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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권의 강화
김계지(18세), 김 재(19세), 김문발(22세), 김한노(21세),
김 방(17세), 김 문(20세), 김 한(20세), 김 열(20세),
김희선(18세), 김무(18세)
태조 이성계가 건국을 하자, 안으로는 왕권을 튼튼히 하고,
밖으로는 명과의 친선 외교를 유지하면서 국가의 안전에 힘을 쏟았다.
여진이나 일본에 대해서 교린정책을 써 국제적 평화유지에 힘을썼다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을 편찬하고,
유교를 숭상하며 불교를 억악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였다.
사찰을 철페하고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 진흥에 힘을썼다.
왕세자의 책봉을 서둘러서
계비 강씨의 소생 8번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첫 번째 부인 한씨의 소생들이 불만이 많았다.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을 세운 다섯째 아들 방원의 불만은 더욱 더 컸다.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과 같이 이복 동생 방석을 살해 하고,
둘째 아들 방과를 내세워 세자로 삼았다.
태조가 물러나 왕위를 이으니 이 분이 정종이다.
정종이 즉위하자 방원이 세자가 되었다.
넷째 아들 방간이 박포의 말을 믿고 방원을 치려다가 실패하였다.
2차에 걸쳐 왕자의 난을 겪고 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니 이분이 태종이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 개혁을 실시하며 왕권을 강화한다.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고,
집권 층이 거느린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켰다.
불교를 억누르고 사원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국가재산으로 환수했다.
주자소를 두고 구리로 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 내었다.
김계지18세 개국공신 광성군 휘 계지(繼志)(문정공파 ‧문민공파)
조선조 창업에 태조(이성계) 태종(이방원) 양조를 섬겨
회천대업(回天大業)에 공훈을 남겨 왕으로부터 이름을 하사 받아
계지(繼志)로 받드니, 초휘는 형(逈) 호는 송곡(松 谷)이다.
아버지는 해령별장 도탁(都卓)이요, 어머니는 흥덕군 부인 조씨이니
문정공(태현)의 증손이요, 문민공(광철)의 손자이다.
공(公)은 태종 2년에 상호군으로 전라, 경상, 충청 삼도의 경차관으로서
병선을 점검하여 만호, 천호(千戶)로서
그 직무에 태만한 관리를 벌한 기록이 있다.
동년 임오 5월에 대호군으로서 경상도 민정을 살펴 왕에게 말씀드렸다.
경상도에 지난해부터
호랑이로 부터 입은 재난으로 죽은 자가 수백으로 인해
군 현에 피해가 많아 출행이 어려워 농사가 더욱 어렵다고 아뢰었다.
왕이 각도 관찰사와 절제사에게 명하되 금후로 호환으로 상하는 자가
단 한사람이라도 발생하면 엄벌한다고 어명을 내렸다.
태종 2년 11월에 왕이 공으로 하여금 서북면(병마사(兵馬使))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삼았다.
서북방면의 변경 수호를 명해 큰 공을 세웠다.
동왕 6년 정월에 왕이 좌우군 총제, 김계지, 이밀 등
10인에게 동북방 변경 수비를 잘한다는, 임오년의 군공을 기록하고,
왕명으로 공(繼志)과 이밀의 공(公)을 치하는 글을 내렸다.
분불고신(噴不顧身: 분한 마음에 몸을 돌보지 않고),
견의 심입(見義深入: 의를 보아 위한 곳 깊이 들어가),
이두환난(以杜患難:이로서 환난을 막으니),
가위일등(可謂一等)이라는
글을 내려 치하하고 오십 결의 전토와 노비 5인을 하사하였다.
4월에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도관찰 박언과 도절제사 김계지 등
수인에게 위로 하는연회를 베풀어주는 특전을 내렸다.
태종 8년에 공이 풍해도 병마절제사. 판 해주목사로서 치적이 많았는데,
공을 시기하는 탄핵이 있었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서 화를 면했다.
후에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제로
개국공신 광성군(光城君)에 봉작되었다.
경태 2년 신미에 돌아가시니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 사제(賜祭)하고 의정부에서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장의 제품과 후한 부의(賻儀)로 조위하고
후에 이조판서에 추층하였다.
공의 배(配)는 남원 양씨는 대제학 이씨의 따님으로 6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가 크게 영달하여 가문을 빛내니 문정공 이후 계계승승 영화를 누렸다.
공의 묘는 태인군 고현 내면 죽사동에 안정하였다
광산김씨 종보. 96. 9. 1
김 재(滓: 19세)
계지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고 상호군과 수문전 직제학을 지냇다.
김문발(: 22세)은
도평 녹사로 전라도 원수의 부하가 되어
보성 남원 등지에서 외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 만호(4품)가되다.
수군 도절제사가(종2품) 되었다가 낙향하여, 부용정을 짓다.
백동녹규를 본받아 광주지방의 향약좌목이 되었다.
태종 17년(1417)에 황해도 관찰사로 갈 때 계지와 같이
궁은(임금 하사주)의 은전도 받았다.
21세 광산군(光山君) 휘 한노(漢老) (낭장공파)
공(公)의 휘는 한노이니 장랑장(규)의 7세손이요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신 자빈의 아드님이다.
고려조 우왕 10년 계해방에 태종 대왕이
대신 이방원과 심효생 등과 함께 동반 급제하여 예의좌랑을 지냈다.
신조(新朝)에 출사하여 재명을 떨쳐 일찍이 제학벼슬에 임명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는데 금은관계 사건으로 한때 파직되었다.
그 후 태종 8년에 좌군동지 총제가 되고 이때
공의 따님인 양녕대군과 결혼, 세자빈이 되었다.
동왕 10년에 예조판서에 승진되어 광산군에 봉작되었다.
다음해에 사헌부 대사헌, 참지의정부사를 역임하고 연이어
13년에 중군도총체,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고,
찬성, 한성부사, 병조판서 중추부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양녕대군 폐 세자 사건
(양녕대군이 세종대왕에게 세자 자리를 물려준 사건)에
연루되어 불행하게도 청주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고 광산군에 봉작되었다.
공은 뛰어난 재주로 일찍이 문형으로 명성을 떨쳐
벼슬길이 순풍을 타서 중추요직으로 한 때 영화를 누렸다.
폐 세자 사건으로 부원군이 되는 영화도 누리지 못한 채
한 많은 아들 영재와 함께 유배생활을 하는 불운을 당했다.
태종 대왕이 승하하고 세종대왕이 등극하여 형제간의
지극한 우애를
양녕대군의 음탕한 행실이 보호를 받았으되
그 때 사헌부의 탄핵이 여러 번 있었으나 극형은 면하였다.
이는 세종대왕이 지극한 우애로 대간들의 논죄를 불륜과 비답으로 일관해
양녕대군과 공의 부자분이 신명을 보존하게 되었다.
공의 평생 이력이 조선조 왕실록,
태종, 세종조 여러 곳에서 자세히 나타나며 부귀가 무상함을 다시금 새롭게 한다.
종보 98. 1. 1.
김 방( 倣:17세)은 전라도 도절제사.
태종의 명을 받고 김제 관개용 저수지 벽골제의 공사 책임자였다.
20세 검열 휘 문(양간공파‧ 판군기감사공파)
1373(공민23)-1393(태조2) 조선 문기 문신. 아버지 관찰사 약채,
어머니 정부인 원주 원씨로 문정공 송수의 딸이다.
자질이 영민하고 학문이 일찍 성취하여
1392(공양5) 나이 20세에 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
예문관 검열 증 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학 세자이사 문 묘갈문
선조고(先朝考)의 휘는 문(問)이요, 자는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 김씨는 계통이 신라에서 나와 광주에 관적을 두어
대대로 동방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선고조는 공민왕 계축년(1373)에 출생하시고
영명하고 위대한 자질이 일찍 성취되었다.
20세에 을과 3인에 뽑혀 예문관 검열이 되었더니
1393년에 병으로 졸하시니
겨우 21세로서 장단부 약사원 북쪽 도승동 계좌원에 안장하였다.
선고조께서 천품은 넉넉하였으나 수명이 길지 못하였다.
세대 또한 멀어서 그 사적을 증거 할 수가 없어 전하지 못하였으나
장손 의정공(국광)이 영달 함으로(좌의정) 좌찬성을 추증 받았다.
부인은 양천 허씨 대사헌 휘 응의 따님이요, 문경공의 현손이니 나이
17세에 부군을 여의였다. 부군을 여의매 부모가 불쌍히 여겨
개가를 시키려 하자 부인이 죽기로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어린 아기를 업고(철산) 시가에 와서 일생을 마치니
조정에서 정려를 명하였다.
명하여 가로되,
광주의 김씨는 신라의 후예로 이름난 자손들이 주례(周禮)를 닦았도다.
손자가 영묘하여 젊어서도 높은 과거에 올랐도다.
싹이 빼어나지 못하니 덕을 후손을 위해 심었도다.
엎어 질 듯 다시 이으니 자손이 번성하도다.
장단언덕에 봉영이 우뚝하니
자손들이 뜻을 모아 불휴(썩지 않음)를 도모하네.
내가 예전에 조그마한 업적을 적었을 뿐 어찌 과장하리오.
삼가 가승을 상고하여 명을 새기니 오직 산은 높고 물은 넓도다.
천 백 년 지내어도 손상하지 말지어다. 8대손 집(集) 찬략
20세 김 한(양간공파, 총제공)
1377년(우왕4)~1448(세종 31), 조선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관찰사 약채,
어머니는 정부인 원주원씨로 문정공 송수의 딸이다.
효우가 극진하여 백형 문(問)이 졸하자 형수인 허씨 부인이
친가에서 본가로 돌아오니
형수를 받들기를 자모와 같이 하였다.
조카 기르기를 친아들과 같이하여 종사를 잇게 하였다.
벼슬은 중군 도총제부 부총제.
20세 퇴촌공 휘 열(양간공파‧ 퇴촌공파)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행 형조도관 좌랑 퇴촌 김공 묘갈명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관음리 후산(가골) 향유원(向酉原)에 구묘(舊墓)가 있으니
이는 광산김씨 분파조 퇴촌공 묘소다.
자손들이 실전 했다가 다시 찾아 개봉축(改封築)한 묘소이다.
김씨는 신라종성 계통으로 왕자공 휘 흥광을 시조로 하여
고려와 이조에 대대로 높은 벼슬이 나시었다.
양간공의 휘 연, 정경공 휘 사원, 장영공 휘 진은 공의 고조이상 3세요
좌사의 휘 명리. 광성군 휘 정. 출척사 휘 약채는 부이상(父以上) 3세이며
비는 원주 원씨 문정공 휘 송수의 따님이시다.
공은 사형제분 중에 끝으로 총명효우하고 일찍 문학이 성취되셨고
풍채와 위엄이 남을 감동 할 만하여 세인의 추증을 받으셨다.
백씨께서 불행 이도 일찍이 돌아가시니 맏형수 허씨 부인께서
아들(철산)을 기르시며 수절하실 제 공이 어린 조카와
형수(허씨 부인)를 보호하사 능히 그 종통과 가업을 이어 받도록 하셨다.
태종조에 문음(조상의 음덕)으로 출사하여
형조도좌랑에 계시다가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하시니 사람들이 공을 일컬어 퇴촌 선생이라 하였다.
증손 휘 여석이 이조판서에 오르니
「통정대부 추조참의」에 증직 되셨고
공의 저서로 빙옥고(氷玉稿))라는 책이 있다.
홍 허백당 휘 귀달(이조판서역임)께서 서문을 지으셨는데
이르기를 선생의 시를 음미함에 그 맛이 담백하고 그 소리가 숭고하여
마치 대경(맛있는 국) 현주(쌀술)와 같고
성정(性情)의 정도(正道)를 이루었다 고 하셨다.
공의 문학이 성(盛)하였음은 여기에서 징험(徵驗)할 만하나 아깝게도
그 책이 전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공의 생졸(生卒) 및 의적을 상고할 수 없음은
사화(士禍)와 병란(丙亂)으로 인함이 아니겠는가.
배(配) 숙부인 삼척 진씨는 집현전 제학 의귀의 따님이시다.
아들 달손은 도호부사(강화도) 수(洙)요,
사(泗)는 생원이며
달덕은 무육하고
달검은 아들이 간이며
달전의 아들은 엄‧ 형‧ 격은 사복시정이요,
지(漬)는 검열이며 주(澍)는 판관이다.
달도의 아들은 관찰사 호요,
유‧빈은 진사요,
인과 준이니 이하는 번거로워 적지 않는다.
아! 공의 묘소를 실전한지 수백 년에 누대에 걸쳐 찾았으나
적지(適地)를 찾지 못하던 중 지난
1982년에 후손 귀현등 제손(諸孫)이
춘천 보호산에 설단((設壇))하여 시향(時享)을 모셨다.
계해(1983) 시월에 후손 대중이
수소문으로 묘소를 찾아 후손의 뜻을 모아 비를 세워 빛나도록 하였으니
옛말에 이르기를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을 감동시킨다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묘갈문을 청한 이는 우현(禹鉉)이다.
명은 아래와 같다.
외로운 조카(철산)를 도와 성가(成家)하게 함은
종통(宗統)을 돈독하게 함이요,
벼슬에 물러나 전원(田園)으로 돌아옴은 어지러운 세상을 멀리 함이로다.
빙옥고에 담은 그 말씀은 바른 풍속이 완연한데
노론에 볼 수 없음이 후세 사람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순천 후인 김철희 근찬
빙옥난고(氷玉亂藁)의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손자 충목공(여석)과 교우하던 허백당 홍귀달(이조판서 역임)께서
서문을 지으시어 그 서문은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행 형조도관 좌랑 퇴촌공 열 빙옥난고서
시(詩)의 본뜻은
성(性)과 정(情)에 있으며 언사(言辭)와 지조(志操)를 귀하게 여긴다.
만약에 말을 헤프게 하고 글이 속되거나 외양을 분칠하듯 하고,
그림을 새기 듯 하여, 남이 보기에 좋은 듯이 된 시는,
아직 제대로 되지 못한 걸로
그 성과 정을 바르게 다룬 시 와는 스스로 거리가 있다 할 것이다.
내 보기에 세상에 시를 말하는 자와 가벼이 그 화려한 것을 보고,
그 충실한 것을 버리며 그 육(肉)을 쪼으면서 산적으로 갖추지 못하여,
처음 보기에는 즐거우나 씹을수록 맛 나는 진미다.
아! 시에 대한 이치가 언제나 옛날처럼 바로 서겠는가.
나는 율재와 퇴촌 두 선생의 시를 대개 비슷하게 보고 있다.
집현전 제학 율제 진선생 휘는 의귀이며
중추부사 김공 은경(휘 여석 충목공)은 그의 후예이다.
두보 선생이 평소에 여러 가지를 지어 읊었던 시를 모아서
책이름을 빙옥난고라 하였다
율재선생은 퇴촌선생의 빙장으로서
은경은 율재의 외현손(外玄孫)이며 퇴촌의 증손이다.
진나라의 선비 악광과 위개의 풍신(風神)이 훌륭하여,
그 때 별명으로 옥윤(玉潤)과 빙청(氷凊)이라 하였다.
이재 율재를 빙(氷)에 비유(比喩)하였으니
이는 조상을 높이 받드는 갸륵한 뜻에서인 것 같다.
은경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삼척지방에서 빙옥고를 간행토록 하였다.
그 곳은 율재의 고향으로서
판각(板刻)과 인쇄(印刷)의 일이 쉽게 이루어 졌다.
하루는 인쇄한 책 한부를 편지와 아울러 나에게 보내와
서문을 청하였다.
아! 내가 어찌 이 시를 아는 사람이겠는가.
그러나 평소에 나고 들 때 예와 이제의 시를 제목으로 한 적도 있었다.
가만히 위에서 말한 대로 두 선생의 시를 읽어보았다.
과연 시에 뼈가 섰으며 군살이 적고 뜻이 충실하고 번거롭지가 아니하다.
대경현주(大藑玄酒)와 토고궤부(土鼓簣桴)처럼 고색(古色)이 짙어서
비록 세속 사람의 입이나 귀에는 맞지 않을지 몰라도
그 담백한 맛과 고박(古朴)한 음조(音調)는 진실이 있다.
비록 옛것을 탐(貪)하여 즐겨 하는 것이나
이것이 후파(候芭)의 태현(太玄)인 것이다.
하물며 나와 은경 만난 지가 작금(昨今)이 아니며
그 사람의 포부도 나는 잘 알고 있다.
평소에 만나면 풍채도 좋았는데 시에 있어 그가 이러한 시를 숭상하였으니
그 호불호(好不好)가 나와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에 나도 평일에 본받은 시를 지었으니
그 개요를 여기에 써서 돌려보내니 그대는 알아주기 바라오.
홍치 5년 6월 허백당 홍귀달 서
18세 김희선(希仙) 양간공파, 밀직부사공파.
아버지는 밀직부사 천리다.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청백하고 도량이 넓어, 선정을 베풀었다.
조선 초기의 명신과 의학자로, 개국원종 공신록에 기록이 있다.
태조 2년(1393)에 전라도 안렴사로 있을 때 각도에 의학원 설치를 건의하였다.
태조 4년(1935)에 정조사로 명에 다녀와 호조판서 제수.
의학에 밝아 의학 서적을 저술. 시호는 원정(元靖)이다.
김 무(務: 18세)는
희선의 동생으로 조봉대부 제용감의 소감(종4품)을 지냈다.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광산김씨 종보.
2023년 5월 펀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