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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월 18일 토요일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일치 주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뜻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다.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2-16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일치 주간의 첫째 날 우연히도 우리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르 2,14)의 소명 이야기를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레위를 기꺼이 당신의 제자로 뽑으셨고, 이어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로 낙인찍히셔야 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의 문턱은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신학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던 저는 막상 신학교 지원을 앞두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저녁 미사를 드리는데 그날 복음이 바로 오늘 복음과 같았습니다. 복음이 봉독되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14) 하는 말씀을 들을 순간부터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영성체를 어떻게 하였는지, 미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습니다.
미사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앉아 있다가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일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마르코 복음 청년 성서 연수’에 참여하여 오늘 복음을 다시 만났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그럭저럭 넉넉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레위의 마음도 제 마음도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제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김동희 모세 신부)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사가로 추정되는 세리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파격적이고 경이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72 제자단의 하나로 뽑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핵심 제자단이라고 할수 있는 12사도 가운데 하나로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둘러서 있던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동시에 쯧쯧 하고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단은 희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라는 신분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직무상 벌어들이는 수입은 짭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국노, 로마 앞잡이, 수전노, 인간 말종...이런 레위를 핵심 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으시는 예수님의 처신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 같은 죄많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신 예수님의 크신 자비에 크게 감사하며,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성대한 저녁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동료 세리들과는 송별회를 겸한 잔치였습니다.
자연스레 그 잔치 자리에는 당대 뒷골목을 주름잡던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 가운데 앉으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포도주 잔을 부딪치며 건배도 하시고, 맛나게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스캔들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가슴에는 성경과 율법서를 간직하고, 얼굴은 짐짓 거룩한 표정을 짓고, 늘 가방끈 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세리나 죄인들과 태연하게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은 화가 단단히 나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귀 밝기가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세상 구려 터진 생각과 마음들을 즉시 파악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 귀가 번쩍 뜨이는 은총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당대 잘 나가는 고관대작들이나 주류 세력들이 아니라 어딜 가나 인간 대접 못 받던 세리, 죄인들과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담소를 나누시던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는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종교가 다른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종교는 ‘진리’라는 바다로 흐르는 강과 같습니다.” 내가 타고 있는 배만이 진리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됩니다. 오만은 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과신하거나 타인을 과소평가하는 태도입니다. 편견은 충분한 이해 없이 내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입니다. 인류는 ‘오만과 편견’으로 소중한 이웃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거침없이 행하였습니다. 노예제와 인종차별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태입니다. 유럽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고 비인간적으로 대우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힘없는 우리의 이웃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홀로코스트가 있습니다. 아리안 인종 우월주의와 히틀러의 독재적 태도는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았습니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등을 열등하거나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었습니다.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여성 억압과 성차별이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제한하고 교육과 일자리에서 배제하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은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예전에 쓰던 모델은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모델이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한 후에 하와를 창조하였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만드셨지만, 하와는 아담의 뼈로 만드셨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종교 재판과 마녀사냥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교리를 절대화하고 개인의 신앙을 억압했습니다. 이단이나 마법을 행한다는 혐의로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종교적 권력이 지나치게 오만해지면서 발생했던 비극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신의 뜻을 따른다는 확신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무슬림, 유대인, 심지어 동방 정교회 신자들까지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의 종교적 갈등과 상호 불신이 생겼습니다. 종교적 오만과 편견이 평화를 해치고 많은 희생을 초래하였습니다. 종교 개혁과 분열이 있습니다. 교회의 부패와 권위주의, 그리고 개혁자들의 강경한 태도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상호 배척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인류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나갑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 그리고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세리와 레위입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움은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표징과 권위는 마귀에게서 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만과 편견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놀라운 눈으로 보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 없이 풍족하게 살았던 부자는 죽어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성심껏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2,15)
사람을
사람들이 따릅니다
가르쳐주는 사람을
못 배운 사람들이 따릅니다
눈여겨보는 사람을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따릅니다
불러주는 사람을
잊힌 사람들이 따릅니다
부드러운 사람을
약한 사람들이 따릅니다
품어주는 사람을
외로운 사람들이 따릅니다
용서하는 사람을
죄 짓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위로하는 사람을
상처 입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들어주는 사람을
울부짖는 사람들이 따릅니다
채워주는 사람을
모자란 사람들이 따릅니다
받아주는 사람을
쫓겨난 사람들이 따릅니다
따뜻한 사람을
헐벗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베푸는 사람을
주린 사람들이 따릅니다
인정해주는 사람을
버림받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다독여주는 사람을
웅크린 사람들이 따릅니다
일으켜주는 사람을
쓰러진 사람들이 따릅니다
북돋아주는 사람을
짓밟힌 사람들이 따릅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람을
얽매인 사람들이 따릅니다
이끌어주는 사람을
길 잃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사람을
사람이고픈 사람들이 따릅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프리스카 (Prisc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로마(Roma)
활동연도 :+270년경
같은이름 : 프리스까 쁘리스까 프리실라 프리쉴라 프리스킬라 프리스낄라 브리스킬라
프리스킬라(Priscilla)로도 알려진 성녀 프리스카는 로마의 초기 순교자인 듯하며,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이 외에는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성녀 마르가리타(Margaret)
신분 : 공주, 수녀
활동지역 : 헝가리(Hungary)
활동연도 : 1242-1271년경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조국 헝가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태어났는데, 그녀의 부모는 만일 전쟁이 승리한다면 어린 마르가리타를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 은혜는 실제적으로 허락되었기에 세 살 난 딸을 베스프렘(Veszprem)에 있는 도미니코 수녀원에 맡기게 되었다. 그녀의 부모는 국왕 벨라 4세(Bela IV)와 마리아 라스카리스(Maria Laskaris)였다.
그녀는 12세 때에 첫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서약할 자격이 미달된다는 내용을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즉 정치적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성녀 마르가리타는 수녀원을 떠나기보다는 코와 입술을 자르라고 항변하여 자신의 자발적인 의사임을 입증하였다.
그 후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사랑과 자기 극기는 여러 가지 활동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가끔 온밤을 지새우며 성체 앞에서 기도하였고, 기도의 효력을 확신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하였다. “갑자기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할 순 없지만, 어쨌든 하느님께 청하면 무엇이든지 다 받을 수 있다.” 사실 그녀의 이 말이 입증된 적이 있는데, 한 번은 2명의 수녀들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더 있다가 가라고 하였지만 즉시 떠나려 했을 때 그녀의 기도로 갑자기 비가 와서 그곳에 더 머물렀다고 한다.
그녀는 자주 탈혼을 경험하였고 기적도 많이 따랐다. 또 사순시기가 끝날 무렵이 되면 그녀는 잠을 거의 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식으로 인하여 측은한 생각마저 들 정도까지 되곤 하였다. “성 금요일은 하루 중에서 가장 짧은 날이다”라고 한 그녀의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271년 1월 18일 부다페스트
(Budapest)에서 사망한 성녀 마르가리타는 1789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시복된 후 1943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녀는 보통 수녀복을 입은 모습으로 흰 백합과 함께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1월 19일에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성녀 베아트릭스 (Beatrice)
신분 : 과부
활동지역 : 페라라(Ferrara)
활동연도 : +1262년
같은이름 : 베아뜨릭스 베아트리체 베아뜨리체
축일이 5월 10일인 에스테(Este)의 베아트릭스의 조카인 베아트릭스(Beatrix, 또는 베아트리체)는 과부가 된 후 이탈리아 페라라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수도원에 들어가서 베네딕토 회원이 되었다.
그 수도원은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준 그녀의 집안에서 세웠다고 한다.
그녀는 여기서 높은 성덕을 쌓으며 지내다가 그곳에서 운명하고 묻혔는데, 지금도 그녀의 무덤에서 치유의 은사가 일어남으로 순례자가 끊이질 않는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774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에 의해 승인되었고, 이듬해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기념일이 지정되었다.
성녀 리베라타 (Liberata)
신분 : 동정녀
활동연도 :+580년
성녀 파우스티나 (Faustina)
신분 : 동정녀
활동연도 : +580년
이탈리아 코모(Como)에서 태어난 성녀 파우스티나(Faustina)와 성녀 리베라타는 자매간으로 코모에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수도원을 함께 설립하였다.
두 성녀는 후에 같은 해에 선종하였고, 그들의 유해는 코모의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녀 크리스티나(Christina)
신분 : 동정녀
활동지역 : 라퀼라(L'Aquila)
활동연도 : +1543년
같은이름 : 끄리스띠나, 크리스띠나
성녀 크리스티나는 유명한 치카렐리(Ciccarelli) 가문의 딸로 1480년경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Abruzzo)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마티아(Matthi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린 나이로 라퀼라의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한 후에 크리스티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도원에서 그녀는 덕행의 모범으로 인정을 받고 살았으며 특히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덕이 돋보였다.
성녀 크리스티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기도하였으며, 자주 탈혼 상태에 빠졌고,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능력으로 유명하였다.
또한 그녀는 매우 엄격한 보속 생활을 하였고, 살아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서 살아있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 성녀는 1543년 1월 18일에 운명하였는데, 라퀼라의 어린이들이 성녀의 죽음을 온 도시에 전하러 다녔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한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4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