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등불을 지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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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여학교를 재건한 사람들.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부터 아우구스티노 수이니 신부,
최정숙, 패트릭 주교. |
어수선한 세상
해방되자 일본군 노동자로 동원됐던 조선인들이 다시 정화의원으로 몰려왔다.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없다고 했다. 그들이라고 염치가 없겠는가. 그들은 갑자기 항복한 일본에 의해 버려진 사람들이었다.
노예로 시달리다 해방이 되었으니 당연히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염치가 중요하지 않았다. 정숙은 그 마음을 오히려 애처롭게 여기고
외면하지 않았다. 정숙은 주머니를 털어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 정숙을 보고 가족과 성당 신자들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간 노무자와 병사들의 수가 1만 7000명에
달했다. 제주에 살던 일본인들도 일본으로 돌아갔다.
어수선하고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큰 불상사 없이 떠날 사람은 떠나고 고향을 등졌던 이들은 돌아왔다. 해방된 우리나라와 우리
땅, 내 고향에 산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그러나 사회는 쉽사리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새롭게 펼쳐진 세상이 모두에게 감당할 수
없도록 무질서했다. 점령군으로 미군이 제주에 상륙하고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제주는 일본과 생활필수품을 교류하는 무역이 경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전면 금지했다.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는 해방을 맞아 제주로 귀환하는 도민들의 휴대 물품과 금액을 철저히 제한했다. 결국 그들은 거의 무일푼으로 돌아왔다.
6만여 일본 출향민들의 귀국은 그동안 고향으로 송금하던 지하경제 자금의 끝도 의미했다. 무일푼으로 귀국한 동포들은 모두 실업자로 전락했다.
제주도민들도 배를 곯고 있는데 그들을 위한 일자리는 더 없었다.
더욱이 극한 가뭄과 흉년까지 겹쳐 집집마다 쌀독이 바닥을 드러냈다. 미군정이 이를 회복하기 위해 미곡정책을 펼쳤지만 모리배와 부패
관리들의 부정으로 오히려 서민들의 공출양만 늘어났다.
일제 강점기보다 더한 압박에 시달렸다. 정치도 아비규환이었다. 신탁 통치로 극심한 대립을 세웠던 중앙의 영향으로 제주도도 좌우익으로
갈라졌다.
사회가 전반에 걸쳐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군에 의해 뱃길이 끊기고 경제의 허리였던 대일무역이 불법화되면서
제주는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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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여학교가 처음 시작했을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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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등불
해방되자 정숙은 제일 먼저 신성여학교를 찾고 싶었다. 늘 그 생각뿐이었다. 천둥벌거숭이 자신이
신성여학교의 교육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알았기에 교육의 절실함이 너무 컸다.
정숙은 신성여학교 출신으로 함께 서울 유학을 했던 동기들과 후배들을 모아 부녀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먼저 제주북국민학교 교실을 빌려 글을
가르쳐주는 일을 했다.
이전까지 일본식 이름과 셈법으로 살았으니 모두 한글로 새롭게 바뀌어야 했다. 그 일은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제주신보 등사판을 빌려 밤을 새워 교재를 만들었다.
야학을 맡은 부녀회원들은 낮이면 무료로 한글을 가르쳐주니 마음 놓고 배우러 나오라고 마을을 다니며 모집했다. 집행부에 동참하려는 부녀회원의
수도 늘어났다. 정규 회원만도 30여 명이 넘었다.
그들은 야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 계몽, 시국강연, 의식주강습 등도
활발히 펼쳐나갔다. 정숙은 신성여학교를 다시 열기 위해 천주교 주교단을 찾았다.
라크루 신부의 정신을 이어받은 신성여학교는 마땅히 천주교의 든든한 교육기관으로 거듭나야 했다. 게다가 신성여학교 자리에 사찰이 터를 잡고
있어 무엇보다 다시 되돌려 찾는 일이 시급했다.
정숙은 호주 사람 아우구스티노 수이니 신부와 함께 미군정에 탄원서를 넣었다. 미군정은 전후 사정을 면밀히 조사하더니 일본에 의해 몰수당했던
학교를 되찾도록 주선해주었다.
1946년, 각고의 노력 끝에 신성여학교는 중학 과정 야간부로 학교 문을 정식으로 열게 되었다.
정숙은 감개무량했다. 고통스러운 역사에 희생되어 사라질 뻔한 모교를 1회 졸업생인 자신이 민족 해방과 더불어 재건한 것이었다.
이런 사명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었다. 정숙은 앞으로도 학교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야간부 수업에
전기가 없어 등갓에 등피를 끼운 등잔을 밝혔다.
정숙은 날마다 그 많은 등피를 손수 닦아 교실에 걸었다. 비록 1학급의 야간부로
출발했지만 뿌리도 내리고 지원도 받기 위해 튼튼한 재단이 필요했다.
정숙은 제주를 관할하는 광주교구가 신성여학교의 재단이 되어 달라고 백방으로 부탁을 넣었다. 1949년 신성여자초급중학교는 4년제
주ㆍ야간으로 인가를 받았다. 초대 이사장에 광주교구 패트릭 주교가 취임하고 교장으로 최정숙이 발령받았다.
서글프게도 정숙만큼 헌신적이고 높은 지성을 갖춘 사람이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한낱 여자가 교장 됨을 어색하게 여기는 보수주의자들이 많았다.
제주의 이 같은 정서를 잘 아는 정숙은 교장 적임자가 나설 때까지만 무보수 임시 교장으로 있겠다고 하여 논란을 잠재웠다. 그러나 누구라도
진정한 신성여학교의 교장은 최정숙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화의원 의사로, 신성여학교 교장으로 또 부녀회 강사로…. 정숙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이렇듯 쉴 틈 없는 생활 속에서도 매일 새벽 성당에 나가 신자들이 오기 전 마루를 쓸고 걸레질을 했다.
미사 종소리가 새벽 안갯속으로 퍼져 나가면 신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미사가 시작되면 정숙은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주했다. 정숙은 이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그러나 행복한 마음과 달리 재정 사정은 형편없었다. 그토록 소망하던 학교를 재건했지만 교사들의 봉급이 늘
부족했다.
미군정의 무역 금지, 태풍과 가뭄과 콜레라의 피해가 섬사람들의 주머니를 말려 수업료가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정숙의 사정은 더 나빴다.
무보수 교장직에 빈민보건소 역할을 하는 병원으로 소득은 전무했다.
그래도 정숙은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쁘게 봉헌한 그리스도의 삶에 걸맞은 청렴하고 가난한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돌개바람
1947년 3월 1일 남조선 노동당이 주최한 3.1절 기념식에서 어린아이가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차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도민들이 항의하자 미군은 총을 발사했고 시민 6명이 사망했다.
이 일의 여파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 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눴다. 그 과정에서 도민들만 속절없이
희생되었다.
집들이 불에 타고 민심은 흉흉했으며 일이 어떻게 번질지 몰라 주민들은 전전긍긍했다. 4·3 사건의 시작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의 4·3사건을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제주 해안이 봉쇄되고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군정토벌대가 제주에 상륙하여 섬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었다. 정숙은 신성여학교
학생들이 4·3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시키고 지도하였다.
학생들의 신변 상황을 교사들로부터 반복해 보고받고 위험 지역의 학생들은 정화의원이나 안전한 가옥에 거처하도록
했다.
4·3사건으로 누구나 알만한 유지들과 인사들이 어디론가 끌려가 처형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제주지방판사이며 초대 제주법원장인 정숙의 아버지 최원순과 제주농업고등학교 교장인 정숙의 오빠 최남식도 난데없이 빨갱이로 몰려 군부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4·3의 돌개바람이 정숙에게도 날아왔다. 정숙은 순수한 목적의 부녀회가 정치적인 오해를 부를까 봐 진작에 부녀회원들과 상의하여
해체해 버렸다. 그러나 정숙의 부녀회를 모방한 여성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좌익 단체의 여성동맹도 그중 하나였다. 부녀회가 해체되면서 활동이 전면 백지화됨을 못내 아쉬워한 일부 열성회원이 여성동맹에 흡수되었다.
그러자 여성동맹은 마치 부녀회와 여성동맹은 같은 단체인 듯 선전하고 다녔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9월 어느 날, 군인들이 다짜고짜 정숙을 끌고 갔다. 도착하고 보니 농업고등학교 운동장 천막 안이었다.
취조관이 험상궂은 얼굴로 윽박질렀다.
“최정숙! 당신 빨갱이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