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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홍수시대에 무슨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해야 하는가?
<권성수-설교신학> 설교와 변화 (1)
2005년 1학기 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에서 <한국교회 설교자 연구>라는 과목을 통해 한경직 김창인 김선도 김장환 곽선희 조용기 이중표 옥한흠 정필도 이동원 등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연구 발표한 후에 마지막 시간에 학생들에게 ‘나의 설교 분석’을 제시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한 학생이 “저는 홈런은 못 쳐도 포볼은 골라서 나가도록 애씁니다.”고 하여 모든 학생들의 폭소를 자아내었다.
일주일에 여러 차례 설교를 하면서 매번 홈런을 친다는 것, 아니 일주일에 한번 하는 설교에서 매주 홈런을 친다는 것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설교자는 스스로 홈런을 친다고 장담하는데 실제로 교인들이 볼 때는 포볼도 골라서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목회의 지혜(?) 차원에서 볼 때 너무 자주 홈런을 치면 홈런의 가치가 없어지니까, 일년에 몇 차례만 치는 것이 좋다는 말도 있다.
여기서 도대체 설교에서 홈런을 친다는 말이 무엇인가? 포볼은 골라서 나간다는 말은 무엇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홈런이다, 포볼을 골라서 나간다고 말하는가? 대다수의 교인들이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면 홈런인가? 대다수는 아니더라도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면 포볼을 골라서 나가는 것인가? 설교자의 마음이 흡족하면 홈런인가? 설교자의 마음이 흡족하지는 않아도 씁쓸하지도 않으면 포볼을 골라서 나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은혜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설교자의 마음이 흡족하다, 씁쓸하다 할 수 있는가?
사실 지금은 설교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카세트테이프와 설교집과 브로슈어 등을 통해 얼마나 많은 설교를 접하는가. 한국교회를 놓고 대충 잡아도 6만 여명의 설교자들이 1200여만 명의 교인들에게 매주 어떤 교회에서는 1부에서 6부까지 설교를 하니, 그 분량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가.
설교는 밀물처럼 밀려오는데 왜 삶은 변하지 않는가? 이것이 한국교회 현실을 바라보면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던지는 질문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그 말씀을 설교하면서 생명과 능력이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어떤 이유로 수많은 설교를 하고 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사회와 우리 가정과 우리 개인이 생명과 능력을 체험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인가? 설교는 많아도 여전히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도덕과 가치관은 붕괴되고 가정과 교육과 사회 전반이 무너지는 것을 절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삶 전체가 왜 무기력과 무(無)생명으로 무력감에 빠져야 하는가?
설교는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왜 그 영향력이 약하거나 거의 없는가? 은혜 받았다는 말은 많이 하고 듣는데, 왜 삶의 변화가 많이 나타나지 않는가?
로이드-존스는 현대의 현상에 대해서 설교의 프로, 쇼맨십의 설교, 감성과 유흥을 자극하는 소위 위대한 설교꾼들(pulpiteers)은 많은데 진리가 약화되고 있다고 탄식했다(D. Martyn Lloyd-Jones, Preaching and Preachers (Grand Rapids: Zondervan, 1971), 13.). 더 많은 음악과 예배 기획과 스타 간증 등으로 예배 형식은 강화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심리적으로 도와주는 개인 상담은 강화되었는데 설교는 약화되고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뒤집어엎는 도구 하나를 주셨는데 그것이 설교이다. 바울은 설교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난다는 것을 이렇게 고백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케루쏘, 설교하니, preach)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2-25).
설교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바울이 고백한 것 같은 설교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서 진정한 의미의 삶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I. 설교의 정의
설교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 되도록 하려면 우선 설교가 무엇인지 정의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물론 본고의 서론에서 설교가 무엇인지 암시되기는 했지만, 설교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설교는 에세이가 아니다. 에세이는 읽는 것이지만 설교는 듣는 것이고, 에세이는 문학적으로 우아해야 하지만 설교는 그렇지 않고, 에세이는 같은 내용을 반복하면 안 되지만 설교는 그렇게 해도 되고, 에세이는 매력과 흥미가 있어야 하지만, 설교는 진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 된다는 면에서 설교는 에세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Lloyd-Jones, 70).
설교는 강의도 아니다(Harry E. Fosdick은 설교와 강의를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강의는 주로 설명되어야 할 주제(subject)에 관한 것이고 설교는 주로 성취되어야 할 목표(object)와 관련된 것이다. 많은 현대의 자유주의 설교에 대한 정당화될 수 있는 비판은 그것이 깔끔하고 분석적인 글로 되어 있고, 실제의 문제들에 관련되고 흔히 생각이 깊고 멋진 구절로 되어 있지만, 누구에게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에쎄이, 논문, 강의다. 도덕적인 용기에 대해서 설교하면서도 아무도 더 용기 있게 만들지 못하기가 쉬운데 이것은 통탄스러운 것이다. 믿음에 대해서 강설하고 한 사람에게도 그 귀중한 믿음이 생기지 않게 하고, 사람에게 결단과 선택의 능력이 있다고 논증하면서 그 때 거기 있는 누구에게도 중요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Lionel Crocker ed., Harry Emerson Fosdick's Art of Preaching: An Anthology [Springfield, IL: Charles C. Thomas Publisher, 1971], 17)).
강의는 정보(information)를 전달하면 되지만 설교는 변화(transformation)를 일으키는 것이다(설교는 목적이 있다. 설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한 한 수단이다. 설교의 목적은 변화다. 가치관과 태도와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설교다. 설교의 유형이 어떤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설교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설교는 그 과녁을 놓친 것이다(John T. K. Lim, Power Preaching (New York: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002), 20.) .
설교가 강의가 되면 음식 대신에 메뉴만 주는 것이다( John Lim, Power Preaching, 13.) 설교가 강의가 되면 병든 사람들에게 약은 주지 않고 약에 대한 강의만 하는 것이다(Philip Brooks, Lectures in Preaching (Grand Rapids: Baker, 1969), 126.)
강의는 주로 지성에 호소하지만 설교는 지정의에 호소하는 것이다. 강의는 빛(light)만 있으면 되지만 설교는 빛과 열(heat)이 있어야 한다. 설교는 빛이 없는 열도 아니고 열이 없는 빛도 아니라 빛과 열이 겸해야 하는 것이다. 로이드-존스는 설교가 “불붙은 논리! 탁월한 이성! 불붙은 신학! 불이 붙은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신학”이라고 했다(Lloyd-Jones, 97).
설교가 빛과 열을 겸하는 것이 무엇인가? 설교가 어떻게 될 때에 불붙은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신학이 될 수 있는가? 설교가 어떤 것일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체험하게 하여 삶의 변화를 줄 수 있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 데살로니가에서의 자신의 설교사역을 놓고 이렇게 술회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여기에 설교자(Preacher)가 나온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이 설교자로서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던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던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아는 바”라고 할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여기에 또 메시지(Message)가 나온다. “우리의 복음”이라는 것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메시지이다. 여기에 또 청중(Audience)이 나온다. 본문에서 “너희”라는 것이 청중으로 그 경우 청중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다.
설교자와 메시지와 청중, 이것은 설교의 기본적인 삼요소이다. 설교는 설교자가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설교에 대한 이런 정의는 어쩌면 너무도 단순하여 굳이 정의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정의이다.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 설교에 있어서 메시지, 설교에 있어서 청중--이렇게 놓고 생각해 보라. 설교자와 메시지와 청중이 각기 얼마나 중요하면 이 세 요소가 결합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 설교자와 메시지와 청중을 언급하면서 그 세 가지 요소의 연결 관계도 언급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라고 했다. 여기서 ‘말’은 설교학에서 말하는 ‘로고스’(logos), “큰 확신”은 ‘파토스’(pathos), ‘너희 가운데서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에토스’(ethos)라고 할 수 있다. 설교에 설교자의 말(로고스)과 설교자의 맘(pathos)와 설교자의 삶(ethos)이 연관되어 있다. 설교는 설교자가 말과 맘과 삶으로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청중은 설교자의 말에서 맘으로 삶으로 나가는 길을 택하고 복음은 삶에서 맘으로 말로 해서 청중에 이른다(Bryan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Redeeming the Expository Sermon (Grand Rapids: Baker, 1994), 26.)
바울은 말과 맘과 삶을 언급하면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은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확신을 가리킨다. 설교자의 말이 능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설교자의 삶의 능력 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이 있어야 한다. 설교자의 맘이 큰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불이 붙어야 한다. 설교는 성령 충만함을 받은 설교자가 삶과 맘과 말로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1장 6절에서 바로 뒤이어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변화를 언급했다.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삶의 현실은 “많은 환난”의 현실이었다. 그것은 요즈음 식으로 말해서 참으로 험악한 삶이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참으로 험악한 삶을 살면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았고 그 결과 바울을 통해서 주님을 본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설교의 결과 주님을 본 받는 삶을 살게 되었다. 설교는 성령의 능력과 큰 확신을 가진 설교자가 청중으로 하여금 “성령의 기쁨으로” 메시지를 받아서 주님을 본 받는 삶을 사는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놓고 볼 때 설교자 바울은 삶과 맘과 말이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 있었다. 청중도 “성령의 기쁨,”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메시지를 받았다. 이렇게 보면 설교자도 성령, 청중도 성령에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설교자와 청중에게 강하게 역사하신 것이다. 그러면 본문에서 ‘복음’이라고 한 메시지는 어떤가? 메시지는 성령과 무관한가?
데살로니가 2장 13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셔 역사하느니라”고 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것은 잘 한 것이다. 그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인들 속에서 역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닮는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메시지는 성령과 무관한가?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설교에서 있어서 ‘메시지’도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도 성령, 메시지도 성령, 청중도 성령과 직결되어 있다. 설교자는 삶과 맘과 말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 메시지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는 것, 청중은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메시지를 받는 자--이렇게 설교의 삼요소가 다 성령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각도에서 설교를 정의하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온다. ‘설교는 성령의 영향을 받은 설교자가 성령의 영향을 받은 메시지를 성령의 영향을 받은 청중에게 전하여 성령으로 주님을 닮는 삶의 변화(Fosdick의 자유주의적인 성향은 문제가 있지만 그는 설교는 “삶을 변화시키는 창조적인 과정”이라고 바로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반응을 소개했다. “25여 년 전에 더럽과 참혹한 젊은이가 어느 날 저역 교회로 기어들어가서 당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술 취한 그 젊은이는 밤에 밖으로 나갔는데 그 말이 그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뭔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 말에 주의했고 마음을 바로 잡고 수년간 야간 학교에 가서 드디어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자기가 선택한 분야에서 전국적으로와 국제적으로 유명해졌고 단지 최근에 .. 대학이 그에게 새로운 책을 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입니다” (Ibid., 18).)를 일으키는 것이다.’ 요컨대 설교는 PMA-ST(P는 설교자Preacher의 P, M은 메시지Message의 M, A는 청중Audience의 A, S는 성령Spirit의 S, T는 변화Transformation의 T)이다.
II. 성령과 변화
위에서 설교의 정의를 내리면서 성령의 영향을 받은 설교자가 성령의 영향을 받은 메시지를 성령의 영향을 받은 청중에게 전달하여 성령의 영향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지적했다. 설교에서 성령은 변화를 일으키시는 능력의 영이시다.
성령의 변화를 일으키실 때에 교회가 성장한다. 설교만 바로 해도 말씀의 흥왕함을 통해서 교회가 성장한다.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이 말씀의 왕성한 역사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사도들의 시대에 잘 드러났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성장을 숫자의 성장으로도 표현할 뿐 아니라(행 2:41; 4:4; 5:14; 6:7) 숫자의 증가를 왕성한 말씀의 역사로도 표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6:7).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 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19:10). 종교개혁 시대에도 교회의 성장은 말씀의 왕성한 역사와 맥을 같이 했다. 칼빈의 청중은 굶주린 사람들이 음식을 찾듯 설교를 들으러 몰려들었다. 양심적으로 외치는 강단사역은 ‘죽음의 키스’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말씀을 바로 전할 때에 교회가 계속 성장한다.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설교사역은 교세의 변화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교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1990년에 100명으로 시작하여 10년 후 3,000명으로 늘어나게 한 설교자 파바레즈(Fabarez)는 “좋은 설교는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열매를 맺는 설교”라고 했다.
교세를 증가시키고 교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는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설교다. 로이드-존스의 교회를 첫 번째 방문한 여성은 로이드-존스 교회에서 심령술 집회에서와 크게 다른 능력을 체험했다고 했다. 그것은 ‘깨끗한 능력’이라는 것이다(Lloyd-Jones, 44.) 설교는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일으키되 교세의 증가, 개인의 변화, 능력의 체험 등을 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삶의 변화라는 것은 결국 주님을 닮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이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마 28:20). 말씀을 전할 때에 ‘지키도록’ 전하라는 것이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딛 3:8).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말씀을 듣고 즐기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선한 일을 힘쓰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 성령으로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교회의 실제의 목회사역과 관련된다. 교회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는 선교와 전도 사역, 예수 믿는 사람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는 예배 사역, 예배드리는 성도들로 삶의 현장에서 말씀 중심으로 사랑을 주고받게 하는 교제 사역, 교제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순종하게 만드는 교육과 훈련 사역, 교육과 훈련을 받은 교인들이 교회와 사회에서 주님을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봉사 사역--이렇게 5대 사역을 감당한다.
설교가 교회의 사역에 핵심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설교는 교회의 사역에 변화를 일으킨다. 설교가 교인들로 선교와 전도에 힘을 내게 하고, 생동적인 예배를 드리게 하고, 말씀을 생활화 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교제를 하게 하며,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교육과 훈련에 열심을 내게 하며, 배운 대로 실천하는 봉사 사역이 활성화 되게 한다. 설교가 이 모든 사역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설교자가 목회의 현장에서 느끼는 것이다. 교인들이 교회의 사역에 싫증을 내거나 짜증을 부리거나 불평을 하거나 교회의 사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은혜가 떨어져서 그렇다’고 한다. 은혜가 떨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설교를 통해서 교회의 사역을 감당할만한 동기와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은혜가 떨어지면 아무리 좋은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실제적인 예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제자훈련은 좋은 것이고 목회에 반드시 도입해야 하는 것이지만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에게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상태에서 제자훈련은 고역이 될 수 있다. 어떤 젊은 목회자가 의욕적으로 제자훈련을 시키는데, 교인들이 제자훈련이 너무 싫어서 교회를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제자훈련에 질려 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훈련이 나빠서가 아니라 교인들이 설교를 통해서 제자훈련을 받을 만큼 동기와 능력을 부여받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를 하면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는데, 그런 변화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 앞에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닮는 자들로 변했다고 했다. 예수님을 본 받은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있었다(1:3).
*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신자들에게 본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1:7-8).
*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1:9-10).
*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말씀이 신자들 속에서 역사한다(2:13).
* 데살로니가 교회도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 받아 동족들에게 예수님을 인한 고난을 감수하였다(2:14).
*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켰다(3:7).
* 주 안에서 굳게 서 있었다(3:8).
* 형제들을 사랑하였다(4:9-10).
바울의 설교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이상과 같은 변화를 일으켰지만, 기록된 것만 그런 것이고 기록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더 많겠는가.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꾜”(3:9) 하면서 감격한 것을 보면 데살로니가 전서에 기록된 것 외에도 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을 너끈히 짐작할 수 있다. 설교자가 청중의 변화를 보고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를 정도라면, 설교를 통한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가.
III. 설교자(Preacher)
설교가 성령의 능력으로 바로 되기만 하면 성령을 통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였거니와 여기서 설교자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야보고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한 대로 설교자는 청중의 스승으로 책임이 막중하다(약 3:1). 선생이 된 설교자가 설교를 제대로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항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자세로 삶(ethos)과 맘(pathos)과 말(logos)을 준비하고 전해야 한다.
설교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중생한 자여야 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말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 중생하지 못한 설교자가 있을 수 있다는 현실 앞에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요소이다. 소위 모태 신앙인으로 부모의 서원에 따라 신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고 후에 강도사 고시를 통과해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설교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중생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아무 의식(意識)이나 확인이 없이 강단에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설교는 하는데 본인에게 우선 기쁨이 없고 청중에게 변화가 없다. 설교를 해도 성경 정보만 전달할 뿐, 청중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귀도 사용하시고(민 22:23-30) 이방인(예: 고레스 왕, 사 45:1)도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중생하지 못한 설교자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통상적인 경우에 중생하지 못한 설교자는 설교자로 나서면 안 된다.
설교자가 설교자의 소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책에서 많이 다루고 있으므로( Faris D. Whitesell, The Art of Biblical Preaching (Grand Rapids: Zondervan, 1950), 65.) 전제하고 성령으로 중생한 설교자는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자신이 변화를 체험하고 성령으로 청중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성령충만에서는 통상충만과 비상충만이 있다. 통상충만은 인격과 삶에 대한 점진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이다. 에베소 5장 18절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할 때는 통상충만을 가리킨다. 성령의 통상충만은 명령이다. 하나님께서 받으라고 하시고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통상충만은 보슬비 같아서 점진적으로 조금씩 변화를 시키지만 평생토록 변화를 시키는 것이다.
성령의 비상충만은 소낙비와 같은 것으로 하늘로부터 획기적으로 쏟아 부어지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이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서술로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물론 통상충만도 그렇지만) 우리에게 쏟아 부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화끈한 은사들로 나타나기도 하도, 토하는 회개로 나타나기도 하며, 이제는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 싶은 정도의 강력한 성화로 나타나기도 하며, 악령과의 힘의 대결(power encounter)에서 악령을 신속하게 제압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저항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능력 있는 봉사와 설교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령의 통상충만은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면 받는 것이지만, 비상충만은 앞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강력하게 획기적으로 나타난다. 설교자는 성령의 통상충만을 반드시 받아야 하지만, 비상충만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체험하는 것이 효과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
성령의 역사를 불의 역사라고 흔히 말하는데 필자는 불은 죄를 태우고 불순물을 제하고 넓게 번지는 역사가 있다고 본다. 설교자는 이런 성령의 불(충만)을 체험해야 변화를 체험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설교자는 권위의 위기에 부딪힌 시대에 같이 고민하는 사람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도 실패자, 나도 실패자, 우리 같이 계속 실패하자’는 식의 메시지를 들을 사람은 없다. 당신이 타율 1할 대의 타자를 보고 3할 대의 타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타율 3할 2푼 5리 대의 타자를 보고 배워야 3할 대의 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청중이 설교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이런 것이다(Haddon Robinson, "What Authority Does A Preacher Have Anymore?" in Bill Hybels, Stuart Briscoe, and Haddon Robinson, Mastering Contemporary Preaching (Portland: Multnomah, 1989), 23.)
불이 아니면 불을 지르지 못한다. 그리스도로 인한 감사와 감격이 없으면 남들에게 감사와 감격을 불을 지르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충성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삶의 유일한 최고의 목적이 되지 않는 한 성령의 불이 받은 설교자라고 하기 힘들다. 성령의 불을 받은 설교자는 자신이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청중에게 말씀의 능력을 전하기 때문에 행복한 설교자이다.
에딘버러의 유명한 설교자 알렉산더 화이트(1836-1921) 박사가 설교한 후 한 교인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박사님은 금방 전능자의 왕궁 접견실에서 나오신 분처럼 설교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마음이 강퍅한 대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징계의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평안을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과 관련하여 이런 도전을 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렘 23:18). 알렉산더 화이트는 말하자면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설교한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이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렘 23:29). 성령의 충만을 받아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그대로 전달하기 때문에 ‘불’ 같고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다. 한 학생이 화이트가 설교한 “프리 세인트 조지 교회의 모든 설교는 화산이었다”고 말한 것도 아마 그런 때문일 것이다.
설교자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설교자의 삶(ethos)과 맘(pathos)(구약 선지자의 특징 중 하나는 구약 선지자는 하나님 자신의 파쏘스를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특별히 관심을 둔 것이 아니다. 그의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the Wholly Other)가 아니다. 그는 언약의 하나님, 역사에 관여하신 하나님, 인간 역사에 깊이 관여하여 사건들에 의해서 밀접하게 영향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살아 있는 관심’(living care)으로서의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다(Walter J. Burghardt, Preaching: The Art and the Craft (New York: Paulist Press, 1987), 33. )과 말(logos)에 성령의 강력한 영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선지자의 설교와 사도의 설교가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었으므로 만일 우리의 설교가 성경적 패턴을 따름에 있어서 성경적인 설교가 되려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 (Faris D. Whitesell, The Art of Biblical Preaching [Grand Rapids: Zondervan, 1950], 76).) 청중은 설교자의 말을 통해서 설교자의 맘을 느끼고 설교자의 삶을 짐작한다. 작은 교회의 설교자의 경우 설교자의 삶이 교인들에게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겠지만, 웬만큼 큰 교회의 경우 청중이 설교자의 삶을 직접적으로 체험해서 알기는 힘들다. 그러나 설교자의 삶을 보지 못하는 청중이라 할지라도 설교자의 말을 통해서 설교자의 맘과 삶을 어느 정도 헤아린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말은 들리지만 설교자의 삶과 맘은 직접적으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청중은 설교자의 말을 통해서 그것을 헤아린다는 것이다.
청중은 설교자의 말을 통해서 설교자의 맘과 삶을 짐작하지만 설교자의 경우 설교자의 삶이 설교자의 맘과 말에 배어나온다. ‘설교는 설교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는 다소 무겁지만 참된 말은 설교자의 삶이 설교로 나타나고 평가된다는 말이다(“E. C. 브라운은 말하기를 ‘그림은 화가가 손에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앉아 있을 때에 그리는 것만이 아니다. 그림은 그가 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림에 대해 생각할 때에 그가 하는 걱을 통해서 주로 그려진다’고 했다. 이것이 화가에게 사실이라면, 설교자에게는 더욱 더 사실이다. 설교는 설교를 만들기 위해서 실제로 드린 시간과 노력 이상의 결과이다. 그것은 설교자의 영적인 삶 전체, 설교자의 도덕적 확신, 설교자의 개인적인 체험과 관계, 설교자의 독서와 성찰, 심지어 설교자의 건강과 식사의 결과이다.” (188. John Killinger, Fundamentals of Preaching (Philadelphia: Fortress, 1985), 188.)
설교자의 말이 삶과 일치하지 않을 때 청중은 실망할 뿐 아니라, 설교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설교자의 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고 확신 있게 전하는 것이 아닐 경우 청중은 설교자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교자는 열정과 확신이 있고 성령의 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설교자의 삶이 성령에 감동에 민감한 경우 설교자는 삶과 말이 거의 일치하게 된다. ‘거의’라는 것은 누구도 완벽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삶과 말이 거의 일치할 경우 청중은 설교를 통해서 감동을 받고 바로 살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게 되며 그 결과 삶의 변화가 나타난다. 설교자는 비유컨대 청중의 마음을 수술(heart surgery)하는 의사이다. 삶과 맘이 말이 성령에 민감한 설교자는 청중의 마음속에 있는 질병을 수술해서 청중을 치료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삶과 맘의 설교를 통해서 반영되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이 곧 메시지라고 할 수도 있다. 일제시대 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오랫동안 박해를 받은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시면, 청중은 그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는 모습에도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메시지는 청중이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설교자가 유머를 너무 많이 사용할 경우 설교자가 강단에 서기만 해도 청중이 웃는다고 한다. 청중은 그런 설교자가 설교하기 전에 이미 그 설교는 웃어 넘겨도 될 설교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청중이 설교자를 좋아하면 설교는 효과가 있지만, 청중이 설교자를 싫어하면 설교는 효과가 없다. 설교자의 외모나 교육 배경이 설령 청중에게 무시를 당할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설교자가 성령의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경우 청중은 그런 설교자를 좋아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 설교를 듣고 변화를 체험한다.
“하나님은 위대한 재능이 있다고 해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위대한 성품이 있을 때에 복을 주신다. 거룩한 목회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강력한 무기이다” (로버트 멕체인)(스코틀란드의 로버트 멕체인은 강단에 올라서서 말 한 마디 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그의 모습만 보고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모습만 봐도 그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Lloyd-Jones, 86).
바울은 설교자로서 자기가 데살로니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그들이 안다고 했다(살전 1:5). 바울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바울이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말씀이 그들 속에서 역사했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설교자였다(1:2-3; 3:11-13). 바울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였다(1:5). 바울은 많은 고난과 “많은 싸움 중에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였다(2:2). 바울은 간사나 부정이나 궤사(詭詐)가 없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세를 복음을 전했다(2:3-4). 바울은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고,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는 설교자였다(2:5-6). 바울은 유모가 자녀를 기르는 것 같이 유순하게 복음을 주되 심지어 목숨까지도 주기를 즐겨하는 자세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였다(2:7-8). 바울은 밤낮으로 스스로 일하면서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였다(2:9). 바울은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는 설교자였다(2:10). 바울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는 설교자였다(2:11). 데살로니가의 청중은 이런 설교자 바울을 좋아하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달게 받아들였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요소를 발견한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고난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고백한 대로 바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많은 고난을 당했다. 바울은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녹아나고 다져진 인격자였다. 다윗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고백했다(시 119:67). 바울이 회심 후 고난당하기 전에 그릇 행하지는 않았겠지만 고난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고백했다.
바울은 특별히 질병의 고난이 자기에서 사라지기를 세 번이나 하나님께 구했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응답하셨다(고후 12:9). 바울은 그 결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는 고난신앙을 익혔다(고후 12:10). 바울의 삶은 이렇게 고난으로 다져진 삶이었고 동시에 기도로 다져진 삶이었다. 바울은 회심하자마자 바로 “기도하는 중”이었을 정도로 신앙생활의 초기부터 기도하여, 그의 서신들 초두와 곳곳에 나오는 대로 깊이 많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기도와 고난의 사람 바울은 효과적인 설교자였다.
설교자는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면서 당하는 고난을 피하지 말아야 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강단에서 승리하려면 밀실에서 승리해야 한다(Ironside). 모든 도서관과 서재는 밀실에 비해서는 공허한 곳이다(스펄젼). “가벼운 기도는 가벼운 설교를 만든다. 기도는 설교를 강하게 만들고 거기에 기름부음을 주며, 설교로 착 달라붙게 만든다. ... 설교자는 반드시 기도를 통해 설교에 하나님을 넣어야 한다.”( E.M. Bounds, Preacher and Prayer (Chicago: Christian Witness Co., 1907), 31-33.)
“당신 영혼의 모든 정직과 능력이 연구실에서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를 통해서 침투되지 않으면 당신의 설교는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연구실에서 기도에 푹 잠긴 설교는 이슬에 잠긴 기드온의 양털처럼 연구실과 강단 사이에서 그 습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Thomas Armitage, Preaching: Its Ideals and Inner Life (Philadelphia: American Baptist Publication, 1880), 170.)
기도는 생명호흡기와 능력호흡기이다. 기도는 지상에서 천국 기밀회의에 참석하는 특권이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렘 23:18, 22). 하나님은 전심으로 기도하는 설교자에게 청중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베푸신다. “여호와의 눈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대하 16:9). 설교자는 강단 의자에서 강단에 서기 전 2분 기도할 때도 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설교자가 어떠한 사람이냐 하는 것이 설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는데, 요즈음처럼 후현대주의 시대에는 그것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후현대주의 시대는 의심과 불신과 야유의 시대이다.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해도 후현대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이권을 노리고 저런 말을 하는가?’하고 들을 수 있다. 모든 말과 모든 글을 이권과 이념에 물든 수사(rhetoric)로 보는 후현대주의 시대에 설교자는 우선 신뢰를 받아야 한다. 신뢰받지 못하는 설교자는 효과적인 설교를 할 수가 없다.
설교자 물론 완벽한 존재는 아니지만, 바울 사도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주님을 본 받는 삶을 통해서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고전 11:1).
“우리는 용서 받았을 뿐 완벽하지는 않다”("We're not perfect, just forgiven")는 식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삶을 정당화 시키는 자세가 설교자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 관광으로 말하면 설교자는 관광객보다 한 수 위의 사람, 즉 관광지의 가이드가 되어야 한다. 달리기도 말하면 설교자는 말씀 적용의 페이스 세터(pace-setter)가 되어야 한다. 탁구로 말하면 설교자는 몇 수 높은 선수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후현대주의 시대의 청중이라도 설교자를 신뢰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미지(image)보다 인격(integrity)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설교자가 성경대로 사는 인격자여야 한다는 것은 “필수 중의 필수, 최고의 필수”이다(Faris D. Whitesell, The Art of Biblical Preaching (Grand Rapids: Zondervan, 1950), 71.) 설교자는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먼저 그 설교에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서민적인 사람으로 청중으로부터 고립되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친근해도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살전 2:7-8). 설교자가 교인과 같이 식사하고(행 2:46), 가정에서도 복음을 전하고(행 20:20), 개인상담도 하는(갈 6:2) 것 등을 통해서 청중과 친근하면서도 신뢰성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후현대주의 시대에 설교자가 청중에게 신뢰를 받기 위해서 철저한 자기관리(self-management)를 해야 한다. 설교자는 자기보다 높은 북(北), 자기보다 낮은 남(南), 자기와 동급인 동서(東西)보다는 자기 자신, 즉 중앙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강단에서도 이긴다. 설교자는 “스포트라이트 갈증”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야망을 통제해야 한다.
큰 교회 설교자를 항상 부러워하고 교세와 예산의 규모에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도록 자기조절을 해야 한다. ‘설교 잘 한다. 명설교가다. 설교로 목회가 성공한다.’는 말을 좋은 말이지만, 이것이 설교자에게 충성의 동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설교자는 항상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대해서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망해야 하리라”고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은 증대되고 나의 영광을 감소해야 한다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요 3:30).
설교자는 정서지수(E.Q.)가 강조되는 요즈음 시대에 정서적 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을 함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Daniel Goleman). 설교자는 항상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골고루 잘 발전하는 건전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특별히 감성을 강조하는 현시대에 감성이 메마르지 않도록 하면서 동시에 지나친 감성에 빠지지 않도록 지성을 배양해야 한다.
요즘 청년들이 찬양을 좋아하고 음악을 잘 하는 젊은 목회자를 좋아하는 것을 설교자는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청년들의 감성을 터치하지 못하면 결국 청년 청중을 놓치고 만다. 청년 청중을 놓치는 것은 교회의 미래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설교자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감성적인 터치를 잘 하도록 감성지수를 스스로 높여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