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曜放談) 귀신을 보았다. 소운/박목철
유교,
우리나라는 유교를 국본으로 삼아 통치한 이후 나라가 쪼그라들었고 중국의 변방 번국으로 주저앉았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패망 이후 당나라를 상대로 국가의 존망을 걸고 7년여를 싸워 당나라 군사를 몰아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거란이나 여진 몽골를 상대로 굽힘이 없이 싸워 국가를 지켜냈고 자존을 지켰다.
그러던 나라가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왜 나 여진에게 제대로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결딴나는
그런 한심한 나라로 전락 한 것은 이성계란 자가 중국을 떠받들며 유교를 숭상. 변변한 상비군 하나 없는 나약한
나라로 연명하다 전쟁 없이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는 미명하에 나라를 일본에 갖다 바치는 지경이 되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던 유교적 의식구조 속에서 나마 다행인 것은 유교에 사후 세계관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를 예로 들면 특정 종교의 뿌리가 너무 깊어 국가나 개인이 선택할 여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후 세계관이 없는 유교에서는 종교적 맹종이 상대적으로 적고 신에게서 자유롭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하겠다. 향교나 서원에 모셔진 공자나 맹자나 이런 자들도 학문적 존경과 본받을 대상이지 신으로 떠받들지는 않는다.
(만약 유교에 종교적 신이 존재했다면 한국은 큰일 날뻔했다)
사람이 죽으면, 삶을 지배하던 혼(魂)과 백(魄)이 육신을 떠나 소멸(消滅)된다고 보는 것이 유교적 생각이다.
거기도 음양(陰陽)이 작용해 가벼운 양인 혼은 날아올라 사라지고 음인 백은 무거워 가라앉아 주변에 머물다
스러진다고 보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 이후 시차적 이견(異見)은 있으나 결국은 소멸하여 없어진다고 본다.
사람이 죽을 때 대게의 경우는 자신이 죽을 거라는 것을 미리 알게 마련이다. 나이가 많거나 병을 앓거나 심하게
다쳐서 병석에 눕더라도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가늠하고 더 살기 어렵겠다 하는 것을 알게 마련이다.
이걸 모르고 죽으면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어 혼백이 떠나지 못하고 자신이
살던 삶의 주변에 머뭇거리게 되는데, 이를 귀신이라 칭한다.
엉컹퀴꽃,
양평 텃밭 주변에 엉겅퀴가 몇 그루 자라더니 사람 키를 훌쩍 넘게 기세를 떨치며 자색의 꽃망울이 곱게
맺히기 시작했다. 장터에서 할머니들이 엉겅퀴 꽃망울을 팔던 것이 생각나 인터넷으로 조회 해 보았다.
여러 효능이 만병통치 수준이고, 한국인이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동의보감에도 좋은 약성을 평가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망설일 것도 없지 않은가, 공구상에서 산 컷터기로 꽃망울을 싹둑 잘라 바구니에 담았다.
자색은 황제의 색이라 했는데 자색 꽃망울이 이쁘기도 했다. 잘 말려서 차를 끓여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바구니에 담아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고이 모셔 두었다.
얼마 후, 뭘 가지러 들어간 작은 방에 민들레 꽃씨 비슷한 솜털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마르라고 바구니에 담아 창가에 둔 엉겅퀴 꽃망울이 활짝 펴 솜털을 날리고 있었다.
분명히 가위로 싹둑 자른 작은 꽃망울이었는데 활짝 부풀려 솜털 뭉치로 변해 있다니, 순간 유교에서 말하는
귀신이 생각났다.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르고 솜털을 부풀려 꽃씨를 날리는 허망함은 유교에서 말하는 귀신이
분명하다.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르는 것을, 허망하다는 이외의 단어로는 달리 마땅한 표현 방법이 없다.
유교에서는 내세관이 없는 대신 삶의 가치에 무게를 둔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에 상처를 내는 것도 불효이고, 더구나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불효중에 불효이다.
죽어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보다 산 돼지가 낫다는 막말이 유교적 삶의 애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천수를 다 누리고 자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것을 가치 있게 여겼기에 잘 죽는 것들 오복 중에
으뜸가는 복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객지에 나가서 죽으면 객사라 하여 시신을 집안에 들이는 것
조차 꺼리기도 했다. 객지에서 죽었다는 것은 자기 죽음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니 소위 귀신이
붙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삶은 여행길에 잠시 꾼 꿈일 뿐이다.
불교에서는 태어나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삶 자체도 고통이라 한다. 행복도 그런 차원에서는 고통의 일종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윤회의 사슬을 끊는 영원한 無의 세계로 드는 열반(涅槃)을 최고의 깨달음이라지 않던가?
하지만 이런 고상한 말들은 다 허상이다. 빨랫감을 뒤적이다 혹 잊었던 만 원짜리 지폐 하나만 나와도 기분이
좋아지는 중생들인데, 하물며 자신이 죽는 것도 모르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겠는가,
크고 작은 사고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모르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안타까운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
유교에서 하는 말대로라면 귀신이 널려야 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 세상사는 다 잊으시라! 툭툭 털고 편안한 곳으로 훨훨 떠나시기 바란다.
평소에 믿고 있던 종교가 있다면, 종교가 말하는 최고의 쉼터에 드시기를 바란다.
그대가 머물던 세상은 좋았던 일까지 다 허상에 불과하다. 뒤돌아 보지 마시고 편히 떠나시라!
터덜거리며 걷던 여행길에서 마주 했던 모든 것들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
(소운은 종교가 없고 종교적 교리를 믿지도 않습니다. 상식선에서 좋은 교훈은 공감할 뿐입니다}
귀신을 보았다. 소운/박목철
제가 죽은 것은 모르면
살던 삶의 언저리에서
애증의 끈에 놓지 못해 서성이고
이를 일컬어 귀신이라 한다.
엉겅퀴 꽃망울이 몸에 좋다기에
한 움큼 따 양지 녘에 두었다.
며칠 후보니
꽃망울이 활짝, 솜털 씨앗이 풍성하다.
댕강 잘라 분명히 죽었는데,
죽은 걸 모르다니, 후손을 걱정하다니,
엉겅퀴 귀신이다.
태어남이 고행苦行이요
삶이 고통苦痛이라 했는데
무에 인연因緣의 끈이 대단하다고
혼비백산魂飛魄散, 묵은 옷 훌훌 벗듯 떠나지 못하고,
바람 좋은 날 꽃씨를 날렸다.
가슴이 시렸다.
윤회輪廻의 끈을 놓지 못한 집착執着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