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독의 War History
이 글은 6.25 전쟁 중 부상을 입고 전쟁포로가 되었던 국군 장교가 당시에 만난 북 사단장의 인간미에 감동 받은 이야기다. 이러한 소재에 오해하시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국군 장교는 월남전의 영웅으로 재구 대대 대대장이었으며 육군 준장 출신인 박경석 장군이다. 그리고 이 노병의 경험이 우리 국군이 크게 배울 교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글의 말미에서 밝히겠다.
1 사단 연대장 시절의 박경석 장군
그가 감동한 북한군 사단장은 그의 소대를 격파하고 부상한 박경석 소위를 포로로 붙잡았던 북한군 부대의 사단장이었다.
국군의 박경석 장군이 반감을 가졌어도 크게 가졌어야 했을 적장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주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70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박장군은 필자와의 자주 있었던 대화에서 이 북한군 사단장을 여러 번 언급했었다.
이제는 문필가로 활동하는 박경석 장군의 회고록 '육사 생도 2기생'이라는 책에서 그 비화를 옮겨온다. 또 어린 국군 장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으나 지금까지 정체불명이었던 그 북한군 장군의 실체를 이 글에서 밝혀보겠다.
박경석 장군이 포로가 된 경황없던 상황에서 파악할 수가 없었고 그 뒤 계속되던 전투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그 사단장은 6.25 전쟁 중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김일성 직속 빨치산 부대 출신 사단장들 패거리들 중에서 예외적인 사람이었다.
이 기막힌 토픽의 내력을 소개하기 전에 박경석 장군의 이력을 먼저 소개하겠다. 박경석 장군은 한국 나이 18세, 만 나이 17세인 1950년 6월 1일에 4년제의 편제로 새로 개교한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었다. 너무 어린 나이가 문제가 되어 입학이 불허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원자 중의 한 명인 군부 실력자 원용덕 장군의 아들이 박경석 생도와 동갑이라서 특혜를 받은 그와 같이 입학하게 되었다.
50년대 육사생의 분열 모습
그러나 입학을 하고 25일 후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6.25 당일 1기 선배인 육사 10기생들과 같이 포천 전선에 투입되었다.
선배인 육사 10기는 그런대로 1년간 교육을 받아서 군인 티가 나는 상황이었지만 박경석 생도 기는 제식 훈련과 집총 훈련 정도만 겨우 진행되고 있던 상태였다. 출동 직전 영점 사격 3 발을 해본 것이 사격의 전부였다.
맨 왼쪽이 포천 전선을 공격했던 북한군 3사단장 이영호- 최용건 계의 빨치산. 윗줄은 김일성의 직계 류경수[좌-105 전차 여단장]와 동해안 공격의 766부대 오진우[우-오랜 세월 북한의 민족 보위상을 했었다.] 남침 때 두 인간은 물론 이영호까지 무자비한 학살을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원체 다급해진 전황으로 육사의 교도대는 물론 생도대도 전원 전선에 투입되었다.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의 명령이었다고 한다. 잘못되었어도 크게 잘못된 결정으로서 이것은 북한군 침공 후 35살의 경험없던 채병덕 장군이 북 침공 사흘 동안 범한 여러 큰 실수의 한 작은 경우였다.
북한군 3사단의 공격에 맞서 배치된 박경석 생도 동기들은 이 무모한 전투에서 무려 86명이나 전사했다. 현실 감각 없었던 국군 간부의 또 다른 행태로서 육사 교장 이준식 장군은 피를 흘리고 모교로 후퇴한 생도대 부상병들은 이 신성한 육군 사관학교에 저런 패잔병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다 내쫓았다고 하니 아연할 수밖에 없다.
절망과 분노에 빠져 수원 남쪽으로 후퇴한 생도대는 모두 돌격해서 옥쇄하자고 결의하고 공격 개시선으로 이동 중에 백선엽 1사단장이 제지하는 바람에 단념하기도 했었다. 생존한 생도들은 모두 부산 동래에 집결해서 종합학교라는 이름으로 급조된 군사학교에서 단기 훈련을 받고 정식 소위로 임관하였다. 박경석 장군의 기는 나중에 육사 생도 2기생으로 불리게 된다. 그의 동기들은 한 명만 빼고 전원 당시 신설 사단인 9사단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사단장은 후에 참모총장이 된 장도영 장군이었다.
1950년 10월 25일 창설된 9사단 [백마부대] 엠브렘
9사단은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전선이 남쪽으로 내려온 상황에서 강원도 평창에서 남진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띄고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소속된 3대대장은 평창의 1,077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적 연대 병력의 주력을 격퇴하라는 명에 따라 두 개 중대에게 야간 이동을 명령했다. 밤새 산등성이를 타고 7부 능선까지 올라가서 대기하다가 동이 트는 새벽 6시에 고지를 공격하는 작계[作計]에 따른 것이었다.
장진호에서 이동하는 미 해병들, 1077 고지 공격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1,077고지라면 서울 북쪽 북한산과 비슷한 높이며 서울 남산보다 다섯 배나 높은 산이다. 이런 산의 고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다는 정보만으로 판단하고 아무런 사전 정찰이나 훈련도 없이 야간 이동과 공격을 명령한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경사지에 무릎 깊이까지 눈으로 뒤덮인 그런 지형이었다. 험한 등산길에 길을 잃은 중대원들은 후래쉬를 여기저기 비추고 침묵해야 할 무선망까지 열어버려서 자기들의 위치를 고지의 북한군에게 스스로 다 노출해버렸다. 국군의 접근을 발견한 고지의 북한군들은 산 중턱까지 내려와서 매복했다가 기습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죽은 북한군과 포로가 된 북한군 포로
무능한 중대장은 북한군의 출현에 놀라서 도망쳐 버리고 대대장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의 혼란한 상황에서 소대는 소대대로 싸워야 했다
.
소대는 잘 싸웠으나 전투 진행 중에 박경석 소위는 접근한 적이 던진 수류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소대는 그대로 후퇴해서 대대에 박경석 소위 전사 보고를 했다. 박경석 소위는 정신을 잃고 아침까지 쓰러져 있다가 전장 정리를 하던 북한군에게 발견되었다.
대개 후퇴한 적이 남겨놓은 중상자는 사살하는데 박소위는 나이도 어리고 잘 생겨서 북한군은 박소위를 여자로 오해하고 상관에게 보고하는 소동이 벌어졌다.(박경석 장군은 지금 80이 넘은 나이에 보아도 잘 생긴 미남이다.)
결국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 소동으로 박소위는 즉결처분 당하는 운명을 피해서 북한군 후방으로 호송되었다.눈을 떠보니 박소위는 어느 동굴같은 곳의 응급 치료소에 누어 있었다.
귀의 고막이 날아가고 허벅지에 큰 파편상을 입었으나 북한군 군의관과 여자 간호 장교가 잘 돌봐주어 완쾌할 수 있었다. 지금도 박장군 다리에는 북한군 군의관이 가정 집에서 쓰던 바느질용 무명실로 꿰맸던 굵은 바늘 자국의 상처가 남아있다.
다부동 방면을 공격하였던 북 13사단 사단장 최용진을 쏘고 미군에 투항했던 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 미군이 그를 포로 수용소로 보내자 그는 분개해서 다시 전향하고 포로 교환 때 북으로 갔다.
박소위가 이 동굴의 가마니 위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어느 날 밖이 수런스럽더니 갑자기 북한군 간부 하나가 들어왔다. 어깨에 왕별 하나를 부착한 북한군 사단장이었다.
[출처] 국군 포로와 북 사단장의 이야기 -1-|작성자 동고동락
이때의 야간 전투 경험을 살렸는지 그가 재구 대대장으로서 월남에서 베트콩 부락을 공격해서 승리한 작전은 문자 그대로 '치밀' 그대로였다.
[출처] 국군 포로와 북 사단장의 이야기 -1-|작성자 동고동락
첫댓글 치욕의 국군포로가 되어 국군의 명예를 더럽힌 부끄러웠던 이야기지만 앞으로 자라나는 세대 또는 후배 군 리더를 위해 밝히기로 했다.
죽었다 살아난 젊은 시절의 전투 경험이었다. 그 실패의 경험탓에 1965년 맹호 제1진 초대 在求大隊長으로 월남전에 참전, 실패를 하지 않은 기록을 세웠다.
바른 전사 기록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후배 울프독(필명)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