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릅의 향기/전성훈
살을 에이는 듯 한 매서운 겨울바람이 문풍지 사이로 실바람 빠지듯 빠져나가면 저 멀리서 봄이 손짓하기 시작한다. 고결한 품위를 자랑하는 매화를 푯대로, 평화를 상징하는 노란 개나리, 기나긴 기다림 속에 피어나는 흰색과 보라색 목련 그리고 부끄러움에 입술을 앙증스럽게 다문 연분홍빛 진달래가 봄이 오는 3월이면 피어난다. 봄꽃이 만발하는 3월 말이나 4월초에 봄의 여신 벚꽃이 화려한 모습으로 피기시작하면 봄의 절정이 우리 곁에 왔음을 실감한다.
4월 들어 연두빛 색깔의 봄기운이 완연하게 산하를 물들이면 나도 모르게 봄나물이 그리워진다. 겨울 내내 잃어버렸던 입맛을 찾아가는 숨바꼭질의 계절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집 나간 입맛을 되찾는 데는 어린냉이를 된장에 풀어 끓인 상큼한 냉이된장국만 한 게 없다. 입맛에 따라 쑥이나 달래로 된장국을 끓여 먹어도 그 맛은 냉이된장국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봄이 무르익는 4월이면 내 입맛을 사로잡는 신선한 나물이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누가 뭐라고 해도 봄나물의 여왕은 두릅이다. 두릅을 직접 재배하거나 키워 본 적은 없다. 밭 두릅이나 산 두릅을 채취하여 깨끗이 씻어 뜨거운 물에 데쳐 먹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저절로 돈다. 두릅과 처음 만난 건 군대시절이다. 벌써 45년도 넘은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다. 내가 근무했던 강원도 화천, 산세가 험한 강원도 대성산에서 근무할 당시, 부대 막사 주변 울타리에 제법 많은 두릅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1976년 봄, 어느 날 강된장과 함께 두릅이 식탁에 올라왔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두릅을 먹어본 경험이 없었던 나는 처음 보는 나물을 무슨 맛으로 먹을까 주뼛주뼛하며 망설였다. 그러자 옆에서 식사하던 분이 먹는 법을 가르쳐주려는 듯이 두릅을 된장에 찍어서 한 입 가득히 배어먹었다. 그렇게 두릅과 만난 이후에 나도 모르게 두릅 마니아가 되었다.
두릅을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데친 두릅을 먼저 코에 대고 그 향기를 맡아 본다. 그윽한 두릅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면 강된장에 두릅을 찍어서 한입 베어 씹는다.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에 찍어먹어도 좋으나 내 경우에는 조금 텁텁한 느낌을 주는 강된장에 찍어먹는 걸 더 좋아한다. 두릅을 한 입 베어 먹고 난 다음에는 막걸리 한 모금을 마시면 더없이 행복한 순간을 맞이한다. 두릅을 먹을 때 함께 있으면 더욱 좋은 나물이 있다. 인삼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다고 말하는 더덕이다. 더덕을 무쳐 먹어도 좋고 깨끗하게 씻어 날로 그냥 먹으면 더덕과 두릅의 맛과 향기가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 두릅과 더덕의 환상적인 궁합에 걸맞게 막걸리 한 모금을 더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계절의 별미를 조금이나마 즐기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짜증나는 생활에 새로운 활력이 되고 기분도 개운해지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음식에 반주로 술을 곁들일 때는 적당한 선에서 술맛과 음식 맛을 음미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경동시장에 들렸더니 아주머니들이 가판을 벌려놓고 두릅을 팔고 있었다. 종기에 얹어놓고 파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근으로 달아서 파는 가게도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울에 얹어 근으로 파는 곳에서 두릅을 사니까 덤으로 한 줌 더 주었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부탁하고 동네 슈퍼에 들려 장수막걸리 한 병을 샀다. 저녁 식사를 하며 살짝 데친 두릅에 아내와 막걸리 한 잔을 나누며 잠시나마 소소한 즐거움을 맛보았다.
봄을 만끽하는 입맛을 돋우는 데는 역시 제철 음식인 두릅만한 게 없고, 봄에 두릅을 맛보지 않으면 봄을 맞이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2021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