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최용현(수필가)
‘화양연화’(2000년)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작으로 꼽는 홍콩영화로, 각자 배우자가 있는 중년 남녀의 원숙하면서도 애잔한 사랑을 담아낸 왕가위 감독의 수채화 같은 멜로드라마이다.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상영되었으며, BBC에서 선정한 비영어권 100대 영화에서 9위를, 21세기 영화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러닝 타임은 1시간 38분.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꽃이 피는 때처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하는데, 이 영화는 칸영화제에서 홍콩배우 최초로 남우주연상 수상과 함께 기술상을 받았다. 이어 대만 금마장에서 여우주연상 등 3개 부문을, 홍콩 금상장에서도 남녀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하였다.
1962년 홍콩. 한 아파트의 옆집에 방 하나씩 세를 얻은 두 부부가 동시에 이사를 온다. 신문사의 편집기자로 일하는 차우(양조위 扮)와 그의 아내, 그리고 무역회사 사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첸 부인(장만옥 扮)과 그녀의 남편이다. 차우의 아내는 호텔에서 일하는 관계로 주로 야간에 집을 비우고, 첸 부인의 남편은 사업상 일본 출장이 잦다.
차우와 첸 부인은 아파트 상가의 국수가게로 오가는 계단에서 자주 마주치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은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차우는 첸 부인이 자신의 아내와 똑같은 핸드백을 가지고 있고, 첸 부인은 차우가 자신의 남편과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 묻는데, 두 가지 다 첸 부인의 남편이 일본에서 사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배우자가 불륜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날, 차우는 아픈 어머니를 돌보러 친정에 간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는데, 일본우표가 붙어있었다. 차우는 아내가 친정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첸 부인의 남편을 따라 일본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억장이 무너진다. 차우와 첸 부인은 자주 만나 서로를 위로하는데,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감정적인 유대감은 더욱 깊어진다.
차우는 아내의 불륜을 마음에서 지우려고 오랜 꿈이던 무협소설을 써서 신문에 연재한다. 첸 부인이 무협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차우는 주변의 눈을 피해 동방호텔 2046호실을 빌려서 거의 매일 저녁 그곳에서 첸 부인과 만나 스토리를 상의하면서 소설을 쓴다. 두 사람은 차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결코 선을 넘지는 않는다.
어느 날, 첸 부인은 집주인 손 부인으로부터 ‘유부녀가 매일 밤늦게 들어오면 안 된다.’는 훈계를 듣는데,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한동안 만나지 못한다. 차우는 오랜만에 만난 첸 부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곧 싱가포르로 갈 것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집 앞 골목에서 이별얘기를 하다가 서로 끌어안는다. 첸 부인은 차우의 품에서 흐느끼다가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않겠어요.’ 하고 말한다.
차우가 떠나자, 첸 부인은 동방호텔의 2046호실에 가서 혼자 눈물짓는다. 얼마 후, 첸 부인은 자신의 생일에 맞춰 남편이 신청한, 이 영화의 제목으로도 차용된 저우쉬안(周璇)의 ‘화양적 연화(花樣的 年華)’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있고, 그 시간 차우가 있는 곳에서는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가 흐르고 있다.
1963년 싱가포르. 싱가포르신문사에서 일하는 차우는 어느 날 신문사에서 자신을 찾는 전화를 받는데, 상대방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끊었다. 그날 저녁 방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방에 두었던 첸 부인의 실내화가 없어지고 재떨이에는 립스틱이 묻은 담배꽁초가 있었다. 차우는 첸 부인이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한다.
1966년 홍콩. 손 부인이 미국에 있는 딸에게 가기 위해 집안의 가재도구들을 정리한다. 손 부인의 배표를 사가지고 온 첸 부인은 손 부인에게서 옆집에 구씨네가 살았던 때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 구씨네 집에 세 들어 살던 차우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인다.
홍콩으로 돌아온 차우는 구씨네 집을 찾아가는데, 그곳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옆집 손 부인의 가족도 이사를 가고, 그 집엔 애 하나 딸린 젊은 여자가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차우는 잠시 옆집을 바라보다가 이제 자신의 화양연화가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젊은 여자가 첸 부인인 것을 모른 체….
1966년 캄보디아. 취재차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간 차우는 전설에 전해져오는 대로 벽에 난 구멍에 입을 대고 자신의 하고 싶은 비밀 얘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풀을 뽑아서 그 구멍을 메운 뒤 앙코르와트를 떠나는데, 화면에 이런 자막이 나오면서 영화가 끝난다.
‘지나간 시절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어도 만질 수가 없기에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유리창을 깰 수 있다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이 절제된 미장센으로 그려낸 사랑과 이별의 영상시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차우의 아내와 첸 부인의 남편이 뒷모습과 목소리만 나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1960년대의 보수적인 사회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결국 차우와 첸 부인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아름다운 추억만 남기게 되는데, 이에 대해 왕가위 감독은 ‘나는 불륜의 다른 쪽 당사자들의 비밀스럽고 내밀한 감정의 여운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 내내 잔잔하게 깔리는 OST Yumeji's theme가 헛헛한 느낌을 주고, 여주인공 장만옥이 계속 갈아입고 나오는 타이트한 치파오가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 마지막에 손 부인과 구씨네가 이사를 가는 것은 홍콩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고, 객실번호 2046은 홍콩의 일국양제(一國兩制)가 끝나고 중국에 완전히 귀속되는 해를 의미한다.
첫댓글 오래전에 본 기억은 있는데 줄거리는 가물가물~ 중독성이 있는 배경음악은 요즘도 가끔씩 듣고 있네요.
네, 배경음악 '유메지의 테마' 들을수록 헛헛하게 가슴을 치고, 은근히 중독성도 있지요.
요즘도 가끔 생각나서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입니다.
동감입니다. 은근히 끌리는 영화지요.
내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