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1959년 그 여름의 우화
사진은 본 문장과는 무관 - 보사동우회의 2013년 가을 울릉도 여행 사진 중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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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은 산악부 학생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계절이다.
마음껏 산행을 할 수 있는 많은 날들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학이라는 매력에 사로잡혀 사범대학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사례도 많았다.
1959년 경북학생산악연맹의 여름 기본행사는
울릉도 학술조사와 무료진료로 짜여졌다.
1958년 제주도에 이어 계속 섬을 여름 행사의 대상지로 잡은 결과가 되었다.
그렇게 미지의 섬은 젊은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또 올라야 할 훌륭한 산도 있었다.
섬 자체는 망망대해에 솟아 있는 하나의 산이기도 하다.
1959년 7월28일부터 8월4일까지 장기간에 걸친 울릉도 여름행사에는
참가자 64명 모두 나름대로 추억들을 간직할 수 있는 행사가 되었다.
7박8일 일정은 배편이 그렇게 밖에 없었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포항-울릉간 정기운항 배편에 맞춰 행사계획이 잡혔다는 뜻이다.
김종욱(당시 대구고 2년)은 이 행사의 기록을 ‘고도(孤島)의 가슴으로’라는
글로 회지 <산악>에다가 소상하게 남겨 놓았다.
당시의 시대상이나 산행풍속도를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다.
학술조사라는 행사 명칭을 뒷바침이라도 하듯
훌륭한 조사연구물들이 행사 후에 보고되었다.
‘울릉도 아동의 희망과 가치관에 대한 조사보고(1)’(이동원-이근후),
‘울릉도의 범죄’(손병환), ‘울릉도의 질병’(정용국) 등
학술적인 가치가 높은 연구물들이 회지 <산악>에 게재되었다.
이동원(서울대문리대 사회학과)과 이근후(경북대 의대)는
뒷날 부부가 되었고 뒷 날 다같이 이화여대 교수로 봉직했었다.
경북학생산악연맹 원년의 멤버로 박재곤과 함께 경북대 산악부원
모집 벽보를 붙이기도 했던 손병환은
효성대 교수가 되어 고향 땅에서 후진들을 길러 내었다.
원년 창립행사부터 개근생으로 참여했던 박재곤 손병환
두 사람은 창립 해인 1957년 11월 학보병(학적보유병사)으로 입대,
1년6개월간 최전방 소총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이 여름행사 때부터 연맹활동에 복귀했다.
울릉도의 질병을 조사했던 정용국 등 무료진료반은
울릉도에 처음으로 X선 기기를 갖고 가서
울릉도 도민들의 가슴을 찍은 기록도 남겼다.
이 날을 기억하시는 분들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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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봉 등반은 오르는 도중 나리분지에서 캠핑을 했다.
도동에서 성인봉을 하루만에 다녀오기는 벅찬 코스였다.
성인봉 등정을 마치고 하산길에는 남양동 해수욕장에서 캠핑하며
해수욕을 즐겼다.
일주도로가 없던 시절이라 배편으로 섬을 일주하며 거울처럼
맑은 동해의 바다물과 해안절경에 도취되기도 했다.
도동에서는 학교운동장에서 울릉도 청년팀과 축구시합도 했다.
당시 인구 7천명의 섬 울릉도에는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는 없었고
바퀴 달린 교통수단이란 전무였다.
놀랍게도 1개 군(郡)이었던 울릉도를 한 개의 선거구로 해서
한 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몇 시간이면 성인봉 정상을 다녀오고 2,000 대가 넘는
자동차로 섬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지금과 비교해 보면 실로 격세지감이다.
이 행사에서는 경찰경비정의 지원을 받아 독도를 다녀왔다.
독도는 지금도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58년 전 그 시절에 독도에 상륙해 보았다는 사실과
경비대원들을 위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등반 대원들에게는
큰 긍지였고 크나 큰 자랑이었다.
이러한 일들로 대구의 등산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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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 머물면서 만들어진 수많은 우화들은 뒷날 대구 향촌동
술집골목의 술상 위에 올려진 맛나는 안주가 되었다.
그 중의 백미는 ‘나(羅)경찰서장님’으로 기억되는
‘경찰서장님’에 관한 것이었다. 경찰서장실로 공식적인 방문을 했다.
근엄한 복장(?)의 경찰서장을 생각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서장 책상 위에는 밀집모자가 놓여 있었고
반소매 사복의 서장은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섬 주민들을 위한 ‘위안행사’라는 이름으로 등반대는
늦은 밤 학교 운동장에서 아마추어 쇼를 펼쳤다.
도동 주민 모두가 관람한 듯한 이 행사는 밤
12시를 훨씬 넘어야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관람하고 있던 경찰서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경찰서장의 한 마디 지시가 참으로 기상천외였다.
서장 뒤켠에 앉아 있던 부하를 부르더니
“오늘밤 통금 사이렌은 불지 말라”는 것이었다.
통금시간이 있던 당시에는 밤 11시30분에 예비 사이렌이 울리고
30분 후인 12시에 한 차례 더 사이렌이 울리면
사람들은 통행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나라에서 특별히 통금시간을 해제라도 해야 할 경우에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야만 된다고 했는데,
울릉도는 그 법의 바깥에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의 이야기다.
그 때 그 시절 대~한민국 사람들은 진달래 백양 탑이라는
이름의 담배를 피웠으니 호랑이도 이들 담배를 피웠겠다.
- 내가 울릉도를 처음 찾은 58년 전인 1959년 여름의 이야기다.
해거름에 포항항을 떠난 통통배는 11시간 항해 끝에
다음날 아침에야 도동항에 닿았다.
당시 울릉도에는 바퀴가 달린 교통수단은 하나도 없었다.
바퀴가 굴러갈 수 있는 길도 물론 없었다.
국민학교 교실 벽에는 자전거 자동차 기차에 이르기까지
바퀴 달린 교통수단을 그려두었다.
선생님은 이 그림으로 학생들에게 육지의 교통수단을 가르쳤다.
그 여름 우리는 나리분지에서 캠핑을 하고 다음날 성인봉을 올랐다.
지금은 도동까지 포항에서 3시간, 묵호에서 2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다.
그리고 울릉도에는 2,000대가 넘는 자동차가 섬 곳곳을 싱싱 달리고
도동에서 나리분지까지도 정기노선 버스가 다닌다.
내가 울릉도를 처음 찾았던 1959년은
정말 호랑이가 담배를 피웠던 시절이었다.
(월간 山 내가 쓴 글에서 발췌)
선남 선녀 모두가 반가운 얼굴들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소서!! 우촌 박재곤
울릉도 도동항 / 촬영 백록담동우
첫댓글 추석연휴 Map Tour 로 울릉도를 한 바퀴 돌았지요.
곳곳에 보사동우들의 발자취가 보이기에 옛날 옛적
이야기를 찾아서 여기에 글과 사진을 올렸습니다.
댓글 많이 달아 주시고
울릉도 명이도 택배로 받아 드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