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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뿌리를 찾아서 스크랩 3. 다루왕과 기루왕, 개로왕
주임교수 추천 3 조회 44 15.07.23 07: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3. 다루왕과 기루왕, 개로왕

 

 

다루왕(재위28~77)

 

다루왕(多婁王)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도량이 넓고 위엄과 덕망이 있었다. 온조왕이 재위 28년에 태자로 삼았고, 46년에 이르러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2년(서기 29) 봄 정월에 시조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2월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3년(서기 30) 겨울 10월에 동부의 흘우(屹于)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10필과 조(租) 500섬을 상으로 주었다.

4년(서기 31) 가을 8월에 고목성(高木城)의 곤우(昆優)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9월에 왕이 횡악(橫岳) 아래에서 사냥하였는데 한 쌍의 사슴을 연달아 맞히니 여러 사람들이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횡악은 507년 고구려 군대가 백제 성왕의 한성을 공격하던 곳이다. 또한 기도처이다.

뒤에 기루왕 17년(서기 93) 가을 8월에 횡악(橫岳)에 큰 돌 다섯 개가 동시에 떨어졌다.
따라서 용강군 오석산성이 바로 그 어원이다. 

고구려 황룡산성이라는 이름이 전해왔는데 본래 백제 횡악성이 어원이 된다. 소위 점재현 신사비가 발굴된 곳인데, 백제 속국의 현장들이 들어와 회의를 하였고 비를 세웠다. 그 대표인 점재현장이 산천에 기도한 내용은 비가 잘 오고 풍년이 들게 해달라는 기원이 있었다.


 

6년(서기 33) 봄 정월에 맏아들 기루(己婁)를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나라 남쪽의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논稻田을 만들게 하였다.
이전에도 벼농사는 있었으나 밭에서 키웠다.

7년(서기 34) 봄 2월에 우보 해루(解婁)가 죽으니 나이가 90세였다. 동부의 흘우(屹于)를 우보로 삼았다.
여름 4월에 동방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가을 9월에 말갈이 마수성(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놓아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겨울 10월에 또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였다.

 

10년(서기 37) 겨울 10월에 우보 흘우를 좌보(左輔)로 삼고, 북부의 진회(眞會)를 우보로 삼았다. 11월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11년(서기 38) 가을에 곡식이 잘 익지 않았으므로 백성이 사사로이 술빚는 것을 금하였다.
겨울 10월에 동부(東部)·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순행하며 위무하고, 가난해서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한 사람당 두 섬을 주었다.

 

21년(서기 48) 봄 2월에 궁중의 큰 홰나무槐樹가 저절로 말랐다. 3월에 좌보 흘우(屹于)가 죽으니 왕이 슬피 곡하였다.

 

28년(서기 55)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죄수를 살펴 사형할 죄도 사면하였다. 가을 8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에 쳐들어 왔다.

29년(서기 56) 봄 2월에 왕이 동부에 명하여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말갈을 방비하게 하였다. 


우곡성은 함흥의 우수주다. 함주군 북쪽 상조양면 탑동리에 있다.
 

36년(서기 63) 겨울 10월에 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렀다.
매성(妹城)이라고 했던 문천군이다. 문주왕(文洲王)의 출신성 문주(文洲)이기도 하다.
낭자곡의 낭자가 배우자를 의미하는 매성으로 바뀐 것이다.
 

속고대왕이 함흥 우수주 남쪽 정평 수시리성으로부터 일본에 가서 스사노오신이 되었다. 그의 궁터가 출운대사이다.
그 스사노오신의 부인은 즐옥명희라고 하였는데 문천군에 절명루(節明樓)가 있다. 또 문천군 서쪽의 배지이천도 그 이름이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에 옮겨갔다
.

곧 사신을 신라에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가 듣지 않았다.
동해안에 성을 세웠기 때문에 백제왕은 신라왕을 부른 것이다.

 

37년(서기 64)에 왕은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기병 2천 명을 일으켜 맞아 쳐서 패주시켰다.
와산성은 충청북도 보은군이고, 구양성은 충청북도 괴산군이다.

 

39년(서기 66)에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00명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신라에게 패하였다.

43년(서기 70)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46년(서기 73) 여름 5월 그믐 무오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산으로 양력 7월 23일이다. 0073 Jul 23 09:28 T 66 0.654 1.041 58.8N 60.6E 49 182 02m51s

47년(서기 74)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신라를 쳤다.
48년(서기 75) 겨울 10월에 또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49년(서기 76) 가을 9월에 와산성이 신라에게 회복되었다.
50년(서기 77)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기루왕(재위77~128)

 

기루왕(己婁王)은 다루왕의 맏아들이다. 뜻과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다루왕이 재위 제6년에 태자로 삼았고, 50년에 이르러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9년(서기 85) 봄 정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여름 4월 을사에 객성(客星)이 자미(紫微) 별자리로 들어갔다.

 

11년(서기 87) 가을 8월 그믐 을미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산으로 양력 10월 15일이다. 0087 Oct 15 08:38 A 64 0.952 0.913 52.5N 94.8E 17 1059 07m43s

 

13년(서기 89) 여름 6월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져 민가를 함몰시키니 죽은 사람이 많았다.
14년(서기 90) 봄 3월에 크게 가물어 보리 수확이 없었다. 여름 6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16년(서기 92) 여름 6월 초하루 무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산으로 양력 7월 23일이다. 0092 Jul 23 03:42 A 76 -0.032 0.987 19.1N 124.7E 88 46 01m26s

 

17년(서기 93) 가을 8월에 횡악(橫岳)에 큰 돌 다섯 개가 동시에 떨어졌다.
횡악은 용강군 오석산 황룡산성이다.

 

21년(서기 97) 여름 4월에 두 마리의 용(龍)이 한강에 나타났다.
백제 한강이 서울의 한강으로 고려된다. 서울 한강에 백제가 진출한 것으로 고려된다.

23년(서기 99)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콩을 해쳤다. 겨울 10월에 우박이 내렸다.
27년(103) 왕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하다가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았다.
29년(105)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31년(107)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32년(108) 봄과 여름에 가물어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가을 7월에 말갈이 우곡(牛谷: 함흥)에 들어와서 백성民口들을 약탈하여 돌아갔다.

35년(111) 봄 3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7년(113)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40년(116) 여름 4월에 황새가 도성의 문 위에 집을 지었다.
6월에 큰비가 열흘이나 내려 한강의 물이 넘쳐 민가를 떠내려가게 하고 허물어뜨렸다. 가을 7월에 담당 관청有司에 명하여 수해를 입은 농토를 보수하게 하였다.

 

49년(125)에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자 글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이를 구원하였다.
말갈이 백제의 함흥, 원산을 동시에 쳤을 수도 있다.
52년(128)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개루왕(재위128~166)

 

개루왕(蓋婁王)은 기루왕의 아들이다. 성품이 공순하고 행실이 올발랐다. 기루가 재위 52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4년(131) 여름 4월에 왕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5년(132) 봄 2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평양의 대성산성을 쌓은 것이다. 안학궁은 근초고왕 대에 만들어졌다.

 

10년(137) 가을 8월 경자에 형혹(熒惑)이 남두(南斗)를 침범하였다.
28년(155) 봄 정월 그믐 병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산으로는 양력 2월 19일이다. 0155 Feb 19 08:43 Pe 52 1.541 0.007 70.8N 0.1W 0 /

겨울 10월에 신라의 아찬 길선(吉宣)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일이 탄로나 도망해 왔다.
신라 왕아달라 이사금이 글을 보내 그를 돌려주기를 청하였으나 보내지 않았다. 신라 왕이 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으나 여러 성이 성벽을 굳게 하여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으니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39년(166)에 왕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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