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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 자신감 . 한자를 갓배우기 시작한 어린 학생들이 쓴 것
이 아니다. 국내 굴지의 A그룹 사원연수과정에서 교육생들이 제출한 리
포트에서 발견된 오자들이다. 일류대학 졸업생뿐 아니라 대학원과정까지
마친 사원들이 보인 한자실력에 교육담당자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상상을 초월한 한자를 접할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고 토로했다. 대기
업 B사에서 일어난 일. 한 직원이 이재민 을 나재민 으로 읽었다
. 나재민 은 곧 부서에서 그의 별명이 됐으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타부서 직원들은 그의 이름이 나재민 인 줄로 오해, 그를 자주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특정 기업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
다. 국내 대부분 기업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한자를 엉터리로 쓴 보고서를 받아본 경험은 비일비재하다. 전혀 엉뚱
한 글자를 쓰는 경우도 없지않다. 오자를 일일이 수정해야하는 작업은
번거로울뿐 아니라 그 자체가 낭비다." 대기업인 C사 임원 얘기다.
예의가 중시되는 비즈니스 현장. 그러나 한자로 된 명함을 제대로 읽
지 못하거나 엉뚱하게 발음했다가 첫인상부터 구겨버리고 수준을 의심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명함 뒤편 영문표기를 보고 짐작하는 직원이 적지않
다는게 기업체 종사자들의 말이다.D기업 중간간부는 기자가 상사의 한자
이름을 확인하자 영 을 길 영 대신 "물 수자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위에 점이 있다"고 설명할 정도였다. 이런 현상이 국내에만 한정된다
면 그나마 다행일 수 있다. 이제는 세계2위의 경제대국 일본, 인구
대국 중국, 화교가 상권을 쥐고있는 동남아국가에 이르기까지 한자를 공
유하는 아태지역이 세계경제의 리더로 비상하는 시대다. 그들이 아끼고
가꿔온 한자는 아-태지역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한자를 등한시한 우리는 아-태지역 경제전쟁에서 그 값
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92년말 중국측이 발주한 프로젝트 입찰에서
일본업체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대기업 E사의 경험. 이 회사는 중국
측이 급히 요구한 보충자료를 일본업체보다 번번이 늦게 제출했다가 "왜
당신들은 행동이 느리냐"는 핀잔을 받았다. 원인은 한자 사용여부였
다. 일본업체는 일단 한자를 주로 사용한 자료를 내서 중국측을 급한대
로 만족시켰다. 반면 E사는 영어와 한글 자료만 제출, 중국측에 번역
하는 수고를 안겨주면서 굼뜨다는 인상만 잔뜩 심어주었다. F사 관계
자는 일본의 거래업체 간부들이 한국출장때 공항에 마중나온 젊은 사원들
과는 한자필담이 잘 안된다고 푸념한다고 전했다. 영어대신 한자필담은
상담과정에서 단순히 윤활유 역할뿐아니라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 필담경험이 있는 비즈니스맨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현대정공 김무
일상무는 베트남에서 겪은 경험담을 소개했다. "50대인 베트남측 관계
자는 불어를 했지만 나는 불어가 서툴렀다. 대화가 형식적으로 흐를 때
한자필담을 제의하니까 그는 흔쾌히 응했다. 그후 상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됐다.""중국 복건성출신 화교가 많은 싱가포르에서 현
지채용인을 교육하고 업무를 시킬때 한자가 무척 유용했다. 특히 복건성
은 한자발음도 우리와 비슷해 조직내 친밀감도 향상시킬 수있었다." 삼
성전자 정혜영과장 얘기다.한자는 결코 죽은 문자가 아니다. 우리만
한글전용=나라사랑 이라는 도식에 얽매여 한자를 매장했을뿐이라고 비즈니
스맨들은 안타까워했다. "한자문화권에 속하지않는 사람이 중국에서 느
끼는 언문장벽은 굉장히 심하다. 반면 한자에 익숙한 우리는 친근감을
쉽게 느끼며 그만큼 모험심도 커진다. 그런 친근감은 12억 시장을 뚫
는데 큰 무기가 된다." 한자교육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중소기업 H
사 S사장의 웅변이다. 이거산기자
도 우리 사회가 중요성과 시급성을 깨닫지 못한채 내팽개쳐뒀던 한자교
육. 업무와 비즈니스현장에서 그 큰 구멍을 절감하다못한 대기업들이 "
우리라도 구멍을 메우겠다"고 나섰다.지난 2월초, 현대그룹과 삼성그룹
은 올하반기 대졸 신입사원 채용시험에 한자과목을 포함시킨다고 동시에
발표했다. 이제 최소한 이 두 그룹 입사시험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이라면
한자교재를 뒤적이지 않을 수 없게된 셈이다.현대그룹은 한자시험 추가
뿐 아니라 한자교육 강화도 추진하고있다. 3월부터는 신입사원과 전직급
에 대한 그룹차원 교육과정에 한자과목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계열사별로 곧 직원들의 한자수준 평가시험을 실시하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할 계획이다. 영어시험을 치러 인사고과에 반영하듯
한자실력도 직장내 승진 요건으로 승격된 셈이다.그래서 입사준비생뿐 아
니라 회사원들도 다급해졌다. 학창시절 괄시했던 한자가 비즈니스현장에서
필요하다는 사실을 체감해오다 이제 의무적 기초소양 이라는 발등의
불로 바싹 다가섰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김창수총무부장은 "부서 직
원중 70%가 일일한자학습지를 구독해 한자를 익히고있다"고 말했다.삼
성그룹 럭키금성그룹 대우그룹 기아그룹도 한자교육이 대세라 여기고 방안
을 추진하고 있어서 대기업 샐러리맨들은 뒤늦은 한자바람에 휩싸이게 됐
다.그러나 금호그룹은 진작부터 한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한자교육에 나
섰다. 지난 91년초 박성용회장이 지시한 직후부터다. 금호는 부장이
하 모든 사무직 사원을 대상으로 3단계 교재를 배포, 자율적으로 학습
토록 했다.초급수준인 3단계는 상용한자 1천자, 2단계는 1천4백자,
1단계는 1천8백자 습득을 목표로 설정했다. 기간은 3단계가 3개월
이며 1~2단계는 각 2개월씩.분기별로 실시하는 시험에는, 모든 직원
이 연간 2차례이상 응시해야 인사고과에서 유리한 평가를 받을 수있다.
목표수준에 미달한 사원은 재시험을 치르도록 하고있다.금호는 한자교육
을 정식으로 시키기 전부터 사내 모든 서류에 한자를 많이 사용토록 독
려했다. 대기업들이 이처럼 뒤늦게나마 한자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육
확대와 관련 제도마련에 나선 것은 한자가 지닌 현실적인 힘과 유용성때
문."이미 한자문화권 국가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게 증
대했다. 한국과 이들 나라간 교역량이 증대할 것은 확실하다. 현대그룹
과 이들 국가간 교역량은 35%수준이나 늘어날 전망이다. 한자를 보
다 깊이 이해하고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해졌다." 현대그룹 종합기획실
홍성원이사의 배경설명이다.대기업 한자교육이 단순히 비즈니스목적 때문만
은 아니다. 국가간 경제전 양상을 띠고 있는 국제환경속에서 어문능력은
곧바로 정보수집력이 된다.삼성전자 인사팀 이선상과장은 "우리는 한자
교육을 등한시해 한자문화권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사장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어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한자지식이 충분하면 일
본신문을 웬만큼 해독할 수 있고 일본어 습득도 빠르다는 지적은 한자가
갖고있는 유용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한글전용에 젖어있던 회사측의 무
심한 배려탓에 사원 스스로 한자사용에 앞장서가는 사례도 없지않다.
A사 수출파트 B과장은 회사에서 만들어주는 명함을 아예 쓰지 않는다.
늘 한글과 영문으로만 만들어주기때문이다. 일본담당인 그는 바이어들이
한자명함을 받으면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그는 회사명
함은 제쳐두고 자비로 한자명함을 만들어 쓴다.현대그룹 홍성원이사는 "
이제 한자는 옛사람이 배우던 글자라는 인식에서 탈피해, 일어 불어 독
어처럼 매우 중요한 제2외국어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이제 이들 대기업의 이니셔티브는 재계 전반으로 확산될 전망이며,
사회전체 한자교육체계에도 상당한 파급효과를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
이거산기자
침마다 "하루 한단어" 읽기-쓰기/신사국교 "오늘 배울 한자는 저축
(저축)이에요. 쌓을 저, 저축할 축". 황인주교사(39.여)의 선창
에 50명 학생들이 합창으로 호응한다. "쌓을 저, 저축할 축!"
"이번에는 순서대로 써볼까." 뜻과 음을 익힌 학생들이 칠판에 적힌
순서대로 허공에다 글씨쓰는 시늉을 한다. 학생들의 눈빛이 진지하기만
하다. 다음은 공책에 직접 써볼 차례. 일제히 공책을 펴고 한 자씩
꾹꾹 눌러 쓴다. 공책 1쪽이 채워지자 황교사는 이번 주에 배운 한
자들을 복습시킨다. "바랄 희, 바랄 망" "영화 영, 빛 광" .
서울 은평구 신사국교 5학년8반의 아침 자습시간 모습이다. 어린이들
의 합창은 다른 교실에서도 들려온다. 곽인성교장이 부임한 90년부터
아침 자습시간에 1학년을 제외한 전교생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있기 때
문이다. 곽교장이 낱말을 직접 골라 교재까지 만들었다. 하루에 한 단
어씩 공부하면 2백20개 단어를 익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처음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한자교육은 무리 라는 반대도 있었지만 이제는 학생들
과 학부모들의 호응이 무척 높다"고 곽교장은 말했다. 다른 학교도
가보자. "땅 지, 모 방 지방" "어미 모, 계집 녀" "질문있는데
요. 모 방이라는 모 는 뭐죠 ", " 계집 녀 에 나오는 계집은
뭐예요. 왜 그렇게 이름을 지었죠 ." 봄방학을 며칠 앞둔 지난 16
일 오후1시 서울 종로구 창신국교의 3학년 2반 교실도 한자 배우는
소리로 떠나갈 듯하다. 학습방법은 신사국교와 비슷하다. 따라읽게 한다
음 종이에 따라쓰게 한다. 아이들은 공책에 쓴 한자를 서로 비교하고는
즐거워한다. 수업시간이 끝나도 자리에 앉아 읽기-쓰기를 계속하는 어
린이들도 많다. 창신국교가 여름-겨울 방학을 이용해 서당교실을 개설
한 것은 지난 92년 전한준교장이 부임하면서부터이다. 당초에는 방학때
만 한자공부를 했으나 지난 겨울방학때 학부모들의 반응이 아주 좋아 방
학이 끝난 뒤에도 한자익히기를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8명의 교사들이
자원하여 서당교실에서 훈장노릇 을 열심히 한 결과이다.학부모 조미
자씨(37)는 "6학년에 다니는 동엽이와 3학년 동원이가 방학때 서당
에 다니더니 예절바른 아이가 됐다"며 흐뭇해 한다. 조씨는 "신문에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옥편을 가져다 찾아보는 애들이 대견스럽다"며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다른 과목 공부에도 더욱 흥미를 느끼는 것같다
"고 말했다. 국교 한자교육의 원조는 아무래도 전남 동광양시 광양제
철국교(교장 전권.63)를 꼽아야 할 것이다. 이 학교의 한자교육 역
사는 벌써 9년을 헤아린다. 85년 개교와 동시에 자습시간 한자공부를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국교에서 한자를 가르치려면 교육청의 눈치를 살
펴야 했다. 한글 전용론자인 학부모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은 상태에서
한자교육이 강행됐다. 이 학교에서는 1-2학년은 1년동안 1백80자
, 3-4학년 2백자, 5-6학년은 2백50자씩을 배우게 돼있다. 한
글세대 교사들은 처음 쑥스러워 하며 한자교육에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배우면서 가르치는데 익숙해졌다.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루함
을 주지 않고 흥미를 느껴가며 한자를 배울 수 있는 교재개발을 서두르
고 있다. 한자만 빼곡하게 들어찬 책이 아니라 그림까지 곁들인 그럴듯
한 교재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미 저명한 미술대 교수에게 삽화제작을
의뢰해 놓았다. 전교장은 "내년부터는 정규과목으로 편성, 1년에 34
시간씩 한자를 가르치겠다"고 밝혔다. 이 학교의 한자학습 효과가 알
려지자 다른 학교에서도 교재를 다투어 요청해왔다. 서울, 부산, 대구
등에까지 이 학교의 한자교재가 보급돼 이제 영-호남 지방에선 검인
정을 받지 않은 교과서 가 돼버렸다. 전국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한자
를 가르치는 국민학교수가 얼마나 될까. 아직 공식 통계가 없는 물음이
다. 창신국교의 전한준교장은 전체 국민학교의 80%는 재량껏 한자를
가르치고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강호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