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95편 1-9절
설교제목 : 이상한 시간 앞에서
이상한 요즘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랑과 평화,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세상으로, 혹은 인간의 의식으로 침투해오는 사건이므로, 대단히 낯선 것입니다. 기존의 나의 체제를 전복시켜야만 하고, 자아가 주인인 왕국을 부수고 그리스도가 새로운 왕국의 주인이 되도록 모셔야 때문입니다. 우리 세계는 지금 평화와 희망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내전의 땅들 가운데 주님이 임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내면의 갈등과 불안 가운데도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이상한 요즘입니다. 지난주 스위스 선생님과 분석을 함께 나누면서 이상한, 낯선 때를 보내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조금씩 비워야 하는 때인데, 너무 바쁘시고,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에도, 월드컵의 축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것을 맘껏 즐기는 세상이 낯설기만 하시다고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156명의 젊은 영혼들이 세상을 떠나갔지만, 광화문 광장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월드컵을 즐기고 있는 풍경은 무언가 내심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저녁마다 TV 앞에서 월드컵을 관전하고 난 후에, 잠자기 전에는 무언가 뒷맛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울하고 힘든 사건 속에 계속적으로 매몰되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롭습니다. 그럼에도 가슴 한 켠에 이 이상한 시간에 대하여 이해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력의 첫 시작인 대림절 첫 주를 보내면서, 내 앞에 놓여진 낯선 것을 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자라나기를 소망합니다.
즐거이 부르는 힘
시편 95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찬양하고,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오너라’, ‘오라’를 외치며 초청합니다. “주님께 즐거이 노래하자”고 권유합니다. 1절과 2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즐거이’, ‘즐겁게’입니다. 히브리어로, ‘루아דוצ’입니다. 이는 ‘즐거운 소리를 내다’, ‘개가를 올리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 나와 노래하는 자는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2절의 ‘나아가서’는 문자적으로, ‘앞을 향하여 재촉하며 민첩하게 나아가다’ 혹은 ‘만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민첩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인의 표현은 하나님께 나아와 노래하는 자가 지녀야 할 중대한 마음의 자세를 일러줍니다. 기쁨과 즐거움이란 태도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지치고, 힘겨워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님을 향하여 목소리를 내라는 것입니다. 탄식과 설움이 북받치는 인생 여정에서 마음의 즐거움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의 삶이 고단해도 즐거이 노래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을 경축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금 여기 삶을 즐거이 노래하지 못하면, 내일의 삶도 역시 즐거이 노래할 수 없는 법입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어도 주님 앞에 나아올 때, 마음의 즐거움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반석은 안전하고 확실한 힘을 주는 단단한 바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반석은 기초와 근간이 됨을 뜻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초가 되시어 우리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여전히 힘겨워도 즐거이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과 정신의 기초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을 제공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든든한 기초가 되는 사람은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인생길을 든든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반석이 되시기에 즐거이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이 흔들리고 요동해도 내면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삶을 경축할 수 있는 인생 여정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노래할 이유
시인은 3-6절까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경배해야 하는 이유, 노래해야 하는 이유를 선언합니다. 왜 주님 앞에서 노래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주목해야 할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손’입니다. 주님의 ‘손 안에’, 주님의 ‘손으로’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주권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십니다. 또 다른 말로 이를 ‘섭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나의 인생이 주님의 손으로 창조되었고, 창조되어 가고 있고, 주님의 손 안에서 내 인생이 든든하게 보호받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인간과 과학은 거대증을 앓고 있습니다. 자아의 손으로, 과학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인간의 문명을 움직이려는 팽창 속에 빠져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 손 안에 쥐고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권력충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위대한 자연까지도 인간의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보다 더 큰 위대한 인격과 힘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왜 인간이 보다 높고 위대한 가치에 희생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변하지 않는 진정한 토대인지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금기도 사라졌고,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태도도 사라졌고,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존경과 거리가 사라져, 학생이 교사를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어린 아이를 학대하는 교사도 너무나 많아졌고, 부모를 돈 때문에 죽이는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집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어떤 양심에 거리낌없이 무자비한 행동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못합니다. 예배하는 이들이 자기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선거철의 정치지도자들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의 손에서, 무엇의 손으로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주님의 손 안에서 살아가고, 주님의 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 배후에 하나님의 손이 떠받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하는 아름다운 전경은 7절에서 노래합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가 손수 이끄시는 양떼다(7)”
하나님께서 손수 기르시고 이끄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그분이 기르시고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지신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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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고단하고 복잡하고 힘겨울수록 단순하고 순수하게 이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들으라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생기고, 자신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면 누구든 주저하고 망설이고 후회하며 주춤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그저 맡기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한계상황과 난관에 마주하면 이전의 습성이 올라오고 경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어라”고 외칩니다.
8-11절까지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의 옛 역사를 회상하면서 어리석은 반복을 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므리바에서처럼, 맛사광야에서 있을 때처럼,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아. 너희의 조상들은 그때에,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 (8-9)”
므리바와 맛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사십년을 유리하면서 경험했던 사건의 대표적 전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로 행군하여 수르광야에 있는 마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물이 써서 먹지를 못했습니다. 그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시어 이스라엘의 목마름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샘이 열 두곳이 있고, 종려나무가 일흔그루가 있는 엘림에 도착하여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신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런데 르비딤에 당도하여 물이 없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우리를 왜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다 죽이려고 하느냐고 돌로 쳐서 죽일 정도로 대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때 그들 앞에서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대들었다’, ‘다투었다’ 하여 ‘므리바’라고 칭했고,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하며 시험하였다 하여 그곳 이름을 ‘맛사’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습성을 마음의 완고함이라고 표현했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또 시험하는 것이라 묘사하였습니다. 완고함이란 목이 곧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만하는 모습이며, 경직되고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인생 여정에서 목이 뻣뻣하게 있으면 스스로 교만에 빠집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기보다 모든 것을 타인으로 잘못으로 환원시키며 투사해버립니다. 오늘날 인간의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목이 다 뻣뻣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겸손히 살피지도 못하고 자신의 주장과 감정을 드러내기 바쁩니다. 그리고 자꾸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가보다’, ‘내 인생과 계획에 대해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합니다.’ 길을 들어서기 전까지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길을 들어선 자의 의심은 이제 나의 대한 의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운명에 대한 의심하는 것이기에 그 시험 길을 결코 길을 완수할 수도 없고, 그 길에서 배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외칩니다. 40년 세월 동안 하나님은 싫증이 나셨고, 깨닫지 못했다고 책망하십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의 최종목적지인 가나안 땅, 하나님의 주시는 평화와 안녕, 쉼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길을 가는 자, 여정에 들어선 자는 마음의 완고함, 뻣뻣함을 깨부수어, 부드럽고 단순하게 한 발 한 발을 디뎌야 합니다. 길을 가는 자는 자신보다 위대한 힘에 나를 맡기고 신뢰함으로 곡진하게 길을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단해도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시니 즐거이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손으로 이끄시는 인생이기에 주님과의 신뢰 속에 길을 갔으면 좋겠습니다. 뻣뻣한 목을 부드럽게 하고, 겸손하고 단순하게 내가 가는 길 위에서 불어닥치는 환경의 난관, 내 마음의 불안을 잠재우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