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나이테를 그리면서 / 이태호
“올해는 욕심을 조금 더 많이 덜어내야겠다.”
매년, 새해 새날 새 일기장에 쓰는 첫 문장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덜어낼 목록 중 가장 먼저 실천할 것은 재물 나눔과 노력 봉사다. 봉사는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며 영역 또한 넓다. 재물은 처지와 걸맞아야 한다. 자칫하면 나눔의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물 나눔이 중요하다. 아내와 나는 매월 두어 곳씩 처지와 형편이 딱한 아동들을 위하여 후원한다. 금액이야 내세울 것도 없다. 하지만 적은 금원이라도 꾸준할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시작 전에 마음의 준비운동과 다짐이 필요하다. 그것은 물욕을 다스리는 자신에 대한 성찰일 수도 있다.
우선 후원금을 늘릴 것인지, 아니면 작년기준으로 동결할 것인지 결정한다. 다음으로는 소장품(所藏品) 목록을 작성했다. 누가 보아도 손색없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 누구에게 어떤 것을 줄 것인가, 주관적으로 결정한다. 물론‘비움’의 절대정의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아끼던 물건을 받을 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옛말에도 임자가 따로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보자. 한시(漢詩) 작품을 ‘가’라는 사람에게 준다고 치자. 그분은 한시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서화나 동서양화, 여행 중에 사들였던 공산품들도 같은 기준이다. 물론 서책이나 스포츠용품, 공구, 옷가지도 포함된다.
아끼던 물건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특히 도자기나 액자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마냥 껴안고 있다는 것 또한 쓸데없는 욕심이다. 어떤 지인처럼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무료 전시할만한 고가의 품목들은 아니다. 집안에 한두 점 걸어놓거나 앉혀놓고 감상할만한 문필가와 장인(匠人)들의 작품들이다.
서예는 두 점만 남기고 모두 포장했다. 나보다 더 좋아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다. 두 점 중 하나는 먼저 간 막냇동생이 예서체로 쓴 천국소망에 대한 찬송가‘저 높은 곳을 향하여’다. 아우는 개신교 장로였다. 액자를 건네주며 밝게 웃던 생전 모습이 떠올랐다. 나머지 하나는 선친께서 물려주신 해서체로 쓴 칠언 한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으레 액자에 담긴 글을 읽고 그 뜻을 암송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시대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칠언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당시 선친께서 해석해 주신 내용을 요약해 본다. 忠孝是吾家之寶(충효시오가지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께 효도하는 것은 인간이 행해야 할 덕목이다 이 말씀을 집안의 보배로 알라.’ 詩書是士家良田(시서시사가양전) ‘시와 글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은 삶의 씨앗을 건강하게 발아시키는 훌륭한 밭이다.’
“여보,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는데 벌써 옮기세요?”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는 나의 행동이 마땅치 않아서다. 매년 연말연시가 되면 안방부터 시작하여 건넛방, 부엌, 심지어는 창고까지 홀까닥 뒤집어 놓는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나누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면 가구의 위치는 물론 책상과 책장, 벽에 부착한 물건들도 변동이 있다. 그런 부산함을 함께 감당해야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실이나 가시오. 혼자 슬슬 할 테니.”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셸리의 시구를 중얼거리면서 아내의 관심을 분산시켰다.
가로로 된 액자는 책상 앞에 걸었다. 한시가 담긴 길쭉한 액자는 왼쪽에 서 있는 책장과 높낮이를 맞췄다. 오른쪽 벽에는 울긋불긋 낙서로 분칠 한 세계전도가 있다. 낙향할 때 떼어온 것이다. 녀석의 나이도 제법이다. 이참에 그것도 떼어냈다. 그 자리에는 큼직하게 제작된 스크린 세계전도가 대신할 것이다. 전에 있던 지도 위에 박혀있던 빨강과 파랑 색깔의 압정도 뺐다. 빨간색은 이미 밟은 땅이란 표식이고, 파란색은 가보고 싶은 미지의 땅을 뜻하는 기호인 셈이다.
유엔에 가입한 국가가 193개국으로 알고 있다. 등록이 안 된 바티칸시와 대만을 포함하면 195개국인가? 여하튼 빨간색 압정들이 6대주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꽂혀있다. 어떤 나라에는 세 개가 겹쳐서 꽂히기도 했다. 아마도 두 번째까지는 젊었던 시절 출장차 다녀온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수박 겉핥기식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세 번째는 출장도, 관광도 아닌 그야말로 진짜배기 여행이었을 것이다.
파란색 압정을 새로운 세계전도에 옮겨 꼽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젠 저 땅은 안 될 것 같은데…….”우려하게 된 동기는 지난해 베트남여행에서다. 패키지는 처음이라서 그런지 자유 제한이 불편했다. 모든 일정과 행동은 일행과 함께 움직여야 했다. 다른 곳을 가보고 싶거나 마음대로 쉴 수도 없다. 그렇다고 버스를 지키고 앉아있을 수도 없다. 일탈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힘에 부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지여행을 선호했고 실천으로 옮겼었다. 격세지감마저 들었다. 100세 시대라든지 인생은 칠십부터라는 말을 누군들 싫어할까. 하지만 여과 없이 믿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 또한 나는 안다.
또래 중에는 새롭게 집을 짓거나 넓히고 집들이 명분으로 초대한다. 그런가 하면, 회사를 확장하는데 온 정성을 쏟는다. 어디 그뿐인가. 얼굴에 칼을 대어 심술보나 주름을 제거한다나? 얼른 보기에는 100세 시대에 걸맞은 자기 관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그들을 탓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박수를 치거나 따라 하지도 않는다. 다만 마음속에 저장된 전도자의 말씀을 떠올렸다. ‘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
3월이면 내 인생의 그루터기에 또 하나의 나이테가 그려질 것이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이 옳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문득 버나드 쇼의 묘비명의 문구가 생각났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교회에서 받은 2025년 새해, 새달 첫 장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무한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결정이며 우리를 변화사키는 힘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우선시하는 마음입니다.’(C.S 루이스)
이미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기록된 말씀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2025년 나이테는 보다 올곧게 그려지길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을 둘러보는 시간에 인색하지 말아야겠다. 그러다보면, 사랑의 명패가 보다 선명해질 것 같다.
*주해
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 :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첫댓글 새해에 좋은 글귀를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먹을 갈아 習字해 보아도 좋은 문구입니다.
음미하면서 붓펜으로 써보니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忠孝是吾家之寶 詩書是士家良田
감사합니다. 윤승원 선생님의 書體는 힘지면서 부드러운 정직이 스며 있습니다. 요즘 저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문인화를 배우고 있답니다. 우리 수필문학 발전을 위하여 솔선수범 하시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습니다. 언제나 맑은 마음으로 건강하시기를 희망합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쌓이는 나이테가 뿌듯한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들여다보기가 두렵습니다. 생각이 많은 선생님의 하루를 그려봅니다. 저 또한 공감하면서요~
오늘은 부디 행복한 날로 기억되시길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네, 회장님! 나이가 들수록 잘못 산 사안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요즘은 아내의 병원 건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압니다.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건강챙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