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남한산성을 찾았었다. 아픈 역사의 상처를 숨긴 채, 잘 정비된 성곽은 반듯하고 행궁은 소담하고 단아하다. 평일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서문 성곽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전경이 일품이었다.
1636년 병자년 12월 2일,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하여 조선으로 진격했다. 그해 12월 9일 압록강을 넘은 전봉장 마부태 부대는 의주 백마산성, 영변 철옹성, 안주성, 황주 정방산성 등을 우회해서 10여 일 만에 한양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강화도로의 몽진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청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栐)이 근왕군(勤王軍)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1637년 1월 28일 쌍령 일대에서 3천여 청군과 맞부딪쳐 싸웠으나, 4만(실제 약 8천 명으로 추정)의 아군이 전멸하다시피 크게 패했다.
경기도 광주시에는 '국수봉(國守峯)'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여섯 개가 있다. 그 이름에는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출하고 나라를 보존하고자 했던 간절한 염원과 전투에서 패한 원통함이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척면 진우리, 광주시 쌍령동, 초월읍 지월리에 각각 자리한 국수봉에 이어, 광주시 중대동에 자리한 국수봉을 찾아보기로 했다. 중대동 국수봉은 텃골마을을 소쿠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봉우리 중 하나로, 여섯 개의 국수봉 가운데 남한산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다. 성남에서 출발해서 경충대로를 따라 갈마터널을 지나면 이내 텃골마을에 닿는다.
오늘 산행은 텃골마을 입구의 좌측 능선 가장자리에서 출발하여 오른쪽 능선으로 내려서는 코스다. 산록 비탈로 들어서니, 산줄기 가장자리 한편에 일군 밭에 채소들이 무성하고, 능선 한편에는 광릉(廣陵; 廣州) 안 씨(安氏) 묘소가 자리하여 텃골마을이 광릉 안 씨의 세거지 임을 새삼 알려준다.
느린 경사의 능선 좌우는 쭉쭉 뻗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진 성긴 숲이다. 능선의 중턱쯤 올라서니 좌우로 삼동과 텃골 마을의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오르니, 경충국도 너머 중대 물빛공원과 태전동을 비롯한 정광산과 태화산까지 전망이 펼쳐진다.
능선 동서 편에 자리한 동네의 경계를 나누듯 키 높이 철조망이 철문을 열어둔 채 기다린다. 철조망을 따라 200여 미터 평탄한 능선길, 돌멩이 하나도 없는 흙길을 누군가 빗자루로 쓸어 놓은 듯 낙엽이 양쪽 가장자리로 치워져 있다.
신발을 벗으라고 자꾸만 채근하는 듯한 고운 흙길의 성화를 못 이겨, 신발과 양말을 벗고 모델이 런웨이 하듯 흙길 끝과 반대편 끝 쪽을 서너 번 오갔다. 봄바람에 불길 번지듯 퍼지는 '어씽(Earthing)' 열풍과 기적처럼 놀라운 그 효능에 대해 익히 듣고 시도도 해 보았던 터였다.
능선 위쪽의 열려 있는 철문으로 나서니, 아름드리 참나무 군락이 바닥에 적갈색 톤의 낙엽 주단을 깔아 놓은 능선길이 기다린다.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 이름 모를 텃새들의 지저귐, 능선 좌측 골프장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굿샷 소리,... 반 시간여를 맨발로 낙엽을 밟으며 걷다가, 널찍하고 평탄한 능선의 쓰러진 고목 나무등걸에 걸터앉아, 발에 묻은 흙을 털고 양말과 신발을 신었다.
평탄한 능선길이 다하자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묘소 위쪽 능선 마루로 가파른 비탈을 짧게 내놓는다. 고도 311미터 능선마루로 올라서니, 왼편 골프장의 필드가 능선 마루까지 치고 들어와 앉아 있다. 그린 옆 능선 가장자리 우측으로 난 등로를 지나자니, 깃대가 꽂힌 홀을 향한 한 골퍼의 신중한 퍼팅에 뒤이어, 동료들과 한목소리로 탄식이 이어진다. 아스팔트 카트 길과 단정한 잔디가 그림처럼 어우러진 골프코스가 한동안 등로를 따라오다가 멀어진다.
골을 타고 능선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무심한 듯 활엽수의 조락한 잎사귀를 흔들어댄다. 능선 아래 200여 미터 지점에 자리한 안정복의 묘를 들러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곧이어 올라선 해발 350여 미터 능선 봉우리 위에는 배수지(配水池)로 보이는 시설이 자리한다. 그 능선의 갈림길에 선 이정표가 이 봉우리가 '사기막골 정상'이라고 알린다. 좌측은 탄벌동, 우측은 국수봉을 거쳐 텃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사기막골 봉우리에서 국수봉으로 내려가는 호젓한 능선 등로는 온통 낙엽으로 덮였고, 숲도 가을빛 향연을 펼치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도 있듯이, 지척에 이렇게 좋은 산이 있다는 것도 관심이 없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양손에 스틱을 잡은 노년의 여성 한 분이 국수봉 쪽에서 능선을 올라오고 있다. 마스크를 꼈지만, 병색이 엿보이는 그녀는 "산이 너무 좋네요"라는 내 말에 맞장구를 치고, 느리지만 쉬지 않고 찬찬히 스틱을 짚으며 능선을 오른다.
해발 350여 미터 사기막골 정상에서 천천히 고도를 낮추어 가던 능선은, 해발 270여 미터에 나무 벤치 두 개가 놓인 국수봉에서 한 번 멈춰 서며, 전후좌우로 능선 줄기를 내놓는다. 앞쪽으로 경안천 상류 쪽으로 펼쳐진 조망으로 인해, 사기막골 정상보다 고도가 낮은 이곳을 국수봉이라 이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국수봉 일대 능선은 여러 방면으로 능선이 펼쳐져 있고, 목현동 너머 북쪽으로 남한산성을 바라다보고 있어, 남한산성을 에워싼 청군에게는 위협적인 군사 요충지였을 것이다.
국수봉에서 텃돌 마을 좌측으로 내려앉는 능선은 평탄하지만, 좌우로는 깎아지른 듯 경사가 가파르기 그지없다. 평탄한 능선은 사각 정자 하나, 그리고 텃골과 탄벌동 갈림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내놓는다. 지나온 능선 여러 봉우리가 텃골 마을로 수렴하듯 정기를 품고 내리뻗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초입으로 내려앉는 산줄기 대신 마을 한가운데 이택재(麗澤齋) 부근으로 내려가는 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산줄기가 마을에 닿으며 멈춰 선 곳에 사다리처럼 높고 긴 철계단이 마을로 세워져 있다. 가을빛으로 물든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옹위하듯 서 있는 이택재로 내려섰다. 이택재는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안정복이 서재 건물로, 1761년 창건한 건물로 후학을 양성하며 강학하던 장소이다.
마을 뒤쪽 가파르고 좁을 골을 따라 순암의 묘소로 향했다. 마을에 서 있는 이정표가 500미터라고 알렸지만, 비탈길과 계단 길을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야 하는 만만찮은 길이다. 이렇듯 가파르고 좁은 골 위에 묘를 쓸만한 자리가 있을까, 하던 의문이 계단이 끝나면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산줄기 팔부 능선쯤에 자리한 너른 묘역을 어깨높이 담장이 둘러섰고, 그 뒤로 국수봉 산군 능선이 외성처럼 둘러서서 옹위하고 있다. 앞쪽으로는 가까이 영장산과 문형산이 거느린 작은 산군 너머로 백마산에서 태화산까지 길게 뻗은 능선과, 향수산 등 용인의 경계까지 시야가 거칠 것 없이 아득히 멀리 뻗쳐 간다.
묘소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수많은 시비(詩碑)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며 숭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을 산의 품에 안겨 정취를 느끼며 어씽을 하고, 고인의 삶도 반추해 본 한나절이었다.
순암 선생은 저술로 평생을 보내셨고,
성호 선생을 사사하여 도덕이 밝았도다.
어린 나이에 능문하니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만년에 출사하여 정직하고 청렴 하였도다.
사서를 개찬함은 나라를 걱정한 일이요, 실학의 전승은 세상을 도우려 한 정성 일세. 수많은 책을 지어 남기니 참으로 귀한 보배라. 천추에 선생 찬양은 그칠 날이 없으리.
*순암 안정복 선생 탄신 300주년기념 전국 한시 공모전 장원시 _車月變
<이택재(麗澤齋)> _전양우
오로지 국가를 푯대삼아
부정을 피하여 좋은 것만 보고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라
몸을 갈고 닦는 것이 애국의 시작이니
미로에도 오로지 성실하고
사철 요란한 꽂에도 흔들림 없다.
산새 더불어 일어나서
벼익는 소리 어울려 글을 쓰고
베옷 그림자 서성이는 그늘
삽살이 낮잠 자고
맑은 물소리 화운 和韻한다
벼슬 높은 장닭 두릿두릿하는데
섬돌 위에 놓인 태사혜(太史鞋) 한 쌍
책 읽는 소리 풍경같다.
*제3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대상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