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0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6,30-35)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hunger, and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thirst."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가 최고 의회에서 긴 설교를 끝내자,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격분하여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 돌로 쳐 죽인다. 스테파노는 순교하면서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죄를 묻지 말아 달라고 기도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은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게 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구원의 양식이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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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열매 하나를 먹는 것은 세상을 먹는 것이다. 그 씨앗을 먹고, 땅에 묻히는 그 죽음을 먹고 열매를 키워 준 흙을 먹고, 바람을 먹고, 태양을 먹고, 비를 먹고, 나무를 먹고, 농부의 땀을 먹고, 어머니의 손길을 먹고 그 열매의 역사를 먹는다. 오늘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그분 전체를 먹는 것이다. 그분의 유아기를 먹고, 유년기를 먹고, 청년기를 먹고, 공생활의 온갖 고뇌와 고통, 기쁨, 인생의 비바람을 먹고,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먹는 것이다. 그분 생의 완전한 일체이셨던 그 어머니 마리아께서도 내 몸과 영의 한 자락이 되시는 것이다. 이 거룩한 먹음의 행위를 나는 매일 치르고 있으니 내 안에 온 세상과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어느 수녀님의 묵상 글입니다. 수도 생활을 하면서 하루하루 꼬박 세 끼 밥을 먹는 것, 날마다 성체를 모시며 사는 피할 수 없는 일상을 묵상하며, 이 모든 먹는 행위 안에서 자연의 섭리와 하나 되고 주님과 하나 된다는 깨달음을 고백한 것이지요. 우리는 매일 미사에서 성체를 모시며 살고 있습니다. 작은 빵 조각에 담긴 비와 바람과 햇볕과 농부의 수고가 주님의 몸이 되어 우리 안에 오는 것입니다. 온 우주가 주님의 몸으로 수렴된 성체를 통하여 우리 자신도 우주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몸이 다시 비와 바람과 햇볕과 농부의 땀방울로 흩어져, 온 우주와 인류로 확산됩니다. 온 우주가 한 조각의 빵을 통하여 주님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만유일체(萬有一體)가 ‘주님의 빵’이 되어 호흡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신 이 말씀,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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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부심을 갖고 대답합니다. 만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조상들이 사막을 떠돌 때, 하늘이 내려 준 음식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그 ‘만나’라고 하십니다. 기적의 양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유다인들의 자부심을 건너뛰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빵은 ‘생명의 이유’입니다. ‘왜 사는지’에 대한 답변입니다. 주님 안에서 ‘삶의 원인’을 찾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진정 우리는 어찌하여 삶을 이어 가고 있는지요? 분명한 답들 가운데 하나는 ‘가족’입니다. 해석이 힘들다면 달리 질문하면 됩니다. 왜 ‘죽지 못하는지’ 되물어 보는 겁니다. 가족이 걸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당신 안에서 ‘삶의 에너지’를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 역시 ‘인생의 사막’을 떠돌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언제까지 참아야 할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매일매일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만나’가 그립습니다. 은총의 이끄심에 기대를 겁니다. 희망을 안고 있으면 결국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서 오아시스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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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가장 강한 짐승은 낙타입니다. 다른 동물은 강렬한 태양 아래서 맥을 못 추지만 낙타는 견디어 냅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물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많은 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느 동물과 비슷한 양의 물입니다. 하지만 낙타는 자신의 내부에 물이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기억합니다. 그 기억이 희망이 되어 사막의 뜨거움을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강한 식물은 선인장입니다. 줄기는 최대한 물을 머금어야 했기에 뚱뚱해졌습니다. 잎은 최소한의 물로써 버티어야 했기에 가늘어졌습니다. 선인장의 가시는 잎이 퇴화된 것이라고 합니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은 이렇게 모양새마저 바꾸었습니다. 그러기에 선인장 꽃은 슬픔을 간직한 화려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생명의 에너지가 있음을 설파하십니다. 인생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려면 당신께 오라는 말씀입니다. 낙타는 오아시스를 만나면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 다시 물을 채웁니다. ‘물은 곧 희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낙타의 지혜를 생각해 봅니다. 희망의 주님께서 생명의 빵으로 오신 이유를 묵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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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가 성하면 영혼도 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는 육체만 건강하면 영혼은 자동적으로 건강해지는 줄로 생각합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표어를 너무 많이 들어 온 탓입니다. 이 외침의 본래 의미는 육체와 함께 정신(영혼)도 건전해지자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를 위한 노력은 별개의 것입니다. 육체에 쏟는 정성의 절반만 영혼에 쏟더라도 얼마나 강인한 영혼이 될는지요. 육체는 건강미가 넘치지만,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문제입니다. 당연히 반응이 나타납니다. 삶이 허무하고 까닭 없는 불안이 떠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원인을 모릅니다. 영적 갈증인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지요. 어디로 가겠습니까? 본능의 충족이 탈출구가 되기 쉽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욕과 식욕과 소유욕을 좇는 불나비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갈증을 없앨 오아시스는 당신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사막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힘을 받아야 건강한 영혼이 될 수 있습니다. 본능을 조절하는 절제를 지닐 수 있습니다.
어제 읽은 책에서 재미있는 질문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했던 질문이라고 하는데요. 여러분들에게도 이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재벌 총수, 권력자, 유명 인사에게 그 자리를 내놓고 스무 살 젊은이와 인생을 바꾸자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들이라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재벌 총수, 권력자, 유명 인사라면 평생에 걸쳐 힘들게 얻은 그 자리를 내놓고 스무 살 젊은이와 인생을 바꾸겠습니까? 사실 부와 명예만을 쫓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되지요. 따라서 부와 명예를 버리고 젊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지금까지 힘들게 일했을지라도 이 성공한 사람들은 백이면 백 모두 젊음과 기꺼이 바꾸겠다는 말을 한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부분 더 큰 꿈을 꾸고, 더 크게 도전하고, 더 크게 이루고 싶은 열정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지금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만으로는 이러한 열정을 절대로 채워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열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열정이야말로 우리를 진정한 성공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긴 학창시절에 별 볼 일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친구가 지금은 성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왜 그때와 다른 모습일까를 생각하면 바로 ‘열정’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 역시 이 열정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열정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열정을 갖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이 바로 주님 부활이라는 커다란 영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열정이 담긴 말씀을 해주십니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생명의 빵임을 천명하시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들의 믿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혹시 미지근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즉, 세상일을 다한 뒤에야 믿겠다는 마음, 남들의 눈치나 보면서 하는 행동들, 죄에 대해서 너무나도 관대한 모습, 받는 것에는 익숙하고 주는 것에는 전혀 관심 없는 욕심…….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지금 당장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그때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통해 영원히 배고프지 또 목마르지도 않는 참된 표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충분한 재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언제나 부족한 것이다(묵자).
일치의 단계
-김현 신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 하느님께서는 단 하루도 어김없이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매일의 미사성제 안에서 하느님은 사제의 손에 당신을 온전히 맡기십니다. 그 어떤 미련이나 아쉬움 없이 사제의 손 안에서 쪼개지고 음식이 되십니다. 사랑하니까 일치하고 싶어서. 그게 다입니다. 나와 일치하고 싶은 하느님은 그저 막연히 그것을 원한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선 내려오십니다. 낮은 곳으로. 그래야만 죄인인 저를 만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은 작아지십니다. 당신의 모습 그대로라면 저와 일치할 수 없습니다. 몸집을 줄여 가벼워지는 것. 작아지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또 있습니다. 부서지고 잘게 쪼개어져 음식이 되는 것. 사랑하는 이와의 일치를 원하는 그 갈망은 ‘내려오는 것’ ‘작아지는 것’ ‘음식이 되어 흡수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일치를 위한 단계인지도 모릅니다. 일치를 위해선 이렇게 하느님의 시범처럼 ‘부서지고 낮추어져야’만 합니다. 제대는 봉헌물이 거룩하게 변화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장소와 상황이 제대가 되어야 합니다. 자꾸만 실망과 불평의 말들이 튀어나오는 거기, 볼품없는 제물이 놓인 곳으로 주인께서 찾아오십니다. 일치하고픈 갈망으로, 내려오시어 작아지셔서 음식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정녕 하느님 손안에 있는 사람은 슬퍼할 수 없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일상생활이 바쁘다고
- 김복순 수녀-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상큼한 아침에 눈을 뜸과 동시에 바치는 짧은 기도로 긴 하루가 시작됩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인 것 같아도 어제와 오늘이 같을 수 없음을 체험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과 물음은 삶의 활력이기도 하고 새로운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몸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먼저 배고픔을 해결합니다. 기본적인 에너지를 보충함으로써 불편 없이 움직이고 힘을 씁니다. 바쁘다고 며칠씩 식사를 거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 열심히 일하며 흘리는 땀방울과 시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도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지 잠시 되돌아봅니다. 세상일에 바쁘게 쫓기면서 신앙생활은 뒤로하고 안위와 편리함을 추구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영적인 부분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함께할 때 더 힘을 얻고 내면의 풍요로움이 느껴져 공허함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일상생활이 바쁘다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생활이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으로 순간순간마다 초대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날마다 우리 삶을 봉헌합시다.
우상화, 사유화, 권력화에 대한 반성
-김찬선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모세는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까요? 하늘에서 참된 빵을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모세는 없어도 그만인 사람일까요?
원칙적으로 보면 하느님께서 주시니 모세는 없어도 그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직접 빵을 주실까요? 만나를 가지고 얘기 한다면 누구 손을 빌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만나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얘기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다 사람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지요.
구약의 많은 얘기들은 이런 상징들을 담고 있습니다. 물이 없어 백성들이 불평을 하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바위를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바위에서 물이 나옵니다. 여기서 바위는 물이 전혀,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바위는 불가능한 것을 가지고도 하느님은 가능케 하심을 강조하고 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차용한 상징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힘으로 아기를 낳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돌계집에게서 예언자들이 태어남을 얘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필요합니다. 아니,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의 전달자, 그것도 충실하고 공정한 전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가끔 보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그걸 전달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에 묘한 관계가 형성됨을 봅니다. 전달하는 사람이 마치 자기 것을 주는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받는 사람도 마치 그가 주는 것처럼 그에게 굽실거립니다. 전달하는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정하게 나눠주지 않고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받는 사람에게 잘 전달되기 위해서는 전달하는 사람이 겸손하고 충실한 집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받는 사람도 잘 알아야 합니다. 주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너무도 잘 그리고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언에서 주님께서 모든 좋은 것을 주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몇몇 형제들을 주신 후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그의 전기를 보면 프란치스코는 성녀 글라라와 실베스텔 형제를 통해 하느님 뜻을 계시 받았습니다.
반성을 해봅니다. 나는 하느님이 주신 것을 전달하는 사람을 우상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사유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자주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내 것인 양 사람들에게 나눠줌으로 나를 권력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느님의 생명
- 전진 신부-
몇 년 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고, 다시금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식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꼴입니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7000만 명이 심각한 영양실조입니다. 현재 아프리카 전 인구의 36퍼센트가 굶주리고 있습니다. 부유한 나라들은 곡식이 남아도 가격 조정을 위해 그것을 폐기처분합니다. 그리고 멀쩡한 소를 도살하기도 합니다.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랍니다. 시장경제 논리에 따라 인간의 존엄 가치는 무시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아버지의 뜻은 내 안에 있는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의 생명을 몸소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과 사랑을 온전히 나눌 수 있길 바랍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기본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어제는 금강 곰나루에서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고 돌아왔습니다. 전국각지에서 오신 신부님들과 수녀님, 그리고 교우들 포함해서 한 3,000여명이 함께 했었지요. 하지만 기쁨의 미사가 되어야 하건만, 마음은 그렇게 좋지가 않았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자연이 파괴되고 있음을 직접 현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공사가 기득권에서는 4대강을 살리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4대강 살리기가 아니라,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더욱 더 살리기 위한 사업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시급한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정말로 이 땅의 소외받고 아파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문제의 해결보다는 눈에 보이는 업적 위주의 사업만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솔직히 걱정보다도 겁이 납니다. 지금의 이런 모습이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일까? 하느님 보시기에 좋게 창조된 이 땅을 엉망진창으로 인간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에 겁이 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한 번 다녀오려면 긴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내려간 뒤에는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넙니다. 그리고는 4~50분을 걸어가야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날 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강에 다리가 생겼고, 도로가 생겨서 편하고 쉽게 시골까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편하게 갈 수 있으니까 지금이 훨씬 좋을까요? 좋은 면도 있지만 그리운 때는 배를 타고 힘들게 걸어갔던 그 시절입니다.
편한 것이 그리고 화려한 것이 결코 우리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불편함이 그리고 꾸며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우리를 더 만족시킬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종종 착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가득 넘쳐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 편한 데로 자기 뜻 데로만 하려는 이기심과 욕심 안에서 주님의 자리는 사라지며 동시에 우리의 행복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아버지 하느님만이 우리의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칠 수 있도록, 그래서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마음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평범함이고,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 창의력이다(찰스 밍거스).
하늘에서 내려온 빵
-오민환-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시는데, 유다인들은 계속 예수님의 손가락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달을 언제나 볼 수 있을는지요. 계속 표징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조상은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 만나를 먹었다고 우쭐댑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들의 몰이해를 수정해주십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 아니요, 모세가 내려준 것도 아니라고 말이지요.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빵은 생명의 빵이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 참된 빵을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청중의 반응은 사마리아 여인과 다를 바 없이 조급합니다(요한 4,7-15). 여인이 영원한 생명수에 대한 말씀을 듣자 바로 그 물을 원하듯, 그들도 기적과도 같은 생명의 빵 말씀을 듣자마자 바로 “늘” 그 빵을 달라고 청합니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오직 당신께서만 사람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참되고 의미 있는 삶으로 채워주실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청중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예수님)을 거부하고, 현세적인 욕구만을 채우려 합니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으로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늘에서 무엇이 내리기를 바라십니까?
생명의 양식
-전삼용신부-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도쿄 올림픽을 위해 집을 헐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뜯어내고 있을 때 도마뱀 한 마리가 몸 안쪽에 못이 박힌 채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부들이 희한하게 생각되어 주인을 불러 도마뱀을 보여주었습니다. 집 주인은 그 도마뱀은 3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잡아서 그렇게 못을 박아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는 것이 신기해서 모두 잠시 그 도마뱀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도마뱀 하나가 그 도마뱀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문이 풀렸습니다. 3년 동안 벽에 못 박혀 있는 도마뱀을 위해 다른 도마뱀이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잠깐이나 영적인 죽음은 영원히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영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안전하고 흠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1테살 5,28)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것처럼 인간도 당신 모상대로 삼위일체로 만드신 것입니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와 같습니다. 영혼은 인간이 만들어질 때 하느님께서 육체 안에 넣어주신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영혼은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하느님을 항상 그리워합니다.
‘육체’는 성자 예수님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육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계시해줍니다. 누가 화내는 모습을 보면 육체가 화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영혼이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영’은 성령님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전달자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가시며 두 분을 하나로 이어주십니다.
인간의 영은 마치 자동차의 기름통처럼 텅 빈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성령님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마치 기름이 없는 자동차처럼 영혼은 죽게 됩니다. 즉, 영혼과 육체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육체는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 안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물로 인간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즉, 피로 죄를 씻고 물, 즉 성령님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피와 물, 이것이 바로 성체고 성경말씀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아 자신 안에 영을 채우게 되어 영혼이 원하는 것을 육체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령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못 박혀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 신세입니다. 누군가가 음식을 날라다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음식을 날라다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와 가르침을 통하여 매일매일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삽니다.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고 목이 마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닷물이 많아도 그 물로는 해갈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바다의 짠물로 해갈을 풀려고 하면 더욱 더 영혼은 메말라가고 죽어갑니다. 즉, 생명의 양식을 찾지 않고 육체의 만족만 찾으며 영혼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바로 영혼의 기본적인 욕구, 즉 사랑과 행복입니다.
영혼은 죄로 잃었던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이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에덴동산의 풍요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육체를 채울지 영을 채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짧은 묵상>>
다른 물고기와는 달리 상어는 피의 냄새를 수km 밖에서도 맡는다고 합니다. 물론 하이에나의 코는 썩는 고기냄새를 누구보다 더 잘 맡습니다. 또 독수리의 눈보다 더 날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동물은 자신들의 생존 본능에 의해 먹이를 찾거나 혹은 천적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각자 필요한 부분을 진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해 바라는 대로 진화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줍니다.
이것은 동물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천사의 두 본능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본능과 영적인 본능입니다. 두 부분 모두 자신의 본능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개인 안에서도 갈등이 일어납니다.
“나는 사랑하고 싶다.”라고 할 때 그 사랑이 동물적인 혹은 육체적인 사랑일 수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사랑일 수 있습니다.
“나는 기쁘고 싶다.”라고 할 때도 그것이 육체적으로 웃기를 원하는 것일 수 있고, 영적으로 구원된 이의 기쁨을 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실 때, 육체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이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는가?’하며 떠나갈 것이고, 영적인 사람들은 이 말씀이, ‘내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면 영원히 영적으로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육체적인 사람은 절대 영적인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변한 사람은, 어떤 수녀님의 경우처럼 12년 동안이나 성체만 영하며 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라고 하실 때, 그 배고픔과 목마름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진리와 사랑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먼저 육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 분을 ‘갈망’하지도 못하거나 갈망하는 것이 육체적인 갈망에 갇혀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찾으려고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본성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동물들처럼 자신을 진화시켜야합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바라서 자신의 바라는 부분을 진화시켰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열절이 갈망하면 그 부분이 진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갈망하는 부분이 진화되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부분을 진화시키고 있습니까? 정말 내 영혼이 진화되도록 그리스도를 배고파하며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진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권력과 돈, 쾌락을 원하여 이상한 모양으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마지막 미사>
이른 아침 새벽시장에서 일하시는 한 형제분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여그 펄떡펄떡 뛰는 숭어 쪼까 있는데, 얼릉 오씨요. 찌개해서 아그들하고 드시면 좋을꺼요!"
그 형제님의 따뜻한 마음이 오늘 제 아침을 훈훈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쁘고 고된 와중에도 틈만 나면 뭔가 나눠주지 못해 안달이 난 그 형제님의 천사 같은 마음이 참으로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영원한 생명의 잔치-매일의 미사가 지닌 핵심적인 의미는 "나눔"입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눌게 없는데..."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크게 그릇된 생각입니다. 아무리 비참하고 열악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뭔가 나눌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꼼짝없이 휠체어에 앉아서 지내는 한 형제가 많은 것을 나누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간병인들에게 늘 환하게 미소짓는 일, 작은 친절에도 정성껏 감사의 인사를 하는 모습, 이웃의 하루를 축복해주는 기도, 고통 중에도 하느님께 신뢰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모습들은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나눔이자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요셉 과드리오 신부님(1921-1963, 이탈리아 태생, 살레시오회 사제)께서 갓 서품된 한 후배사제에게 선물로 주신 "다섯 가지 권고" 가운데 "매일의 미사" 부분을 소개해드립니다. 오늘 하루 영적인 양식으로 삼으시기 충분한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에게.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미사는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부디 그대가 봉헌하는 미사가 입술만으로 봉헌되는 미사가 아니라 진지하게 음미하는 미사, 무엇보다도 삶 한가운데서 생활화되는 미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절대 잊지 마십시오. 가장 훌륭한 미사는 가장 잘 준비된 미사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그대가 집전하는 미사는 그대 생애 안에 유일한 미사, 최초이자 최후의 미사처럼 여기십시오.
그대의 모든 미사가 성전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대의 삶 안으로 연장되는, 삶 가운데서 계속 지속적으로 거행되는 미사이길 바랍니다. 그대가 미사 경본을 덮을 때마다 그대의 미사는 다시 한번 그대의 생활 안에서 새롭게 시작됨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행전 7,51-8,1)
-양승국신부-
<마니산 자락너머 저녁노을>
강화도 함허동천이란 곳을 가보셨는지요? 1박 2일간 저는 형제들과 함께 함허동천 야영장으로 뒤늦은 엠마우스 소풍(부활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함허동천은 마니산 남단에 위치한 계곡인데, 세종대왕때 이름을 떨친 함허대사가 수도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상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맑은 계곡 물 바로 옆에 텐트를 치고 1박 2일 내내 족구시합을 즐겼지요. 안가보신 분들은 가족들과 함께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실속 있는 소풍이 될 것입니다.
어제는 너무나 많은 인파가 야영장에 몰려들었기에 저녁 5시까지는 각기 찢어져서 여가를 즐겼습니다. 일부는 자전거 하이킹을, 일부는 마니산 등반을, 저희 "꾼들"은 함허동천 근처의 저수지를 찾았습니다.
낚시터에 도착한 저희는 저수지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좌대가 그럴듯한 포인트로 여겨져서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러나 웬걸, 한시간이 지나도 붕어들은 전혀 협조를 해주지 않더군요.
"진정한 낚시란 고기를 잡는 것이기보다 세월을 낚는 것이다. 진정한 낚시는 스스로를 비워내는 행위이다. 잔잔한 수면과 끊임없이 흔들리는 찌를 도구로 내적인 긴장을 가다듬는 수련이 낚시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위안을 가져보려 했지만 한 마리도 안 잡히니 은근히 짜증이 나더군요.
그렇게 뙤약볕 아래서 한참을 앉아 있다보니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에라 모르겠다"며 좌대 위에 대자(大字)로 누워 깊은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마침 저수지 건너편 마니산 자락이 저녁노을로 붉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제방 너머 해변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오후 내낸 붕어는 단 두 마리밖에 잡지 못했지만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장엄한 일몰광경을 바라보며 "우리 인생의 마무리도 저렇게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생각을 한참동안이나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스테파노는 아름다운 저녁노을 못지 않게 숭고하고도 고결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적대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기 일보 직전에 스테파노가 어떻게 처신했었고 어떤 말을 했는가를 한번 보십시오.
빗발처럼 날아오는 돌팔매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두 손을 가지런히 가슴에 얹고 눈동자는 하늘을 향했습니다.
그 끔찍한 고통,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내 영혼을 아버지,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며 하느님 아버지를 찾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 역시 저녁노을처럼 찬란했으면 좋겠습니다. 젊을 때부터, 건강할 때부터 미리미리 죽음을 잘 준비해서 고결하고도 깨끗한 임종, 이웃들에게 감동을 주는 최후를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 역시 스테파노의 최후처럼 주님을 쳐다보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다운 마침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요즘 취업하기가 정말로 어렵다고 하지요. 특히 점점 높아만 가는 청년 실업률 때문에 취업하지 않고서 공부를 선택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글을 하나 올려 봅니다. 즉, 면접을 볼 때 해서는 안 되는 말로, 이런 말들은 면접관을 짜증나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는 어떤 기업의 인사부장이 알려주는 비밀이기 때문에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물론 따르는 것은 본인 마음이지만요…….
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말.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지원자는 면접관의 질문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답변하는 사람이다.
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말.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는데요.” 지원자가 이야기한 내용을 다 기억하는 것은 무리다.
해서는 안 되는 세 번째 말. (긴 질문 후에)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 순간 면접관의 마음은 이미 떠난다. 적극적인 경청이 중요하다.
해서는 안 되는 네 번째 말. “그런 일은 절대, 추호도 없습니다.” 절대, 추호도, 반드시 등의 표현은 다른 답변 상황에서 충돌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말들, 사실은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하는 우리들의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 어떠합니까? 그렇게 기분이 유쾌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괜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만 하는 말이 아닌, 바로 내 자신도 자주 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주님께서도 이러한 말을 들으시고 기분이 좋으실까 라는 반성도 하게 되네요.
주님 위에 서서 주님을 판단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께 단 한 번 기도한 것으로 자기의 도리를 다 한 것인 양 생각할 때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잘 듣지도 않습니다. 헛된 맹세를 말할 때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고는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너무나 자주 주님께 원망과 불평을 던졌던 우리였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못된 말과 행동으로 얼마나 아파하실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더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지만,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친절히 설명을 해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다른 것만을 쫓으면서,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는 주님께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못된 말과 행동으로 더 이상 주님을 아프게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예쁜 자녀가 되어야 할 때인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상대가 비록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라. 그러면 상대도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게 된다.(벤자민 프랭클린)
수수깡 색안경
-정명숙 수녀-
어릴 때 색안경을 끼고 놀던 생각이 납니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겉에 다양한 색의 셀로판지를 끼워보면 세상은 빨갛게, 파랗게, 노랗게 변해갑니다. 세상의 색을 내 입맛대로 고르며 바라보는 안경 너머 세상은 자기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채 어느새 내가 원하는 색으로 변합니다. 나는 그것이 진짜 세상인 양 기뻐합니다. 오늘 복음의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선생님을 보고 믿게 하시겠습니까?” 하는 군중의 질문에서 그들이 원하는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면 도무지 믿을 것 같지 않은 완고한 기운이 느껴져옵니다. 마치 원하는 색을 끼워 세상을 바라보는 수수깡 안경 속의 눈처럼 고집스런 종교적 신념의 안경을 끼고 있던 그들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마저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자기들의 신앙을 고집합니다.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야 믿을 수 있는 기적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그 옛날 자기네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다는 만나의 기적으로 하느님을 시험하려 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참된 빵,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3)이라 하시며 이들이 원하는 표징을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잘못된 신앙의 색안경을 쓰고 예수님께 끊임없이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나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생명의 양식
-전삼용신부-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도쿄 올림픽을 위해 집을 헐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뜯어내고 있을 때 도마뱀 한 마리가 몸 안쪽에 못이 박힌 채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부들이 희한하게 생각되어 주인을 불러 도마뱀을 보여주었습니다. 집 주인은 그 도마뱀은 3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잡아서 그렇게 못을 박아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는 것이 신기해서 모두 잠시 그 도마뱀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도마뱀 하나가 그 도마뱀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문이 풀렸습니다. 3년 동안 벽에 못 박혀 있는 도마뱀을 위해 다른 도마뱀이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잠깐이나 영적인 죽음은 영원히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영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안전하고 흠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1테살 5,28)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것처럼 인간도 당신 모상대로 삼위일체로 만드신 것입니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아버지와 같습니다. 영혼은 인간이 만들어질 때 하느님께서 육체 안에 넣어주신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영혼은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하느님을 항상 그리워합니다.
‘육체’는 성자 예수님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육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계시해줍니다. 누가 화내는 모습을 보면 육체가 화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영혼이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영’은 성령님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전달자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가시며 두 분을 하나로 이어주십니다.
인간의 영은 마치 자동차의 기름통처럼 텅 빈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성령님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마치 기름이 없는 자동차처럼 영혼은 죽게 됩니다. 즉, 영혼과 육체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육체는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 안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물로 인간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즉, 피로 죄를 씻고 물, 즉 성령님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피와 물, 이것이 바로 성체고 성경말씀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아 자신 안에 영을 채워 영혼이 원하는 것을 육체도 따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령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못 박혀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 신새입니다. 누군가가 음식을 날라다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음식을 날라다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와 가르침을 통하여 매일매일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삽니다.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고 목이 마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닷물이 많아도 그 물로는 해갈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져야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바다의 짠물로 해갈을 풀려고 하면서 더욱 더 영혼은 메말라가고 죽어갑니다. 즉, 생명의 양식을 찾지 않고 육체의 만족만 찾으며 영혼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바로 영혼의 기본적인 욕구, 즉 사랑과 행복입니다.
영혼은 죄로 잃었던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이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에덴동산의 풍요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육체를 채울지 영을 채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Alter Christo인 스테파노
-김찬선신부-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외쳤다.”
오늘 사도행전의 스테파노는 성령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충만한 스테파노는 이제 성령의 눈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먼저 하늘을 유심히 봅니다. 그렇게 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보입니다. 성령의 사람에게는 하늘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육의 사람에게는 하늘이 막혀 세상 것밖에 보지 못하고 그래서 세상사밖에는 보지 못하지만 영의 사람에게는 하늘이 열려 하느님이 보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하고 자기가 본 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스테파노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기에게 돌을 던질 때 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고 기도하고,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주님께 외칩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고 하신 예수님을 그대로 떠올립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스테파노는 예수가 되어 예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를 일컬어 Alter Christo라고 하는데 스테파노도 Alter Christo(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본 하늘을 보라고 하고 하느님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청합니다.
생명의 빵
- 오정순-
사람들은 ‘먹는다.’ 또는 ‘먹힌다.’라는 말을 다양한 경우에 사용한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채울 때 그 행위의 상징으로 먹는다고 표현한다. 성이 고픈 남성이 여성을 취했을 때도 먹었다고 말하고, 운동경기에서 승리했을 때도 ‘1등 먹었다.’라고 표현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합병했을 때도 ‘먹었다.’고 표현한다. ‘먹었다.’는 것이 곧 ‘채워졌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할 것이 무수히 많겠지만 그중 생명에 가장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빵이다. 영혼과 육신의 생명 질서는 그 원칙에서 동일하다. 먹는다는 말은 생명을 이어간다는 말이 전제되고, 생명이란 단어는 빵과 직결된다. 물질의 빵과 영적 빵인 말씀이 동시에 우리에게 들어와야 하며 한쪽이 모자라면 다른 쪽에서 많이 채워 생명의 균형을 잡아간다. 한 번의 영적 변화로 일생 동안 건강한 영혼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새로 태어났어도 태어난 것은 빵을 먹으며 성장 발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종종 자기 점검을 해야 한다. 사람들과 잘 부딪치고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하며 남의 심정을 헤아리기보다 정의를 앞세워 칼같이 단죄하는 습성이 자주 드러난다면 이미 은총의 물이 욕조를 빠져나가듯 바닥이 보일 때다. ‘꼬르륵’ 하고 마지막 물 빠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생명의 빵을 정기적으로 챙겨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얘야, 생명의 빵 좀 먹고 가거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과잉친절의 하느님>
언젠가 형제들과 농가 봉사활동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절대로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점심 식사로 도시락까지 맞춰 갔었는데, 홀로 사시는 할머님, 막무가내셨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희를 위해 큰 가마솥에 밥을 지으셨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냄새부터 다르더군요. 밥에 기름이 자르르 흘렀습니다.
후덕하신 할머님, 아니나 다를까, 밥공기 크기부터 달랐습니다. 놋쇠로 된 무거운 밥그릇은 보통 식당 공기그릇의 거의 두 배였습니다. 그런 그릇에 밥을 꽉꽉 눌러 담은 다음, 또 다시 애써 고봉으로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껄쭉하게 잘 끓인 청국장을 큰 대접에 한 대접씩 퍼주셨습니다.
밥숟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도 밥공기에 든 밥은 통 줄어들지를 않았습니다. 저희 모두는 하나같이 밥그릇, 국그릇, 비운다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살았다, 이제 다 먹었다, 했는데, 비호처럼 다가오신 할머니, 어느새 제 밥그릇 안으로 밥 한 주걱을 더 얹어주시며 하시는 말씀.
“덩치는 산만한 장정들이 밥 먹는 게 통 시원찮여! ”
‘밥 고문’ 당할 당시는 물어보지도 않고 너무나 일방적인 할머니가 엄청 미웠지만,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할머님으로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표현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셨겠지요. 할머님과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어 안달이 나신 분,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더 잘 먹이려고, 더 많이 먹이려고, 더 좋은 것을 먹이려고 기를 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도망을 가고, 우리가 외면을 해도, 어떻게 해서든 쫓아와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과잉친절’의 하느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희망을 주셨습니다.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랑을 주셨습니다. 위로를 주셨습니다. 격려를 주셨습니다. 새 출발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이 지니셨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당신의 생명을 주십니다. 살과 피를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평생토록 자비와 은총을 흘러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풍요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주다주다 못해 줘서는 안 될 당신의 살과 피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되풀이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역시 가난한 이웃들과 가진 바를 관대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형제들을 위해 아낌없이 우리의 시간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들, 고통 받는 이웃들 싫다고 해도 쫓아가서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의 주 통신 수단은 휴대전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휴대전화의 문자서비스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지요. 그래서 저 역시 매일 아침마다 그날 우리가 가슴에 새길만한 성경말씀을 문자메시지로 보내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이 문자메시지를 주로 이용합니다.
며칠 전의 일입니다. 우리 본당의 고3 학생들에게 힘내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혹시 저의 번호를 모를까봐 메시지 맨 뒤에 ‘빠다킹신부’라는 글을 적어 넣었지요. 그런데 문자를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여보세요.”라고 말하면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에게서 울리는 음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누구세요?”
보통 전화 한 사람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약간 신경질적인 말투여서 저는 몹시 당황스러웠지요. 그리고 “조명연신부인데요.”라고 대답하자, 상대방은 “네? 신부가 뭐하는 사람인데요?”하면서 저를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더군요. 문득 ‘방금 내가 문자를 보낸 고3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통화를 하면서 주소록을 보니 맞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말했지요.
“나 본당신부라고.”
그때서야 알아보더라고요. 그리고 나중에 연락이 다시 왔는데, ‘빠다킹 신부’라고 적혀 있어서 결혼이벤트회사 광고 전화인줄 알았다는거에요.
아무튼 그 당시에는 무척이나 서운했습니다. 그래도 생각해서 문자를 보냈는데 이렇게 응답을 하니까, ‘앞으로 문자를 보내지 말까?’라는 생각까지 했었지요. 하지만 저를 알아본 다른 고3들의 고맙다는 답장을 보면서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런데 문득 ‘100%의 만족? 과연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긴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인데,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반대하는 그 모습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해 왔던 봉사와 희생을 이제는 안 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큰 욕심입니다. 사람들에게 100%의 인정을 받겠다는……. 주님께서도 100%의 인정을 못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나는 100%의 인정을 받아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겠다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그리고 그렇게 가슴에 많이 와 닿는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욕심을 보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그 모든 행동과 말씀도 100%의 인정을 이끌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떤지요?
오히려 내가 받는 부정적인 평가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기에……. 그리고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이기에…….
말씀을 알아듣기 위하여
-임준기 신부-
‘동문서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질문과는 다른 엉뚱한 대답을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고 싶은 빵’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알고 싶어 합니다. 신앙적인 의미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극복할 힘을 얻게 되고, 좌절하지 않고 더 높은 희망을 향해 적극적인 자기 투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삶의 의미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그분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 내주는 사람
- 김우정 신부-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기가 찬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표징을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은 더 큰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흥미로운 것을 주님께 요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신 것은 하느님을 믿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며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지만, 금방 모든 것을 잊고 주님께 또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본질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여 결국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청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면 곧잘 하느님께 등을 돌리거나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 그토록 많음에도 하느님께 투덜거립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모두 내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받을까를 생각하기보다 받은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봐야 합니다. 감사드릴 것이 그토록 많은데도 우리는 혹시 하느님께 받을 것만 생각하지 않는지 돌아봅시다. 만일 아직까지 감사드리지 못했다면, 이제 우리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내주는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닮은 자녀가 될 것입니다.
생명의 빵
-오상선신부-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얼마나 힘찬 선언인가! 과연 예수만이 외칠 수 있는 말이다. 누가 감히 생명의 빵이 된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매일같이 음식을 먹지만 요 며칠간 식중독끼가 있는 듯하여 제대로 먹지를 못한다. 생명을 위해 먹지만 약이 되기는 커녕 잘못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단 말이겠지.
자, 나는 생명의 빵인가?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사제요 수도자인가? 아니면 오히려 잘못 먹여서 식중독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그런 병을 주는 사제요 수도자는 아닌가?
언제 나 또한 주님처럼 <나는 생명의 빵이다!> 하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으리오.
그 이전에 <내가 생명은 주지 못할 망정 독을 주지는 말게 하소서> 하고 청해야 하리라.
내가 진정 생명의 빵이 되려면 생명의 빵이신 그분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리라. 그래야만 나도 작은 생명의 빵이 되리라.
오늘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 되게 해보자. 생명의 빵이신 그분이 내 안에서 일하시게 해보자.
영이 가르다
-김찬선신부-
오늘의 사도행전은 유다의 원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과 팽팽히 맞서는 스테파노의 모습을 전합니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예전 제가 참관했던 80년대 재판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문 익환 목사의 시국사건 재판이었습니다. 인상에 남은 것은 죄인으로 단죄 받는 문 익환 목사가 오히려 의연하고 당당한데 비해 죄인을 고소하는 검사들과 판결하는 법관들이 오히려 초라했던 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에 남은 것은 문 목사님의 어머니였습니다. 최후 증언에서 문 목사님은 그때 재판정에 나와 계신 당신의 95세 노모를 얘기하시며 시아버지, 남편, 아들 3대가 옥살이하는 집안에 오셔서 일생을 옥바라지 하신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도록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말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얘기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그 연세에도 몸도 꼿꼿하시고 아들이 또 다시 감옥에 가는데도 마음의 흔들림이 없어보였습니다. 마카베오서에 일곱 형제를 차례로 순교케 한 어머니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스테파노 최후 재판정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단죄 받는 스테파노가 오히려 의연하고 당당하고 단죄하는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화가 치밀어 어쩔 줄 모르고 결국 스테파노를 감당하지 못해 죽이고 맙니다. 화를 내는 사람이 지는 것인데, 결국 스테파노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지만 스테파노에게 지고 만 것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고 스테파노와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영의 차이입니다. 스테파노는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습니다. 듣기에 사뭇 이상하지만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하고 꾸짖습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겉으로는 할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인 것 같지만 마음과 귀는 완전히 굳어질 대로 굳어져 하느님의 소리는 귓전에도 울리지 않고 마음은 더더욱 울리지 않아 하는 것마다 하느님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겉 할례는 받았지만 속 할례는 받지 않았다는 얘기이고 무늬는 신자지만 속은 신자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 않고 졸기만 합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합니다. 어떤 얘기를 해도 불감증에 걸려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테파노는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하고 그들을 질타합니다. 영을 거부하고 거역하는 완고함, 그래서 영이 죽어있는 화석의 상태가 그들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스테파노의 영이 주님의 영과 일치하고 주님의 영이 스테파노의 영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닫혀 있는 하늘이 주님의 영으로 인해 스테파노에게는 열리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의 영으로 인해 스테파노는 봅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마침내 자기의 영을 주님께 바치며 맡깁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o)가 되어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용서청하며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독서> :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한 스테파노 - 경규봉 신부-
스테파노는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배교했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내려졌듯이 지금 성령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내릴 것임을 암시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은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였던 것처럼(느헤 9,26; 예레 2,30) 의회원들이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아를 살해한 무리라고 스테파노는 그들을 고발하였다.
이에 그들은 대단히 격분했지만,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영광과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편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를 선포하였다. 이에 격노한 유다인들은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끌고나가 돌로 치기 시작하였다.
스테파노는 십자가상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처럼(루가 23,45; 23,33)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운명한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의 시작이었다.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팔레스티나 각지와 아시아 지역까지 흩어지게 되었다(8,1). 그러나 이 박해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각 지역으로 흩어지도록 함으로써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결국 스테파노의 피는 그리스도교 확산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의 눈에는 그리스도이신지를 모르고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한 그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성령을 거스르지 말도록 진심어린 충고를 한다. 그들의 조상들이 저질렀던 예언자들을 죽인 죄를 되풀이하지 말기를 간청한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보고, 자기가 본 것을 확신에 차서 그들에게 전하며 회개하기를 간청한다.
그러한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죽이려는 그들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 원망이나 저주의 감정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가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돌에 맞아 쓰러져 있었던 중에서도 몸을 일으켜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간구한다. 이제 죽음으로써 대면하게 될 하느님 아버지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이처럼 죽음에 직면해서도 십자가상의 주님처럼 기도하는 스테파노는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참 신앙인은 언제나 주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산다. 주님의 마음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다.“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않는”(마태 5,42), 마음이며,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마태 5,44) 마음이다.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악의가 없고 오직 선의만이 있다. 분노, 시기, 원망, 탐욕 등의 악한 마음이 없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 육정에 따라 살지 않으며(갈라 5,16),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갈라 5,22-23)가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처럼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오늘 스테파노처럼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자. 사랑과 용서가 우리 마음속에 가득하기를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오늘 그리고 영생을 살아가는 신앙 - 예정출 신부-
이집트를 탈출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광야를 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젓과 꿀이 흐르는 복지를 향해 나아간 그들의 여정은 길고도 험했습니다. 많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향해 시련과 고통의 광야를 걸었습니다.
광야의 생활은 힘들고 배고픈 생활이었습니다. 목마른 백성들은 사막에서 갈증으로 원망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할때가 더 좋았다 하며 과거의 죄스런 삶에 집착하기도 했습니다. 때론 배가 고파 허기져 지도자 모세에게 불평도 심하게 드러냈습니다. 배고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간청을 들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 만나를 먹고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람들이 영생의 빵을 찾을 때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떤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어 당신을 믿게 하겠느냐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뭘 보여주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믿을 만한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예수께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그들에게 그 빵을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참된 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빵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십니다.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쉬울 것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목마르게 하지 않습니다. 배고프게 하거나 부족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우리를 애태우게 하고 목마르게 합니다. 세상의 것은 언제나 우리를 배고프게 합니다. 항상 부족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세상살이에 잘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런 부족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목마름과 세상의 모든 허기짐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서 힘을 얻습니다. 그분의 말씀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분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을 찾는 바른 삶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을 쫓아 사는 우리들에게 진리를 향한 바른 길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사람을 살리는 신앙입니다. 세상사에 지쳐 힘들어하고 기진맥진해 있는 우리 인생에 힘을 북돋아주는 신앙입니다. 생명을 불어넣는 신앙입니다.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용기있게 살아가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주님은 당신 부활로서 하느님 성부의 계획을 드러내셨고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경륜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죽어 없어지는 일시적 빵을 구하는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는 양식, 바로 구원의 빵을 구하라고 초대합니다.
여러분, 사랑이신 하느님은 당신 아들 성자 그리스도를 세상 구원을 위한 생명의 빵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 곧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위해 세상 창조 전부터 준비해놓은 축복을 함께 나누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세를 살더라도 항상 미래를 바라봅니다. 오늘을 살더라도 내일을 계획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내세를 준비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늘을 사는 신앙이며 나아가 영생을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축복의 식탁, 영생의 잔치에 교회는 항상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는 분이십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 을 것이다. - 신요안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해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분께 삶의 이유와 활력이 있는데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곳에서 열심히 찾고들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빵은 음식입니다. 생명의 빵은 영혼의 음식입니다. 영혼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건강한데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균형은 깨어지고 무너지고 맙니다. 삶이 불안해 지고 허무감에 휩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고 갈증을 느낀다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고, 모르고 있기에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려고 본능적인 삶에 탐닉을 합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더욱더 심해질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의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은 영혼에게 생명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음식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답변이 주어져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서 대답을 찾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자신을 두고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생명의 빵을 체험하게 됩니다. 영성체를 통해 영적 음식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강해진 영혼이 육체적인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영성체 입니까?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성체를 수없이 모시지만 영적인 힘을 느끼지 못했다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나는 성체를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성체 앞에 나선다는 것은 실제로 살아 계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최소한의 정성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생략되었기에 구경하는 미사가 되고, 아무 뜻 없이 받아먹는 영성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성체신심은 정성에서 출발합니다. 교회가 공심재를 정해놓은 것은 정성을 다해 성체를 모시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많이 후퇴하여 성체를 모시기 한시간 전 까지면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오래 전에 우리 교우들은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물도 못 먹게 하였고 양치질을 해도 양칫물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과장된 행동이었지만 그 만큼 정성을 들여 성체를 모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옛 교우들은 이 규정을 끔직 이도 지켰답니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셔야 필요한 곳에서 영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분 힘이 우리 영혼과 성체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활 속의 불안과 허무를 극복할 줄 압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름다운 변화가 자신에게 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체를 정성껏 모실 수 있을 때, 성체께 대한 신심은 새로워 질 것이고, 그 분 안에서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 노성호 신부-
정말 그날 머릿속에 가장 많이 떠올랐던 말은 ‘맨 땅에 헤딩하기’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존경스러웠던 인물은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본당 차원으로 가두선교가 있었던 날. 조금 긴장되고 떨리기는 했지만, 기도로 시작하면서 주님의 사명을 완수해 보겠노라고 다짐도 하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웃는 낯으로 대하면서 성당에 오셔서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자고 권유도 하며 선교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도 냉혹했습니다. 험상궂게 인상을 쓰고 가는 아저씨들, 완전 무시하고 지나가는 아줌마들, 껌을 짝짝 씹으며 침을 뱉는 청소년들. 게다가 나눠 준 선교책자를 갈기갈기 찢는 취객들까지. ‘주님, 제 분노가 죄가 아니길 바랍니다’라는 기도가 자연스레 나왔지요. 예수님께서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기에 박해 아닌 박해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선교에 임하고자 했습니다. 역시 구원을 얻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 험난한 여정을 다 겪어 낸 후에야 주님께서 상으로 주시는 것이니 말입니다. 때로는 박해를 당하기도 할 테고, 예수님처럼 ‘베엘제불’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 모든 역경들을 반드시 이겨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 중에 우리 모두와 함께해 주시겠다 약속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 문병찬 신부-
군중들이 예수님께 믿을 만한 근거로 기적이나 일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믿을만한 예로써 자신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제시합니다.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살아날 수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는 곧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절실하고 가장 믿을 만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적을 보여준다면, 기꺼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만나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순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예수님께 믿을 만한 징표를 요구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믿음, 잘못된 믿음, 순수하지 못한 믿음을 탓하기보다 예수님께 모든 책임을 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자체로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 것인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신앙생활이 기쁘고 보람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것에서 신앙생활의 기쁨과 보람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위로나 주변의 칭찬, 활동 속에 느끼는 인간적인 기쁨이 신앙생활의 기쁨의 참된 원천인 양 착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고, 어느 정도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적인 기쁨이 주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자체의 기쁨과 의의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면, 분명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만족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 김웅태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좀처럼 믿지 않는 완고한 유대인들의 태도와, 그와 아주 대조적으로 예수는 참으로 의인이시며, 예언자이시고, 사람의 아들이시며 주님이심을 피로써 증거하고 죽어간 스테파노의 위대한 신앙고백과 예수님 자신의 증언을 듣게 됩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끊임없이 박해해 왔던 조상들의 완고한 마음을 상기시키면서 또한 그 시대에도 하느님의 중개자를 거부하고 그 뜻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행하여야 할 참된 일은,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을 따르며 그 분을 믿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자신을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자이며, 사람들이 기다려 오던 메시아이심을 믿고 받아들일 것을 또한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을 군중들이 들었을 때, 그 사실을 입증해 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굶주린 그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가져다가 먹였고, 또 메시아가 오시면 시편 78, 24의 말씀과 같이 그 백성을 만나로 배불리라고 되어 있는데,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 사실을 증명해 보라는 요구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며,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또한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나 스테파노를 죽인 사람들이나 모두 예수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신가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으나,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신앙을 찾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한테서 큰 능력을 보여주는 기적이나 징표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보면 모세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들을 데리고 사막을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 불평하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음식으로 내려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군중들은 모세가 그러했듯이 예수가 하느님께 보냄을 받은 이라면 모세가 행한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을 해보라고 요구하는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5,000명을 배불리 먹인 빵을 하느님께로부터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사실임을 못 알아 듣고, 보통 음식에서 시작해서 보통 음식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① 하늘에서 만나를 가져다 먹인 것을 모세가 아니라, 당신 아버지이시라는 것과, ② 음식은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며,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사람은 살아 남을 수 없다. 그러나 먹고 나서 얼마 있으면 배가 고파서 또 찾아야 하는 그러한 음식을 찾기에만 몰두하지 말고 마음과 영혼이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음식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신을 먹이는 음식보다 육신을 이끌어 나가는 마음의 양식, 영혼을 배불리고 영원히 살게 하는 음식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육신은 아무리 잘 먹어도 언젠가는 병들고 죽습니다. 그러기에 육신을 갖고 살아 있는 동안에 육신의 죽음으로 영혼도 함께 죽음을 맞아야 할 것이 아니라, 현세의 축복과 삶의 종말인 죽음을 지나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한 생명을 주는 음식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 당신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구하며 찾아야 하겠습니다. 또 주신 은혜에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당신에게 올 때나, 당신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마치 음식이 육신에 생기를 주고 삶을 주듯이, 당신과 당신 말씀 안에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생명력을 주십니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구성된 합일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그 신체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육신적 음식도 필요하지만, 또한 인간은 인격체이며 하느님의 모상을 타고난 것이기에 정신적, 영혼의 양식도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빵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시며, 또한 영혼의 양식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십니다. 바로 생명의 빵이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이 생명의 빵을 찾는 굶주림을 본성적으로 두신 것입니다. 이러한 굶주림은 세상의 음식이나 현세적인 욕망으로는 아무리 먹어도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은총, 그리고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만 만족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멘.
영원한 빵
-김유철 신부-
오늘 요한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믿으라 하고 사람들은 믿음직한 표징을 보여달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에게 대중성을 지닌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뜻을 중심으로 서로 모여 마음을 열고,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모두 풍족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부족함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미 하느님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총을 베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총의 풍부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은총을 깨닫지 못합니다. 육적으로 배고프지 않을 빵을 달라고만 합니다. 사람들은 그 옛날 조상들이 광야를 헤매며 굶주릴 때, 모세의 도움으로 ‘만나’를 먹고 살게 되었다고 모세를 칭송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나를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니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육적인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지만 열두 광주리나 남게 한 오병이어의 기적은 생각을 바꿔 이웃을 초대하고 마음을 열어 나누는 것이기에 한 번 먹고 끝나는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런 생각을 이해하고 동참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생명의 빵을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빵
-이세영 수녀-
삼십 년 가까이 수도생활을 해온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저는 딱 한 번 주어지는 인생에서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수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공동생활을 해나가면서 힘들고 어려우면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하고, 제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성장의 시간 가운데 제게 주어진 처지와 환경을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다른 사람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주님이 내 안에서 더 찬미를 받으실 수 있도록 ‘나’를 포기하며 ‘나’를 낮추는 기도생활에 더욱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도생활뿐 아니라 제 인생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총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평화는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타났으며, 수도생활도 한결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하여 순간에 충실하고 평범한 일상의 삶 안에서 비범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어 비로소 행복한 수도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수도자로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싶은 갈망을 안고 최선을 다한 저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모든 수녀님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하느님의 얼이 담긴 얼굴’로 보게 되고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길 줄 아는 능력도 생겨났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지난 삼십 년, 아니 더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생명의 빵이 저를 감사와 사랑이 충만한 진정한 새 생명으로 일으켜 세웠음을.
부활 제3주간 화요일
- 김경욱 신부 -
어제는 하루라도 성체의 의미를 살려서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작은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셨는지요. 어제가 아니라면 오늘이라도 우리 가까이 있는 이웃에게 사랑의 웃음을 선사해보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서 주님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둔하고 어리석은 군중들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어떻게 합니까?” 이 질문에 대답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이제 믿을 수 있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청하는 표징은 그리스도의 본래 모습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번에 배고픈 우리를 먹여 주었듯이 또 먹여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깨달아서 주님을 찾아 헤맨 것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어서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빵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요구한 표징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종살이를 떠나 광야에 들어서서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하느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불평을 벌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매일매일 제공해 주셨습니다. 농사짓지 않고 그저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도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그날 먹을 만큼만 주어지는 양식은 맛없고 충분히 질릴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기가 그립다고 불평까지 합니다. 그들은 에집트 종살이 시절에 겪었던 노예가 먹는 가마솥 음식까지 그립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들도 결국 하느님이 주시는 음식의 표징을 모르고 죽어 갔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그 빵, ‘만나’를 먹었지만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기에 모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그렇게 죽어갈 그런 빵을 제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원한 것은 눈에 보이고 확인하고 먹을 수 있는 ‘썩어 없어질 빵’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서 알고자 했습니다. 표징을 보여주십시오. 눈으로 보고서 믿는다는 말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너는 눈으로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서 믿는 자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라고 하셨듯이 믿음은 눈으로 보지 않고 하는 행위입니다. 아둔하고 어리석은 이들은 하느님의 빵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준다는 그 말씀을 ‘만나’처럼 노동없이 먹을 수 있는 빵으로 착각했습니다. 기적으로 군중을 먹이셨던 그 빵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세상의 재화와 풍요를 하느님께 청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바로 하느님의 빵은 결국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복음서의 저술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이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주는 빵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 영원히 먹어서 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빵을 먹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구세주를 믿고 그분의 삶을 사는 것이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적인 노력이나 빵 제조법을 가지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위한 물질적인 음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증거할 때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먹어서 죽지 않는 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성체의 삶은 바로 세상에 살면서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고 또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성체를 받아 모신 사람으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내 이웃의 건강한 생명을 위해 하루 봉헌하며 삽시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양승국신부
<대책 없는 예수님>
가끔씩 대책 없는 어르신들을 뵙니다. 아직도 ‘꽤 많이 남은 날들’을 생각해서 당신
들 몫을 잘 챙겨놓으셔야 하는데, 이 자식, 저 자식 다 마음에 걸립니다.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다 나누어 주다보니 이제 남은 재산이라곤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더 못줘서 안달이십니다. 나중에 어떡하려고 하시는지 정말 대책이 안섭니다.
이리 떼이고 저리 뺏겨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상태, 더 이상 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이제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은 더 대책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있는 것 없는 것 다 나눠주고 이제
그분께 남은 것은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남은 마지막 몸뚱아
리조차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
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빵’이라시며 우리에게 내어놓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무엇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 애가 타시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하느님
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 내내 음식과 무척이나 관련이 있었습니다.
‘빵집’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말들이 쉴 새 없이 입을 들이대던
곳, 건초가 가득담긴 말구유에 뉘어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허기
진 백성들의 해결사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제는 우리들의 배고픔을 영원히 해결해주시기 위해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흔들리는 우리를 보다 강건하게 만들어주시기 위해, 나약한 인간에게 당신의 신성
(神性)을 공유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죄인인 우리이지만 예수님께서 내어놓으신 생명의 빵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에 참
여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목숨인 우리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나눠주신 생명의 빵으
로 인해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과분한 축제가 성체성사입니다. 그 큰 사랑, 측량할 길 없는 감사의 축제가
성체성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주님 현존의 장(場)이 어디 있을
까요?
의외로, 또 은혜롭게도 그 장은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
다.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신비를 되풀이하십니다. 매 미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당하시고, 죽으시는가 하면 영광스럽게 부활하십니다.
성체성사에 참석하는 우리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파스카의 신비에 깊이 침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옛날 홍해를 통해 죽음의 땅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매일
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도 지금까지의 삶을 일단락 지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어제의 나와 결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죄와 악습으로 물든 지난 삶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 때 마다 우리
는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절차를 반복해야 합니다.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순간 우리는 과감하게 아래쪽을 포기하고 위쪽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죄와 암흑이 지배하는 죽음의 나라를 통과해서 은총과 빛이 흘러넘치는 생
명의 나라로 부단히 넘어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이제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별도의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
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 굳이 비행기 삯을 들여서 최후의 만
찬이 거행되었던 예루살렘의 다락방 순례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활은 이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
일 주어지는 선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은 동물들이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필요한 사료가 아니
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우리 인간의 영혼들
을 영생의 창공으로 비상하게 할 참된 양식입니다.
"생명의 빵"
-이수철신부-
하루하루를 하느님 주시는 새날의 선물로 생각한다면,
늘 새 마음으로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죽어있는 것들은 차고 딱딱합니다.
진화가 잘 된 동물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진화가 덜된 동물은 차갑고 딱딱합니다.
진화가 최고도에 이르렀다는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한 살이 딱딱한 뼈를 에워싸고 있지만,
진화가 덜된 거북이, 게, 가재 같은 동물은
딱딱한 뼈가 살을 에워싸고 있다는 이야기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이들,
진화가 덜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진화가 최고도에 이르렀다는 사람들,
예나 이제나 쇠붙이 무기들 들고 전쟁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진화가 덜 된 문명과 야만을 동시에 지닌
역설적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처럼 무익하고 무모한 전쟁을 하는 동물들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군대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은, 문명화된
야만인일 수뿐이 없습니다.
외적상태만 아니라 내적상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내면은
진화로 말하면 최고의 절정상태입니다.
다음 스테파노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백성, 원로들, 율법학자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성령을 거역하면
마음과 몸은 차고 어둡고 거칠고 딱딱해져
완고하고 인색해 질 수뿐이 없습니다.
반면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참 거룩한 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의 임종어와 똑같은 스테파노의 두 임종어가
그의 부활하신 주님과의 일치의 삶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새삼 참 영성의 특징은
단순성,
개방성,
유연성,
신축성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결같이 성령 충만한 결과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빵, 생명의 빵인
부활하신 주님의 성체와 말씀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며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존재하는 온 세상의 피조물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미인 다음 말씀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성체성사의 진수를 밝혀줍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결코’라는 단어에 주님의 힘이 집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육으로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지요!
영육이 배고프고 목말라도 채워지지 않아
차가워지고 굳어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생명의 빵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실 때
일거에 해결되는 영육의 배고픔이요 목마름입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복음의 군중은 물론 우리의 간절한 소원에 응답하여,
부활하신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빵인 당신 자신과 더불어 성령을 충만히 선사하십니다.
아멘.
기적 중의 기적
-강영구신부
당신은 무엇을 기적(奇跡)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큰 사랑이 감지(感知)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을 기적(奇跡)이라고 합니다. 창밖을 내다보시겠습니까? 당신은 거기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까?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새록새록 돋아나는 새싹들, 하루가 다르게 녹색 옷으로 갈아입는 잔디밭이 보입니까? 그것이 기적(奇跡)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손길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날씨가 맑겠구나.’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한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악하고 절개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나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마태16,1-4) 요나가 니느웨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손길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인류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예수님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아침저녁 하늘을 보고 날씨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도 하느님의 큰 사랑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는 눈 뜬 장님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고 요한복음은 증언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당신에게 허락된 오늘 하루도 큰 기적입니다. 당신 자신도 기적입니다.(一明)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박상대 신부 -
어제 복음(6,22-29)에서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육신만을 배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기'보다는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즉 '추구'하라고 강조하셨다. 이 말씀은 불멸의 양식이란 썩어 없어질 양식처럼 찾을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추구(追求)'하라는 것이다.
'찾는다'는 말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을 뒤지거나 두루 살펴서 발견해 내는 일이다. 때로는 요구하거나 청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추구한다'는 말은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끝까지 좇아 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멸의 양식이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찾을 수 없고 오직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조건은 불멸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는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 어제 복음의 결론이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불멸의 양식이 무엇인지가 선포된다.
오늘 복음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① 예수께서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 조건'으로 '불멸의 양식을 주는 자'를 믿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믿음을 얻기 위한 기적을 요구한다.(30-31절) 그들은 모세와 예수를 대립시켜 "모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 우리의 조상들을 먹이는"(출애 16,1-36; 시편 78,24; 지혜 16,20-29 참조)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예수는 어떤 기적을 보여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을 위해 기적(奇蹟)을 청하고 있다.
사실 믿음이란 내심(內心)에 주어진 어떤 무엇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response)이다. 기적을 보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적이 믿음을 강요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라. 그들은 항상 기적을 요구했고, 기적을 보고서야 믿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에 믿음이 강요당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된 믿음이란 기적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지의 온전한 결단으로 성립된다. 군중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기보다는 기적에 의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빵의 기적과 비슷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으니 결국 육적 세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② 이제 예수님의 부연설명이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다 조상들을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라고 정정(訂正)하여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자 하신다.(32-33절) 예수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모세가 하늘에 청한 만나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 일용할 양식이 넉넉지 못함을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신다.(출애 16,1-36) 이 기록을 살펴보면 만나는 그야말로 하루의 양식이었고(안식일은 예외) 다음 날은 곰팡이와 구더기의 밥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빵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그런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이다.
③ 사람들이 예수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을 청한다. 이에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심을 선포하신다.(34-35절) 이 언명(言明)은 더 이상의 설명이 아니다. 이는 선포요 폭로(暴露)이며 예수님의 자기계시이다. 사람들은 앞서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조상에게 빵을 먹인 사람이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 내 아버지'라는 예수의 자기계시적 언명(言明)도 쉽게 수긍하는 듯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가파르나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사람들 보다 순진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안중에 '하늘의 빵' 밖에 없는 것인가?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라는 선포는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이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허기짐과 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이다. 이 빵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가야하며, 그분에게 가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빵의 기적을 행하신 그 날 밤,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하신 바로 하느님 그분이시며, 이분이 바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자신을 구체적으로 폭로하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성체성사로 오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 † 어느덧 부활 3주간 화요일입니다. 그리고 온누리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꽃피는 4월입니다. 어떤 시인은 4월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표현했지만 만개하여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솟아나게 하는 힘찬 생동감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상을 바쁘게 사는 민초들은 계절의 감각도 잊고 사는 스스로 불쌍한 것 같은 시간들도 꽤 있습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어린이들이 결식하고, 노인들이 버려지고, 밤거리의 다니는 사람들은 무섭고...세상은 점점 어두운 색갈을 띠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운이 주는 만물의 생동 현장에 비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은 무척 칙칙한 환경입니다.
어느 노숙자가 자조 섞인 말로 내 귀에다 속삭이기를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살겠나? 남은 인생이 지나온 날보다 짧기만 한데 “예수고 부활이고, 지랄이고...인생이나 즐겨야겠다.”...라고 도전적으로 말합니다. 나는 그에게 적절한 대답인지 아닌지도 구별하지 않은채 이렇게 귀에 속삭여 주었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평화로 남은 인생을 멋있게 사랑하며 살고 싶다.”라고... 그 노숙자도 언젠가는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웃옷과 몇푼 안되는 돈과 전대에 있는 단팥빵 두개를 집어주고 홀연히 다른 길을 향했습니다. 희망과 슬픔이 교차하는 내 마음 속의 4월에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기를 외치면서..........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께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렵니까?”(요한 6,30)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시정잡배들 같이 예의없이 대들면서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건방진 것들의 말투나 행동은 똑 같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당연하게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시거나 어떤 이적을 보여주실 필요는 없으셨을 텐데도 그들은 용감하게도 따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무례함에 비해 주님의 반응은 참 의연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으과 같이 대답해 주십니다.“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한 6,33)
이 말을 들은 그들의 반응은 참 뻔뻔스럽게 보입니다.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금방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이득이 되면 금방 주님하다가, 자기에게 이득이 없다면 금방 돌아서는 사람들과 같이, 그들은 오늘복음에서 주님께 요구합니다.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 주님과 이들과의 대화가 참 재미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산중에서 수십년간 참선이나 하신 것 같이 완전한 선문답으로 답하십니다.
“나를 먹어라”(요한 6,34참조) 하십니다. 이 얼마나 통쾌한 대답입니까? 지난번 복음에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너는 새로(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에 '이 큰 어른의 몸뚱이가 어떻게 어머니 배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느냐?'는 식으로 질문을 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그들이 듣기에는 이상한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아마 그 말을 들은 그들은 놀랍고도 기괴한 답에 말문이 막혔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옆에 먹을 것을 두고도 다른데 가서 먹을 것을 찾으며 돌아다니다가 허기져 굶어 죽는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진리는 바로 곁에 있고, 친구는 바로 옆에서 찾아야 됨을 주님께서는 행동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해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분께 삶의 이유와 활력이 있는데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곳에서 열심히 찾고들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빵은 음식입니다. 생명의 빵은 영혼의 음식입니다. 영혼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건강한데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균형은 깨어지고 무너지고 맙니다. 삶이 불안해 지고 허무감에 휩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고 갈증을 느낀다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고, 모르고 있기에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려고 본능적인 삶에 탐닉을 합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더욱더 심해질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의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은 영혼에게 생명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음식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답변이 주어져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서 대답을 찾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자신을 두고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생명의 빵을 체험하게 됩니다. 영성체를 통해 영적 음식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강해진 영혼이 육체적인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영성체 입니까?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성체를 수없이 모시지만 영적인 힘을 느끼지 못했다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나는 성체를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성체 앞에 나선다는 것은 실제로 살아 계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최소한의 정성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생략되었기에 구경하는 미사가 되고, 아무 뜻 없이 받아먹는 영성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성체신심은 정성에서 출발합니다. 교회가 공심재를 정해놓은 것은 정성을 다해 성체를 모시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많이 후퇴하여 성체를 모시기 한시간 전 까지면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오래 전에 우리 교우들은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물도 못 먹게 하였고 양치질을 해도 양칫물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과장된 행동이었지만 그 만큼 정성을 들여 성체를 모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옛 교우들은 이 규정을 끔직 이도 지켰답니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셔야 필요한 곳에서 영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분 힘이 우리 영혼과 성체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활 속의 불안과 허무를 극복할 줄 압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름다운 변화가 자신에게 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체를 정성껏 모실 수 있을 때, 성체께 대한 신심은 새로워 질 것이고, 그 분 안에서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신선한 빵입니다. 육화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온갖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오염된 빵이 아니시고,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히 정화된 빵'입니다. 오늘 상큼한 봄 향기를 맡으며 하늘도 보고 아지랑이 피어나는 먼 산도 바라보며 진리는 바로 곁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면서 '신선한 빵을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맛있게 빵을 드십시오!!!.......(아멘).....◆
-두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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