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
주경림, 백지, 윤혜지, 함기석, 유종인, 박성우, 이외현, 이병국, 려원, 최병근
사슴 모양 뿔잔 토기
주경림
눈매가 천진한 사슴이 뒤를 돌아보며
“주인님, 제 등에 오르세요.”
쫑긋한 귀에, 뿔이 없어 더 착해 보이는
사슴 표정에 그만 끌리어
등어리에 내 영혼을 올려 태웠다
그러자,
나를 태운 사슴이 달리기 시작했다
엉덩이에 붙어있던 짧은 꼬리가
위로 들렸다가 내리치면서 속도가 더 빨라졌다
사슴 등 위의 V자 모양의 뿔잔이
날개로 펼쳐졌다
함안 말이산 정상, 아라가야의 45호 무덤에서
나를 태운 사슴 모양 뿔잔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 별자리가
오늘 밤에는,
날개 펼친 사슴 별자리로 보인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혀
백지
사람들의 입속에 사는 나는
붉은 빛깔의 연체동물이다
입안 아래쪽에 있는 길고 둥근 살덩어리
맛을 느끼며 소리를 내는 구실을 한다*
뼈가 없어 유순해 보이지만 다혈질이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기도 한다
내 몸속엔
달콤한 과즙과 세 치의 칼날이 있다
과즙은 향기로운 독주 같아서 부드러운 입술을 탐하기도 하고
칼날은 날뛰는 말과 같아서 사람들의 다치거나 죽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 한다
내 몸속에 뭔가 있음을 확실히 아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 목구멍 깊숙이 나를 묶어두고
이빨 울타리를 만들어 영영 가둬버렸다
나는 붉은 동굴에 갇힌 영원한 무기수다
*네이버 지식백과 설명글 인용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야생 눈사람*
윤혜지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한 사람에게
술을 부었다 얼기 전에 마시자
굵은 눈송이 눈송이
눈송이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저절로 생겨난 것을 보면 몽땅 혀에 올려놓고 싶었다 갓 돋아난 속눈썹과 손가락
뜨거운 것도 덥석 집었던 녀석에게는 아주 차가울 혀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쓸어주던 손길에 포개진 손으로
눈송이
눈송이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눈
송
이
이제 내려가자
같은 것이 같은 것을 헤쳐 나간다
길을 낸다
눈이 눈을
사람이 사람을
가짜 꽃을 치우고
가짜 꽃을 다시 꽂았다
한 번도 녹아본 적 없는
손바닥을 펼치면
손금 앞쪽에서 헤매고 있는
작은 사람이
* 변영근의 작품 이름에서 가져옴.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걷는 사람
함기석
그림자가 계속 뒤를 따라온다
내가 일생을 똑바로 걸어가서
배고픈 무덤에 잘 들어가는지
검안하라고 빛이 보낸 검시관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그러니까 만세
유종인
어깨 염증을 오래 참았더니
어느 날부터 팔을 돌리기가 어렵다
팔을 앞으로 돌릴 때도 그렇지만
팔을 뒤로 젖혀 돌릴 때는 더 아파온다
팔이 너무 아프니까
팔이 내 팔 같지가 않다
아픔이 이제 팔의 주인 같다
아플 때마다 참아온 팔이
안 아플 때조차 견뎌온 팔이
아플 때마다 따로 떼어논 팔이
아픔을 모르는 나를 만들어온 것같이
언제부터인가 앓아온 나라를
그래도 이게 내 나라인가
묻는 이들이 좌로 우로 북적일 때마다
하나같이 그들은
어떻게든 만세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
만세를 못 불러서
오히려 팔이 아파온 사람들
못나도 가만 불러주고
잘나도 만세를 불러주길 오래 참았더니
아픈 팔만 남은 몸뚱이같이
그 아픈 자식들만 남은 나라 같이
팔이 나으려면 아파도 돌리세요
그러면서, 동네 의사는 때로 義士나 烈士처럼
내 팔을 그윽이 대신 들어주진 않는다
그래도 아픔 몰래 팔을 살살 돌리다
경계 삼엄한 아픔한테 걸려 팔을 도로 내릴 때
내 몸은 내 마음한테 그런다
언제까지 아픈 팔을 데리고 살 거냐
언제까지 아픈 나라를 고개 숙이고 살거냐
그 때에 이르러 당신이 한 말씀
아픔을 가만히 참고
먼저 팔이 어디까지 올려지나 올려 보세요
통증이 잡아끄는 팔을
조금씩 또 조금씩 들어 천장을 향해 하늘에 올릴 때
아 나 같은 어깨 병신 팔 병신도
뭔가 한 것만 같은 으쓱함이여
그러니까 만세
그러니까 만세
말을 닫고 그저 입만 꽃처럼 벌리고
아픈 팔이 안 아픈 팔까지 거들어 올리고
서로 좀 즐거이 아파보자구
서로 좀 살 떨리게 기쁜 아픔 찾아보자구
벌써 가로수와 정원수와 죽어가는 나무들까지
언제부턴가 두 팔 들어 올린 지 오래고
하늘 높이 기다린 지 오래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은행나무 길목
박성우
초저녁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
두 정거장 더 가서 하차해야 하지만
나는 은행나무 사거리에서 내려 걷는다
이 길을 걷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은행나무정육점에 들러 삼겹살 한 근 산다
결혼을 하면서부터 17년을 살아온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길목,
서른 중반에 신혼살림을 차려
딸애 하나 낳아 그냥저냥 잘 살다가
쉰 살을 넘겨 떠나려 하니 생각이 많아진다
아빠, 해가 꼭 사과 같아!
뜨겁고 달콤한 것들만 품고 이곳을 떠나야지
쉬는 날 오후면 세 식구가 함께 다녀오던
은행나무시장을 뒤돌아보니, 불빛 환하다
은행나무떡집도, 은행나무반찬집도 안녕
17년을 오갔으니 정이 안 들면 이상한 일,
한결같이 다니던 미용실로도 자꾸 눈길이 간다
지금은 사라진 가게들이 왜 자꾸 떠오르지?
주말부부를 하던 신혼 때 들르던 빵집이며
겨울엔 붕어빵을 팔기도 하던 분식집이며
언제 찾아가든 문이 열려있던 집 앞 세탁소까지
저녁 식탁 위에 도란도란 꺼내놓고
이사 가기 전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굽는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라면과 텐데
이외현
엄마 말대로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엄친아가 되었을 텐데.
삼촌 말대로 손바닥을 잘 비볐더라면 출세를 했었을 텐데.
친구 말대로 재테크에 신경 썼더라면 건물이 있었을 텐데.
카드를 쓰지 않았더라면 이런 신용불량은 아니었을 텐데.
보증을 서지 않았더라면 그런 집안 망신은 없었을 텐데.
가게를 하지 않았더라면 저런 고리 대출은 없었을 텐데.
쳇봇에게 라면과 텐데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려고 했더니
앱에서 다짜고짜 청구서부터 내민다. 짜증 나고 배가 고파
라면 속 점점이 떠다니는 텐데 건더기를 건져 씹어 먹는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냉담
이병국
두 손을 모을 땐
낯선 이와 인사를 하거나 연인과 깍지를 끼거나
로또를 맞출 때
처음 보는 이의 손이 따뜻해서 깍지를 끼고 싶었다 그러려면 로또에 맞아야 했고
낙첨된 종이로 배를 접어 띄우면
욕조가 없어도 평온했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솎아지는 운은 불쾌하지도 않았고
넘지 못할 문턱이 없어 으슥함을 으쓱하고 돌아설 수 있다 침대가 여기에 있다 누워 뒹굴 수 있다 쉽게 까먹을 수 있다 하루를 이틀을 일생을
나가려면 나갈 수 있다 거울을 보고 매무새를 점검할 수 있다 뒤통수에 매달린 창문을 열어젖힐 수 있지만
고해소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죄를 목격한 이후로 나는 나에게만 말한다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말씀을 듣는다
엉망진창이구나
괜한 헛심 쓰지 말아라
사람이거나 귀신이거나 손을 생각하지 않는다
두 손을 모아 버릴
쓰레기통만 찾으면 될 일이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려원
내가 만든 포도밭 말랑말랑한 포도송이가 말캉말캉 포도푸딩
이야기가 되어 넝쿨 뻗어나가지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우리가 설계한 와인너리 카페에
포도향기 은밀하게
참 예쁘지요
우리라는 말과 함께
한 잎의 예쁜 말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히 과일향기 짙어오는
우리들의 솜사탕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어볼래요
우리들만의 예쁜 꽃말로 입술 간질여서 나쁠 거야 없지요
사라지는 날갯짓 푸드득
마음 움직여
마을엔 온통 발자국 찍히는 전설
시베리아 설원 곳곳에 하얀
눈꽃 피우지요
눈송이처럼 푸른 씨앗을 바람에 떨구지요
눈물처럼 춥다가도 어느새
자작나무 희디흰 옷차림은 눈부신 말씀이 되어 태어나지요
포도향기 풍기며
우리 에어 브러쉬 키스할까요?
우리가 만든 낱말을 모두 바람에 날리고
우리가 만든 세상의 모든 별사탕이 입안에서 한꺼번에
단물 쏟아낼 때까지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필명: 려원
2015년 <시와표현> 등단.
시집 「꽃들이 꺼지는 순간」 , 「그 해 내 몸은 바람꽃을 피웠다」 외.
우리의 소유권
최병근
곱창집 구석자리 소주를 마시다
다 드러낸 속내를 젓가락으로 짚는다
그래, 생은 간보다 가는 거야
양넘장에 곱창 한 점 찍을 때마다 사연들이 흥건하다
말하면 뭣해 다 사는 얘긴데
잔이나 받으시오
비운 잔을 옆자리에 건넨다
리시버와 스마트폰으로 중무장하고
훔쳐보는 관심과 소리조차 지워버리며
저 만치 골목을 돌아가는 외인용병 둘이서 세상을 비웃고 있다
얼마나 많은 입술들이 닿았을까 이 술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앉았다 갔을까 이 의자
얼마나 많은 살점들이 지글거렸을까
이 불판
머지앉아 비워줘야 할 자리
털고 일어나
포만의 시간을 삼킨 배 두드리며
여직 살아 있다고
어두운 바깥으로 몰려들 나간다
골목은 끝이 있어도 내 골목은 없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