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편린 한 조각 (隨筆)
影園 김인희
아침 출근길에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있다. 아니다. 아침 출근길뿐이 아니다. 햇볕 내리쬐는 한낮에도 길을 걷다가도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도 늘 두리번거리고 연신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버릇이 있다.
밤에는 온통 하늘을 샅샅이 뒤지면서 별을 찾는다. 요즘 같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영롱한 별빛을 보고 헤헤 웃는다. 비가 오는 밤에도 먹구름이 하늘을 덮은 밤에도 하늘을 더듬는 버릇은 불치다. 그런 날에는 별은 보이지 않지만 거기 그 자리에 나의 별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미소 짓고 한참 우러러보곤 한다.
무서리가 하얗게 내린 어제는 스카프로 묵을 칭칭 동여매고 출근했다. 햇빛이 닿지 않은 응달에는 한 움큼의 서리가 눈처럼 쌓여있었다. 노란색 국화는 더욱더 화사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간은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이맘때였다. 사금파리 조각으로 가슴을 스크래치 하듯 아려오는 그리움 한 조각 소환한다.
추석명절을 지내고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던 십 년 전의 일이다. 주말 저녁에 아버지께서 계신 친정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와 한 동네에서 살고 있는 친척 오빠였다. 아버지 집에 화재가 나서 소방차를 불렀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 전화를 받았을 때는 믿어지지 않아서 어떤 말인지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물었다. 왜 불이 났느냐고.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냐고. 지금 상황은 어떠냐고...
그때 아버지께 어떻게 달려갔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소방차가 화재를 진화하고 돌아간 후였다. 아버지 집에 들어가는 길목은 물이 잔뜩 고여서 첨벙첨벙했다. 그런 따위는 상관없었다.
나는 미친 여자처럼 “아버지! 우리 아버지 어디 있어요.”울부짖으면서 아버지를 찾았다.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그 속에 아버지께서 계셨다. 내 목소리는 만신창이가 되어 괴성이 되었다. 내 목소리는 내 색깔을 잃고 짐승이 울부짖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간신히 나오는 목소리로 “아버지 여기 있다. 무사하니까 놀라지 마라.”하시면서 내게 오셨다. 나는 아버지 몸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정말 괜찮으신지 살폈다. 아버지 머리를 만져보고 어깨를 만져보고 손과 다리를 만져보았다. 아버지께서는 삭정이처럼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는데 괜찮다는 말씀만 연신 되뇌셨다.
주방에서 시작된 불은 거실을 태우고 아버지 침실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청양군 지역축제가 있어서 마을 어른들과 읍내를 다녀오셨다. 읍내에서 귀가한 후 아버지께서는 피곤해서 낮잠을 주무셨다고 했다. 옆집 아주머니께서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나서 밖으로 나왔고 아버지 집 주방에서 연기가 나서 아버지를 불렀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침실에서 나오는데 주방의 불길은 이미 거실까지 덮쳐왔다고 했다.
청양 읍내에서 시골 아버지 집까지 소방차가 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고 마을길이 좁아서 화재를 진화하기까지 힘들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전부가 소실되고 아버지와 옷장 안에 있었던 이불 몇 채와 옷 몇 벌만이 무사했다. 그 옷장 깊숙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손수 지어놓은 아버지 수의가 보자기에 싸여 곱게 보관되어 있었다.
다음날 소방서에서 나와서 화재 원인을 조사했고 한전에서도 조사하고 돌아갔다.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했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어디서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무사하다는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남매들은 독수리 오 남매가 되어 아버지를 지켜드려야 했다. 오빠, 언니 둘, 나와 여동생 우리 오 남매는 날마다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다. 아버지께서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셔서 아버지 집을 다시 짓기로 했다. 새 집을 짓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오빠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청양과 가까운 부여 우리 집도 마다하셨다. 아버지 동네에 있는 친척 오빠가 모시겠다고 해도 폐를 끼칠 수 없다 시며 마을 회관에서 지내기로 하셨다.
아버지께서 집을 짓는 동안 날마다 달려갔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기온이 내려가고 나는 늘 안절부절못했다. 아버지께 가서 밑반찬을 챙겨드리고 잠자리를 손으로 만져보고 춥지 않은지 살폈다. 집 짓는 공사장에서 일을 거들어서 아버지 옷이 흙투성이가 된 날에는 옷을 세탁하면서 눈물을 감추었다.
아버지의 새 집이 완성되는 날에는 독수리 오 남매가 모이고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음식을 접대했다. 동네 어르신들께서는 아버지 집이 튼튼하고 따뜻하게 잘 지었다고 덕담하면서 좋아했다. 아버지께서도 밝게 웃으면서 자식들을 내세웠다.
어르신들께서 약주를 드시면서 속내를 드러내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께서 “그때 내가 갔어야 했는데... 괜히 애들 고생시키네.”하는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는 아버지의 한탄을 가슴에 묻고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께 자주 찾아가고 전화를 드리면서 힘을 보태드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때 내게는 일하고 공부하고 아버지를 찾아뵙는 일이 전부였다. 아버지께서는 한결같이 ‘아버지 걱정하지 마라.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시댁 가까이 살면서 친정 자주 드나들지 마라. 흉이 되면 안 된다. 애들 잘 돌보고 네 몸 챙겨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전부 드리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기운 낼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그보다 더 한 것도 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오래오래 우리 옆에 머물러주시기만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운명은 너무 잔인했다!
아버지께서 새 집에서 지내시고 채 2년이 되지 않아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운명을 예견하셨는지 침대 옆에 오빠 전화번호와 내 전화번호를 큰 글씨로 쓴 메모지를 두었다.
아버지께서 천안 순천향 병원 응급실에 누워계신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부짖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내 곁에 계시리라 믿었기에 갑자기 닥친 이별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의료기가 간신히 아버지를 붙들고 있었다. 아버지 품에 안겨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께서 얼마나 훌륭하게 살아오셨는지 하늘도 땅도 세상도 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를 존경해요. 아버지를 사랑해요. 아, 아버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미쳐 다 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는 운명하셨다. 의료진들이 달려와서 아버지에게서 나를 억지로 떼어 놨다.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부터 내가 아버지를 찾아 뵐 때마다 말씀하셨다. “인희야, 아버지 도장은 어디에 두었느리라. 문서는 어디에 있단다. 이것은 여기에 있고, 저것은 저기 있느리라.” 나는 그때마다 “아버지, 싫어요. 그렇게 당부하는 말씀이 슬퍼지려고 해요. 기분이 이상해져요. 꼭, 먼 길 떠날 것처럼 말씀하지 말아요.”하고 울 듯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애써 웃으시면서 “이상할 것 없단다. 누군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하는 것이다. 네가 알고 있으면 아버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네게 당부하는 것이니. 너무 슬프게 받아들이지 마라.”하고 달래듯이 말씀하셨다.
그렇게 아버지께서는 한 걸음씩 내 곁에서 떠날 준비를 하셨다는 것을 아버지께서 떠나시고 난 후 깨닫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지어 놓은 수의를 입고 동화처럼 우리 곁을 떠나시던 날에는 겨우내 떨고 있던 나목에 새싹이 돋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장하여 모신 후 산에서 내려오는 검은 상복을 입은 내 눈에 진달래 꽃봉오리와 개나리꽃이 눈물과 범벅이 되었다. 내 생애 가장 슬픈 봄날이었다.
이맘때 무서리 내린 계절에 아버지께서 마을 회관에서 차갑게 지내고 계셨는데....
나는 지금 시린 마음 부여잡고 울고 있다!
첫댓글 효심 지극한 따님의 思父哭 을 듣고 있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 옴을 ..
길흉화복 도 생각 하기 나름
그 아버지에 그 딸
나목이 생존을 위해 잎을 떨구면서 새봄에 돋아날 푸른 잎들의 향연에 가슴을
졸이는 이치가 위로가 되는지 슬픔의 연장인지 이 또한 생각 나름
그리운 이여 ! 그립다 말을 하니 더 그리워 지는구려 ! 이제 울음 을 멈추어 주소서
새벽이 새 날을 노-크 하는 시간 입니다.
길흉화복도 생각하기 나름이라. . .
맞아요. 전화위복을 경험했습니다.ㅎㅎ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착하고 따뜻하게 지내겠습니다.
내가 행복하게 지내야 밤하늘의 별도 기뻐할테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