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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아델리나 패티”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패티의 음성을 들은 자들은, 한결같이, “신이 내린 음성”이라며, “콜로라투라의 파가니니”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패티가 프랑스로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패티는 먼저, 가족들에게, 자신의 짐을, 우편으로 보내달라 하고는, 프랑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곤, 우체국으로 가서, “아델리나 패티에게 온 우편물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직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우편물을 찾으려면, 찾는 자의 신분증이 있어야 한다며, 신분증을 요구했습니다. 순간, 패티는 자신의 신분증을 두고 왔다는 생각에 얼른, 자신의 명함을 건네었습니다. 여러분, 명함으로 신분증을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직원은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패티는, 자신이 패티이니, 우편물을 달라고 때를 썼습니다. 그러자, 직원은, “당신이 정말, 아델리나 패티라면, 명함이 아닌, 다른 것으로, 증명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에게, 다른 것으로 증명해 달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때, 우체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패티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어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우편물을 찾기 위해, 패티는, 자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고, 직원은, 감동스러운 표정으로, “감사합니다. 당신이 아델리나 패티가 아니라면, 그렇게 부르지 못할 겁니다”라면서, 우편물을 내 주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메스컴등 여러 방법으로 확인되겠지만, 워낙 유명했고,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였기에, 패티의 노래는, 준비되지 않았어도, 우체국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패티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팔당을 지나 광주 퇴촌이나 양평의 양동리를 지나다 보면, 가끔, 폐가들을 보게 됩니다. 제가 전임 전도사 시절, 교회 청년들과 함께, 양동리에 있는 교회로 수련회를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프로그램을 하고, 근처 냇가로 물놀이를 갈 때 였습니다. 가다 보니, 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폐가가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예전에, 다른 교회에 있을 때, 그 곳 학생들과 수련회를 왔을 때는, 분명, 사람이 살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그 곳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빈 집이 되어, 마당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문들은 부서진 체로, 삐걱거리며 매달려 있는 것이 보기가 안 좋았습니다. 본래부터, 모르는 집이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사람이 살던 집이라는 것을 알기에, 청년들과 물놀이 장소로 가면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정든 집을 저렇게 두고, 떠났을까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 하던 이스라엘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숨어 있는 아담을 향해, “네가 어디있느냐”고 하신 것처럼, 남 유다가 북 이스라엘의 타락을 답습한 것에 대해,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유다를 대표해서,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예레미야의 기도와는 무관하게, 우상숭배를 하며, 하나님을 등진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지도를 받으며, 예레미야의 기도를 따라, 입으로는 회개를 하지만, 여전히, 우상 숭배의 자리에서 돌이키지 않았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기에, 이스라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묵은 땅을 갈고, 마음 가죽을 벰으로 하나님께 속하라고 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풍성한 가을을 그리며, 파종할 때, 겨울내내 묵힌 땅에 그대로, 파종하겠습니까? 아니면, 잡초로 우거진 곳에 그대로, 파종하겠습니까?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돌만 나오는 곳을, 조금씩 조금씩 개간한 것이 3년이 되었다면서, 진행자와 함께 개간하는 것을 봤습니다. 풍성한 가을을 원한다면, 힘들어도 겨울내내 묵혔던 땅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유다에게, 마음의 밭을 갈아엎으라고 합니다. 회개는, 죄 사함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자리로 나가는 방편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첫째, 하나님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 1 - 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고 합니다.
본문 1절을 쉬운 성경역으로 보시면,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미워하는 네 우상들을 버리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증하다”의 히브리어는, “쉭쿠츠”입니다. 여기에는, “더러운 것, 혐오스러운 것, 아주 싫은 것, 미운 물건”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너희가 진실로 내게로 오려면, 그 동안, 너희가 중요하게 여겼던, 혐오스러운 것, 더러운 것들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굳게해서, 오라고 합니다. 창 34장을 보시면, 야곱의 집안에 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들들의 행위로 인해, 가나안과 브리스 족속으로부터, 위협을 받게되자, 야곱이 선택한 것이 뭡니까? 창 35: 3 – 4을 보시면,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라고 합니다. 자신들이 가장 중시여긴 것이라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혐오스럽다면, 죄가 된다면, 모두 포기하였던 겁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라는 야곱의 고백이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유다에게 원하신 것이, 이겁니다. 유다가 어떤 자리에 있든, 하나님께, 진실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께 돌아오는, 유다의 자세는 어떤 자세입니까? 본문 2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삶을 두고”라고 합니다. 당시, 근동지역에서는, 쌍방간에 계약을 하거나 맹세를 할 때는,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맹세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맹세에 대해, 조금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도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조금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면, 유다로 말미암아, 주변의 모든 이방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나온다는 겁니다. 진실한 회개는,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이 회복으로 인하여, 회개한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하나님의 축복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들어서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본문의 유다도 결국, 하나님이 돌아오라는 자리에 서지 않음으로, 주전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당합니다. 이를 보면, 성도된 우리의 마지막 보루가 어디겠습니까?
우리나라 교회사 가운데, 조금은 극단적이지만, 초대교회의 최권능 목사님으로 불리는, 최봉석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목회에 있어서도 권능으로 행하실 뿐 아니라, 모든 목사님이 찬성하신 의결도, 반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찬성하는 것을, 혼자서 “아니요”라고 반대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담대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이 사건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1890년 26세의 나이로,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오신, 마포삼열 선교사님이, 일본의 탄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목사님들이, 그간 선교사님의 노고에 감사하여, 기념비를 만들 것이 제안했고,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최 목사님이 한 마디 하셨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마포삼열 박사님을 존경합니다. 한국교회의 은인이며 나의 신앙의 선배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들이 마포삼열 박사님의 비나 동상을 세우면 나는 도끼로 때려 부술 겁니다. 당신들은 세우십시오. 나는 부술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최 목사님의 충정을 이해하신, 선교사님의 만류로, 기념관만 세워졌습니다. 최 목사님의 마지막 보류가 어디였습니까? 요즘, 교회들이 시끄럽고, 물의를 일으키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회들을 보면, 정신적 보루가 꼭 있습니다. 이른 바, 그 교회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 교회에서는 누구누구가 중심이다. 누구누구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 분이 안 계시면, 그 분이 행하지 않으면, 교회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주일학교를 담당하다 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오늘날에도, 각 교회에서 사역하는, 교육 전도사들 대부분이 겪을 겁니다. 부장님이나 총무교사 눈 밖에 나면, 주일학교가 운영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타협하거나 그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 보다는, 다른 무엇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좀처럼,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지막 보류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에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내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부름은, 이스라엘 최후의 보루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노선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코람데오의 삶”을 요구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라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찾는 삶, 하나님만을 높이는 삶, 하나님만을 자랑하는 삶을 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전 15: 10을 보시면, 사도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다른 그 무엇에 관심을 두었고, 중심을 두었고, 마음을 두었다면, 그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우리의, 최후의 보루로 삼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묵은 것을 갈아 내야 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지금까지 행했던 방식으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겨울내내 얼었다 녹았다 하는 땅에, 파종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돌이 많이 묻혀있고, 잡초로 우거진 땅에 파종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 주면, 곳곳에서 주말농장이 문을 열겁니다. 주말농장 주인들은, 이를 위해, 땅을 갈아엎고, 가시 떨기등 잡초는 뽑아내고, 거름을 뿌려 흙과 섞는 등 많은 일들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눅 8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연상케 합니다. 여기를 보면, 길 가에 떨어진 씨는 밟히거나, 공중의 새들에게 먹히고,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싹은 나지만,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해 말라 죽고,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는, 가시떨기의 가시에 갇혀 자라지 못하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묻습니다. 이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에 대해, 눅 8: 12 – 15을 보시면,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합니다. 호 10: 12을 보시면,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는, 예수님께, 멋진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지만,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자, 어떻게 합니까? 마 16: 22을 보시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항변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거칠게 항의했다는 겁니다. 이랬던 베드로가 어떻게 변합니까? 요 21: 18 - 19을 보시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는 말에, 항변했던 베드로였습니다. 또, 눅 9: 33을 보시면,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며,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욕심으로 말하던 자였습니다. 이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면, 예수님이, 요 21장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리고, 그 모습을 그대로 가졌다면, 그가 끝까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겠습니까? 딤후 4: 10을 보시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레스게나 디도는, 자신이 맡은 바 사명을 위해, 바울 곁을 떠났지만, 데마는, 결국, 하나님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묵은 땅을 갈아엎지 않고, 가시덤불에 파종한 사례입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호 10: 12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의 묵은 땅을 갈아엎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촉촉이 내려, 여러분의 삶 속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유다에게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라고 합니다. 이 말은, 1절에서, “네가 돌아오려거든”과 상통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합니다. 이 또한, 1절의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와 상통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삶 전체를 맡긴다는 겁니다. 이점에서, 유다가 행하는 할례는,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요, 정신의 할례이며, 삶의 할례였던 겁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할례는, 본문에서만 말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신 10: 16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를 보시면,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사도 바울 역시, 롬 2: 29에서,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 조문의 할례”는, “육체의 할례”입니다. 인터넷에서, “나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이는, 이지은 전도사님이, 우리나라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동안 강의해 왔던 것을 정리하여, 출판한 책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암기하고, 그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것이, 앞에서 읽어드린 신 10: 16과 롬 2: 29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할례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마 7: 21을 보시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또, 빌 3: 3을 보시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하며, 계 22: 14을 보시면,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입술만의 찬송이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감격이 되살아남으로, 주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끌려나오는 예배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됨으로, 하나님께 속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