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한의학의 의서와 인물
동의보감(東醫寶鑑)
우리 나라 3대 한의서 가운데 하나인 동의보감은 조선 중기의 태의였던 허준이 지었다. 조선 선조 29년(1596)에 왕명으로 김응탁을 비롯 양예수, 이명원, 정작등과 함께 집필하였으나 정유재란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그후 허준이 완성한 것이다. 한의학과 관계된 백과사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25권 25책을 조선 광해 5년(1613)에 내의원에서 간행하였다. 조선 세종때의 의방유취와 향약집성방, 조선 선조때의 의림촬요 등이 인용되어 있으며 각 강의 유에 따라 항과 목으로 나누어 병론과 방약을 빠짐없이 수록하는 한편 그 출전을 기록하고 있어 각 병증에 대한 고금의 치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점과 허준이 자신의 경험방을 적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억지스런 말을 배제하고 실증, 실용적인 처방을 정확하게 적고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내경편을 비롯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경, 외형, 잡병편에는 각종 병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옛날의 처방이 약 배분량이 너무 많은데다가 위급할 때 쓸 수 없는 점을 감안해 이를 제거하고 비교적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약재에 의한 처방을 제시해 놓았다. 내용은 내경편 6권을 비롯 외형편 4권, 잡병편 11권 탕액편 3권, 침구편 1권등이다. 내경편에는 신형과 정을 비롯 신·혈·몽·언어등 내과와 관련된 질병을 외형편에서는 두·면·이·비·배·요·협에 이르는 외과와 관련된 질병을 설명하고 있다. 잡병편에는 진맥·용약등 진담법에서부터 풍·한·서·황달·창만에 이르는 질환들이 섞여있으며 탕액편에는 채약법·건약법·수제법 등을 기록했다. 한편 침구편에는 화침법과 구법 침보사법이 적혀 있다.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
전염방의 치료와 관계된 여러가지 방문을 모아 엮은 의서인 간이벽온방은 조선 중종때의 의관인 김순봉을 비롯 박세거와 유영정등이 중종 20년(1525)에 편찬하였다. 1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중종 19년(1525) 봄까지 평안도에 전염성열병인 여역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죽자 이를 막을 생각으로 많은 한의서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먼저 병의 증상을 기록하였으며, 44개 항목으로 구성된 치료법부근에서는 치료법은 물론이고 예방법을 적고 있다. 증상부분에서는 나이에 관계없이 전염병에 걸리게 되면 열이 몹시 나고 정신을 잃게 되며 사망률이 높으므로 미리 약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예방법부분에는 환자와의 접촉을 될수 있는 대로 피하고 가족들의 옷과 환자의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어야 한다고 설명해 놓았다. 현재에는 원간본은 전하지 않으며, 다만 조선 선조 11년(1578)에 을해자로 간행되고 조선 광해 5년(1613)에 훈련도감자로 간행된 중간본이 전해진다.
허준(許浚)
조선 중기의 의인인 허준에 대해서는 선조실록을 비롯 광해군일기 등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허준의 묘역이 경기도 파주군등에 의해 민통선지대 안에 복원되기도 했다. 명종 1년(1546)에 태어나 광해 7년(1615) 70세에 죽었으며 본관은 양천, 호는 구암이다. 무관이었던 할아버지 허곤과 아버지 허륜과는 달리 29세되던 해인 선조 7년(1574)에 의과에 합격하여 의관이 되었다. 그뒤 내의를 비롯 태의, 어의로 이름을 떨쳤으며, 우리 나라 3대 한의서중 하나인 동의보감을 편술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51세되던 해인 선조 29년(1596)에 선조의 명으로 김응탁, 양예수, 이명원, 정예남, 정작 등과 내의원 편집구에서 작업을 시작해 10년만인 광해 2년(1610)에 완성을 했다. 이밖에도 56세되던 선조 34년(1601)에 언해구급방과 두창집요, 63세되던 해인 선조 41년(1608)에 언해태산집요, 67세되던 해인 관해 4년(1612)에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을 가가 개편하거나 간행, 편집, 저술하였다. 한편 허준은 품계가 종일품인 승록대부를 지냈으며 그의 생활이 담긴 허준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제마(李濟馬)
이제마는 사람들을 체격과 용모등 육체적인 측면과 성질, 정서, 행동 등 정신적인 측면등에 따라 네가지 체질로 구분하여 환자의 진단과 치료에 응용되고 있는 사상의학이론을 확증한 조선 말기의 한의학자다. 헌종 4년(1838)에 함경남도의 함흥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고종 4년(1900)에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본관은 전주, 호는 동무였다. 56세때인 고종 30년(1893)에 자신이 맡고 있던 진해현감을 그만두고 서울로 와 책을 저술하기 시작해 이듬해인 고종 31년(1894)에 동의수세보원의 저술을 마쳤다. 58세되던 해인 고종 32년(1895)부터는 함흥으로 가서 어머니의 병을 돌보면서 의업에 종사하였다. 1900년에 동의수세보원의 내용을 개편하기 시작했으나 그가 죽자 제자들이 모여 동의수세보원의 증보판을 출판하였다. 이밖에 이제마의 저술로는 격치고가 있다.
강명길(康命吉)
조선 후기 의관이였던 강명길은 정조 23년에 왕명으로 제중신편이라는 제목의 의서를 편찬해 우리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영조13년(1737)에 태어나 순조 1년(1801)에 유명을 달리하였으며 본관은 승평이다. 아버지는 강덕령이며 의과출신인 강명오와는 형제간이고 어렸을 때 부르던 이름인 초명은 명휘 자는 군석이었다. 34세되던 해인 영조 44년(1768) 의과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이 의과선생안에 보인다. 이듬해에 대궐안의 의약을 맡아보던 부서인 내의원의 의관이 되었으며 정조가 임금의 장손인 왕세손으로 있을 때에 특별히 사랑을 받아 의약에 대한 자문을 맡기도 하였다. 58세때인 정조 18년(1794)에는 내의원의 제일 높은 의원인 수의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양주의 지방장관인 목사와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중추원을 고쳐부르던 중추부의 부사를 지냈으며 종일품인 슬록대부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65때인 순조 1년(1801)에 정조의 질병을 잘못 치료했다고 하여 동료 의관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우리 나라 한의학의 고전인 제중신편은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의 번잡함을 피하여 간략하게 요약한 총 8권의 책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한편 동의보감에 중요한 부분을 뽑아 통현집을 편찬하였으며 강명길에 대한 참고문헌으로는 정조실록과 순조실록 등이 있다.
권중화(權仲和)
문신인 권중화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를 살았던 인물로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용부, 호는 동고였다. 32세때인 고려 공민왕 2년(1353)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왕명을 전하는 벼슬인 승지에 해당하는 우·좌부대언을 거쳐 고려 후기 몽고간섭기에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관청인 밀직사의 정삼품 관직, 지신사로서 관리를 뽑는 일을 맡았다. 또한 56세때인 고려 우왕 3년(1377)에는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던 중서문하성의 종이품 벼슬인 정당문학의 신분으로 과거의 최종시험인 예부시의 시험관이 되었다. 이밖에도 71세때인 고려 공양왕 3년(1392)에는 중국에 보내는 사신인 보은사로 명에 파견되었다가 왕조가 바뀐 후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한편 의약에도 정통하여 고려 말기에 유행한 의학서인 삼화자향약방을 보충하는 성격의 향약간이방을 서찬 등과 편집하였으며, 78세때인 정종 1년(1399)에는 한상경과 신편집성마우이방을 새로 편집하였다. 권중화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와 태조실록등에서 볼 수 있다.
권찬(權攢)
조선 초기의 의관이자 문신인 권찬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취지시호는 정순이다. 아버지는 관리들을 통솔하고 정사를 도맡아 하던 최고 행정관청인 의정부의 종일품 벼슬인 좌찬성을 지낸 권훤이며 세종 12년(1430)에 태어나 성종 18년(1847) 56세에 삶을 마쳤다. 33세때인 세조 8년(1462)에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인 사마시에 합격, 의서를 읽고 익히는 관리인 의서습독관에 임명되어 의방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37세때인 세조 12년(1466)에는 궁중에서 쓰이는 의약을 맡아보던 내의원의 종육품 벼슬인 주부 겸 의학교육을 맡아보던 의학의 교수를 지냈다. 그 이듬해에는 공조의 정육품인 좌랑으로 있으면서 왕손의 질병을 치료하여 왕실의 족친과 관계되는 일을 맡았던 종친부의 정오품인 전부령으로 승진됐다. 또 48세때인 성종 8년(1477)에 성종의 질병치료와 의서유취를 간행하여 정이품의 품계에 해당하는 자헌대부가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치료에 힘써 많은 사람을 살렸으며, 이로 인해 명의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김순몽(金順蒙)
조선 중종 20년(1525)에 박세거, 유영정과 간이벽온방을 편찬한 김순몽은 태어나고 죽은해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관직에 대한 언급만이 1962년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의학사급질병사에 실려 있다. 중종 11년(1516) 궁중에서 쓰이는 의약을 맡아보던 내의원의 종일품에서 정·종이품에 해당되는 제조조 임명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임금이 질병이 있을 때에 임시로 설치했던 기관인 시약청의 의원이 되었다. 주로 종기를 잘 치료하여 명의라 불리웠으며, 중종 14년(1519)에는 종오품 벼슬인 판관에서 정삼품 통정대부 이상에 해당하는 당삼의관을 제수받았다.
김응삼(金應三)
숙종 6년에 태어난 조선 후기의 의관인 김응삼은 죽은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다. 효종 1년(1650)과 숙종 7년(1681) 의과에 뽑힌 김경화와 김후가 할아버지고 아버지며, 의과출신인 김성수와 김광국이 아들이며 손자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정보, 호는 행촌이다. 20세때인 숙종 25년(1699)에 나라에 경사 있을 때 기념으로 실시하던 과거인 증광시 의과에 합격하여 의과선생안에 이름이 적혀 있으며, 내의원의 의관인 내의가 되었다. 33세때인 숙종 38년(1712)에는 청나라 연경에 임금이 특별히 파견한 의사로 다녀왔으며 51세때인 영조 6년(1730)에는 빈궁의 질병을 치료해 상을 받기도 했다. 한편 수종실록과 영조실록, 의과선생안 등의 서적에 따르면 김응삼은 무려 23년간 내의원의 수의로 있었다.
유이태(劉爾泰)
머리에 나는 부스럼인 두창과 홍역등의 질병이 널리 퍼지는데 자극을 받았던 유이태는 조선 정조때의 명의였다. 자신의 집에 대대로 내려오던 마진경험방을 근거로 해서 정조 10년(1786)에 붓으로 직접 쓴 마진편을 내놓았으며, 지난 1931년 경남 진주에서 박주헌이 출간한 바 있다. 특히 유이태는 우리나라 구비문학 차원에서 볼때 허준과 함께 설화를 지닌 인물이다. 유이태 설화는 주로 영남지방에서 전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이태탕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인즉 하루는 유이태가 어느 곳을 지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담장 밑에서 약을 달이는데 약봉지에 유이태탕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이태가 적힌 연유를 물으니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면 명의인 유이태가 있어야 하는데 그를 만날 길이 없어 그 대신 약봉지에 유이태라고 쓰게 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질만큼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