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㉘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㉙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㉚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㉛야곱이 또 이르되,“내게 맹세하라.”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나이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달력의 나이’이다. 달력이 넘어간 수대로 나이를 먹는다. 예외는 없다. 달력의 나이로 어른 노릇하려는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둘째는 ‘생물학적 나이’이다. ‘건강의 나이’이다. 달력의 나이가 70이라 하더라도, 건강 관리를 잘하면 생물학적 나이는 40일 수 있다. 셋째는 ‘정신적 나이’이다. 나잇값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이런 경우 ‘철이 없다’라고 한다. 나이에 비해 너무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경우는 ‘애늙은이’라고 이야기한다. 넷째는 ‘사회적 나이’이다. 사회에서 나이에 맞는 행동을 요구한다. 8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가야만 한다. 20살이 되면 군대를 가야 한다. 다섯째는 ‘자각의 나이’이다. 자기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나이이다. 달력의 나이가 많아도, 스스로가 젊다고 생각하면 젊은 것이다. 젊어도 희망이 없다면, 그는 늙은 것이다.
가나안 정탐꾼이었던 갈렙의 ‘달력의 나이’는 85세이다. 그렇지만 그의 ‘자각의 나이’는 40세이다.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사명감이 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수 14:12) 크고 견고한 헤브론이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읍이다. 능히 저들을 이길 수 있다.
야곱의 ‘달력의 나이’가 147세가 되었다.애굽에 왔을 때, 그의 나이는 130세였다. 그리고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으로 야반도주한 당시의 나이가 77세였다. 남들은 손주 재롱 보면서 쉴 나이에, 야곱은 고난의 세월을 시작하였다. 그나마 마지막 인생 17년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과 더불어,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평안의 극치를 누렸으니 말이다. 창조의 축복을 누렸으니 말이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27절)
고난의 세월에 비해, 행복한 세월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야곱은 벌써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29절) 유언은 가장 사랑스러운 아들, 가장 믿음직스러운 아들 요셉에게 당부한다.
유언을 하기에 앞서, 야곱은 요셉의 손을 자신의‘허벅지 아래’에 넣으라고 말한다. 이것은 고대 근동의 엄숙한 서약 의식이다. ‘허벅지 아래’는 남자의 생식기를 가리킨다. 그곳에 손을 대고 맹세하는 것은 맹세의 엄숙성 및 절대성을 상징한다. 생식기로부터 생명이 시작된다. 즉‘허벅지 아래’ 약속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약속이라는 의미이다.
야곱이 그토록 당부하는 유언의 내용은 이것이다.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29절) 자신의 시신을 절대로 애굽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 애굽에 있을 때처럼 행복했던 적은 없다. 풍요로웠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가나안으로 가야만 한다. 가야만 하는 본향이 있다. 그곳은 애굽처럼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다. 그곳은 애굽처럼 치안이 안전하지 않다. 그곳은 애굽처럼 존경 받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계시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땅이다. 그래서 가야만 한다. 지금의 안락으로 인해, 가나안을 잊으면 절대로 안 된다.
당시에는, 죽음이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30절) 야곱의 조상들은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 안치되었다. ‘조상의 묘지’에 당연히 야곱 자신도 묻혀야만 한다.
인도에서 일곱 마리의 코끼리가 기차에 치여 한꺼번에 죽는 사고가 있었다. 코끼리들이 철길을 건너던 중, 새끼 코끼리의 발이 철로에 끼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어른 코끼리들은 기차가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새끼 코끼리를 도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도무지 발이 빠지지 않는다. 기차가 오는 데도 한 마리의 코끼리도 피하지 않은 채,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생명도 함께 나누지만, 죽음도 그들에게는 함께 나눠야만 하는 것이었다.
수의사가 코끼리에게 마취총을 쏘았다. 마취총을 맞은 코끼리는 당연히 쓰러졌다. 그런데 주위에 있던 다른 코끼리들이 도망을 가지 않는다. 오히려 쓰러진 코끼리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만든다. 나뭇가지와 잎사귀들, 그리고 흙으로 쓰러진 코끼리에게 덮어주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코끼리의 그러한 행동을 죽음의 냄새를 가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쓰러진 코끼리가 굳이 자기 가족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잠들어 있으면, 사람에게도 이불을 덮어준다. 죽음의 자리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마음이다. 그래서 그럴까? 코끼리는 이따금 다른 코끼리들의 무덤을 방문한다. 코끼리는 죽을 때, 다른 코끼리들의 무덤으로 가서 죽는다고도 한다.
이건 예언이다. 절대로 틀리지 않는 예언이다. 사람은 죽는다. 누구나 죽는다.아담은 930세를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 피해가고 싶지만, 절대로 피할 수 없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
‘데스티네이션’ 영화 시리즈가 있었다. 3편 제목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이었었다. 그런데 4편과 5편까지 제작되었다. ‘데스티네이션’(Destination)은 ‘운명’이라는 뜻이다. 또 하나의 뜻이 있다. ‘마지막 종착지’이다. 영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알렉스에게는 죽음을 예지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친구들의 죽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고를 피하였으나, 갑작스럽고 신비한 사고로 인하여, 친구들이 하나씩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죽는 것은 ‘운명’이다.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 그리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종착지’이다.
죽음이 무엇일까?의식이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기절과 비슷하다. 죽음을 영면(永眠)이라고 한다. ‘잠’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잠에서는 꿈을 꾸지만, 기절하면 꿈을 꾸지 않는다. 물론 죽음 상태에서도 꿈을 꾸지 않는다. 죽음은 생명에 관계된 모든 신체활동이 정지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고통스럽게 받아들인다. 두려움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것이 참 우스운 이야기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서도, 고통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한다. 불로초를 먹는다. 살아있는 채로 냉동실에 들어가 수십 년간 잠을 자기도 한다.
‘귀신의 집’이 있다. 귀신 분장한 사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가, 요란한 소리와 행동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귀신 분장한 사람들이지, 절대로 귀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분명히 숨어있다. 다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깜짝깜짝 놀란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다 안다. 두 번이 아닌, 한 번이라는 것도 안다.‘귀신의 집’에 숨어 있는 사람이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놀라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다.
‘귀신의 집’에 두 번 들어가면,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 무서워할까? 놀랄까? 하나도 무섭지 않다. 놀라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다음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미지의 종착지, 가야만 하는 종착지, 운명이 된 종착지, 그것은 죽음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오시리스와 아누비스의 심판을 받아 심장을 깃털과 함께 저울에 잰다. 이때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죄를 많이 지은 걸로 판정되어 암무트에게 심장을 먹혀 영원히 구천을 떠돌고, 착한 사람은 오시리스의 왕국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고 믿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3일 동안 몸에 그대로 남아서 한평생 행한 일을 돌이켜보다가, 제4일이 되면 심판대로 간다고 믿었다. 그곳에서 태양신 미트라가 죽은 자의 삶의 행위를 저울에 올려놓고 심판을 하여, 저울이 악한 쪽으로 기울면 그 영혼은 지옥으로 가고, 약간이라도 선한 쪽으로 기울면 그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고 믿었다. 심판을 받은 영혼은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를 지나가게 되는데, 선한 영혼은 넓고 편안한 다리를 건너서 계곡 너머의 천국으로 가고, 악한 영혼은 칼날 같은 다리를 건너다가 결국 계곡 아래의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믿었다.
창 5장에는 아담의 족보가 설명되었다. ‘아담’은 ‘인간’, ‘셋’은 ‘정해진’, ‘에노스’는 ‘죽어야 할 운명’, ‘게난’은 ‘슬픔’, ‘마할랄렐’은 ‘찬양받으실 하나님’, ‘야렛’은 ‘내려오다, 하강하다’, ‘에녹’은 ‘가르치다, 지시하다, 훈련시키다’, ‘므두셀라’는 ‘보낼 것이다’, ‘라멕’은 ‘숨겨진 왕’, ‘노아’는 ‘안식을 주다’는 뜻이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 계보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의 뜻을 한 문장으로 이끌어 보면, 아래와 같은 깊은 숨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인간은 죽어야 할 슬픈 운명으로 정해졌다. 찬양받으실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그의 죽으심은 숨겨진 왕과 안식을 보낼 것임을 가르치실 것이다.’
‘귀천’이라는 시가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천상병 시인의 노래가 아니다. 그가 실종되었었는데, 가족들은 그의 사망신고를 하였다. 후에 그 이야기를 듣고, 천상병 시인은 노래한 것이 귀천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소풍과도 같은 삶을 마감하고 귀천, 나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1993년에 교통사고가 있었다. 운전한지 세 달이 안 되었을 것이다. 고갯길에서 내려갈 때, 앞차가 너무 급하게 끼어드는 바람에 그만 차가 논두렁으로 굴렀다. 1분도 아닌, 10초도 안 걸렸을 상황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짧은 순간에, 내가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이 다 떠올랐다.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이렇게 죽는 구나. 하나님, 받아주세요.’라는 기도까지 하였다.
임종이 코앞에 닥치면, 우리 몸에서 엔도르핀이 다량으로 방출된다. 엔도르핀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진통 효과가 아주 탁월하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죽음을 편안하게 맞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죽음은 두려운 적이 아니다.내가 한평생 예수 잘 믿고, 선하게 살았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실 터이다. 나쁜 짓만 골라 살았던 인생이 아니라면, 두려워할 것이 하나 없다. 에녹은 하나님과 일평생을 소풍처럼 즐긴 사람이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것이 내 모습이 되어선 안 될 이유가 있겠는가?
소풍에 나선 사람처럼 인생을 살면 어떨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두 팔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기쁨으로 그 날이 오기를 사모하자. 우리는 본향을 향하는 순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