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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미국에서 독립운동 기록 (자료집 해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 제18권 구미위원부Ⅱ 해제
고정휴(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해 제
1. 구미위원부의 외교 및 선전활동
구미위원부-대외적으로는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관련문서들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구미위원부의 조직 및 운영에 관계되는 문서들과 그들이 발행한 통신문류이다. 둘째는 이승만-구미위원부와 미국 정부(주로 국무부) 사이에 오고간 문서들과 대외적으로 발표된 각종 선전문건류이다. 이들 문서 중 전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17권에, 후자는 본 자료집(제18권)에 각각 수록되었다.
이 자료집에 수록된 문서들을 살피기 위해서는 구미위원부의 외교 및 선전활동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에 이에 대하여 먼저 약술하고 자료집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3·1운동 이후 한국민의 독립 요구에 대한 서구 열강의 공식 반응은 한국문제는 일본의 내정문제로서 자신들이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구미위원부는 설립 후 일단 정부 차원의 교섭을 뒤로 미루고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구미위원부의 선전방식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일반 국민을 상대로 직접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그들의 관심과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신문 및 잡지에의 기고와 각종 홍보물의 제작·배포였다. 셋째는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로 결성된 ‘한국친우회’를 미국 내 주요 도시와 유럽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다소 막연하고 그 전망 또한 불투명했지만, 공식적인 외교 교섭의 통로가 닫혀 있는 상황에서는 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활동에는 이승만·정한경·서재필 등이 앞장섰다.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설립 후 워싱턴의 일상 업무는 위원장인 김규식에게 맡기고 미국의 주요 도시와 교민들의 거주지를 순회하며 강연활동을 펼쳤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외교협찬원’이었다가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선임된 정한경은 주로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서 활동했다. 필라델피아통신부의 책임자인 서재필은 자신의 생활근거지인 필라델피아와 그 주변에서 활동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교육 및 선교사업에 종사했던 헐버트(Homer B. Hulbert)와 벡(S. A. Beck)이 구미위원부의 ‘선전원’으로 활약했다. 헐버트는 구한말 한국에서 교육 및 선교활동에 종사했고, 1905년 11월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되기 직전 고종 황제의 ‘밀사’로서 미국에 파견된 바 있다. 벡은 한국성서공회 소속의 선교사로서 신흥우가 한성정부의 선포문건을 비밀리에 미국으로 가지고 나올 때 그를 도왔던 인물이다. 1920년 10월호 『한국평론』에 따르면, 벡은 지난 4개월 동안 뉴욕, 뉴저지, 펜실베니아, 코네티컷, 메사추세츠주 등 대서양 연안의 중·북부지역을 돌아다니며 약 10만명에게 한국문제에 대하여 강연을 했다. 헐버트도 그해 여름 미국 중부와 북서부 지역을 순회하며 10만명에게 한국사정을 알렸다.
구미위원부의 초기(1919~1920) 선전활동은 전후 미국에서 일고 있던 배일여론과 맞물리며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왕조 말기에 형성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일제의 잔혹성이 널리 알려졌다. 미국 상·하 양원에는 한국민의 독립 열망에 동정을 표하는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여기에는 물론 한계가 있었다. 구미위원부는 미국 내에 친한여론을 조성함으로써 의회를 움직이고, 이를 통하여 윌슨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그런데 미 의회에서는 1920년 3월 베르사이유조약의 비준을 거부한 뒤 더 이상 한국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무렵 선교단체들은 한국민이 일제의 식민통치 개선에 순응 내지 협조할 것을 권고했다. 그들은 한국의 독립보다는 현상유지를 원했다.
1921년 7월 중순 미국의 신임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관계 열국에 워싱턴회의(Washington Conference)의 개최를 제안했다. 미국은 일본의 태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제1차 세계대전시기 서구 열강이 유럽에서 총력전을 펼치는 동안 일본은 만주와 몽고, 시베리아, 중국 본토와 티벳, 태평양의 섬들에까지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일본의 이러한 팽창정책은 미국의 문호개방정책과 배치되는 것으로써 일각에서는 미일전쟁설이 나돌 정도로 양국 관계가 긴장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워싱턴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한국의 민족운동세력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주의 『신한민보』와 상해의 『독립신문』,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들은 워싱턴회의와 관련된 기사들을 집중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국민적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구미위원부는 위원부와는 별도로 ‘한국대표단’을 구성하고 워싱턴회의에 한국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다. 미주한인사회는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그러나 주최국인 미국은 한국대표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1921년 2월에 종결된 워싱턴회의는 미·일간 현안을 일괄 타결하면서 소위 워싱턴체제를 출범시켰다. 이후 구미위원부는 장기간 침체에 빠졌고, 상해임정은 1925년 3월에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유지하면서 간간히 선전활동을 펼쳤다.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침공을 전후하여는 상해임정과 이승만 사이에 타협의 움직임이 있었고, 이를 배경으로 구미위원부 명의의 선전물이 간행되기도 했다. 본 자료집에는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이 한국독립운동 전개에 미친 영향을 고려하여 1930년대 초반의 선전물까지를 수록했다.
2. 대미교섭 문서
1) 대미 교섭문서(1)
여기에 수록된 문서들은 미국 국립문서관(National Archives)에 보존되어 있는 문서들 중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되어 일반에 공개된 바 있는, “한국 내정관계 미 국무부 문서철(Records of the U. 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Internal Affairs of Korea), 1910~1929”에서 선별한 것들이다. 통상적으로 미 국무부의 일반문서들(Record Group 59)은 십진분류 문서철 체계에 따라 정리되는데, 그 가운데 “십진문서철 895(Decimal File 895)”에 한국과 관련된 일반 외교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외교문서들 중 일정 시기가 경과한 후 소정절차를 밟아 공개된 문서들이 자료 보존과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배포되는 것이다.
“한국 내정관계 미 국무부 문서철, 1910~1929”은 마이크로필름으로 9개 분량이지만, 그 중 이승만과 구미위원부의 대미 교섭문서는 얼마 되지 않는다. 3·1운동으로 한국민의 독립의지가 널리 알려지기는 했지만,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한국문제를 일본의 ‘내정문제’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구미위원부는 미 국무부와의 교섭을 끊임없이 시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다.
여기에 수록된 문서들은 세 시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1919년 3월부터 7월까지이다. 이 시기 한국에서는 3·1운동이 진행되고 있었고, 파리에서는 미국과 영국·프랑스의 주도 하에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3월 10일에 처음으로 3·1운동의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다음 날 미 국무장관 대리(Frank L. Polk)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에서의 일본의 잔학행위에 대한 중지를 요청한다. 그 해 6월 14일 이승만은 자신이 서울에서 선포된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세칭 한성정부를 말한다-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음을 미 국무부에 통고했다. 한편으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도 전문을 보내 한국문제에 대한 ‘거중조정’을 요청하지만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 파리강화회의가 끝나기 하루 전인 6월 27일 이승만은 윌슨에게 다시 전보를 보내, 한국 국민과 정부는 ‘한국 대표’가 참여하지 않은 강화회의의 어떤 결정에도 구속받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한국민에게 다대한 희망과 기대를 품게 했던 파리강화회의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제2기는 1919년 8월부터 1921년 9월까지이다. 이승만은 1919년 8월 25일에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개설한 직후에 초대 위원장 김규식과 공동명의로「한국민의 지속적인 독립 선언과 요구(Proclamation and Demand for Continued Independence of the Korean Nation)」를 발표했다. 이는 한국문제를 외면한 파리강화회의의 결정과 일본측이 한국민에 대한 회유책으로 제시하던 ‘자치론’을 배격함으로써 구미위원부의 존립과 활동 근거를 마련코자 하는 결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1920년 상반기에는 한국친우회가 전면에 나서 한미수호조약(1882)의 ‘거중조정(good offices)’에 의거,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이러한 요청에 대하여 미 국무부는 1910년 8월 22일에 체결된 한·일간 합병조약에 따라 한국은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한미수호조약도 자동적으로 소멸되었다는 논리를 폈다. 이승만은 1920년 6월, 김규식은 그 해 9월에 각각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에 잠시 머물다가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제3기는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이다. 이승만과 김규식이 워싱턴을 떠난 후에는 현순이 구미위원부의 임시위원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후 구미위원부에 대한 미주 교민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한편 워싱턴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현순은, 1921년 3월 공화당의 하딩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대표’의 명의로 한미간 공식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요청하는 공한을 하딩과 국무부에 보냈다. 미 국무부는 이때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간 1905년 이후 미국은 한국과 어떠한 외교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정리하고 현순의 서한에 대하여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 대미 교섭문서(2)
여기에 수록된 문서들은 워싱턴회의(1921. 11. 12~1922. 2. 6)와 관련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집·보존하고 있던 문서들 중에서 선별한 것이다. 이들 문서들 또한 미 국립문서관 소장 국무부문서철의 일부이다. 워싱턴회의는 당시 국내에서 ‘태평양회의’ 또는 ‘워싱턴군축회의’로 불렸다.
1921년 7월 중순 미국의 하딩 대통령으로부터 워싱턴회의에 초청을 받은 나라는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칼 등 8개국이었다. 한국은 이때 초청을 받지 못했지만 대표단(‘Korean Mission’)을 출범시켰다. 이승만이 단장이고 서재필이 부단장, 정한경이 서기, 돌프(Fred A. Dolph)가 고문이었다. 이들 대표단은 상해임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 한편 특별 법률고문의 자격으로 토마스(Charles S. Thomas)가 한국대표단에 합류했다. 민주당원으로서 콜로라도 주지사와 연방 상원의원을 지낸 토마스는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로비활동을 맡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해 10월 1일에 ‘한국대표단'은 연명으로 미 국무장관 휴즈 (Charles E. Hughes)가 이끌게 될 미국대표단에게 청원서를 보내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가 다루어질 수 있도록 미국대표단이 적극 중재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미 국무부 극동국은 “한국이 현재 아무런 국제적 지위도 갖고 있지 못하며, 우리는 그 나라와 1905년 이래 어떠한 외교적 접촉도 없었다”면서 한국대표단의 청원서에 대한 아무런 언급없이 그것을 문서철에 보존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국무장관에게 건의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대표단’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미국 각처의 한국친우회와 재미한인단체들을 동원하여 미국 정부와 의회에 청원서를 보내는 운동을 전개했다. 예컨대 필라델피아의 한국친우회 회장인 톰킨스(Floyd W. Tomkins)는 워싱턴회의가 개최되기 하루 전날 미국대표단 단장인 휴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한국친우회가 25,000명에 달하는 미국 시민들을 회원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 뒤 동양에서 서구문명 특히 기독교를 가장 빨리 그리고 폭넓게 받아들인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인들이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면서 한국인들이 워싱턴회의에서 그들의 주장과 요구를 진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회의에 참석한 열강이 2천만 한국민의 평화적인 호소를 계속 외면한다면 그들은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극동에서 새로운 혼란과 전쟁이 야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11월 22일에는 필라델피아의 한 침례교회에서 대중집회가 열렸다. 톰킨스가 주재한 이 집회의 참석자들은 지정학적, 역사적, 정치적 제요인을 고려해 볼 때 한국은 중국·일본·러시아 3국 사이에서 ‘독립된 완충국(an independent and buffer state)’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래야만 극동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상공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워싱턴회의에 출석한 미국대표단이 한국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조미수호조약(1882)에 합치하는 공평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톰킨스는 이 결의안을 미국대표단에 서면으로 전달했다.
미주교민들도 청원활동을 전개했다. 하와이의 대한인교민단 단장인 민찬호는 이곳 6천명 한인들을 대표하여 휴즈 국무장관에게 전보를 보냈다. 그는 이 전보에서 한국이 자유롭기 전에는 동양에서의 영구평화는 있을 수 없다면서 한국대표단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캘리포니아주의 다뉴바(Dinuba)에 있는 대한애국부인회도 휴즈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민이 현재와 같은 혹독한 식민지배 하에서는 일본인과 더불어 살 수도 없고 살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미국의 호의적인 주선으로 한국인들이 파멸에서 구원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한국대표단에게 워싱턴회의에 출석할 기회는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이로써 3·1운동 후 대미외교를 주도해 왔던 이승만과 구미위원부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당시 『동아일보』의 기자로서 워싱턴회의를 참관했던 김동성은 귀국 후 환영연에서, 그동안 미국이나 기타 외국인들이 한국독립을 원조하거나 이에 동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결코 그들의 성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종교 선포의 한 수단으로서 교묘히 한국인에게 영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은 당분간 절망이므로 한국인은 모름지기 문화의 향상·발전에 노력하고 실력양성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국내에서는 이른바 민족주의 우파를 중심으로 한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워싱턴회의는 그만큼 한국의 민족운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3. 선전문건류
3·1운동 이후 구미위원부와 국민회 중앙총회는 다양한 형태의 홍보물을 직접 발행하거나 주문 제작하여 널리 배포했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 그것들은 대략 40~50종에 달하는데, 본 자료집에 수록된 것은 모두 10종이다. 즉 구미위원부의 법률고문 돌프가 작성한 문건이 3건, 서재필이 맡고 있던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에서 발행한 팜플렛이 3건, 워싱턴회의에의 청원서가 2건, 그리고 1930년대 초에 발행된 팜플렛이 2건이다.
1) 법률고문 돌프의 작성문건(3편)
일리노이주 출신의 변호사 돌프(F. A. Dolph, 1871~1926)는 3·1운동을 계기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9년 6월 14일에 미 국무장관 대리 폴크(Frank L. Polk)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대한공화국’을 조직·선포한 사실을 통고하면서 돌프가 앞으로 대한공화국(나중에는 구미위원부)의 변호인이자 법률고문으로 활동하게 될 것임을 알린 바 있다. 이후 돌프는 1926년 11월 29일에 심장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구미위원부의 제반 활동에 대하여 법률적 자문을 하고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성심성의껏 노력했다. 『동아일보』는 그 해 12월 30일자 신문에서 돌프의 쓸쓸한 장례 기사를 내보내면서, 그가 “기미년(1919) 이후로 벌어쓴 돈이 40여 만원에 달하나 그 돈은 [구미]위원부 공용으로 쓴 것이 대다수에 달한다더라”고 했다.
①「한국문제(The Korean Question) 」
“대한민국에 관한 진술 및 개요(Statement and Brief for the Republic of Korea)”라는 부제가 붙은 이 문건은, 1919년 9월 19일에 상원의원 스펜서(Seldon P. Spencer)의 제안에 의하여 미 의회 의사록(Congressional Record)에 수록되고 상원 외교위원회에 회부되었던 것이다. 이후 구미위원부는 그 문건을 별도로 ‘수만 부’ 인쇄하여 일반에 널리 배포했다(『구미위원부 통신』제9-4호). 미 의회 의사록에 수록되었던 만큼 한국문제를 선전하는 데 대단히 유용하게 활용되었던 것 같다.
12쪽 분량의 문건에는 일본에 대한 고발(charge)과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실들(facts)’이 간략하지만 요령 있게 서술되고 있다. 결론에서, 한국이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물리적 개입이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킴으로써 자신의 과오를 시정한다면 일본은 세계 모든 국가로부터 경멸이나 멸시를 당하지 않을 것임을 충고하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요컨대 일본이 스스로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미국이 막후에서 거중조정과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것이다.
이 문건은 1919년 10월 하원의 외무위원회에도 제출되었는데, 이때에는 한미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했다. 1921년 6월 국무장관 휴즈(Charles E. Hughes)에게 보낼 때에는 상원과 하원에 보냈던 문건을 합하여『한국적요(Brief for Korea)』(44쪽)라고 했다.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지만, 이들 문건은 법률적 차원에서 한국문제를 다루고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실적 증거들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② 『일본의 한국 경영(Japanese Stewardship of Korea)』
1920년 워싱턴 D.C.의 한 출판사(Byron S. Adams)에서 간행된 팜플렛(44쪽)으로, 일본인과 친일파들이 일본의 한국 통치 이후 한국인들은 물질적 번영과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선전의 허구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돌프는 국가의 명예라든가 조약의 신성성, 기본권과 도덕적 정의에 대한 일본의 침해라는 모든 문제들을 배제하고 순전히 경제적·재정적 측면에서 일본이 주장하는 ‘물질적 혜택들’의 실상에 대하여 검토하고 있다.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기하기 위하여 돌프는 일본 정부측 자료와 보고서에 기초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돌프는 일본이 한국과의 ‘보호 및 합병조약’에 의하여 대리인이자 수탁인으로서 한국의 경영 책임을 맡았지만, 지난 15년간 한국과 한국민을 경제적으로 수탈했을 뿐 실제적인 물질적 혜택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한 예로서 돌프는 일본에 의해 한국의 ‘국채’가 크게 증가하고 한국민은 대한제국기보다 두 배 이상의 세금을 내야 했다는 점을 통계로서 제시했다. 그는 또 일본이 한국에서의 벌목 사업과 철도 운영, 인삼 판매와 탄광 경영 등에 의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외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일본의 한국 ‘경영’의 실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문건이다.
③ 『극동에서의 대차대조표(Balancing Debits and Credits in Far East)』
1920년 9월호 『한국평론(Korea Review)』에 실렸던 글로서, 나중에 독립된 문건으로 제작되어 일반에 배포되었다(20쪽).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얻어 한국과 만주, 몽고, 중국 본토 등에 투자하고 있는데,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로 말미암아 이들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가 불가능하며 기득권마저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흥미롭게도 돌프는 이 문건의 머리말에서 자신이 지난 15년간 공공사업을 위한 차관 및 신용 대출을 얻는 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경제적·재정적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 일본과 동아시아의 관계에 흥미를 갖고 이 문제를 깊이 다루게 되었던 것도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2)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한국친우회 발행 선전책자
한국통신부는 1919년 4월 중순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서재필의 제안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재정지원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의 명칭은 ‘대한공화국 통신부(The Bureau of Information for the Republic of Korea)’로서, 미국 내에서 일본의 왜곡된 선전에 대항하여 한국문제에 대한 공정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를 위하여 통신부는 『한국평론(Korea Review)』이라는 영문 월간잡지를 발간하고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의 조직 확장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서재필의 주관 하에 발행되었던 『한국평론』은 3·1운동 후 미주한인사회의 가장 유력한 선전매체로서 1919년 6월부터 1922년 7월까지 발행되었다. 매회 발간 부수는 2,500부 정도로서 미국의 정부기관과 대학·교회 등에 무료로 배포하고 일반 독자들로부터는 구독료(일년 2달러, 1부는 20센트)를 받았다. 한국통신부는 처음에는 국민회 중앙총회의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선전활동을 펼쳤으나, 1919년 8월 말 구미위원부가 설립된 이후부터는 위원부 산하단체로 편입되어 매월 800달러 정도의 지원을 받았다.
①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for Korea)』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가 공동 제작한 팜플렛(15쪽)으로, “외국 지배로부터의 독립과 해방에 대한 요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한국의 국토와 민족, 역사와 문화, 일제치하의 한국, 한민족의 열망 등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한민족의 열망이라는 장에서는, 1919년 4월 중순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제1차 한인회의’의 결의문들-즉 ≪미국에 대한 호소≫, ≪한국인들의 목표와 열망≫, ≪지각있는 일본인들에게≫-이 인용되고 있다. 결론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원하는 한국인들이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외세에 의한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자유, 자유로운 사회 발전 및 교육 발전을 누리고자 한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② 『한국의 어린 순교자들(Little Martyrs of Korea)』
한국통신부에서 1919년 말에 펴낸 팜플렛(16쪽)으로, 3·1운동 당시 한국 거주 미국인들이 목격한 어린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국인의 독립 열망이 특정 계급이나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민, 심지어 ‘어린이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실례들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 후, “자유라는 이 한 가지 공동 목표 아래 단결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하는 이천만 단일민족은 다른 나라나 민족 집단에 의해 멸망할 수 없을 것이며 멸망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장은 정당하며 때가 되면 전 세계가 그것을 알게 되어 한민족이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에서는 ‘신의 왕국 건설’을 거론함으로써 미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끌고자 했다.
③ 『한국에서의 일본의 잔혹행위들(Japanese Atrocities in Korea)』
3·1운동 당시 일제 관헌들의 잔혹상을 고발한 팜플렛(15쪽)으로, “일본의 선전에 의해 강조되고 설득력을 얻게 된 보도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3·1운동기 일본의 잔혹행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들, 예컨대 십자가에 못박혀 총살당하는 한국인들, 방화된 교회, 만세를 부르다 두 팔이 잘린 중년 남자, 매질의 희생자, 미망인이 된 아낙네들의 모습들이 나온다. 이들 사진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자 일본은 그것이 조작되었거나 러일전쟁기(1904~1905) 또는 그 이전의 사진들이라는 주장을 펴게 되는데, 이 책자에서는 그러한 주장들이 사실을 왜곡하는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3) 워싱턴회의 개최기 한국대표단의 선전문건
①『군축회의에의 한국청원서 번역(Translation of the Memorial from Korea to the Conference on Limitation of Armament)』
Korea’s Appeal to the Conference on Limitation of Armament
여기에서 말하는 군축회의란 워싱턴회의를 가르키며, 한국청원서란 국내에서 작성되었다는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 」(이하 「태평양회의서」)이다. 워싱턴회의에의 한국대표단의 출석과 한국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촉구한 「태평양회의서」에는 국내의 황족대표 1명(李堈), 귀족대표 2명(金允植·閔泳奎), 종교·사회단체 대표 100명(각 단체 2명), 그리고 지역대표(道·府·郡) 271명 등 총 374명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비밀경로를 통하여 「태평양회의서」를 입수한 한국대표단은 그것을 영문으로 번역하고 뒤에는 원문을 첨부하여 1922년 1월 초 워싱턴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과 언론에 배포했다. 이때 이승만은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이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을 받을 수 있지만 워싱턴회의에 대한 한국민의 단합된 요구를 보이기 위하여 그것을 부득이 공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조선총독부로부터 워싱턴에 파견된 경기도 경찰부장 치바(千葉了)는 그것을 보고 한눈에 위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어린 아해들의 작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소에 부쳤다. 그는 위작의 근거로 (1)각 대표자들의 서명이 두 세 사람의 손에 의하여 작성되었고, (2)문서에 찍힌 인감과 서명자들이 실제 소지한 인감이 다르며, (3)서명자 중 의심이 갈 만한 사람들에 대하여 내사한 결과 그들이 청원운동에 참여한 형적이 없으며, (4)현재 그러한 운동에 반드시 참가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인물들은 서명에서 빠지고 수년 전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은 명단에 올라 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조선독립운동비화』, 제국지방행정학회, 1925, 180쪽).
그러나 한국대표단은 「태평양회의서」가 진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이 문서의 공개에 대단히 신중했으며 그 효과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서재필의 회고에 의하면, 미 국무장관 휴즈는 워싱턴회의에 참석한 일본대표단 단장인 도쿠가와(德川家達)에게 「태평양회의서」를 보여주면서 “이 문서는 위조가 아니다. 내가 사적으로 권하는 바는 인도적 입장에서 한국의 무고한 양민을 학대치 않기를 희망한다. 일본은 일등국인 이상, 일등국으로서의 도량과 관용을 보여야 할 것이다. 오늘은 이렇게 비공식 권고에 그치거니와 만일 일본이 한국의 통치방침을 고치지 아니하게 되면, 결국에는 미국의 교회와 여론이 격앙하게 되어 미국은 부득이 공식조처를 취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김도태, 『서재필박사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291~292쪽).
「태평양회의서 」에 대해서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문서의 작성 경위와 주체, 워싱턴으로의 전달 경로 등이 앞으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재미사학자 방선주는 「태평양회의서」가 총독부측의 주장대로 문서에 찍힌 인감들의 제조자가 같은 사람인 혐의가 있고 서명자의 필적도 2~3인의 것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국내 인사들의 청원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고, 이상재 등 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 천도교의 모모 인사들과 연락하여 명단을 만든 뒤 상해로 밀송했을 것으로 추측한 바 있다(「1921~22년의 워싱턴회의와 재미한인의 독립청원운동 」, 『한민족독립운동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89, 216쪽).
②『군축회의에의 한국 호소(Korea’s Appeal to the Conference on Limitation of Armament)』
1921년 12월 1일자로 작성된 ‘한국대표단’의 청원문. 이승만을 단장으로 한 한국대표단은 당초 미국 정부와 접촉하여 워싱턴회의에의 출석권을 얻으려고 했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회의에 참석한 열국 대표단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한 노력의 첫 출발로서 나온 것이 이 문건이다.
청원문의 분량은 44쪽에 달하지만, 열국에의 호소문은 5쪽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부록이다. 호소문에서는, “우리는 한국에 대한 정의 구현이 극동문제의 항구적 해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확신한다”면서 이번 워싱턴회의에서도 “한국문제가 미해결인 채로 남게 되거나 열강의 노력으로 일본의 야심이 좌절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운명이 곧 아시아의 운명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부록에는 미국대표단에게 보내는 호소문, 일본에의 병합 이전 회의 참가국들의 한국과의 약속, 한국에서의 일본의 만행들, 한국의 독립운동과 공화국 수립 등에 관한 자료 또는 설명이 들어가 있다.
4) 1930년대 전반기 선전문건
① 『한국은 독립되어야 한다(Korea Must Be Free)』
이 팜플렛은 1930년 3월경 워싱턴 D.C.에서 발행되었다(분량은 32쪽). 그 서문을 보면 ‘대한민국의 공식 대표기구’인 구미위원부가 미국과 하와이, 멕시코, 캐나다 소재 4개의 주요 민족단체의 공동 지시 하에서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4개의 단체란 대한인국민회, 교민단, 동지회, 북미한인유학생총회를 가리킨다.
워싱턴회의(1921. 11~1922. 2) 종결 이후 대외활동을 사실상 중단한 바 있던 구미위원부는, 이 팜플렛의 발간을 통하여 다시금 활동을 재개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1929년 11월 3일 국내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이었다. 책의 서문에서는 그 운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하나의 사소한 사건이 지금과 같은 반란(revolt)이 되었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건은 오늘날까지 억눌려왔던 민족적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불길로 타오르게 하는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한국(민)은 자주 그들의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말을 할 때에는 그처럼 정열적이며 결의에 찬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팜플렛의 마지막 장에서는 ‘한국과 국제연맹’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바, 전후 국제연맹이 출범하면서 열강의 기득권을 인정했기 때문에(연맹 규약 제10조를 가리킨다) 식민지 약소민족의 독립에 대한 희망은 더욱 멀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평화 유지와 국제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유일한 기관이 국제연맹인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연맹이 ‘한국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구미위원부와 미주 한인단체들이 국제연맹 이외에 달리 한국문제를 호소할 곳이 없었던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② 『만주의 한국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발행된 이 팜플렛(35쪽)에는 “이승만 박사의 논평과 함께 리튼보고서에서 발췌(Extracts from the Lytton Report with Comments by the Dr. Syngman Rhee)”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리튼보고서라 함은, 1931년 9월 18일에 소위 만주사변이 발생한 후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하여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파견한 조사위원회(영국의 V. A. G. R. Bulwer-Lytton卿을 포함 5인 위원으로 구성)의 보고서를 가리킨다. 1932년 10월 2일에 만주를 중국 주권의 범위 안에 넣는 리튼보고서가 발표되고, 이듬해 2월 24일 국제연맹 본회의에서 그 보고서가 채택되자 일본은 연맹을 탈퇴했다.
일본의 만주침공으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미국에서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로 활동 무대를 옮긴 이승만은, 리튼보고서에서 만주 거주 한국인 문제를 거론한 구절들을 발췌·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는 이 책자를 발행했다. 그 표지를 보면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한국대표부(Agence Korea)'에서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기관명은 이승만이 임의로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책 본문의 첫 머리에서 “우리들, 즉 한국과 만주·시베리아·하와이·미국·멕시코 및 기타 지역에 거주하는 2,300만 한국인으로부터 완전히 그 자격을 인증받은 공식 대표단”임을 강조하고 있다.
팜플렛의 발행 목적은 만주를 둘러싼 중·일간 분쟁을 해결함에 있어 이 지역에 거주하는 백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의 정당한 생존권과 법적 지위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국제연맹과 각 회원국 및 언론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문제를 만주문제와 결부시킴으로써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본문의 마지막에서, 지난 25년 동안 오직 일본의 공포정치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이주하여 삶의 터전을 일구어 왔던 한국인들이 이제 다시금 일본의 군사적 지배의 무자비한 확장에 의하여 짓밟히게 되었다고 했다. 부록에는 3·1운동기 일본의 잔혹행위와 간도참변(1920) 및 관동대지진(1923) 때의 한국인 학살을 고발하는 세 편의 글이 실려 있다.
4. 구미위원부의 외교선전활동과 그 의의
구미위원부가 다양한 형태의 외교선전활동을 통하여 서방 세계, 특히 미국 국민에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은 ‘동양에서 처음 보는 기독교국’이 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발언은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상실된 후 한국과 서양을 연결시키는 통로는 기독교 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둘째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였다. 즉 한국은 동아시아의 십자로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 세력균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함으로써 대륙으로의 팽창이 가능해졌고 서구 열강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좁혀지고 있다. 한국이 독립되면 한반도는 물론 만주까지 개방함으로써 일본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미국의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겨냥한 것이었다.
셋째로 서구 열강은 한국을 도와주어야 할 법적·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들이 조선왕조와 체결한 조약이 공식 파기된 적이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대해서는 조미수호조약(1982)을 체결할 때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면 ‘거중조정(good office)’을 하기로 약속했다는 점을 계속 상기시켰다.
넷째로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와 병합은 한국에 대한 배신행위이자 불법이며, 일본의 식민통치 또한 그들의 선전과는 달리 한국민에 대한 착취이자 억압일 뿐임을 주지시키고자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방세계의 국민들에게 일본은 ‘아시아의 독일’이라는 인상을 각인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미위원부의 활동이 갖는 첫 번째 의의는, 1905년 11월 일본의 외교권 박탈 이후 한국과 서구 열강과의 단절된 국교를 14년만에 재개시키려고 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당장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워싱턴에 설치한 구미위원부를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기구로 생각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주미대사관이 설립될 때까지 유지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한미관계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다음으로, 구미위원부는 ‘근대적’인 외교를 시도했다. 개항(1876) 이후 조선왕조는 서양이 주도하는 이른바 만국공법체제 속에 편입되었다. 고종과 당시 집권층은 새로운 국제질서와 국가간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망국의 비운을 맞았다. 그런데 구미위원부의 초기 활동을 이끌었던 인물들-즉 이승만, 서재필, 김규식, 정한경 등-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근대적인 외교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배우고 관찰했고 3·1운동 후에는 그것을 직접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지도적인 정치가, 외교가, 법률가 등과 교류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인맥과 외교적 경험은 독립운동기를 거쳐 해방 이후로 연결되었다.
셋째로, 구미위원부는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 정부 차원의 외교 못지않게 국민 여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여론의 형성 과정과 그 방법에 대하여 예의 주시했다. 그들은 3·1운동 후 미국 내에 친한여론을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회를 움직이며 최종적으로는 그들 정부의 대한정책을 바꾸도록 유도하는 ‘우회전략’을 구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구미에서는 이전에 관행이 되어 왔던 궁정외교 또는 비밀외교를 타파하고 국민 여론에 입각한 공개외교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이를 선도해 나갔던 것이 미국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구미위원부는 나름대로 시대의 흐름을 살피고 그것에 맞추어 활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구미위원부의 활동에는 물론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미국 정부와 여론이 한국문제를 외면할 때 그들은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1922년 2월 워싱턴회의가 끝난 후부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근 20년간 구미위원부가 그 명맥만을 유지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고정휴(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