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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7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왕)
성경본문 : 다니엘 3: 1-7
1. 느부갓네살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2. 느부갓네살왕이 보내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자기 느부갓네살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매
3. 이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느부갓네살왕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4. 반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가로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5.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라
6.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하매
7.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리어 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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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정선 목사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군요. 비록 우리가 멀리 이곳에 있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어쩌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국민들이 현명한 판단을 해서 정말 좋은 대통령이 선출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한 사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중요한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그러니까 그때도 대통령 선거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입니다. 부산에서 소위 ‘초원복집 사건’이란 게 터졌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고질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관권선거와 지역감정의 조장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군요. 이 초원복집 사건이란 무엇인가 하면, 당시 검찰총장이 부산에 내려와서 부산시장을 비롯한 여러 기관장들을 비밀리에 모아놓고 그 지역출신인 특정후보의 당선을 위해 애써야 할 지침을 하달한 것입니다. 전형적인 관권개입과 지역감정 조장의 사례가 되겠군요. 그런데 그 사건이 며칠 후 대대적으로 신문에 보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후보측에서 그것을 미리 알고 그 모임장소인 초원복집에다가 도청장치를 해놨다가 그 비밀회동을 녹음했던 것입니다.
사건이 이렇게 되었으면 그 후보는 치명상을 당해서 선거에서 떨어지고, 그 비밀회동을 했던 사람들은 줄줄이 쇠고랑을 찼어야 했겠지요. 그런데 그 후보는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기는커녕 자기를 음해하는 비열한 공작정치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임을 주도했던 검찰총장은 쇠고랑을 차는 대신에 새 정부에서 법무부장관으로 화려하게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반면에 그 비밀회동을 적발했던 사람들은 도청이라는 불법행위를 한 죄로 줄줄이 쇠고랑을 찼답니다. 참 희한한 세상이지요? 이런 것을 보고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본질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끄트머리의 자리가 바뀐 것입니다. 초원복집 사건에서 본질은 검찰총장이 그 지역의 기관장들을 불러모아 불법적이고 타락적인 선거운동을 했다는 것인데, 그것을 적발한 도청이라는 방법상의 하자에 죄를 뒤집어씌워 본질적인 범죄행위에는 면죄부를 주고 만 것이지요.
이처럼 본말이 전도되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됩니다. 원래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젊은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마음속의 사랑을 아름다운 시로 적어 보냈다고 합시다. 정말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쁜 편지지가 없어서 연습장 종이에 적어서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여인이 그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것을 적은 종이에만 관심이 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따위 연습장에다 사랑의 고백을 적어서 보내는 얼간이가 어디 있어? 나를 뭐로 보는 거야? 그러면서 그 남자를 경멸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사건 아니겠어요? 정말 불행한 결과지요?
여기 나오는 느부갓네살이야말로 본말을 전도시킨 탁월한 샘플이 되겠습니다. 보세요, 그가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60규빗(약 27미터), 넓이가 6규빗(약 2.7미터)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왜 느닷없이 그런 신상을 만들었을까요?
어디서 힌트를 얻었을까요? 그렇지요. 그가 꾸었던 꿈, 잊어버렸다가 다니엘이 다시 찾아준 그 꿈에서 힌트를 얻어 이 신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에게 그 꿈을 꾸게 하신 것이 이 따위 금신상이나 만들라고 보여주신 것이었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그 꿈을 통해서 장래에 될 일을 보여주셨다고 다니엘이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해 주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고 승리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마땅히 그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알려주었잖아요? 그런데 그 본질적인 교훈은 한 귀에 들어왔다가 다른 귀로 나가버리고, 느부갓네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 거대한 신상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하잖아요? 그리고는 마침내 그것을 실제로 만드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본말의 전도가 이 정도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본말이 전도되면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고 했지요? 얼마나 불행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보세요.
우선 그가 만든 신상은 금으로 된 것입니다. 꿈에서 본 것을 변경시켰군요. 하나님의 계시를 변경시켜서 새로운 학설, 새로운 이단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형국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이리저리 자르고 늘려서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습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뜯어고치다 보니까 전혀 다른 것이 생겨나게 되겠지요? 느부갓네살도 그렇습니다. 자기는 금 머리에 해당된다는 해석까지는 무지하게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건설한 자신의 왕국이 금보다 못한 은에 의해 망한다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대목이겠지요? 그리고 놋이니 철이니 흙이니 하면서 나라의 주인과 특징이 바뀐다는 것도 권력자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그 신상을 머리부터 발까지 모조리 금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의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가 뒤를 이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왕국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력자의 특징입니다. 한번 잡으면 절대로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 두 가지는 마이크와 권력이라고 하잖아요?
이 느부갓네살의 욕망은 중국 진시황의 욕망과 정확히 일치한 것이네요. 중국에서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진시황은 자기가 누리는 절대 권력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권력이 있으면 뭐합니까? 머지않아 늙어 죽게 될 텐데. 만약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나 이 권력을 누릴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동남동녀 3,000명을 뽑아 늙지 않게 하는 약 불로초를 구하러 동방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진시황이 겨우 나이 50에 죽었다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느부갓네살의 이 뚱딴지같은 발상과 행위도 속절없는 헛수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헛수고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생시키고 있나 보세요. 자신의 권력과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나라 안의 모든 기관장들을 소집했습니다. 요즘 중국에서는 전당대회가 열리는 모양입니다. 전국의 주요 당직자들이 몇 년 만에 모두 모이는 거대한 모임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소집한 모임도 실력자들이나 행정담당자들이 모이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전당대회처럼 모여서 국가의 여러 가지 이슈들을 의논하고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왕이 만든 금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거기에 절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무의미하고 소비적인 모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권력의 강화라는 면에서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겠네요. 고대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복종과 충성을 강요 내지 유도했으니까요.
거대한 금신상을 세웠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권력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전체주의 국가의 강력한 권력자들은 자신의 거대한 동상 만들기를 좋아했습니다. 소련의 레닌이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이런 사람들은 무식할 정도로 큰 자신의 동상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큰 동상을 바라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크기에 압도되어 어떤 경외감 같은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은 그렇게 금신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절하라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금신상과 자신을 어느 정도 동일화시키고 있습니다. 즉 자신을 신격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패한 권력의 점정이 바로 신격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인들을 그토록 박해했던 이유가 바로 황제의 신격화와 기독교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력한 독재 권력자들이 거대한 동상을 세우는 행위도 일종의 신격화인 것이죠. 이처럼 느부갓네살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은 다시 한번 하늘의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유다 왕국을 손아귀에 넣고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성전 기물들을 약탈하던 그 승리의 기분으로 다시 한번 여호와와 맞장을 떠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느부갓네살의 행위가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다니엘에게 절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앞에 굴복했던 그가 다시 그런 도전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얻어맞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덤벼들었던 바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습성은 느부갓네살이나 멀리 바로에게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 속에서 늘 발견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늘 회개를 하면서도 자꾸만 범죄를 반복하는 것, 참 이 못된 습성과 버릇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이 되어서야 고쳐질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위세를 떨치기 위해 금신상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거기 절하라고 하면서,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만약 절을 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불 속에 던져 죽이겠다는 것은 또 얼마나 끔찍하고 야만적인 발상입니까? 결국 그의 권력이라는 것도 그런 야만적이고 추악한 욕망 위에 세워진 부도덕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밀의 창을 살짝 열고 보여주신 거룩한 계시의 교훈을 본말을 전도해서 받아들인 결과가 이처럼 불행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박사들을 불러놓고 다짜고짜로 잊어버린 자기 꿈을 알아내라고 하면서 못 알아내면 가족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미쳐 날뛰던 그 버릇이 여기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군요. 자기 맘에 안 들면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느부갓네살의 버릇이란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있어요. 다니엘에게 한 방 얻어맞고 정신을 좀 차리는가 했더니, 웬걸 다시 제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있다’(벧후 2:22)고 옛날 속담을 인용했는데, 느부갓네살이 딱 그 모양이군요.
거대한 금신상을 세워놓고 온갖 악기를 동원해서 현란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한 구석에는 풀무불이 극렬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거대한 금신상과 장대한 오케스트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속여 빼앗는 우민(愚民)정치의 극단적인 모습이고, 한쪽에서 타오르는 풀무불은 백성들을 위협하고 공포에 몰아넣어 통제하려는 공포(恐怖)정치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시민의식이 성장한 사회에서는 우민정치나 공포정치가 통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근대 이후에도, 심지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많은 곳에서 백성들이 우민정치와 공포정치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시민의식과는 상관없이, 혹은 시민의식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면서 독재권력이 백성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도 군사독재자들이 얼마나 국민을 속이고 협박했는지 몰라요.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우민정치, 공포정치가 영원히 사라지는 성숙한 나라가 되도록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느부갓네살의 못된 행위는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지요. 백성을 속이고 위협한 결과 모두가 그 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왕의 꿈을 알아내고 해석했을 때, 왕이 다니엘의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했을 때, 바벨론 궁중의 많은 사람들, 또 많은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그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금신상에게 절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어리석게도 다시 한번 여호와 하나님께 도전장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더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요? 얼마나 더 설명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느부갓네살의 도전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죽느냐, 아니면 믿음을 포기하고 목숨을 부지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세상의 왕국이 하나님의 왕국에 끊임없이 대항하고 반항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처럼 고난을 당하고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느부갓네살 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에서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결단을 내리도록 강요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위기를 모면하든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순결함을 지키며 세상에 대항하든가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 단락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또 어떻게 될 것인지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