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0;4-11, 고난 받은 여호와의 종
종의 노래의 세 번째 입니다.
첫 번째 종의 노래(42:1-9)에서는 종이 소개되었고 소명에 대한 종의 신실함이 강조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종이 임무를 완수해서 온 세상을 공의로 가득 채울 것을 강조했습니다.
두 번째 종의 노래(49:1-13)에서는 실패가 계기가 되어 그에게 더 커다란 임무가 주어졌고 종은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리라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세 번째 종의 노래(50:4-11)은 종이 소명을 감당하면서 당할 혹독한 고통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본문이 종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네 번째 종의 노래(52:13-53:12)에서 종이 죽음을 통해 절정에 달하는 그의 고통을 예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세 번째 종의 노래와 네 번째 종의 노래의 커다란 차이점은 세 번째에서는 인간의 손에 수난을 당하지만, 네 번째에서는 종이 인간과 하나님의 손에 수난을 당한다는 점입니다.
이 전 노래들에서와 같이 이 노래에서도 종은 이사야나 이스라엘이 될 수 없습니다.
4-6절, 충성을 다짐하는 종
(4)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소개없이 등장한 종이 말하고 있으며, 그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그 대상이 8절에 이르기까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주 여호와”라는 칭호는 이사야서에서 여러 차례 사용되지만, 종의 노래에서는 유일하게 이 노래에서만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4번(4,5,7,9절) 등장하는데 항상 문장을 시작할 때 사용되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에게 학자/제자의 혀를 주셨습니다.
학자/제자는 학습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종을 제자 삼으신 여호와께서 그에게 학자/제자의 혀와 귀를 주셨습니다.
종이 선포되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듣고 받은 가르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종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에서만 가능한 지식과 가르침으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종의 사역은 무엇인가?
종의 사역은 궁핍한 자를 돕는 것입니다.
돕다의 히브리어 단어는 성경에서 단 한번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곤핍한 자는 누구인가?
40:27-31에 의하면 곤핍한 자들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종의 사역에는 이방이 속해 있으므로(42;1; 49:1,6-7) 열방의 곤핍한 자도 속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열방의 곤핍함은 우상을 섬기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은 열방에게 우상의 어리석음과 여호와만이 참 신이심을 가르침으로 그들의 곤핍함을 덜어주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하나님과 종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매일 아침 종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선지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을 받게 되었는가를 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극렬한 환희나 무아의 경지에서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말고 깨끗한 정신과 이성을 통해 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르침을 통해 종의 귀를 깨우쳐 주십니다.
(5)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듣는다는 것은 곧 순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종의 귀를 여시니 종이 두 가지의 의지적 결단을 내리고 그것들을 자신의 삶에서 추구합니다.
첫째, 그는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사람의 내면적인 각오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지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던 것입니다.
둘째, 그는 결코 “뒤로 물러가지도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외적인 행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표현은 종의 의지와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의 각오와 의지는 이스라엘의 행동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이스라엘은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종은 여호와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6)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종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계기 삼아 인간이 주는 갖은 수모도 참아냅니다.
사람들은 마치 그를 죄인 취급합니다.
여기에 기재된 모든 수난이 죄인을 다루는 모습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종이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고문/형벌을 받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섰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종의 수염이 뽑히고 있습니다. 머리카락 깍이는 것도 치욕으로 생각하던 사회에서 수염이 뽑히고 있습니다.
수욕과 침 뱉음
역시 극에 달한 경멸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종이 인간에게 당할 수난이 매우 심각한 수위에 도달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이 수난이 죽음과 연결되고 있지 않습니다.
죽음과 연결되는 것은 53장에 가서의 일입니다.
7-9절,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리라는 종의 믿음
하나님의 “제자”인 종이 비록 인간들에게 갖은 수모와 멸시를 당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어라 하든 하나님께서는 종을 인정하리라는 확신입니다.
(7)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고대근동의 법정에 선 피고가 사람들의 멸시와 수모를 조용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종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면서도 조용히 묵묵히 고통을 견디어내고 있습니다.
종이 혹독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신다는 신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종에게 어떤 도움을 주신다는 것인가?
외부적인, 육체적인 도움이 아니라 영적, 심적 도움을 뜻합니다.
비록 사람들은 자신들의 멸시와 격멸을 조용히 맞이하는 종을 보고 죄인이라는 결론을 내렸겠지만 종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그가 이 모든 고통을 묵묵히 참아 낸 것은 매우 적합한 결정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8)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사람들의 비난과 정죄를 받는 종이 묵묵히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인정하셨으니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그리고는 그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외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니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그는 핍박하는 자들에게 함께 재판장에 서서 누가 옳고 그를지를 판가름해보자고 권합니다.
(9b)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종을 비난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허망한 종말을 맞게 됩니다.
그들은 좀에게 먹힌 옷처럼 헤어집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은유법으로 조금씩 진행되지만 확실한 결과가 초래될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종의 원수들에게 임할 육신적인 심판보다는 그들의 상소가 완전히 무너져 버린 법정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종이 언제 의롭다는 판결을 받는가?
신약적 관점에서 두 단계를 통해 진행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 받으셨습니다.
둘째, 재림후 천년 왕국의 왕으로 군림하실 때 일어날 일입니다.
10-11절, 순종하는 자와 악한 자들의 비교입니다.
10절에서는 믿음에 대한 권면을, 11절에서는 그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을 자들을 향한 경고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3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Muilenburg).
둘째, 10절은 종이, 11절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Whybray).
셋째, 11절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이 선포하는 메시지이다(Engnell).
(10)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종을 따르는 자들이 어두움 속을 거닐지라도 믿음으로 걸어가라는 권면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흑암에 거할지라도 그 흑암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됩니다.
첫째, 누가는 질문대명사이다.
“누가 여호와를 의지할 것인가?”
말씀을 들은 자들에게 심적 결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누가는 관계대명사이다.
이 경우 아무나 누구라도 여호와를 순종하라는 권면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메시지를 듣고 마음만 결정하면 하나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해석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 권면을 듣는 자들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종에게 순종하는 자” “어둠 속을 걷는 자” 그리고 “”빛이 없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미 여호와를 의지해 오던 자들에게 선포된 메시지인 것입니다.
본문은 “달리는 말에게 채찍을 가하는“ 효과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1)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악한 자들의 자기 중심적 노력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악인들이 자신들의 업적에 대하여 평가를 받는 모습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져서 구원을 이루려는 모습”을 말하는 듯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의인은 어둠 속에서도 인내를 가지고 여호와가 불을 밝힐 때까지 조심스레 길을 걷습니다.
악인은 스스로 불을 피웁니다.
그러나 그 불이 그들을 삼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