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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9일 : 낯선 사람들과 낯선 풍경 속으로
우리의 첫 만남은 청주 산남동 오전 4시에서 이루어졌다. 깜깜한 새벽, 커다란 카고백을 하나씩 짊어진 뒷모습과 졸린 눈, 어색한 미소가 우리 오지마을 체험단원들의 첫인상이었다. 버스를 타고 공항에서 수속을 밟고 비행기를 타는 내내 전날 밤을 거의 새다 시피 했던 나는 비몽사몽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네팔 카트만두였다. 원숭이가 돌아다니는, 빨간 벽돌의 공항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색하고 낯선 벽돌들은 공격적이거나 배타적인 느낌 대신 신기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맞거나 손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대장님의 경고를 받고 무척 긴장해서 공항을 나서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리 단원들이 탈 버스를 찾아 짐을 싣고 좌석에 앉았는데 버스 안에 미니 선풍기가 칸칸이 달려 귀엽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촌스럽지만 화려한 여러 가게들을 지나쳐 드디어 오늘 우리가 묵을 YAK & YETI Hotel에 도착. 로비에 손이 아주 많이 달린 신의 동상이 우리를 맞아 주었고, 주스 한 잔과 환영의 의미로 목에 둘러주는 천과 ‘나마스떼’ 인사를 받았다. 낯선 나라지만 외국인인 나를 반겨주는 것이 고마웠다. 랑무르 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서 내가 아는 유일한 친구인 상언이의 방에 놀러갔다. 상언이의 룸메이트로 배정된 덕규와 인사를 나눴는데, 알고 보니 이 친구, 음대생이었다. 신이 난 나와 상언이는 덕규를 1층에 있는 피아노로 데려갔고, 덕규는 멋진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었다. YAK & YETI Hotel은 옛날 궁궐을 개조해서 운영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은 터라 1층을 샅샅이 돌아보고 구경했다. 아랍 동화에 나올 법한 멋진 문양의 양탄자와 커다란 수정 구슬, 각종 귀금속들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정이 시작되는 것을 떠올리며 방에 서둘러 돌아갔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직원을 불러 방에 들어가 보니, 내 룸메이트인 윤지는 검은색 침낭에서 잠들어있었다. 조심스럽게 불을 끄고 그 옆에 누워 낯선 사람들과 낯선 풍경을 되짚어보다가 나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2012년 1월 10일 : 네팔 음식과의 첫 만남.
오늘의 일정은 하루 종일 차를 타고 포카라로 이동하는 것. 버스를 타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안개가 자욱한 공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고 있었다. 하루 중 단 십분도 명상에 투자하지 않는 한국인들을 떠올리며 네팔 사람들에게 저 명상이 어떤 역할을 해주고 있는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아침식사는 고속도로를 옆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먹게 되었다. 앞뒤로 뻥 뚫려있고, 식탁과 의자만 잔뜩 놓여있는 식당이었는데 일곱 살, 여덟 살로 보이는 작은 아이들이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다니며 ‘찌야’를 외쳤다. 찌야는 홍차와 우유를 섞은 음료인데 따뜻하고 달달해서 새벽의 쌀쌀함을 녹여주었다. 빵과 과일, 망고주스로 아침을 챙겨먹고 다시 버스를 타서 최연소 단원인 형빈이와 가위바위보, 묵찌빠, 학교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또 점심시간. 우타니 하이웨이라는 식당이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네팔식 뷔페를 맛보게 되었다. 길쭉하고 버석버석한 쌀알의 볶음밥과 스파게티, 그리고 동그랗고 바삭바삭한 난을 먹었다. 변상규 소장님께서 같은 테이블에 앉으셨는데, 우리가 네팔 음식을 낯설어하는 것을 보시더니 네팔 사람들에게 음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설명해주셨다. 설명을 듣고 나니 접시에 담겨있는 음식들이 꽤 그럴듯하고 멋진 식사로 보이는 것도 같았다. (사실 이 음식들과 아주 친해지진 못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포카라 부근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청포도를 얻어먹게 되었는데, 알이 길고 맛은 달았다. 중간에 봉고차로 한번 갈아타고, 우리가 묵을 Sakura Hotel로 이동했다. 이틀을 함께 보냈어도 버스나 비행기로 이동하는 시간뿐이었기 때문에 어색한 우리는 로지 앞마당에 모여 멋쩍게 웃었다. 저녁으로는 수육, 상추, 맑은 된장국이 나왔는데 매우 반가웠고 아주 맛있었다. 대장님의 주도 하에 서로 소개를 하고 오늘의 느낀 점을 말하는 1분 스피치 시간을 가졌다. 아직 서로가 어색하지만 모두 ABC(Annapurna Base Camp)에 오르고자 하는 의지와 따뜻한 마음이 엿보여서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다함께 아무 탈 없이 다녀올 수 있길!
1월 11일 : 첫 산행과 란드룩 초등학교, 별
무려 새벽 다섯 시 반, 가장 먼저 시작되는 일정인 청소년 몸 풀기 시간이다. 부엌 뒤 뒷마당에 모여 기본 체조를 하는데 주변 풍경은 멋진 설산! 마치 설산을 그림으로 그려 온 사방에 병풍을 쳐놓은 것 같다며 우리는 연신 감탄했다. 미역국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드디어 산행이 시작되었다. “비스따리 자네.(천천히 가자.)”라는 대장님의 여유 있는 구호와는 정반대로, 나는 산행이 시작되자마자 헉헉대기 시작했다. 윽, 이틀간 잊고 있었던 내 저질 체력이 드러날 시간이구나. 앞사람 발만 보고 가기도 정신없이 바빴다.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는 짐만 될 것 같았던 스틱이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데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같이 헉헉대는 대원들의 숨소리가 위로가 되었다. 드디어 처음으로 쉬는 시간. 네팔어로 ‘초우따라’라고 부르는 큰 돌무덤에서 쉬었는데, 이곳의 마을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배려해서 만들어놓은 것이다. 숨도 고르고, 물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아, 살겠다. 약 10분간의 짧은 휴식은 단순히 힘든 몸을 누이는 시간이 아니라 몸 상태를 확인하고, 다음 산행을 위해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등산화의 끈을 매거나 체온 유지를 위해 두꺼운 파카를 입고 벗느라 매우 빠듯하다. 다시 대장님의 힘찬 구호에 일어나 걷고, 쉬고를 두어 번 반복하니 어느 새 점심시간. 메뉴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라면이다. 후루룩후루룩 면과 국물을 정신없이 먹고 나니 배도 부르고 햇볕은 따뜻해서 신선이 따로 없다 싶을 찰나, “자, 또 비스따리하게 가봅시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목적지인 란드룩에 도착했다. 오늘은 란드룩 초등학교에 구호 물품을 전해주고 함께 꼬리잡기를 하며 학생들과 놀아주는, 우리에겐 허술하고 아주 작은 봉사를 하는 날이지만 학생들에게는 소중하고 귀한 날이다. 전교생이 백 명도 안 되어 보였는데, 다섯 팀으로 나누어 꼬리잡기 놀이를 했다. 우리 단원들이 긴 줄의 머리나 꼬리에 붙어 학생들을 이끌었는데, 어이쿠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모두 승부욕이 불타올라 한바탕 와글와글 난리가 났다. 함께 시간을 보낸 후에는 볼펜, 헌 옷, 칫솔 치약 세트 등을 담은 쇼핑백을 하나씩 나누어 주며 학생들을 한 명씩 안아주었다. 학생 중에 자기 몸집만한 동생을 안고 돌봐주는 언니들은 가느다란 팔로 동생을 안고, 손에는 쇼핑백을 두 개나 들어야 했는데, 요 꼬맹이들을 보고는 집을 떠나 처음으로 가족들이 떠올랐다.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히말라야에 간 내 얘기로 매일 시간을 보내실 부모님과 수능 끝났다고 정신없이 놀러 다닐 성배와 혼자만 입시에 버둥댈 막내 기배가 머릿속에서 빤히 그려졌다. 에이, 나 빼고 다들 매일같이 한국 음식 맛나게 먹고 잘 지낼 텐데,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이 흘러 어느 새 밤이 되었다. 산에서 우리가 묵는 숙소는 롯지(lodge)로 방마다 침대만 달랑 있고 전기는 복불복으로 들어온다. 운이 없는 지, 이틀 연속으로 전등이 켜지지 않는 롯지다. 산에서, 그것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보는 하늘에는 밝은 별이 아주 많이 떠있었다. 반짝거리는 별 아래 산에는 인가에서 비춰오는 노오란 불빛이 콕콕 박혀있었다. 네팔의 자연과 네팔 사람들의 빛이 참 예쁘고 순수하게 느껴져서 기분이 두둥실 떠올랐고 약간은 들떴다. 그리고는 한국과는 너무나 다른 네팔에 대해 상언이와 도란도란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웅장한 자연, 한국에 비해 어려운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산행이 시작되면서 부족한 체력에 버둥대는 나에 대해 고백하기도 했으며, 한국에서 보내는 시간과 네팔에서 보내는 시간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야깃거리는 많았고 흩어져있었으며 결론이 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직 한국에서의 나와 네팔에서의 나 사이의 괴리를 얼핏 인식하면서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빠듯한 일정 속에서 깊은 생각은 미뤄두고 있었다. 하루하루 걷다보면 무언가는 매듭지어지지 않을까 하는 흐릿한 기대 속에 잠을 청했다.
2012년 1월 12일 : 고생 끝에 낙이 있다? 촘롱 끝에 염소 있다!
오후가 되면서 날씨가 점점 꾸물꾸물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산행 코스 중에 가장 경사가 급한, 촘롱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우수수 우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동그랗고 하얀 알맹이들이 팔과 얼굴을 때렸다. 잠시 쉬러 들린 인가에서 따뜻한 홍차를 시켜 마셨다. “아이고, 세상에. 여기가 원래 더워서 탄산음료 시켜 마셔야 되는 곳인데.” 히말라야 등산이 다섯 번째라는 대장님도 예상치 못한 날씨 변화에 당황하신 눈치였다. 그러나 우박이 내린다고 무조건 피할 소냐. 얼른 옷매무새며 가방을 정리하곤 끝없이 솟은 계단 위로 다시 올라섰다. 쏟아지는 우박에 정신없이 앞에 놓인 계단 하나하나 올라가다 보니, 드디어 촘롱 도착! 너무 기뻐, 예능 프로그램 일박 이일에서처럼 ‘도착을~ 했습니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이닝 룸의 탁자에 모두 둘러 앉아 발밑의 불을 쬐는 도중, 형빈이의 뽀뽀 타령에 엉뚱하게 말려든 우리 대장님과 최윤철 변호사님께서 뽀뽀를 해주셨다.(!) 덕분에 한결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를 타고 네팔 현지인들 (우리 스태프들) 에게 네팔 전통 민요인 레쌈삐리리를 배웠다. “우레라 장끼 다라마 번장 레쌈 삐리리~” 네팔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고 모두 한 데 어울려서 노래하고 춤추는 사이, 오늘의 하이라이트 저녁식사가 차려졌다. 오늘 저녁 메뉴는 김기남 사장님께서 사주시는 염소고기! 거기에 최대만 기자님께서 준비해 오신 특제소스까지. 촘롱까지 온다고 고생한 것이 싹 잊히는 순간이었다. 염소고기로 몸보신을 하고 나니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낭만적으로 보였다.
2012년 1월 13일 : 난생 처음 눈 내린 산길을 걷다.
“으악.” 오늘의 산행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눈이 언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불상사가 나타났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차느라 모두 계단 한 구석에서 멈추어 섰다. 스패츠는 바지 밑단이 젖지 않도록 감싸는 발토시 같은 것이고, 아이젠은 눈길에 미끌어지지 않도록 뾰족한 철심을 등산화 아래에 다는 것이다. 난생 처음 써보는 물건과 낑낑대며 씨름하자 배종영 아저씨께서 도와주셨다. 급한 내리막에서도 아이젠 덕분에 든든한 마음으로 눈길을 걸을 수 있었다. 고개를 푹 박고 눈길을 한참 걷다보니 들리는 대장님의 구원의 목소리. “자, 십분 간 휴식.” 이렇게 쉬는 시간마다 입은 즐겁게 몸은 힘이 나게 해준 것이 바로 간식거리다. 따뜻하고 상큼했던 망고 티, 파인애플 티와 같은 각종 차와 달고 진득한 브라우니, 덥고 답답했던 순간을 잊게 해주는 탄산음료, 짭조름한 프링글스는 하루 중의 큰 행복들이었다. 서로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며 웃는 순간마다 산행이 힘들다고 투덜대던 것은 까맣게 잊었고, 정이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하얀 눈길과 설산과 나뭇잎에 피어오른 눈꽃을 감상하며 또 넘어져가며 밤부를 넘어 목적지인 도반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난롯가에 모여 앉은 청소년들에게 최대만 기자님께서 해주시는 말씀. “정직하게 살아라. 정직하게 살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 조언에 대해 요리조리 생각해보다가 침낭에 누웠다. 로지에서는 난방이 전혀 되지 않기 때문에 저녁마다 따또바니(따뜻한 물)을 수통에 받아 침낭에 넣고 그 온기로 잠을 청하는데, 워낙에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수통에 발싸개까지 하고도 밤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이날 밤에도 어설프게 잠이 들었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어져서 새벽에 방을 나왔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눈으로 검은 산줄기와 그 위를 덮은 새하얀 눈이 달빛에 비쳐 한가득 담겨왔다. 처음 산행을 시작하던 날보다 산이 더 커져있었고, 나를 집어 삼킬 것만 같은 그 위용에 덜컥 겁이 났다. 낮에는 보지 못한 대자연의 모습이었다. 산을 바라보며 히말라야의 신에게 가호를 빌었다.
2012년 1월 14일 : 해발 3200m에서 비아그라를 먹다.
오늘, 내일은 고산지대에 몸을 적응시키기 위해 이동시간과 거리가 짧아진다고 한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한 산행이 오후 1시에 데우랄리에서 끝이 났다. 데우랄리는 해발 3200m의 고산지대다. 여기에서는 열댓 개의 계단만 올라도 숨이 차고, 커피봉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등 아래 지역보다 공기가 많이 부족한 것을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슬슬 약한 고산병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몇몇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도 그중 하나. 점심으로 나온 짜장면을 신나게 먹고 방에서 누웠는데 얼굴은 퉁퉁 붓고 가슴은 두근두근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자칭 타칭 히말라야의 약사 대장님께서 조제해주신 타이레놀과 비아그라를 먹었다. 겨우 스물세 살의 나이에 비아그라를 먹다니!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니 비아그라는 원래 혈관 확장제로 개발된 것이라고 한다. 살면서 별 재미난 경험을 다 하는 구나. 신통방통한(?) 약을 먹고 나니 한결 머리가 가벼워져서 매우 좋았다.
2012년 1월 15일 : ABC, 네 이놈 게 섰거라.
아침에 일어났더니 어제 머리가 아팠던 것은 가라앉았는데 얼굴은 아직 퉁퉁 부은 상태였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오르막 내리막이 걷기 어렵지 않게 섞여 있는, 눈 쌓인 산골길을 세 시간 정도 걷고 나니 MBC 도착. MBC는 Machhapuchhre Base Camp의 약자로, ABC의 바로 앞 동네(?)이다.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어느 새 준비된 오늘의 간식, 육개장! 해발 3700m에서 먹는 컵라면은 감동이었다. 한국에서는 라면, 더더군다나 컵라면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았던 내가 국물까지 싹 다 비웠다. 배가 부르니 주변 풍경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온 사방이 눈으로 덮여있고, 아주 큰 바위 아래에만 드문드문 검은 그늘이 져있었다. 아름답고 웅장하다는 표현이 부족한 대자연에 감탄하며 다시 산행할 채비를 했다. 출발한 지 십 분 혹은 이십 분쯤 지났나 싶은 때에 속이 미식거리기 시작했다. 울렁울렁하는 것을 못 참고 길 옆으로 서서 헛구역질을 서너 번 하고 나서야 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걸은 지 이십 분을 못 참고, 다시 헛구역질.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자, ABC까지 가는 눈 덮인 길이 끝없는 사막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과 해는 내 머리 위에서 짓누르고, ABC까지의 길은 경사가 거의 없는 평지지만 구불구불하게 나있는 길은 야속하게 길기만 했다. 그 긴 길 위에서 신기루처럼 보이는 ABC는 걸어도, 걸어도 닿지를 않고 나를 약 올리기만 했다. 울렁거리는 위를 떼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내가 멈추어 설 때마다 옆에 서서 말없이 기다려주고 물을 챙겨주는 상언이와 “딱하지~” 하고 농담 던져주시던 유명렬 사장님, 안부 물어봐주시던 어른들, 은근한 말투로 응원해 주던 청소년 대장 원식 오빠, 자꾸만 뒤처지는 나를 줄 앞에 계속 넣어주신 대장님과 갈 수 있다고 재촉해주신 한은순 선생님, 자기 자리 꿋꿋이 지켜주던 청소년 단원들의 발걸음이, 목소리가 더 걸을 힘을 줬다. 달랑달랑 줄 맨 끝에서 앞사람 발만 보며 간신히 따라가며 “도착이다!”라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를 알려주는, 나무 기둥으로 만든 문이 있었고, 그 왼쪽 앞으로 급한 경사의 계단 위로 ABC가 보였다. ABC에 먼저 도착한 대원들은 뒤에 오는 대원들을 축하해주었는데, 나는 축하에 감사하단 말 대신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댔다. 그리고 로지 끝에 있는 화장실을 반도 채 못가 간식으로 먹은 라면을 토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녁식사 전에 너덧 번은 더 토해댔다. 그런 나를 보고 최윤철 변호사님 내외분께서 걱정해주셨고, 중간에 합류한 오미숙 선생님께서 손을 따주시기도 했다. 12일 밤, 사정이 생겨 같이 가던 일행과 헤어지고 우리 단원과 합류하여 등산하게 된 오미숙 선생님은 나와 계속 같은 방을 쓰셨는데, 이 외에도 좋은 자리를 양보하는 등의 배려를 아주 많이 받았다. ABC는 무려 해발 4130m인지라, 고산병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평소 강인한 체력으로 내 앞에서 이끌어주던 덕규도 두통이 심하다며 점심도 거르고 침낭에 들어갔고, 오는 내내 내 등을 토닥여주던 상언이도 두통 때문에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푹 박고 엎드려 있었다. 평소 나를 많이 챙겨주던 친구들이 아파하니까 나도 신경써주고 싶은데 삼십 분 간격으로 속이 뒤집어 지니 누군가를 챙길 군번이 못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에 달린 묵직한 추가 되어버린, 오늘 나는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였다. 성인이라는 만 20세를 지나 대학 졸업학번을 앞두고도 그룹 안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내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찔렀다. 그리고 꼭 한국에 돌아가면 꾸준히 운동해서 체력을 기르리라 다짐했다.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를 모두 거르고 노란 액체를 토해낸 빈속이 계속 불편했다. 다이닝 룸에서 가장 따뜻한 곳을 차지하고 앉아있는데, 배종영 산악인님의 조촐한 생일 축하 파티가 열렸다. 최대만 기자님께서 쏘신 피자와 초를 앞에 두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연이어 김기남 사장님께서 준비하신 초코파이가 나왔다. 뒤태를 자랑하며 늘 농담과 편한 웃음으로 무장하시고 뒤를 지켜주시던 배종영 아저씨의 생일을 다함께 진심으로 축하했고, 전원이 ABC에 무사히 올라온 것을 축하했다. 오늘 산행은 가장 짧았지만 이야깃거리는 아주 많았다.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내가 모든 것에게 감사한다는 것이다. ABC까지 함께 올라온 대원들, 산, 등산 장비, 매 식사, 매 잠자리, 내 나라 한국, 그리고 부모님께.
2012년 1월 16일 : 동요의 힘. 동료의 힘.
“블락띠(Black tea)?” 스태프 소리에 깼다. 오늘은 직지로드를 개척하다 명을 달리한 산악인 두 분을 기리는 추모식을 올린단다. 갈 채비를 느릿느릿 해서 제사상을 차려놓은 로지 뒤로 허겁지겁 나가보니 벌써 제를 다 지내고 포토타임. 사진을 찍는 곳이 매우 좁아서 나는 찍히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로지로 내려왔다.
이제부터는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간단다. 밤새 눈이 아주 많이 내린 탓에 서너 뼘 정도 되는 길 밖으로 발은 잘못디디면 무릎이나 허벅지까지 쑥 빠졌다. 폭설로 100m 앞이 뿌옇게 보여도, 다들 내려가는 길은 한결 여유로워졌는지 눈밭에 누워 사진도 찍고 농담도 더 많이 하면서 즐겁게 걸었다. 어제 그 힘들었던 MBC까지의 길이 겨우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MBC를 지나자 어제 점심과 저녁을 모두 거른 것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없어 푹푹 빠지고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데우랄리를 지나 히말라야 호텔(lodge)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을 멈추어 서서 헛구역질을 했고, 히말라야 호텔에서 다들 점심을 먹는 동안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며 토했다. 최윤철 변호사님께서 건네주시는 배를 한 조각 먹고는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걸을 채비를 했다. 아침에 내리던 눈이 차가운 비로 바뀌어 내리기 시작했다. 노란 우비를 입고 걷기 시작했는데,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눈이 내린 바위 위는 미끄러웠고, 구불구불한 산 비틀 길이 끝날 듯 끝날 듯 이어졌다. 힘들다고 걷는 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힘들다고 마음대로 주저앉으면, 내 몸이 낫는 것도 아닐뿐더러 이미 걸음이 가장 느린 나에게 맞추어 걷고 있는 대원들 모두가 숙소에 더욱 늦게 도착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식거리는 위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오늘 아침의 즐거웠던 기분은 점점 가라앉아 오늘 묵을 로지에 도착하는 상상만을 반복하며 팔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걷는 나를 위해 덕규, 상언이, 변상규 소장님께서 농담도 던져주시고 동요도 불러주었다. 추억의 만화 주제가를 들으면서 걷는 길은 힘들지만 외롭지 않았다. 버티어 갈만한 힘을 주었다. 노래와 농담 속에서 아침에 놓쳤던 추모식이 생각났다. 또, “우리처럼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했던 두 대원”으로 소개했던 대장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대원들이 느려터진 나를 빼고 먼저 갔다면 아마 더 빨리 숙소에 도착했을 것이고, 더 오래 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맨 앞에 세우고 우리는 함께 갔다. 험하고, 미끄럽고, 추웠다 더웠다 눈이 내렸다 비가 내렸다 하는 긴 길을 외롭지 않게 하나의 줄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밤부에 도착했다. 오늘 나는 어제만큼이나 감사했다. 밤부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밤부까지 걸어왔던 길이 내게는 더 소중하게 남을 것 같다.
2012년 1월 17일 : 다시 만난 촘롱, 다시 먹은 염소.
아침에 일어나 청소년 체조를 하는 동안 미라마냥 걸었던 어제와는 달리, 속이 편하고 기분도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다. 어제의 느린 걸음을 만회하기 위해 오늘은 열심히 걸으리라 다짐을 하고 다시 방으로 내려오다가 옆방에 들렀다. 그런데 내 뒤에서 늘 챙겨주던 상언이가 간밤에 술병이 났단다. 혼이 나간 표정으로 누워 있는 애를 깨워 같이 아침밥을 먹고 산행을 시작했는데 영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무지막지한 경사를 자랑하는 촘롱 내려가는 길에서 우리의 거리는 점점 벌어져 나중에는 한참이나 기다려야 뒤에 따라오는 것이 보일랑 말랑 했다. 그래도 점심을 먹고 나자 눈빛이 초롱초롱해져서 평소처럼 농담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오늘의 목적지는 올라왔던 길에서 벗어난 큐미이다. 그래서 먼저 앞서나가 우리의 걷는 모습을 찍어주시곤 하셨던 변상규 소장님께서 길을 헤매는 헤프닝도 벌어졌다. 큐미의 로지는 지붕 아래로 꾸며놓은 꽃으로 아주 예뻤다. 그런데 따뜻한 물과 전기가 (역시나) 안 나온다는 것이 아닌가. 이제 옷을 갈아입어도 몸이 끈적끈적하고 머리도 안 감은지 엿새째. 내가 내 몸을 피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찬 물에 씻기 싫은 마음이 더 커서 그냥 하루 참기로 하고 저녁식사를 하러 갔더니, 메뉴가 염소! 오늘은 최윤철 변호사님께서 사주신단다. 끈적끈적한 몸과 염소고기로 짜증과 기쁨이 동시에 일어서 매우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일찍 침낭에 누워 윤지와 오미숙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여자 셋의 수다였는지, 남자 넷의 수다였는지 몰랐더래요.)
2012년 1월 18일 : 누구세요?
마지막 산행이 시작되었다. 산길을 조금 걷다보니 위에 도로를 짓느라 산사태가 난 길이 나타났다. 급한 경사면에 바위가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는데, 이제 이 정도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다들 신나게 넘어갔다. 그리고 곧이어 나타난 차도. 우리나라의 차도처럼 아스팔트가 깔린 운전하기 쉬운 길이 아니라, 길을 대충 평평하게 만든, 자갈도 많고 경계선도 딱히 없는 길이다. 지나가는 외국인, 학생들, 소와 작은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두 시간을 룰루랄라 걷고 나니, 산행이 끝나는 장소 Birethanti에 도착했다. 일주일간 요긴하게 썼던 스틱을 집어넣고 수제비를 먹고 나서는 슬슬 걸어 시장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익숙한 식료품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네팔은 제조업이 발달되지 않아 대부분의 물품들을 인도에서 수입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식료품점에는 이곳에서 나는 과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입과자, 양주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이마이를 팔 것 같은 전자제품점이나 오토바이를 파는 가게(네팔의 자동차는 아주 낙후된 반면 오토바이는 아주 세련됐다.)도 실컷 구경했다. 시장 구경을 마치고 이제 포카라로 가는 버스도 도착했다. 버스를 타기 전에 그간 우리의 짐을 날라줬던 포터들과 악수를 나눴는데, 처음 보는 얼굴들도 많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일주일 이상을 산을 타는 고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지만 일이 끝난 그들의 표정은 너무나 행복해보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짐을 날라주어 산행을 마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에서의 내 삶도 다른 사람이 내 짐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영위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웠다. 버스를 타고 포카라의 베이스 캠프 리조트(호텔)에 도착해서는 룸메이트였던 오미숙 선생님과 헤어졌다. 단원들 모두가 오미숙 선생님의 남은 여행이 무사히 끝나길 바라면서 아쉬움의 인사를 몇 번씩 주고받았다. 방에 들어가서는 드디어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일주일동안 모자 아래 꼭꼭 숨겨놨던 머리카락을 꺼내 빨래하듯 여러 번 감았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나니, 아주 개운했다. 그리고 등산복과 등산화를 카고백 깊숙이 넣고 오랜만에 내 운동화와 트레이닝복 바지, 후드티를 꺼내 입었다. 아이고, 그런데 내 발이 퉁퉁 부어서 운동화가 터질 것만 같았다. 다시 등산화로 갈아 신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룸메이트인 윤지가 다 씻고 나와서 그냥 밖으로 나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다들 모자도 벗고, 얼굴은 뽀얗고, (남자 어른들은) 수염도 깎으니 너무나도 깔끔해져서 ‘반갑습니다.’ 하고 새로 인사를 나눌 정도였다. 편안한 발걸음으로 포카라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차와 짝퉁 North Face, 서점, 네팔 전통악기점을 둘러봤다. 웃으며 구경하는 사이 날은 어둑어둑해져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다. 저녁 메뉴는 무려 삼겹살! 고기에 탄산음료, 술이 나오니 다들 흥이 나서 돌아가며 한 곡씩 불렀다. 분위기 띄우기에 딱인 트로트뿐만 아니라 네팔 민요인 레쌈삐리리와 애국가도 포카라에 울려퍼졌다. 모두 들떴고, 주황색 불빛은 포근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몽글몽글한 구름 위로 걷는 기분이었다.
2012년 1월 19일 : 사치스러운 하루
아침을 먹고 나서, 호텔 뒤에 있는 호수에 갔다. 어제 시내를 둘러보기 전에 지나쳤던 곳인데 보트를 탈 수 있는 큰 호수이다. 나, 윤지, 덕규, 상언, 형빈 이렇게 다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보트를 탔다. 날씨는 아주 맑았고, 호수 안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한 쪽에는 설산이, 다른 쪽에는 포카라의 건물들이 멋진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호수 한 가운데에는 힌두교 절이 있는데 작은 공원처럼 꾸며놓았다.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나서 다시 배로 돌아오려는 찰나, 에구머니나! 내 연보라색 후드티에 새똥이 툭 떨어졌다. 날이 맑아서 인지 “그게 바로 복 받은 거야. 복권 사.”라는 어른들 말씀 덕분인지 휴지로 한번 쓰윽 닦아내고는 푸하하 웃었다. (사실 일주일동안 씻지도 않았던 내가 감히 새똥보고 더럽다고 할 입장이 못 되었다.) 다시 호숫가로 돌아와서는 수작업으로 배를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 대패질을 하는 솜씨가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또, 그 옆에 작은 기타처럼 생긴 네팔 전통 악기로 레쌈삐리리를 연주하는 아저씨와 기념품들을 구경하다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비행기가 연착되는 덕분에(?) 포카라에서 아주 좋은 대학교로 쳐주는 Janapriya Multiple campus를 가보게 되었다. 4~5층 정도의 건물 너덧 개가 전부였는데, 칠판, 의자, 책상 할 것 없이 낡아있었다. 도서관은 겨우 두 교실을 터놓은 정도의 넓이였고, 대학교 도서관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책 권 수도 매우 적었다. 란드룩 초등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Janapriya Multiple campus에서도 네팔 학생들이 얼마나 어렵게 공부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 한 번 연착된 비행기를 타고 카드만두에 도착했다. 첫날 묵었던 YAK & YETI Hotel에 들러 다시 짐을 풀고는 시내 깊숙이 있는, 세련된 식당에서 김재년 아저씨께서 사주시는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현지 음식으로 치킨 수프, 난, 볶음밥이 나왔는데 아주 맛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 상언이, 덕규는 식당 아래층 마트에서 기념품으로 선물할 히말라야 립밤과 녹차를 골랐고, 우리끼리 파티를 벌일 요량으로 스위트 와인 한 병과 각 종 과자, 주스를 샀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KFC를 들렀고 그 옆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하나씩 입에 물고 돌아왔다. 한 방에 모여 야금야금 주전부리를 먹고 있으니 윤지와 원식오빠가 슬금슬금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 같이 과자와 치킨을 나눠 먹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열두시가 넘어가자 와인 덕분인지 시간이 늦어서인지 눈이 감겼다.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이때를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히말라야 팩을 세 남자(원식오빠, 상언, 덕규)의 얼굴에 발라주었다. 하얀 팩을 얹은 얼굴이 무척 웃겼다. 서로를 보며 마구 웃어댔고, 물로 씻어낸 후에는 보들보들한 얼굴을 자랑했다. 그때 쏟아졌던 웃음만큼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도 아주 예쁘게 저물었다.
2012년 1월 20일 ~ 2012년 1월 21일 새벽 : NEPAL
대장님의 모닝콜이 울렸다. 어젯밤 너무 많이 먹고 자서 그런지 퉁퉁 부은 얼굴을 비비며 일어났다. YAK & YETI Hotel의 1층 식당에서 아침 뷔페를 먹고, 어제 저녁 들렀던 마트로 향했다. 어제 썼던 팩이 마음에 들었는지 덕규와 상언이는 한두 개씩 팩을 더 구입했다. 그리고 장난기가 발동한 우리는 매니큐어를 각각 다른 색으로 4개를 구입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릭샤(마차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자전거처럼 운전수가 페달을 밟아 가는 이동수단)를 타고 가기로 했다. 꽃가마처럼 예쁘게 치장해놓은 릭샤를 타고 가니 마치 왕이 된 기분이었다. 릭샤 운전수는 우리가 돌아다니지 않았던 길로 돌아갔는데, 우리나라의 재래시장과 비슷한 골목이었다. 화려한 옷가게와 정육점, 나물 가게, 신발 가게 등을 구경했다. 복잡하고 좁은 길에서 다른 이동수단들과 부딪치지도 않고 쌩쌩 달리는 릭샤 운전수의 운전 실력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호텔에 도착한 나, 원식 오빠, 덕규, 상언이는 마트에서 구입한 매니큐어를 하나씩 들고 비장하게 가위 바위 보를 시작했다. 이긴 사람이 진 사람 손톱에 매니큐어 발라주기! 늘 우리 주위를 맴돌며 놀아달라고 하던 형빈이는 매니큐어를 보더니 슬쩍 도망갔고, 윤지는 진 사람의 손톱이 칠해질 때마다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네 사람의 예뻐진(?) 손톱을 구경하며 호텔을 나서 번개 불에 콩 볶아먹듯 원숭이 사원을 둘러보고 공항으로 갔다. 열흘간 우리 밥을 해주던 옌디와 파산 부부, 일정 내내 함께하며 통역해주던 락바 스님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목에 상아색 천을 둘러주며 우리를 배웅했다. 다시 마주친 공항의 빨간 벽돌들은 이제 반가웠다. 짐을 부치고 비행기에 탑승해 운동화 끈을 풀고 아직 붓기가 빠지지 않은 발을 꺼내고 나서야 그간의 긴장이 풀렸다. 네팔에 오기 전에는 산을 타며 많은 고민을 해결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내 기대와는 다르게 걷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네팔의 환경과 사람들, 히말라야의 산은 나에게 더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그렇지만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고, 혼자 빨리 가는 것보다 다 함께 가는 것이 더 아름다움을 느꼈다. 매일 매일 빠듯한 일정에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고된 산행을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정이 든 우리 22명, 아니 23명의 대원들에게 NEPAL(Never End Peace and Love)이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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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게시판 글로 보니까 글씨가 작아 보기도 힘들고 편집도 힘들 것 같아서 파일로 함께 올렸어요~
일기를 넘 빽빽하게 썼나 ㅠㅠ싶네요.
nepal 짜맞추기 ㅇㅅㅇ
책자에 나온거 베낀거 ㅋㅋㅋㅋㅋㅋㅋ히히
아 어지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