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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川李氏 紫雲齋舍 1. 유래 영천이씨 자운재사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강호(江湖) 시조작가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과 그 배위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의 묘제를 위해 마련된 건물이다. 안동시 예안면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 봉화군과 맞닿아 있는 신남리인데, 재사는 신남리의 작은 마을 가운데 하나인 정자골에 있다. 정자골로 가는 길은 예안면 면소재지인 정산리에서 919번 지방도로 북쪽으로 약 15km를 올라가면 된다. 신남리의 작은 마을인 높은대로 올라가는 길을 경계로 해서 왼편에 베틀골이 위치하며 오른편에 정자골이 있다. 재사는 정자골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재사 바로 뒤편에는 몇 해 전까지 농암신도비(聾巖神道碑)가 있었는데, 현재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조성한 분강촌(汾江村)1)으로 이건하였다. 재사의 이름은 정자골 북쪽에 있는 자운마을에서 빌려온 듯한데,
길 오른쪽이 정자골이며 멀리 보이는 건물이 자운재사이다. 이 마 자운재사의 역사는 농암의 묘소를 정자동으로 이건할 당시로 소급해 볼 수 있는데, 이때 대규모의 산역에 따라 3동의 임시 막사가 지어졌고 산역이 끝난 후에는 이 건물들이 묘제를 준비하는 재실의 성격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묘소의 이장은 경상감사가 7개 군(안동, 예안, 의성, 영양, 예천, 청송, 영주)에서 장정 300명을 징발하도록 지시하고, 안동부와 예안현에 관리들이 파견되어 이를 관리하였으며, 도산서원에서는 안동으로 대형 상여를 주문하는 등 거도적인 토목공사의 성격을 띠었다. 묘터는 전라도의 한광지(韓光祉)라는 사인(士人)이 잡았는데, 그 형국에 대해서는 ‘장비길혈(藏秘吉穴)’, ‘대현길지(大賢吉地)’ 라고 하였다. 감영의 관리가 산역을 지키는 가운데 3동의 임시막사가 지어지고 안동부사가 제수를 장만하여 영양군수가 치제(致祭)하고 수많은 인사들이 치전(致奠)했다. 이날 참석자는 무려 800여명에 이르러 방명록의 종이가 부족할 정도였다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광중을 헤치고 관곽을 열어보니 당시의 장례 복식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며, 당시의 만사(輓詞) 35점이 고스란히 발견된 점이다.」3) 농암 선생의 묘역은 공터를 포함하여 반경 50m 정도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아름드리 적송들이 감싸고 있다. 묘역은 석축을 쌓아 두 개의 단으로 구획하여 봉분과 석물 등을 배치하였는데, 하단의 길이는 19m 정도이고 폭은 약 2m이다. 묘역 상단은 하단보다 약간 좁아져서 길이가 12m 정도이다. 석물은 맨 하단 양가에 문관석 2기를 마주보게 배치하였고, 상단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전면에 상석과 향로석을 설치하고, 좌측에는 묘전비를 세워 두었다. 그리고 상단묘역의 맨 가장자리에 망주석 2기를 배치하였다. 봉분은 방향이 자좌(子坐)향이며 형태는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원형분으로 앞쪽 하단부에 외벌로 댓돌을 놓은 후 봉토를 쌓았으며, 뒤쪽으로 2m쯤 떨어진 곳에는 자연석을 쌓아 2개의 석축을 만들었는데 토사가 봉분 쪽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묘전비는 1824년(순조 24)에 세웠는데 높이가 230㎝ 정도로 비신받침인 대좌(臺座)와 비문을 새긴 비신(碑身), 비신을 덮는 개석(蓋石)등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좌는 높이 40cm의 방형(方形)대좌로 하단과 상단의 2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아래쪽에 설치된 대좌에 상단의 대좌를 끼워 넣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꽃잎무늬를 새겼다. 비신은 재질이 오석으로 폭 76cm, 높이 125m이며, 번암(樊巖) 채재공(蔡濟恭)의 글씨로 전면에 ‘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聾巖李先生之墓 配貞夫人安東權氏祔右(숭정대부행지중추부사 증시효절공농암이선생지묘 배정부인안동권씨부우)’라고 음각하였고, 비음(碑陰)에는 세계와 행적을 새겼다. 개석은 구름무늬를 양각하였으며 높이는 57㎝ 정도이다. 갈장(碣狀) 등에 나타난 이현보 선생의 세계(世系)와 이력을 간략히 더듬어보면 선생은 영천인(永川人)으로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 또는 설빈옹(雪鬢翁)이다. 영천이씨의 계보는 고려 평장사인 휘 문한(文漢)에서 나와서 대대로 벼슬이 이어지며 번성하였는데, 고조는 영천이씨 예안입향조이며 소윤공파의 파조인 군기시소윤 휘 헌(軒)이다. 증조의 휘는 파(坡)인데 의흥현감으로 병조참의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효손(孝孫)으로 통례문 봉례이며 증 이조참판이다. 아버지의 휘는 흠(欽)으로 인제현감을 역임하고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에 증직되었다.
농암 영정 현감공은 호군인 권겸(權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는데, 조부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대대로 선을 베풀어 온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하였다. 잠을 깬 뒤에 마침 권씨 며느리가 생남하였는데, 기이한 생각에 손자(이현보)의 어릴 때 이름을 유경(有慶)이라하였다. 선생은 예안현 부내[汾川]에서 생장하였다. 글공부는 9살에 시작하였으나 향교에 유학할 때부터 비로소 분발하였으며, 20세 때 허백당 홍귀달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더욱 깊어졌다. 1495년(연산군 1)에 사마시에 입격하고 32세 때인 1498년(동 4)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동 10) 38세 때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 안기역에 유배되었다. 이 무렵 동료들에게 얻은 별명이 ‘소주도병(燒酒陶甁)’이란 별명인데 이는 선생의 맑고 강직한 내면과 외면을 나타낸 말로서 밖은 소주병과 같이 검으나 안은 맑고 강직하다는 뜻이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었으며 고향에 계시는 어버이를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해 외관직을 자청하여 30여 년에 걸쳐서 여덟 번이나 고을살이를 하였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어서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선생의 생애에서 ‘효(孝)’는 ‘적선(積善)’과 더불어 일관된 지향점이 되는 것으로 지방관으로 있을 때 가는 곳마다 양로연을 베풀었다. 특히, 1519년 안동부사 시절에 부(府) 내의 80세 이상의 노인을 청사마당으로 초청하여 개최한 화산(花山 : 安東) 양로연은 유명하다.
농암신도비각(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난 후, 1542년(동 37), 선생은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정계를 은퇴하였는데, 중종은 친히 선생을 접견하고 금서띠와 금포를 하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생의 은퇴를 가리켜 ‘염퇴(恬退)’4)로 규정하였으며, 중종대왕은 선생의 염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지중추부사를 내리고 선세를 추증하여 황고를 의정부좌참찬에, 모부인을 정부인에, 조부를 이조참판에, 증조에게 병조참의를 주었다. 선생은 강호문학(江湖文學)의 창시자로 76세 때 낙향하여 작고할 때 까지 13년간, 분천에서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 퇴계는 선생의 이러한 삶을 동경하여「어부사(漁父詞)」발문에서는 “농암 선생은 강호지락(江湖之樂)의 참됨을 터득하였으니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이 신선과 같았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여러 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농암의 어부사는 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함께 한국 시가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농암선생은 1555년 향년 89세의 일기로 분천에서 생애를 마쳤으며, 명종은 부음을 듣고 놀라 슬퍼하면서 “이현보는 여러 차례 불러도 오지 않더니, 이제 죽으매 내가 측은한 마음이 든다. 치제와 부의하는 일을 각별히 하라”고 하였다. 또, 퇴계는 선생을 일러 “선생은 남을 위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자기를 위하는 데는 치졸하였다. 항상 몸을 깨끗이 하며 넘치는 것을 경계했다. 경사가 있으면 문득 근심하며 벼슬이 오르면 두려워하여 기뻐하지 않았다. 욕심이 없어 이익을 탐내지 않았으며, 무릇 입고 쓰는 물건이 간소하여 일개 서생과 다름없었다.”고 평하였다. 명종 12년인 1557년에 효절(孝節)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맑은 인품으로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또한 안동 도산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배위는 정부인 안동권씨로 충순위 효성(孝誠)의 따님이다. 슬하에 6남1녀를 두었는데, 장자는 석량(碩樑)으로 요수하였다. 차자는 문량(文樑)인데 찰방이고, 희량(希樑)은 현감, 중량(仲樑)은 관찰사, 계량(季樑)은 현감, 숙량(叔樑)은 진사이다. 딸은 군수 김부인(金富仁)에게 출가했고, 다음에 순흥이씨는 2남을 낳으니 윤량(閏樑), 연량(衍樑)이다. 2. 건물의 구성과 배치
자운재사 현판 자운재사는 본채에 해당하는 강당과 아래채인 관리사로 구분된다. 건물의 규모는 모두 합해 12칸 반의 크기인데 강당인 본채가 6칸이며, 관리사는 6칸 반으로 여기에 측간과 욕실이 가작으로 설치되었다.
강당 전경 강당은 묘사 때 참제원의 숙식과 음복 등을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으며, 관리사는 관리인이 살며 재사와 묘소를 관리하고 묘사 때는 회식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건물은 산자락 경사면을 깎아 터를 고르고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건물을 올렸는데, 축대의 높이는 관리사 쪽이 50㎝ 정도이고, 강당은 130㎝ 정도이다. 관리사와 강당 사이에는 폭이 4m쯤 되는 길쭉한 마당을 조성하였으며, 강당의 전면에는 승강(乘降)의 편의를 위해 4단의 계단을 설치하였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지붕은 홑처마팔작지붕이다. 공간구성은 앞쪽에 퇴칸을 둔 전면 2칸의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각각 1칸 반 크기의 방을 배치한 단출한 구성이다. 재사의 중심공간인 대청의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마무리하였으며, 뒷벽에는 머름을 드린 문얼굴에 넌출문의 바라지창을 설치하여 집회 시에 조망과 통풍을 고려하였다. 방의 앞쪽에는 군불을 땔 수 있게 아궁이를 설치하였고 전면과 측면의 벽에는 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천장은 고미반자로 마무리하였다. 관리사는 정면이 5칸이고 측면은 왼쪽이 1칸, 우측면은 1칸 반의 크기이다. 건물의 좌측면과 우측면의 칸 수 차이는 고방과 문간을 이루는 좌측공간에 비해 작은방과 안방, 부엌으로 구성된 우측 공간이 앞쪽으로 반 칸 정도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붕의 모양도 관리사의 좌측 공간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취하였고, 우측 공간을 이루는 부분은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는데 현재는 지붕 위에 기와모양의 강판을 덮어 놓았다. 3. 기타 1) 關聯儀禮 (1) 聾巖先生墓享 笏記 諸執事先就外位○贊者入就再拜○因就位○祝及諸執事入就再拜○各就位○陳設○執事設蔬果○參神○獻官以下皆再拜○降神○初獻官陞詣盥洗位○盥手○因詣墓位前跪○三上香 ○執事二人一奉酒注○一奉盤盞○斟酒授獻官○獻官灌于地○俛○伏○興○少退再拜○因降復位○進饌○執事奉飯羹餠麵進于俎
行初獻禮 初獻官陞○執事酌酒授獻官○奠爵○俛○伏○興○少退跪○祝進獻官之左○東向跪○讀祝 ○獻官俛○伏○興○少退再拜○因降復位
行亞獻禮 亞獻官陞詣盥洗位○盥手○因詣墓位前跪○奠爵○俛○伏○興○少退再拜○因降復位
行終獻禮 終獻官陞詣盥洗位○盥手○因詣墓位前跪○奠爵○俛○伏○興○少退再拜○因降復位
行侑食禮 祝添酌拜禮○扱匙正箸○獻官以下皆再拜○俯伏○祝三噫歆○進茶○獻官以下皆鞠躬○平身
行飮福禮 初獻官詣香案前○跪○祝取首獻盤盞之酒○授獻官○獻官飮訖○祝復虛盞于尊卓○俛○伏○興○降復位○撤匙箸○撤茶○辭神再拜○焚祝○獻官以下以次出○祝及諸執事皆再拜而出 (2) 聾巖先生墓享 祝式 ① 墓祭祝 維歲次云云某親某官某敢昭告于 顯先祖考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府君 顯先祖妣貞夫人安東權氏之墓氣序流易霜露旣降膽掃封瑩 不勝感愴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 尙 饗
② 山神祝 維歲次云云某官姓名敢昭告于 土地之神某恭修歲事于先祖考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府君先祖妣貞夫人安東權氏之墓維時保佑 實賴神休敢以酒饌敬伸奠獻 尙 饗
2) 關聯資料 (1) 聾巖先生墓碣銘 【前面大字】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聾巖李先生之墓 配貞夫人安東權氏祔右 【碑 文】 故孝節公聾巖李先生歷事三朝蔚爲名臣以嘉靖乙卯六月十三日卒訃聞于朝上震悼謂廷臣曰李賢輔屢召不來今則已矣予甚慘恒其賻贈有加以是年八月葬于禮安縣北龍頭山乾坐原厥後宗嗣頗不振人或謂大賢之後宜昌而若此甚非天理九代孫祥熻萬熻等遍議京鄕諸先達積誠經紀乃於正宗辛亥卜地于安東才山縣淸凉南麓始改葬焉距乙卯始葬寶二百三十八年也及啓壙棺柩髹㯃如新旌翣桋幣及挽軸三十四度遺衣三稱宛然俱在卒完襄殆神明佑之也舊有碑碑重不可遠移仍竪于汾江院新阡義不可無碣更議新斲以其文託不佞竊惟先生立朝本末出處大節具在退陶老先生所纂狀及忍齋洪太學士舊碑文不容更贅略述生平踐歷與夫遷奉事實以志其槩焉先生諱賢輔字棐仲永川之李也曾祖諱坡義興縣監贈兵曹參議祖諱孝孫通禮門奉禮贈吏曹參判考諱欽麟蹄縣監贈左參贊妣贈貞夫人安東權氏護軍謙女以惠莊王丁亥七月二十九日生燕山乙卯進士戊午登文科內而校書正字藝文館檢閱待敎奉敎成均館典籍司成司諫院正言司諫司憲府持平執義侍講院司書輔德司僕寺正軍器監正僉正繕工禮賓副正尙衣院判官戶曹佐郞參判刑曹正郞參議參判兵曹參知禮曹參議佐郞承政院同副右副承旨弘文館副提學同知中樞府使知中樞府事外而永川榮川郡守密陽安東大丘府事忠州星州牧使慶州府尹慶尙監司此其履歷也先生雅尙謙退引年乞骸者屢任寅春始辭病東歸上引見特賜金犀帶錦袍以褒寵之命吏護行搢神傾朝出餞自是家居十四年中廟嘉其恬退因本秩守知中樞府使仁廟奬其抗疏忠直陞資憲明廟因大臣請尙節義陞正憲又特擧尊年之典陞崇政知樞常帶如故此盖異數也先生行誼之高德業之盛立朝而聖明恃如蓍龜在野而一代仰若山斗況以退陶之大賢書牘唱酬之際極致尊敬至有登門質業永供灑掃之語卽此而先生之德望可知也已後生何敢一辭贊焉先生娶安東權氏忠順衛孝誠女生六男一女長碩樑夭次文樑察訪次希樑縣監次中樑觀察使次季樑縣監次叔樑進士師傳女適節度使金富仁后娶順興李氏生二男閏樑判事衍樑銘曰史直傳誨萊戱曾養大賢特書列朝寵章余言奚贅仰止彌長浩㤼衣履載遷吉崗玄和如新神佑孔彰幽隧永完福祿無彊曰有雲仍孝思是將奚斲新珉懿德愈光天長地久君子之藏 崇祿大夫前行兵曹判書兼 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 韓致應 謹撰 ■ 농암선생 묘갈명 고 효절공 농암 이 선생이 역사 삼조(三朝)하여 울연히 명신이 되었다. 가정 을묘 6월 13일에 졸하고 부고가 조정에 들리니 임금이 놀라 슬퍼하시고 조신에 말씀하되 “이현보가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아니하더니 지금은 그만이라. 내가 심히 비통하고 놀랍도다. 그 부의를 더 주어라.” 이 해 8월에 예안현 도곡 선영 및 건좌(乾坐)에 장사하였더니 그 뒤에 종사가 자못 부진하게 되니 누가 이르되 대현의 뒤가 당연히 창성할 것인데 이와 같으니 심히 천리가 아닌 것 같다. 9대손 상흡(祥熻) 만흡(萬熻)등이 널리 경향 제 선달에 의론하고 많은 경영을 쌓아 이에 정종 신해 10월 초 길일에 안동 재산현 정자동 자좌로 이장하니 가정 을묘에 처음 장사시대로 말하면 237년이었는데 관곽의 칠이 새롭고 명정 삽 체백 및 만사 34와 유의 세 불이 완연히 있었으며 마침내 완전히 양례하였으니 자못 신명이 도운 듯하다. 비가 있었으나 후중하여 멀리 운치할 수 없어 분강본원에 옮겨서 세우고 신산에 묘갈이 없을 수 없어 다시 의론하여 세우고 그 글을 나에게 부탁하거늘 가만히 생각하매 선생의 입조 본말과 출처 대절이 퇴도 노선생이 지은 행장과 홍 태학사 옛 비문에 갖추어 있으니 다시 쓸데없이 덧붙여 할 수 없고 대략 평생 이력과 면례 사실을 지어 그 대체의 요점이나 기재하노라. 선생의 휘는 현보(賢輔)요 자는 비중(棐仲)이요 호는 농암인데 영천인이라. 증조의 휘는 파(坡)인데 현감 증(贈) 병조참의요, 조의 휘는 효손(孝孫)인데 통례문 봉례에 증 이조참판이요, 고의 휘는 흠(欽)인데 인제현감에 증 좌참찬이요, 비는 정부인 안동권씨 호군 겸(謙)의 따님이다. 혜장왕 정해 7월 29일에 나시다. 연산 을묘에 진사하고 무오에 문과에 올라, 안으로 교서 정자 예문관검열 대교 봉교 성균관전적 사성 사간원정언 사간 사헌부지평 집의 시강원사서 보덕 사복시정 군기감정 첨정 선공 예빈부정 상의원 판관 호조좌랑 참판 형조정랑 참의 참판 병조참지 예조참의 좌랑 승정원 동부 우부승지 홍문관 부제학 동지중추부사 지중추부사이고, 밖으로는 영천(永川)․영천(榮川)군수 밀양․안동․대구부사, 충주․성주목사 경주부윤 경상감사가 그 이력이다. 선생이 본 뜻이 겸허하여 인년(引年) 걸퇴를 여러 번 하다가 임인년 봄에 비로소 병으로 사양하고 동으로 돌아오니 임금이 불러보시고 특히 금서대 금포를 주시어 포총하시고 영이에 명령하여 호행케 하셨고 대신들이 모두 조정을 비우고 나와 전별하였다. 이로부터 집에 14년을 거쳐하셨으며 중종께서 그 편안히 물러가심을 가상하여 지중추부사를 주시고 인종께서 그 소를 올린 충성을 장려하여 자헌대부로 승진시키시고 명종께서 대신의 청으로 절의를 숭상하여 정헌대부로 승진시키셨고 또 존현의 전례로 특별히 숭정대부로 승진시키시고 지중추 직위는 늘 가지게 하시니 대개 특이한 수(數)이시다. 선생의 행의의 높음과 덕업의 성함은 조정에 들어가서는 임금이 시귀와 같이 믿었고 재야에서는 일대가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렀다. 하물며 퇴도의 대현으로도 편지와 시의 화답할 때 가지끈 존경하여 등문질업(登門質業) 영공쇄소(永供灑掃)의 말씀이 있게 이르니 곧 여기에 선생의 덕망을 알 수 있다. 후생이 한 말이라도 찬양할 수 있을까? 배위는 안동권씨 충순위 효성(孝誠)의 따님이다. 6남1녀를 낳으니 석량(碩樑)은 요수하고 문량(文樑)은 찰방 다음 희량(希樑)은 현감 다음 중량(仲樑)은 관찰사 다음 계량(季樑)은 현감 다음 숙량(叔樑)은 진사 사부요 여(女)는 절도사 김부인(金富仁) 다음 순흥 이씨는 2남을 낳았으니 윤량(閏樑)은 판사 다음은 연량(衍樑)이다. 명(銘)에 말하기를, 사어(史魚)의 곧음이며 부열의 가르침이요 노래자의 희롱이며 증자의 기름이다. 대현이 특서하셨고 열조(중종 인종 명종)가 사랑의 글이었다. 넓은 겁계를 지내어 의리(衣履)가 이에 좋은 산에 옮김이라. 관구가 새로움과 같으니 신명이 도움이라. 묘소가 길이 완전하리니 복록이 무강하리라. 자손의 효심으 로 이 일을 하였다. 이에 새 비를 세우노니 큰 덕이 더욱 빛나리라. 하늘이 길고 땅 이 오래도록 군자의 무덤이다. 숭록대부 전행병조판서겸 판의금부 지경연춘추관사 한치응은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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