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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차 대전문화유산답사>
“대전전투와 민간인 학살” 답사 후기
○ 일 시 : 2019년 7월 6일(토) 9:00-14:30
○ 코 스 : 시청 앞 평화의 소녀상 - 옛대전형무소망루 - 옛충남도지사공관 - 점심 - 보문산 UN탑 - 을유해방기념비 - 산내골령골 - 평화의 소녀상
○ 강 사 : 노원록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이사
○ 참석인원 : 15명
1. 평화의 소녀상
이번 답사는 대전시청 맞은편 보라매공원 입구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시작 하였습니다.
강사님은 이 소녀상이 세워진 이곳이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이후인 1944년도에 세워진 대전비행장이 있던 자리이며, 대전비행장은 대전.유성 지역 학생들을 강제 동원하여 만들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2011년 12월 수요집회 1,000회를 기념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를 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국내외에 널리 설치되고 있습니다. 대전 평화의 소녀상은 광복 70년 분단 70년인 2015년 3월 1일에 세워졌습니다.
소녀상 조형물에는 많은 의미가 있는데 조선인 소녀들의 머리는 댕기머리였는데 댕기머리가 강제로 잘리고 뜯겨진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 소녀상의 발이 맨발이고 뒤꿈치가 들려있는데 이는 대부분 돌아오지 못한 상황에서 어렵게 돌아왔으나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은 불편한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셨고, 소녀상 옆의 빈 의자는 함께 살아 돌아오지 못한 대부분의 먼저 가신 분들을 위한 자리이기도 하면서, 우리도 이 분들과 나란히 앉아 아픔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겠다는 의미라고도 설명해주셨습니다.
특히 눈에 띈 점은 소녀상 바닥의 그림자는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이었는데 어린 소녀시절에 강제로 끌려가 고통을 겪었고, 할머니가 된 현재까지도 그 아픔이 치유되지 못하고 사죄도 받지 못한 현재의 상황이 겹쳐지며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할머니 그림자의 가슴에는 흰 나비가 앉아 있었는데 나비는 환생이나 희망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할머니들이 다시 태어나신 다면 다음번엔 행복한 삶을 사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평화의 소녀상 옆에는 올해 2019년 8월 13일자에 대전강제징용노동자상도 세워질 예정이라고 설명하시면서 이곳이 일제비행장터였지만 일제 징용 피해자들의 아픔을 기억하는 장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은 함께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옛대전형무소
▲1968년의 대전형무소 항공사진(빨간색 표시: 망루)
▲현재 남아있는 옛대전형무소터의 위치(노란점: 망루, 빨간점: 우물, 초록점: 왕버드나무)
옛대전형무소는 1919년 3.1 만세운동 직후 독립운동가와 사상범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였던 일본이 당시의 수감시설이 부족해지자 설치하였습니다. 철도의 개통으로 전국 어디에서나 죄수 수송이 편리한 대전에 1919년 5월 1일 ‘대전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신설하였고, 1923년 ‘대전형무소’로 이름을 변경하였고, 1939년 대규모 시설로 확장하였습니다.
▲옛대전형무소 망루
대전형무소는 이중감옥시설로 지어 감옥 안에 또 하나의 작은 감옥을 만들고, 그 안에 다시 이중벽을 쌓아서 내부로부터의 탈출을 막을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곳이었고, 서대문형무소의 구조와 같이 파놉티콘(Panopticon) 방식으로 지어져 간수가 중앙에서 360도로 여러 개의 동을 감시하기 쉽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대전형무소는 정사각형 형태로 한쪽 담장이 대략 230m에 이르렀고 대지면적 34,000평, 구내면적 14,000평으로 매우 큰 규모였으나 지금은 선병원 바로 맞은편 도로변에 망루 한 동과 그 건너편에 우물 한 동이 남아 있어 불과 7.5%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망루의 모습을 보면 2층에 해당되는 부분까지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사각의 형태이고 그 윗부분은 원형인데, 강사님은 빨간벽돌까지가 일제시대에 만든 것이고, 그 윗부분은 1971년도에 증축된 것으로 확인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대전형무소에 투옥된 사람들은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대거 수감되었고, 광복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는 정치인, 좌익인사, 제주 4.3사건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보도연맹원 등이 수감되었는데 이 시기에 수감되었던 4900명 ~ 7000여명의 사람들이 민간인 학살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후에는 사상범, 민족주의자들이 수감되었습니다.
또,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었던 이응노 화백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는데 이것이 대전에 이응노미술관이 있게 된 이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대전형무소 우물
▲옛대전형무소터 공원화공사 중 발견된 옛대전형무소 담장 일부
지난해인 2018년 8월에 옛대전형무소 터 관광자원화 공사를 진행하던 중 옛대전형무소의 담장과 시설 일부가 발견되어 2018년 9월 말에 대전문화유산울림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등 대전의 시민단체들이 공사중단과 발굴전면확대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한 바 있었고, 추후에 발굴하기로 하고 현재는 발견된 담장유구를 그대로 묻어둔 상황입니다.
몇 달 만에 이곳을 방문했더니 그 사이 주변이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포토월을 만들 벽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오늘 답사를 하면서 뜨겁기도 했지만 이렇게 그늘 속에 있으면 바람이 시원해서 땀을 식힐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3. 대전 충청남도청 구 관사
일행은 세번째 답사 장소인 옛충남도청 관사로 이동을 했습니다.
옛충남도청관사 내부를 둘러보기 전에 관사 뒷마당 그늘에서 한국전쟁 당시 이곳을 임시거처로 사용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잠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전은 6월 27일부터 7월 14일(국가기록원 기록)까지 18일동안 임시수도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3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⓵ 허위방송사건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발발 후 6월 27일 새벽 2시에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피난길에 올라 대구까지 내려갔으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지적에 따라 열차를 되돌려 오후 4시 30분에 대전에 도착했습니다. 임시 거처로 마련된 충남도지사관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방송국 국장을 비밀리에 불러 육성녹음을 하게 하여 27일 밤 8시부터 3회에 걸쳐 국민들에게 허위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녹음한 연설을 통해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요지로 “국군이 반격 중이니 도망가지 말라. 나 이승만이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동요하지 말라”고 연설을 해서 이 방송을 듣고 피난길에 나서려던 많은 서울시민들이 도로 짐을 풀고 주저앉았다고 합니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예고도 없이 갑자기 한강다리가 폭파됐습니다. 이 다리가 끊겨 많은 사상자가 발행하기도 했고, 서울시민 대부분이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후에 이렇게 서울에 남겨진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부역자로 몰려 처형당하게 됩니다.
▲미 공군이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있는 장면(미 국립항공우주박물관 제공)
⓶ 대전협정과 작전지휘권 이양
1950년 7월 12일 전시 하 주한미군의 지위 및 재판관할권에 관해 체결된 한. 미간의 협정인 대전협정이 이곳 옛충남도지사관사에서 서한교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미국의 요구조건을 한국정부가 수락함으로써 수립되었습니다.
1950년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본인은 현 적대행위가 계속되는 동안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모든 지휘권(command authority)을 이양(assign)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다..(중략)“라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이는 정식조약을 맺거나 국회의 비준을 얻은 것도 아니지만, 1950년 7월 17일부터 실시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⓷ 최초 민간인 학살의 시발점
이승만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은 '반정부 세력' 처단을 지시했습니다. 6월 28일부터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기 직전인 7월 중순까지 충청지역에서 최소 4,000명에서 최고 7,00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재소자 등이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불법 총살됐습니다. 이 학살을 지시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답사 마지막 코스인 산내 골령골에서 하기로 하고 관사를 둘러본 후 다음 답사지인 보문산으로 이동했습니다.
4. 대전지구전승비(UN탑)
우리 일행은 보문산에서 유명한 보리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대전지구전승비(일명 UN탑) 계단에 앉아 강사님께 대전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사님께서는 먼저 한국전쟁이 그동안 6.25전쟁 또는 한국전쟁이라고 불려왔었는데 그 이름들이 모두 맞는 표현이 아니라는 설명부터 하셨습니다.
보통 전쟁에 이름을 붙일 때 그 전쟁의 성격이나 장소를 넣어서 일름을 정하는데 날짜를 넣어 이름을 붙인 유일한 전쟁이 6.25전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6월 25일에 처음 전쟁이 시작된 것도 아니고 그 이전에 이미 2,000여회 정도의 국지전이 있었던 상황이라 그 당시에 이미 내전상태였기 때문에 6.25 전쟁이란 표현이 맞지 않다고 설명하시면서, 다만 6월 25일에 전면전이 크게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6.25 전쟁이라고 불렀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표현도 남한과 북한을 모두 포함한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도 맞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대전전투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남한엔 군 병력이 전방에는 10만이 있었으나, 아래쪽엔 병력을 다 끌어 모아도 고작 2만5천이 전부였던 상황이었고, 맥아더장군은 한국을 사찰한 후 한국은 자체적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고를 하게 되고 미군이 한국전쟁에 투입되게 되어 이때부터 북미전쟁으로 전환되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북한 인민군은 6월 29일 서울을 점령한 후 3일을 머물다 7월 3일에 한강을 도하했습니다.
1950년 7월 2일.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보병 21연대(제1대대장인 스미스 중령)가 대전역에 도착했습니다. 스미스부대는 오산 죽미령고개로 이동해 7월 5일에 인민군과 미군의 첫 전투인 오산전투를 치렀으나 예상치 못하게 미군이 완전히 대패했습니다.
▲7월 2일 대전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TF SMITH 부대(LIFE지 사진)
1950년 7월 3일. 미 8군 산하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이 대전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딘 소장은 이날 충남도청 2층의 처치 장군 집무실에서 주한 미 육군사령관직을 겸직하게 됐음을 통보받았습니다.
7월 12일. 조치원도 인민군이 점령하게 되자 딘소장은 대전 방어를 위해 금강라인을 설정하고 유리한 지점에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딘소장은 유엔군 주력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지리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금강이 있는 대전에서 시간을 벌어야 했습니다.
반면 인민군은 대전을 점령해 부산과 전라도로 내려갈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1950년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금강방어선이 무너지자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대전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24사단과 인민군 1군 산하 3·4사단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입니다. 대전시가지가 전쟁터가 됐습니다.
7월 20일 인민군이 대전을 포위했습니다. 20일 오후 인민군이 미군을 포위하고 있었고, 딘은 사단본부의 후퇴를 정식으로 명령했습니다. 살아남은 24사단 장병들은 대부분 개별적으로 후퇴를 했고, 딘 소장은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버리고 걸어서 36일을 도망가다 전북 진안에서 인민군에게 생포됐습니다.
대전은 그로부터 67일간 북한 인민군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딘소장구출작전 이야기의 팩트>
7월 20일 딘소장이 대전전투에서 퇴각하기 위해 대전역에 남아있던 군수물자들을 빼라고 지시를 합니다.
이때 김재현기관사 등이 미카3 129호 증기기관차를 몰고 영동에서 대전역으로 보급물자를 회수하기 위해 출발합니다. 그러나 세천삼거리에서 매복중이던 인민군에게 공격을 받아 대전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퇴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딘소장구출작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팩트는 “7월 20일 보급물자회수작전”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대전전투에 대해 북한에서는 대전전투에 대해 압도적으로 승리한 전투로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미국. 남한측에서는 딘소장이 목숨을 걸고 지켰으며 지연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한편, 대전지구전승비는 1959년 3월 31일에 미군 24사단장 딘 소장이 직접 3.5인치 로켓포를 메고 인민군 전차를 격파했다고 전해지는 대흥2동(구 대전문화방송국 앞)에 세웠으나 1975년 10월에 이곳 보문산공원으로 옮겼습니다. 현재 비가 세워져 있는 이 곳은 후퇴하던 미24사단 소속 미국병사 3명이 북한군과 끝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한 곳입니다.
5. 을유해방기념비
을유해방기념비는 해방을 기념하여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일에 대전부민들이 성금을 모아 대전역 앞에 세운 비석입니다.
1971년 8월에 보문산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이 당시에 한글로 새긴 비석은 흔치 않았는데 이렇게 한글로 깊게 새긴 비석이라는 점과 한국전쟁 당시 비석은 사격연습용으로 많이 쓰여서 비석들마다 여기저기 총탄 자국이 나있기 일쑤인데 이 비석은 너무나 깨끗하다는 점 등이 다른 것들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2018년 울림에서 전국에 있는 해방기념비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13기 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그중 3기가 대전에 있습니다.
보문산에 있는 이 을유해방기념비와 유성초등학교에 세워진 해방기념비, 유성 세동의 광복기념 식수 느티나무가 그것입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전국에 있는 어느 해방기념비보다 을유해방기념비가 단연코 가장 크고 웅장하고 멋있는것 같습니다.
▲대전역 앞에 서있는 을유해방기념비와 해태상
6. 산내 골령골
우리 일행은 마지막 답사지인 산내 골령골 학살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별칭이 붙은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이 시작된 무렵 1950년 6월 말부터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제주 4.3사건 및 여순사건 관련자 등 정치범과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들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끌려와 집단 처형되어 묻힌 비극적인 곳입니다.
▲세로로 길게 보이는 약간 높은 곳이 유해를 발견한 곳이고 아직도 많은 유해가 이곳에 묻혀있다.
산내 학살사건은 크게 3차로 나누어 일어났습니다.
⓵산내 1차 학살 사건
1차 학살사건은 1950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있었으며,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가 그 대상이었다. 이들은 헌병대, 경찰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와 처형되었으며 그 규모가 14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⓶산내 2차 학살 사건
2차 학살은 1950년 7월 3일부터 5일까지 일어났으며, 그 규모가 1,800명 ~2,000명에 이른다. 항일운동가 이관술, 4.3항쟁 관련 재소자 등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제2사단, 제5연대 헌병대의 주도로 처형되었습니다.
⓷산내 3차 학살 사건
3차 학살 사건은 1950년 7월 6일부터 17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영등포, 서대문, 수원형무소 가석방자들이 열차 타고 내려오다가 대전역에서 마구잡이로 연행되었고, 공주형무소, 청주형무소의 일반사범 200명, 서산경찰서 보도연맹원 400명을 비롯해 태안, 부여, 강경, 홍성, 서천에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중 주동자급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육군형무소의 육군 주도하여 처형되어 그 규모는 1700명에서 많게는 3700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해발굴현장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진상 조사와 함께 유해 발굴도 진행됐습니다. 이곳 산내에서는 2007년 6월 25일부터 9월 22일까지 약 70여 일에 걸쳐 유해발굴 조사를 실시했지만, 소유주와의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유해 매장 추정지 7곳 중 4개 지점에 대해서만 한정적으로 유해발굴을 진행했고, 4개 지점 중 2개 지점에서 34구의 유해가 발견됐습니다.
유족과 시민단체가 나서 지난 2015년과 2016년에 유해 발굴을 다시 실시 2015년에 2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2016년에는 유해를 찾지 못해 현재까지 모두 50여 구의 유해만 발굴한 상태입니다.
산내 학살지 한켠에 창고처럼 보이는 컨테이너 건물이 있었다. 마음 아프게도 이곳이 유해가 발굴된 분들을 임시로 모시고 있는 추모관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2015년 6월에 대전산내 희생자 유가족들이 힘을 모아 마련한 곳입니다.
▲산내 학살 피해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임시추모관
노원록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이사님께 대전전투와 민간인학살에 대해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답사였습니다.
노원록 이사님은 오랫동안 평화통일교육을 해오면서 늘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살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한마디로 많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유해발굴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서 이곳에 묻혀있는 모든 분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시길 바라며, 이곳에 진실을 알리고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추모공원이 하루 빨리 건립되기를 기대해봅니다.
강의 : 노원록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이사
글쓴이 : 허혜경 (사)대전문화유산울림 사무국장
첫댓글 답사 후기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