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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와 침례
말씀 : 벧전 3:21.
우리나라에 1611년 판 진본 킹제임스 성경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하나님의 크나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진본 킹제임스 성경은 현재 전 세계에 몇 권 없답니다. 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 마량포에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의 책이 200여 년 전 영국 해군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보관 상태가 좋고 진본의 활자체 또한 요즘 책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목회자 모임 일행이 우리나라 처음 성경도래지 마량포에 진본 킹제임스 성경이 있다는 말을 듣고 2017년 5월 그곳을 방문하여 200여 년 전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들을 재현해 놓은 것들을 보았는데 기록되어진 것들을 통하여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 교회 성도들과 다시 그곳을 찾아 관람하며 우리나라가 얼마나 복 받은 나라이며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인가? 그리고 지금 내가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생각할 때 다시 한 번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역사적인 기록은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치거나 기록자의 일방적인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경이 전래된 역사적 기록은 당시 이곳을 방문했던 영국 해군들의 항해 기록을 통해 증명된다는 것은 참으로 값진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한국사를 통해 듣고 배운 것들은 확실한 고증들이 별로 없고 구전을 통한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캐토릭 측에 의한 것들이 더러 있으나 온전한 기독교의 전래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활동들의 기록들이 물증으로 남은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 해군 소속의 함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항해 기록을 통해 본다는 것은 우리의 기록보다도 더 값진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마량포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다른 유명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곳을 방문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우리에게 주신 복이 얼마나 큰지 무한 감사 했지만 우리가 그곳의 방문기를 기록해 놓지는 못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방문기와 그들이 느낀 소감들이 소개 되었는데 그중 하나를 인용하여 여러분들에게 알려 드리고자합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당시 그 진본 성경으로 복음이 전해지고 번역되어 신앙의 기초를 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느 여행자의 수기)
마량포구는 서해안 유일의 해돋이와 해짐이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천연기념물인 마량리 동백나무숲과 함께 서해안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매년 해돋이 축제에는 1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드는 서해안의 정동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에 성경이 처음 전해진 곳인데 곧 마량포구라는 곳입니다. 마량포구 작은 언덕에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비(碑)가 서있고 성경전래지 비(碑) 뒤에는 영국 해군이 타고 왔던 군함과 우리나라 판옥선 모형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국 해군 전함 갑판에 오르면 대포가 양쪽으로 설치되어있고 마량진 첨사(僉使:조선시대 각 진영에 속한 종3품의 무관)와 일행들이 영국 군함을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테이블이 놓여있습니다. 공원은 새롭게 조성하였는지 넓은 터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모형 배 이외에는 특별한 설명 자료가 없었습니다.
특이하게 마량포 방파제 벽면에는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곳에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 전래 고증 벽화가 자세한 설명과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내용은 주로 순조실록과 영국해군 바실 홀(Basil Hall)함장의 항해기에서 발취한 것인데 의외로 상세한 기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로부터 “은둔의 나라”조선 서해안을 탐사하라는 임무를 받은 알세스트호의 ‘머리 맥스웰 선장’과 라이러스 호의 ‘바실 홀 선장’일행은 마량진에 정박하다(1816년9월4일, 순조16년)라고 쓰여 있습니다.
(바실 홀 항해기) : [우리들이 해안에 가까이 가자 해변에 있는 사람들, 배에 있는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가 법석거리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중 하얀 턱수염을 한 노대관(老大官)은 하얀 턱수염이 가슴을 거쳐 허리 밑까지 닿았고, 푸른 명주로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든 옷은 위풍 있게 펄럭이고 있었다.]
(1816년9월4일, 순조16년) ; 라이러호 함상에 안내된 조대복 첨사 일행은 준비된 돗자리를 깔고 시종무관을 좌우에 두고 정좌하여 바실 홀 선장 일행과 문정을 통해 대화를 시도하다.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묻자 모르겠다고 머리를 흔들어 다시 한글로 물었으나 여전히 모르겠다고 손을 흔들어 힐난하기를 꽤 오래하였으나 결국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라이러호에 재방문한 조대복 첨사 일행은 군의관으로부터 진찰도 받고 함포사격시범도 관람하며 식사에 초대되어 서양요리를 처음 접하다.(1816년9월5일, 순조16년)
(바실 홀 항해기) : [그렇게도 색다른 인종의 문화를 소화해 나가는 그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는 정말 놀랄 만 했다. 그 훌륭한 태도는 그 사회에서 그의 지위를 짐작케 할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 정도가 무시 못 할 만큼 높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는 연구심이 강하고 결코 터무니없이 놀라거나 과도한 찬사를 하는 일이 없는데, 세계 어느 곳에 갔다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교양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바실 홀 항해기에서)
(1816년9월5일, 순조16년) : 얼마 후 상황은 급변하여 영국 함선 일행이 육지로 상육하려하자 첨사 조대복은 자신의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며 온 몸으로 반대하였으나 일행은 육지에 이르렀고 조대복은 크게 실망하여 대성통곡하다.
(바실 홀 항해기) : [이 문제의 신호가 무었을 의미하던 간에 외래 인을 취급하는데 관한 국가 지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곳에서 우리들에게 취해진 행동이라든지 우리들의 상육을 그렇게 반대하는 것을 보면 정부 측에서 경계와 감시가 극히 엄중한 것임을 알려 주는 듯했다.](바실 홀 항해기에서)
(1816년9월5일, 순조16년) : 머리 맥스웰 함장 일행은 첨사의 마음을 여러 가지로 달랜 후 첨사 조대복 일행이 다시 함상의 서재에 들어가 서적을 둘러볼 때 그가 성경의 장정에 상당히 마음이 끌리는 듯했다. 머리 맥스월 일행에게는 그것이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1816년9월5일, 순조16년)
(바실 홀 항해기) : [그(마량진 첨사 조대복)가 선실에 있는 서적들을 구경한 후 그는 성경의 장정에 상당한 마음이 끌렸으나 막상 그에게 성경을 권하자 비록 마지못해 서지만 주저하면서 거절했다. 그러나 배가 막 떠나려할 때 다시 건네주자 이제는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받고 상당히 기분 좋게 돌아갔다.](바실 홀 항해기에서)
벽화를 따라가며 설명과 그림을 보니 이곳에 성경이 전해지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나라의 순조실록과 바실 홀 함장(Captain Basil Hall)의 항해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있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지금부터 200년 전 이곳 앞바다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방파제 위에서 마량포구를 바라보며 200년 전 영국인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만나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주고받았을 모습을 상상해 보니 우습기도 했습니다.
영국 함장의 눈에 당당하게 보였던 첨사 조대복이란 분이 정말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마량포구를 돌아 나오는데 언덕위에 높다란 서양식 건물에 성경 전래지 기념관이란 간판이 보였습니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니 기념관 입구가 나타났습니다. 안으로 들어섰더니 성경 전래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된 이야기는 방파제에서 보았던 것과 거의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놀라운 것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양인이 쓴 최초의 한국 서해안 탐사 여행기로 멕레오드(Mc Leod)가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1816년 9월 영국 군함 알세스트호가 우리나라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였습니다. 알세스트호의 군의관인 맥래오드와 라이러호의 바실 홀 함장(Captain Basil Hall)은 이때의 경험을 귀국 후 여행기로 남겨 각각 한국 서해안 항해기를 출간하였습니다. 특히 맥래오드의 여행기는 서양인과 한국인 최초의 만남이 삼화로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방파제에 그려진 그림은 바로 이 삽화를 옮겨 그린 것이었습니다. 첨사 일행이 건네받은 것과 같은 1611년도 킹제임스 성경(1611 King James Bible)도 전시되어있었습니다. 전시관에 있는 예배당은 작지만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마량포구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처음엔 시골의 작은 항구였지만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니 뭔가 깊은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언덕을 넘어 돌아오는 길에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도 찾아보았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문을 열지 않았는지 공사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라이러호의 바실 홀 함장(Captain Basil Hall)이 방문한 69년 후인 1885년 아펜젤러 감리교 목사는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와 교육활동을 하던 중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 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인천에서 목포로 가다가 이곳 마량포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펜젤러 목사의 기념비는 한국 최초 성경 도래지에 서 있었습니다.
‘하늘이여, 바다여, 파도여’라는 정진삼 목사의 시와 흉상이 모셔져있었습니다. 지는 해와 뜨는 해를 함께 볼 수 있다는 서해안의 명소 마량포구에서 뜻밖의 기독교 역사 유적을 만났습니다.(어느 여행가의 마량포 관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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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기준은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도 진실함이나 진품을 좋아하고 원하는데 불행하게도 가짜나 모조품이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어떤 물건이 진품이 아니고 가짜나 모조품이라면 그것의 값은 별 볼일 없을 것입니다.
제 1 TV의 진품명품이란 코너에 여러 가지 골동품들이 소개됩니다. 거기에 오래된 미술품이라든지 서예라든지 가구나 도자기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오래되고 보존 상태가 좋으며 진품이라면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값이 매겨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진품은 값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가끔 진품인줄 알고 가보로 여기며 소중히 여기다가 진품임을 판정받기 위하여 가져 나왔다가 모조품이라는 판정을 받고 크게 실망하는 일도 있습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모조품이나 위조품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찌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들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어찌합니까? 나쁜 의도나 변개하려는 의도는 아닐지라도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그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선한 뜻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쓰거나 어떤 단어를 잘못 번역하거나 단어를 빠트리거나 자기 생각을 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 될 경우가 있음이 사실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시 116:10-11)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거니와 내가 심히 고난을 당하여 황급히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롬 3:4)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 이것은 기록된바, 이로써 주께서 주의 말씀하신 것에서 의롭게 되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시리이다, 함과 같으니라.』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불안전하며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훈계하시고 책망하시고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책망을 받으며 자기를 돌아보고 잘못을 바로잡아야합니다. 잘못된 길에서 바로잡혔다 하더라도 훈계가 반복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시 잘못 될 수 있고 곁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러운 마음을 씻고 회개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자라도 항상 깨끗하거나 완벽하지 않으므로 훈계에 훈계를 거듭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성경 전체에서 여러 번 말씀하시고 또 경고하십니다. (신 4:2)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한 가정에서도 어느 아들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할 때 아버지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더하거나 자기가 하기 싫은 내용을 빼고 전달한다면 아버지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간에 오해가 생기거나 불편한 관계를 낳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일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하셨는데 여자는 말하기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즉 만지지도 말라 라는 말을 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죽으리라”하셨는데 여자는 “죽을까 염려하노라”로 변개 시켰습니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행위입니다.
(신 12: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지켜 행하고 너는 거기에 더하거나 그것에서 빼지 말지니라.』 이러한 명령을 성경 곳곳에 반복해서 기록해 놓으셨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고 있을 뿐 아니라 변개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다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보는 성경엔 오류가 전혀 없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고후 2:1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많은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함에서 난 자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같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악한 자들에 의해서 더해지거나 빠지거나 잘못 번역되는 것이 부패시키는 것입니다.
(잠 30:6)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라. 그분께서 너를 책망하실 터인즉 네가 거짓말쟁이로 드러날까 염려하노라.』 어느 성경번역자가 친절하게도 어린이들이 알기 쉽게 번역한다고 소위 어린이 성경이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선한 뜻으로 어려운 단어를 쉬운 말로 풀어 놓다가 하나님의 말씀과는 동떨어진 의미 전달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시는 영역입니다. 그것을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해시키려 하는 것이 잘못된 일입니다. 성경은 이해하는 책이 아니라 기록된 대로 믿는 책입니다. 우리는 기록된 그대로 전달하면 됩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실 일입니다. (요 14:26)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하셨습니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설교할 때 알아듣기 쉽게 한다며 많은 예화나 비유를 드는데,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에다 자기 생각을 더하든지 오늘날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뺀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전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목사라면 하나님의 말씀에다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빼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듣기에 즐겁고 감동스러운 설교보다는 성경기록에 따른 바른 말씀을 전하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비교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는”베레아 사람들을 고귀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행17:11).
성경과 맞지 않는 연설을 설교라고 떠드는 자들을 경계해야합니다.
(렘 26:2)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의 집 뜰에 서서 {주}의 집에서 경배하려고 오는 유다의 모든 도시들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말하라고 한 모든 말을 말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날 성경을 읽다가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개역성경을 사용할 때인데 구원 받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한 동안 멍한 상태에 빠졌었습니다. (계 22:18-19:개역)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개역성경에는 (없음)구절이 무려 13절이나 됩니다. 몇 단어를 빼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성경을 보면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결국 천국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린다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성경의 결론이 이렇게 끝난다는 말인가? 참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은 이런 성경을 읽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성경의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말라는 설교를 자주하시는데 그 예를 들어 주시는 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온전히 보존된 바른 성경을 접하게 되었고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이 구절을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계 22:18)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개역성경과 같이 거룩한 성에 참여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을 섬기는 부분에서 받을 상급을 빼신다는 말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엄중하고 존귀하고 두렵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거나 변개 시킬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재앙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를 더하면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이 그에게 더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인가를 뺀다면 그가 주님께 받을 몫에서 빼실 것입니다.
♥ 저는 오늘 개역성경에 세례(洗禮)라고 번역된 단어를 상고해 보고자합니다. 대다수의 성도들이 세례나 침례나 같은 것이 아니냐? 반문합니다. 물론 대개가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대단히 크고 다릅니다. 단순하게 세례는 씻는다는 의미이고 침례는 잠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씻는 것과 잠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가요? 우선 씻는 것은 적은 양의 물로도 해결됩니다. 그러나 잠기는 것은 몸이 잠길 만큼의 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물에 잠기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침례는 물속에 잠기고 죽고 묻혔다가 일어난다는 부활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세례와 침례의 다른 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은 많이 늦었지만 개역성경도 성경의 표준인 킹제임스 성경을 알고 지식 있는 사람들에 의해 세례를 침례로 바로잡기도 했습니다. 많은 부분들을 바로잡거나 없음 구절들을 채우기도 했으나 아직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마 3:13-14)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으로 요한에게 오사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 14)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물 침례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그분이 물 침례를 받으신 것은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마3:15)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기 위해서 요르단으로 가셨습니다. 만약 세례를 받기 위해서라면 요르단까지 가지 않아도 어디서나 물 한 바가지면 해결됩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물이 많아야 하고 물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침례는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마 3:16)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라.』 (요 3: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이는 거기에 많은 물이 있었기 때문이더라. 또 그들이 와서 침례를 받으니』 침례를 받으려면 물이 많아야합니다.
전도자 빌립에게 침례를 받은 이디오피아 내시가 침례를 받을 때에도 물속으로 내려갔습니다. (행 8:38) 『그가 명령하여 병거를 멈추게 한 뒤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속으로 내려가니 그가 내시에게 침례를 주니라.』 세례를 받으려면 누군가 한 사람이 물을 조금 떠 오면 됨으로 둘이 물속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은 그들 모두에게 침례를 베풀기 위함입니다. (고전 10:2) 『모두가 구름과 바다 속에서 모세에게로 침례를 받고』이들은 실상 갈라진 바다의 마른 땅을 걸었지만 이는 영적인 의미로 “바다 속에서”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 침례란 물 침례가 있고 성령침례가 있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받는 불 침례가 있습니다. 성령침례란 성령께서 내 안에 내가 성령 안에 잠기는 것을 말합니다. (마 3:11) 『참으로 나는 회개에 이르도록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있으시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나를 자격도 없노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 (막 1:8) 『참으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리라, 하니라.』 (눅 3:16) 『요한이 그들 모두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시나니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노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
참으로 안타깝게도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침례를 받을 때 특별히 뜨거운 체험을 해야 한다며 반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침례보다 더 강한 것이 불 침례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불 침례는 유황불 못에 던져지고 잠기는 것을 말씀합니다.
물 침례는 신앙고백으로 잠기고 죽고 다시 일어나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행 1:5)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아니하여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시느니라.』 (행 11:16) 『그때에 내가 [주]의 말씀 곧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을 기억하였노라.』 물 침례는 모든 침례의 실질적인 모형입니다.
(엡 4:5)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우리는 주님을 믿고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고 동시에 성령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과 성령침례를 받는 것은 동시적인 일로 하나입니다.
성령침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 자들이 받는 것이고 불 침례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받는 침례입니다. 물 침례는 물속에 잠기는 것이요, 불 침례는 불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계 20:14)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 침례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 안으로, 성령님 안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예수님은 내 안에 나는 예수님 안에 있게 되는데 이것이 곧 진정한 침례의 의미입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마치 스폰지를 물에 넣으면 스폰지가 물속에 잠김과 동시에 물 또한 스폰지 속으로 스며듭니다. 물 침례를 받으면 물속으로 들어가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고 성령침례를 받으면 성령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롬 6:3)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다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 (골 2:12)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믿음을 통해 침례 안에서 또한 그분과 함께 일어났느니라.』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 안으로 침례 되어 예수님으로 옷 입는 것입니다. (갈 3:27)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로서는 도저히 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령님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없습니다.
♥ 침례는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완전하게 전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전해야 합니다.
(고전 15: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 것을 기억하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또한 그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3)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은 곧 성경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4)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이것이 완전한 복음이요, 헛되이 믿지 않았으면 완전한 침례가 됩니다.
사람이 물속에 잠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인인 우리는 죽어야 그 죄로부터 분리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의 남편은 죄입니다. 죄와 죽음을 통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없습니다.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법에 의해 그에게 매여 있으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녀가 자기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나니 이것은 너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분과 결혼하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죄인은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다가 물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죄 없는 부활의 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결합을 의미합니다.
세례나 침례는 같은 의미라 하나 세례는 씻는 다는 의미는 있지만 죽음이나 부활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골 2:20)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성찬식이라는 주의 만찬을 행할 때마다 읽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고전 11:26)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니라.』 우리가 침례를 말할 때 죽음과 부활과 하나 됨을 빼고서는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빌 3:10) 『이것은 내가 그분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분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
침례를 세례로 번역하는 성경에서는 잠긴다는 말을 모두 삭제해 버렸습니다. 세례로서는 도저히 잠긴다는 표현을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어느 것이 맞는 말씀인지 분별하는 데는 하나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 침례란 잠기는 것입니다.
(마 20:22)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실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나를 잠기게 한 그 침례로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할 수 있나이다, 하매 23)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참으로 내 잔을 마시고 나를 잠기게 한 그 침례로 침례를 받으려니와 .......』(막10:38-39; 눅12:50참조)
♥ 침례는 누구의 이름으로 주고받습니까?
사람들은 가끔 누구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어야 되느냐? 질문합니다. 성경에는 무어라고 기록합니까?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침례식을 행할 때 주로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행 2:38)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10:47) 『이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을 받았으니 누가 물을 금하여 이들이 침례를 받지 못하게 하겠느냐? 하고 48) 그들에게 명령하여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게 하니라. 그때에 그들이 그에게 며칠 동안 머물 것을 청하니라.』 (행 19:4-5) 『이에 바울이 이르되, 참으로 요한이 회개의 침례로 침례를 주며 백성에게 말하여 그들이 자기 뒤에 오실 분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느니라, 하거늘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든지,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든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든지 상관없습니다. 그것가지고 다툴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을 다 부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든지, 주의 이름으로 하든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든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면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일 5: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 전통이 성경교리를 거스릅니다.
제가 장로교회 목사님들과 성경을 토론할 때 많은 목사님들이 기록된 성경보다 교회의 전통을 더 중시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대대로 내려온 교회(교단, 노회) 전통을 어떻게 버리고 무시하느냐? 말합니다. 또한 킹제임스성경으로 바꾸는 일도 노회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교회의 전통이라는 새로운 율법에 매여 있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주님은 (마 15:2-3)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그들이 빵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하거늘 3)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또한 어찌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느냐?』
(벧전 3:21) 『그 일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또한 우리를 구원하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니라.)』침례는 구원 받은 자들의 신앙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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