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 7, 위장, 그 외양과 내부
세칭 동방교라고 하지만, 목사나 전도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니까 일반 예배당처럼 연상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뾰족한 첨탑위에 십자가를 세워놓은 그런 예배당을 연상했다면 아주 큰 착각이다. 세칭 동방교에서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로 위장하였다가 주무관청인 문공부로부터 허가취소(인터넷검색자료 #1)된 2년후 고등법원의 판결로 허가취소가 취소되었다가 같은 해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문공부의 허가취소가 확정된후
지금은 재차 위장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개혁)교단이라는 위장 간판을 내걸고 숨겨둔 재산을 교묘하게 활용해서 지병으로 요절 단명한 부자지간인 1, 2대 교주의 우상화를 위한 기념관(인터넷검색자료 #2)으로 일백수십억원을 들여 청남수양관을 건립하기도 하고 예배당(인터넷검색자료 #3)도 제법 근사하게 건축하기도 하고 적당한 건물을 구입하거나 임대해서 십자가도 세우고 하지만 초창기의 동방교는 은둔의 종교였으니까 외부에는 교회 이름도 십자가도 아무런 표식 자체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념관을 건립하고 예배당을 신축하는 등 그 많은 자금 속에는 뼈 빠지게 바쳤던 내 지성(헌금)도 그동안 새끼쳐서 상당한 금액이 들어 있으리라.
---인터넷검색자료 #1---
1974.06.04 동아일보 1면 사회 기사(뉴스)
文公部(문공부) 東方敎(동방교)에 許可(허가)취소
文公部(문공부)는 그동안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온 세칭 東方敎(동방교)로불리는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가... 위배했기때문이라고 밝혔다. 동방교는 그동안 어린소녀들을 강제로 교단에 입단시켜 껌팔이 등을 시켜 사회에 커다란 물의를 빚어 왔었다...
---인터넷검색자료 #2---
청남수양관, 군북면 작은도서관에 도서구입비 전달 (5월15일... 2012.05.15 보내기청남수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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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컨트롤메뉴인쇄하기시군뉴스청남수양관, 군북면 작은도서관에 도서구입비 전달
2012.05.15(화) 15:43:20 | 금산군청 ( ahj6366@hanmail.net)
군북면 내부2리 청남수양관 대표 김차영 목사는 ‘군북면 작은도서관의 도서구입비로 사용해 달라며 100만원을 전달했다. 김차영 목사는 “문화소외계층이 많은 농촌지역에 작은 도서관이 있어서 매우 기쁘다”며 “작은 힘이나마 주민들의 독서활동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정배 도서관장은 “김차영 목사의 당부 말씀을 널리 알리는 한편, 양질의 도서를 구입하여 주민들의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인터넷검색자료 #3---
부산한빛교회(대한예수교 장로회) 설명회 참석 견해
다데라 2011.07.17 06:41
http://blog.daum.net/dklee6086/3
[ 잘 읽었습니다 실력없는 목회자들 퇴출은 다음으로 미룹시다. 우리들이 지금 주장하는 것 즉 성령 받으신 분으로부터 하늘의 멧세지를 들을 수 있는 행정이 될 때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90년대에 말씀중에 '앞으로 우리 행정은 세상 행정학을 한사람 삼분의 일과 지교 성민 삼분의 일과 수도자 삼분의일이 이 교단을 이끌고가야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조금만 참읍시다. 하늘에서 정리를 해주실때까지. 고맙습니다 ]
-위의 글에서 글쓴이 '다데라'는 세칭 동방교에서의 그의 명명(동방교에서 부르는 이름)인듯 하다-
세칭 동방교의 1대 교주 노광공은 그의 호를 ‘청해’라고 지어 사용했고, 그 아들 2대 교주 노영구는 ‘부남’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는데 거기서 한자씩 따 와서 ‘청남수양관’이라 이름해 놓고 그들 1, 2대 부자(父子) 교주의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면서 유품이나 기념품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지금은 대한예수교 장로회로 위장하여 간판을 붙이고 있는 전국의 신도들을 모아들여 위대했던(?) 1, 2대 부자(父子) 교주들의 자취를 설명하고 우상화시키고 있는것이다.
그 지역의 인근에는 같은 부류의 기독교 이단사이비 종교인 정명석집단의 거창한 ‘JMS 타운’도 있다. 현재 정명석은 강간사건으로 10년형을 언도받아 형무소에 들어가 있다.(인터넷검색자료 #4) 그래도 그의 신도들은 우리 선생님(JMS 정명석)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애절한 마음으로 출옥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어느 누가 사실을 이야기 해 주어도 믿으려고 들지 않는다. 명백한 증거와 증언, 3심제 법원 재판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악의에 찬 모함이요 중상모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가련한 군상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못하고 그 망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럴때 나는 길들여진 이런 저급한 종교적 굴종성에 대하여 한없는 인간적 비애를 느낀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따로 기록할 기회가 있을것 같다. 어쩌면 이단사이비 종교집단들은 그토록 똑 같은 판박이일까? 그러나 나는 그들이 교주에 대하여 가지는 애타는 심정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다. 어떻게?, 나는 경험했으니까, 그리고 경험자는 진실을 말할 수 있으니까.
---인터넷검색자료 #4---
정명석은 강간범입니다.2013.07.12 보내기네이버 직원과 통화를 해서 이른 바 JMS 라 불리는 정명석을 따르는 기독교복음선교회(애천교회... 그래서 임시로 게시중단 된 글들을 다시 게시하고자 정명석의 범죄 행위를 정리합니다. 그동안...
blog.naver.com/coolie1/110171909831
깡통의 깡통소리 블로그 내 검색
현재 정명석은 강간등의 혐의로 지난 2009년 4월 대법원에서 10년형을 확정받아 복역중이다. 그럼에도 아직 정명석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정명석이 죄가 없다고 계속 씨불 씨불 대다보면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의 목소리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보다. 하지만 그런 씨불댐의 소리가 나 같이 물속깊이 들어가 잠을 자던 사람들까지 고개를 디밀고 나오게 만든다는 것은 생각 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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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남(靑南)’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장소는 서울의 가회동에도 있다. 안국동 사거리에서 헌법재판소길을 따라 북촌한옥마을쪽으로 계속 걸어가다보면 대지 200여평에 연건평 약 800여평에 이르는 지하2층 지상 5층의 세칭 동방교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 한빛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세칭 동방교의 교회도 있고 ‘청남문화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청남(靑南)’이라는 명칭은 ‘청해(靑海)'와 '부남(夫南)’에서 한자씩 따와서 사용하는 것인데 ‘청해(靑海)’는 세칭 동방교의 창설 교주 노광공의 호((號))이고 ‘부남(夫南)’은 노광공의 둘째아들인 2대 교주 노영구의 호(號)이다. 언제부터인가 2대 교주 노영구는 ‘부남(夫南)’이라는 호((號))를 지어 사용했다.
어쨌던 옛시절 동방교의 대부분은 그냥 일반 가옥으로 외부에서 보면 영락없는 살림집이다. 그러나 대문을 통과하여 출입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사정이 좀 다르다. 그 가옥중에 제일 큰 방 하나 혹은 그 방과 미닫이로 다른 방 하나를 연결해서 집회장소로 사용한다. 한쪽 벽으로 붙여 제단을 모신다.
제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살펴보면 이렇다. 가꾸목으로 네 귀퉁이에 다리를 세우고 그위에 판데기를 얹어 사람 허리정도 높이의 책상같이 만들고 다시 그 판데기 위에 흰 천으로 덮개를 씌워놓고 일곱촛대라는 것을 나무로 만들어 양초를 꽂을 수 있도록 못을 박아 중앙에 놓고 한켠에는 컵에 물 한잔을 부어 받침이 있는 접시 위에 올려놓고 한쪽 모서리에 성경을 놓아둔다.
그리고 보좌라고 해서 팔걸이가 있는 걸상을 조잡하게 만들어 방석을 깔아 탁자의 안쪽 벽에 붙여 놓아둔 것이 전부이다. 그 안쪽 보좌에 이래조부님(노광공 교주를 그렇게 불렀다)이 앉아 계시면서 방안에 무릎꿇고 앉아있는 우리를 내려다 보고 계신다는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코메디 같은 장소다.
그때는 그것을 하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제단위의 물컵은 매일 아침 비우고 새로 떠다 놓는데 어떤때는 그 물컵의 물이 반으로 줄어 들었다고 하면서 이래조부님이 마셨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경우도 있었다.
누가 마셨는지 증발했는지 반만 부어 놓았는지 누구의 장난인지 아리송하지만 진짜 이래조부님이 목말라 마셨는줄로 그때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서울과 지방의 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신도라고 해 봐야 10-20명 수준이니 이정도의 공간으로도 충분했었고 신도수가 조금 불어나면 집회장소를 새로 만들기도 하지만 비밀스럽게 포교가 이루어지다 보니 신도수가 그리 쉽게 불어나지 않았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때는 교회라고 하기 어려운 소규모 영세 집단이었다. 전도사 혹은 목사라고 이름붙여진 사람 한명이 아침에는 팔작밥 저녁에는 오작죽을 먹고 한푼의 월급도 없이 교주의 지시를 하늘같이 떠 받들면서 이 영세한 단위 집단을 이끌어 갖가지 명목으로 지성(헌금)을 긁어모아 상부로 올렸다. 관점을 달리해서 본다면 그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전도자들 처럼 생활했으니 기성교회의 목사들처럼 삯군 목자는 아니었다고 한다면 칭찬 받을만 한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교주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우상숭배의 과오속을 헤메면서 허공에 방망이 달겠다는 식으로 엄청난 인생의 헛수고를 했으니 그들은 과연 누구에게 보상받으랴.
내가 첫발을 디뎌 입교했던 '사상8교회'도 외양과 내부는 다른 동방교의 모습과 대동 소이했다. 그러나 신도수가 조금 많아 고아원으로 사용하던 바닥이 삐거덕 거리는 나무 마루가 깔린 2-30평 정도 될까 말까한 창고 같은 건물을 집회장소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뾰족한 첨탑위에 십자가를 세워놓는다든가 하는 외부에 예배당임을 알리는 표식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외부인이 알게되면 큰일 나는 것이다. 지붕이 스레트로 씌어진 아주 허름한 건물로 비가 오면 여러군데 빗물이 흘러내리곤 해서 세숫대야을 갖다 바쳐놓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