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15:7
제목: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
●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받으신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모든 기도가 열납되고 응답을 받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최소한 아래와 같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예수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성도도 기도하고 이방인도 기도할 수 있지만 참 기독교의 기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참 성도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여러 가지 교리적∙신앙적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확실한 것은 성도의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지배하는 성도, 이를 성도의 입장에서 설명하면, 성도가 말씀을 소유하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최소한의 기도 정도는 시작한 것입니다. 이 기본에서 출발하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기도로서 이방인과 이단들이 헛수고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방인의 기도는 아래 예수님이 지적한 말씀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참고하고 경계하시면 좋겠습니다.
마6: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타종교는 물론이고 이단이나 신비주의 성향의 교회 예배나 기도회를 관찰해 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의 시간을 때우거나 중언부언을 합니다. 그들은 왜 그럴까요? 기도를 장시간 동안 많은 말로 해야만 응답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우매한 관행을 형성한 것입니다. 신사도운동을 하는 불건전 교회에서 탈출한 청년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들은 인위적으로 학습된 방언을 몇 시간이고 오래 지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기괴하고 미신적인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지적하고 경고하셨습니다. 참 성도에게 있어야 기도를 성부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신뢰한다면 예수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명료하게 기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 앞서 지적하셨던 불건전 기도를 피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는 성자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가능합니다.
요14: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로 인하여 영광을 받습니다. 참 성도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응답을 해주십니다. 이 응답으로 시행하시는 것을 주님은 ‘내가 행하리라’고 확언하셨습니다. 요15:7이 예수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을 강조했다면 요14:13, 14는 기도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기초이지만 또 알아야 합니다.
마1: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3.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예수의 이름은 궁극적으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고 현재적∙현실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임마누엘)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내세에 천국에 가게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현재 현세에서 우리 성도들과 함께 하시며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섭리를 오해하고 잘못 믿는 범신론에 문제가 많지만 자유주의자들이 오해하고 잘못 믿는 이신론도 문제가 많은데요. 이신론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신론(理神論, Deism)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품고 계신 관심은 대단히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고 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법칙을 제정하시고, 세상을 작동시키신 다음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계신다. 세상이 불변하는 자연 법칙에 따라 제 궤도를 달릴 때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시며, 무엇이 잘못되어갈 때에만 간섭하셔서 세상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드신다.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작동시키신 기계와 같으며, 날마다 조종을 받아야 하는 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
범신론(凡神論, Pantheism)은 신과 세상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과 세상을 동일시하며, 그러므로 실제로 진정한 의미의 섭리에 아무런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자연의 전체 과정은 단순히 신의 자기 계시, 즉 제2원인들의 독립된 역할에 아무런 여지를 남기지 않는 자기 계시일 뿐이다. 이른바 자연 법칙들은 신의 직접적인 행동 양태들일 뿐이다. 신은 아주 직접적인 의미에서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의 원인(author)이시다. 우리가 인간에게 돌리는 행위들조차 실은 신의 행위들이다. 이 체계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가 아니며, 자기 행동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벌코프 조직신학 개론』. |
●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롬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이고 참 성도일지라도 예수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늘 쉬운 것은 않습니다. 그래서 참 성도일지라도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기 어려울 때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비록 육체를 가진 성도가 입술로 기도할지라도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가 기도할 때 성령이 도우시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신자가 참 성도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에는 아래 번역과 같이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는 놀라운 뜻마저도 있습니다.
새번역)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위격들은 구분되지만(三位) 분리되지는 않습니다(一體). 성부는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성령은 성부의 뜻을 따라서, “성도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시기까지 합니다. 마치 어떤 은인이 머리 나쁜 학생을 대신하여 숙제를 해주고 시험을 대신 봐주는 격인데요. 이런 기도는 반드시 성공하고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그 기도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도가 성령의 기도하는 말씀을 앵무새처럼 대언하는 의지 없는 로봇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입장에서는 믿음을 다하여 최선의 기도를 올리려고 해야 합니다.
● 성숙한 성도들은 아래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합니다.
요일5:14.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하기 어려울 때,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롬8:26)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시며(롬8:27), 성도는 예수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요15:7). 기도가 막히고 방향이 안 잡힐 때 성령은 보혜사로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요약하면 성도는 최선을 다해 자기 의지로 기도해야 하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성도의 필요를 아시고 성령이 도우시므로, 우리 모두가 믿음을 다해 기도하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위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더 다양한 해석을 알고자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는 아래에 덧글로 주석의 설명도 올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
그리스도 안에 거한 자들이 얻는 축복의 특권(요15:7절). "내랄 이 너희 안에 거하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시행될 것이다.
[1]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떠한 방법으로 지속될 것인가? 그것은 말씀으로 가능하다.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이라고 바꾸어 말씀하고 계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그리고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곧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0:6-8).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모셔들이는 것은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한 곳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 말씀이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가 된다면, 또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것이다.
[2]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떠한 방법으로 지속될 것인가? 그것은 기도로 가능하다. "너희가 원하는 데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우리가 요청하는 이 기도외에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마음에 기쁨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음의 소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신다면 우리는 선한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이 약속 속에는 두 가지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 이외에는 분수를 넘어 더 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 거하는 약속들은 다시 기도에로 환원되도록 준비되어 있다. 따라서 그렇게 조절된 기도는 빨리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둘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우리가 우리 모든 기도에 대하여 평안의 대답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다.
@장코뱅 기도를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점에서 잘 설명한 것 같습니다.
<호크마 주석>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느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슴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장코뱅 그리스도와의 연합 + 말씀을 소유한 자는 본문 및 주석의 설명처럼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박윤선 주석>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 신자들은 종종 자신들이 풍성한 열매를 내는 풍부한 자양분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빈곤한 것처럼 여길 때가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든 그들이 그것을 하나님에게서 구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빈곤에 대한 대비책은 언제고 마련되어 있다"하는 말씀이 덧붙여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열성을 훈련시키시려고 종종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아주 유익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그에게 속히 닥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구하는 바에 대해서 궁핍을 느끼지 않을 것이요, 그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그의 무궁한 보고에서 충당해주실 것이다(고전1:5).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 이 말씀은, 우리가 신앙으로 그의 안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하는 뜻이다.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에서 떠나는 순간 그리스도를 다른 곳에서 찾는 셈이다.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은 우리의 무절제한 요청을 다 들어 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욕망에 빠지고 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 사항을 그처럼 쉽고 풍성하게 양보하신다면 그는 우리의 구원을 잘못 관리하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올바른 기도의 원칙에 제한하고 있다. 그의 백성은 육신이 어리석게 열망하는 부와 영광,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을 원하지(will) 않고 열매를 내는 성령의 진액(vital sap)을 원한다는 것이 본문의 의도이므로 앞서의 주장은 문맥의 확증을 받고 있다.
@장코뱅 성령의 진액은 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공급받는 것으로 신박한 표현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칼빈 주석: 요한복음>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믿는 자들은 흔히 자기들은 궁핍하고 부족하며 풍요로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이라고 느낀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일부러 덧붙이신 이유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떤 것에서 궁핍함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그들의 부족함을 즉시 해결해 주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유익한 권면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 열심을 내서 기도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로 종종 배고픔을 겪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구한 것들을 얻어서 결코 궁핍함을 겪지 않게 될 것이고, 주님은 자신의 결코 고갈되지 않는 풍성하심으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고전 1:5).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의 가르침을 떠나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우리가 무엇이든 제멋대로 구해도 된다고 하신 것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 쉽사리 그리고 너무 관대하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 별 관심이 없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 어리석고 부질없는 욕망에 얼마나 잘 빠지는 존재인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그 한계를 정해 주심으로써 바르게 기도하는 법(法)을 제시해 주시는데, 그 법이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감정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문맥을 통해서 확인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이 육신의 어리석은 소욕(所欲)을 따라서 부나 명예 따위를 바라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줄 성령의 생명의 수액(樹液)을 바라고서 기도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코뱅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다는 표현이 너무나 멋있고 믿음의 본질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기도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해서 신자들이 취하는 하니님과의 교제 (communication)의 한 형태를 말한다. 따라서 기도는 다양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간구(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 기도를 포함함)•불평(예.욘 4 : 1-3)•찬양•감사•고백•저주(예. 민 16 : 15 ; 시 69 : 22-28)•무언의 영적 교통(롬 8 : 26)•방언(고전 14 : 14-15)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기도는 신자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며 그가 하나님께 대해서 믿는 바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내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향상 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모든 형태의 기도에서 중심을 이루는 두 요소는 찬양과 간구이다. 여기에서 간구는 하나님께서 간구되어지는 것들을 들으시고 돌보아 주시며 간구에 응답해서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기도는 거의 보편적인 종교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동일한 전제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들을 믿고 그들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신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전제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고, 그것들을 거부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거부에 근거해서 참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다른 신들에 대한 기도 사이의 차이점들을 밝히고 있다. 차이점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성이며(왕상 18 : 25-38 ; 마 6 : 7-8), 이것은 성경의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특징이 되고 있다. 나아가 찬양은 하나님이 창조주시요(시 104편) 그분 백성들의 구원자(대상 16 : 8-22)로서 찬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심을 전제로 하고 있다. (→찬송)간구하는 기도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하나님의 공의를 비는 기도가 첫번째이자 최상의 기도이다(마 6 : 9-10, 25-33 ; 눅 18 : 1-8).
여기에는 또한 성령을 받기 위한 기도도 포함되어 있다(11 : 13).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구하는 기도(마 6 : 11-13)와 '마음의 소원들'(시 37 : 4)을 비는 기도도 여기에서 제외될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중요한 행위이며 그 때문에 대개 집단적인 행위의 하나로 경험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역사를 보면서,
모든 상황에서 개인적인 기도가 가능했으며 실제로 응답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여러 전환점에 앞서 종종 개인들의 기도가 선행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창 18 : 22-32), 야곱(32 : 9-12), 모세(출 32 : 11-13 ; 민 14 : 13-19), 기드온(삿 6 : 36-39), 한나(삼상 1 : 10-11), 엘리야(왕상 18 : 36-37)의 기도가 그와 같은 중요한 기도에 속한다. 복음서에 의하면 특별히 예수님은 친히 기도를 드리시고(예. 막 1 : 35 ; 14 : 35-39 ; 눅 5 : 16 ; 6 : 12 ; 22 : 32 ; 요 17장), 기도에 관해서 가르치셨으며 (예. 마 6 : 5-15 ; 눅 11 : 1-13), 기도의 효력을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막 9 : 29, 또한 그것을 약속하셨던 분이시다 (예. 마 6 : 6, 8 ; 7 : 7-11 ; 18 : 19 ; 21 : 22 ; 막 11 : 24 ; 요 14 : 13-14).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구약 공동체는 특정한 장소들을 향해-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이었다(왕상 8 : 28-30)-집단적으로 기도를 드렸다.
또한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성전을 재건했던 공동체도 집단적으로 중요한 간구의 기도를 드렸는데, 이 사실은 스 9 : 6-10 : 5과 느 9 : 1-38에 기록되어 있다.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성전을 갖기도 했지만 디아스포라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흩어졌기 때문에 주로 각 지역의 회당에서 집단으로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건물을 이용할 수 없는 경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또 다른 '기도처'를 이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행 16 : 13).
한편 기도를 포함한 초대 교회의 활동들은 주로 예루살렘에 있던 특정한 개인들의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 : 13-14 ; 12 : 12 ; 참조. 2 : 2).
하지만 교회가 빠른 속도로 확장되면서 새로운 믿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기도가 드려졌다(참조. 행 18 : 7 ; 롬 16 : 5 ; 고전 16 : 19 ; 골 4 : 15 ; 몬 1 : 2).
기도할 때 사람들이 취하는 자세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예.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왕상 8 : 54 ; “손을 들고....몸을 굽혀”, 느 8 : 6 ; “서서", 6 : 5 ;
눅 18 : 11, 13).
그러나 어떤 특정한 자세가 결코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기도에 관한 어떤 약속들은(예. 마 18 : 19 ; 요 16 : 23 ; 약 1 : 5 ; 요일 5 : 14-15) 종종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즉 계속해서 간구하는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시 말해서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있는 것이다(참조. 눅 22 : 42 ; 고후 12 : 7-9).
그런데 효과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이다(마 26 : 39 ; 롬 8 : 26-27 ; 요일 5 : 14).
약속들은 신자들이 기도와 생활의 제일차적인 목표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내(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마 18 : 20 ; 요 14 : 13-14 ; 15 : 16 ; 16 : 23-24, 26) 바로 그와 같은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일한 근거에서 믿음(마 21 : 22 ; 히 11 : 6)과 의(요 9 : 31 ; 약 4 : 3 ; 5 요일 3 : 22)도 기도 응답의 요건으로 언급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 이미 다 아신다고 말씀하고 있다(마 6 : 8, 32).
그렇다면 과연 신자들이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여기에서 생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7 : 7-11), 오히려 용기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근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물론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는 사랑을 위해서도 좋은 것들을 주신다. 하지만 그 사람은 기도에 대한 응답, 즉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의 결과나 증거로서 그러한 좋은 것들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생각에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관계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하는 행위이다. 사실 기도는 자유로운 인간과 능력의 하나님 사이의 언약 관계가 믿음 위에 기초할 때에만 진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 부분은 (눅 11 : 5-13 ; 18 : 1-18)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필요에 반응하시는 사랑의 방법이 인간의 사랑이나 정의와는 다르다는 데 오히려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주기도문)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에 대해서 잘 설명한 묵상인데요. 매우 공감합니다.
요 15:7은 기도에 대해서 가장 간명하고 확실하게 알려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으며 말씀대로 살면서 예수 안에서 성장해가는 자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거잖아요.
이 말씀은 절망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큰 힘을 주는 게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과업을 마무리하시는 단계에서 제자들에게 엄청난 유산을 물려주시는 걸 봅니다. 금과 은을 주신 것이 아니라 평생동안 사용할 수 있는 은행권, 증권 같은 것을 주신 것이니까요. 만물이 다 내 것인데 너희에게도 준다는 의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다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네요. 불순종과 믿음 없음이 원인이겠죠.
성령을 의지하여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성자 예수 이름으로 더욱 부지런히 쉬지말고 기도하여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이룰 수 있도록 순종해야겠다는 깨우침을 주시네요. 묵상의 내용에 공감하며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묵상을 요약하고 풍성한 분별도 더 추가하신 갓 같아요. 공감하며, 잘 참고하겠습니다.
풍성한 댓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