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치는 열정을 캔버스에 담았다. 격렬하게 밀려오는 생동감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붓질마다 웅장한 자연의 거친 숨소리를 느끼게 한다. 때로는 평온한 색채 배합도 보이건만 화가는 파도의 역동적 자유를 표현했나보다.
제주 여행 중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순회 전시를 보게 되는 행운을 가졌다. 지인들이 외국 여행에서 보았다는 유명 화가들의 명화 관람은 나에게 평생 접하기 힘든 기회다. 늘 어깨너머로 넘겨다보는 식견으로는 세계 명화는 감상도 어렵다. 그냥 편안하게 눈과 마음을 열어 내 생각, 내 감정, 내 느낌으로 지켜본다. 다행히 ‘도립미술관’ 큐레이터의 작품 설명에 기대어 19세기 유럽 예술가들의 화풍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가족이 있어서 더욱 감동이 짙다.
모네가 유난히 많이 그렸다는 ‘수련’ 그림에 젖어 든다. 밀레의 ‘양 떼를 치는 남자’는 목동의 고단함이 보여 안타깝다. 로댕의 ‘아름다운 아내’는 바위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벌거벗은 늙은 여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조각 작품이다. 마른 몸에 쭈글쭈글해진 젖가슴과 늘어진 뱃살이 도저히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조각을 바라보는 내 눈이 얕는 탓일까. 하지만 조각가 로댕의 예술적 세계는 예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늙어진 모습을 생생하게 조각했지만, 어머니로 한 생을 살아 낸 여자의 내면을 표현한 것으로 느껴진다.
다음은 구스타브 쿠르베의 ‘파도’ 그림 앞에 섰다. 그는 오로지 눈에 비치는 것만 그린다는 사실주의 작가로서 뜨거운 열정이 캔버스에 오롯이 넘쳐난다. 감동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벼랑을 텅텅 치받는 괴성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얼마나 많은 물굽이를 돌아왔기에 천 길 벼랑을 내딛고 할퀴는 파도의 절규를 닮았을까. 마치 어느 티브이 프로에서 보았던, 탱고 리듬에 관능적이고 격정적인 춤사위를 선보였던 무용수들을 연상시킨다. 파도가 움쩍 않는 바위를 안고 돌 듯 고독한 광기와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진다. 쿠르베 그림이 가는 내 발길을 자꾸만 돌려세운다.
섬에서 태어나서일까, 바다는 온통 나의 그리움이다. 가고파의 노랫말처럼 내 고향 남쪽 바다는 큰 파도가 없는 잔잔한 바다다. 그래서인지 더 넓고 격렬하게 요동치는 큰 바다에 대한 갈망이 있다. 지금 사는 부산 어디에서나 넓고 푸른 바다를 마주할 수 있지만 가까이 있다고, 보고 싶다고 달려가 쉬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긴 세월 삶이 올가미처럼 매인 현실에서 지척의 바다는 늘 그리움일 뿐이었다.
섬사람들에게서 바다는 생존의 수단이고 투쟁의 대상이다. 생명의 줄을 쥐고 있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바다가 미쳐 광란의 파도로 드세게 밀려올 때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어부였던 내 아버지는 강풍과 거친 파도 따위는 두렵지 않았을 테다. 빠른 해류에도 휩쓸리지 않았고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도 뱃길을 찾았다. 고기들이 모여드는 곳에, 그물을 올려 늘 만선의 깃발을 올렸을 테다. 아버지는 분명 유능한 젊은 선장이자 선주였다. 그런 이유로 바다는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아버지의 혼이라 여겼다. 물장구치며 놀았던 유년 시절을 별 탈 없이 보냈고 아버지가 없어도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고 기죽는 일도 없었다. 일찍 떠난 미안함에 혼으로 힘든 세상 고비마다 잘 살펴 주었지 싶다.
감정이 들쑥날쑥한 바다처럼 세상살이가 편안할 수만 없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이 힘들게 했다. 하늘이 무너진 듯 상실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강렬하게 비추었던 그 빛이 꺼졌다. 마음은 언제나 소용돌이치는 광란의 파도였다. 그럴 때면 종종 제주 올레길을 걷는다. 그곳에서 파도를 치솟게 하는 사납고 매서운 바람의 힘을 보았다. 바람에 대항하며 거친 파도로 밀려올 때 그대가 살아있는 바다지 싶다. 고비마다 억센 삶을 살아내는 우리네 생도 그렇다.
지난 늦가을, 때아닌 태풍주의보가 내려졌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날에 쉽지 않은 용기를 내었다. 육지의 끝자락 이기대 벼랑길 위에 나를 세웠다. 아직 태풍의 중심이 육지의 끝자락에 닿지 않았을 때건만 다가오는 바람의 위력에 작은 체구가 휘청거렸다. 태풍에 휩쓸리는 넓은 바다가 온통 흰 물 가루였다. 격노한 파도가 요동치며 험한 벼랑 위로 짠 물보라를 날렸다. 치솟다가 떨어지는 물과 함께 내 몸이 천 길 바닷속으로 휩쓸려 갈 것만 같았다. 길길이 패악 치며 울부짖는 광란의 바다였다. 그 순간 모든 시름이 파도의 괴성에 갇혀버렸다. 나는 미술관에 전시된 쿠르베의 그림 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했듯이 광란의 춤을 추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다. 그날 미친 듯 붓질을 해대는 그가 거기에 있었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서 있는 바다 풍경을 그리고 있다. 생전처럼 내 가까이서 요동치는 파도 위에 덧칠해대었다. 그가 막 그린 그림을 내 눈앞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곁으로 다가와 전처럼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바다를 그려봤어. 이 그림은 어때?”
내가 좋아하는 바다를 그렸다. 호방한 붓놀림도, 그림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도, 잔잔한 목소리도 전처럼 여전하다. 생전에 그는 사실주의 화가였으니 거침없는 열정적 붓질이 그대로 살아있다. 나를 위해 그렸다는 그림 앞에서 울컥했다. 그림은 그리움의 준말이라 했던가.
바람 많은 제주도다. 거친 파도가 끝없이 밀려와 방파제를 때리고 하얀 물거품으로 으스러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는 많은 예술인의 예술혼을 자극했다. 마치 어제 미술관에서 본 구스타브 쿠르베의 파도 그림도 실제 모습 같다. 쿠르베도 분명 사실주의 화가였으니 광란하는 바다를 그대로 훔쳐 액자 속에 담아놓았나 보다.
바다는 지붕도 벽도 없는 천연 미술관이다. 올레길 걸음을 멈추고 망망대해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본다. 서 있는 나도 오늘만큼은 대자연 미술관에 전시된 한 폭 풍경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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