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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정공(存謙)묘갈명 해석문
이민보(李敏輔) 지음
동래의 대성(大姓)은 문익(文翼)공부터 한 문중이 전후로 십여 대를 재상에 이어 올랐으니 옛날부터 사세(四世)에 다섯 분이 대를 이어 부족함이 없이 많다 할 것이다.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봉조하(奉朝賀) 정(鄭)공 존겸(存謙)은 가업(家業)을 이어 나라의 부름으로 받아 내가 알기로는 양조(兩朝)를 통하여 나아가고 물러남에 명예와 행실에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으니 이미 돌아가신 재상을 훌륭한 재상이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공(公)의 자(字)는 대수(大受)이며 자호(自號)를 양재(陽齋)라 하였다. 고려(高麗)때 좌복야(左僕射) 목(穆)은 먼 윗대의 조상이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여러 벼슬을 거쳐 임당(林塘)공과 수죽(水竹)공의 양세(兩世)가 재상(宰相)이 되어 더욱 크게 드러났으니 육대 조 이조참판(吏曹參判) 휘(諱) 광경(廣敬)의 아드님 휘(諱) 지화(至和)의 관직은 찰방(察訪)이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찬선(纘先)인데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이고 조부의 휘(諱)는 형운(亨運)으로 증좌찬성(贈左贊成)이며 아버지의 휘(諱)는 문상(文祥)으로 증영의정(贈領議政)이다. 지평(持平) 제선(濟先)의 손자이며 군수(郡守) 형진(亨晉)의 아들로 써 찬성(贊成)에게 입후(入後) 하였다.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황주목사(黃州牧使) 사제(思悌)의 따님이다. 공(公)은 경종(景宗) 임인(壬寅)년에 태어나서 영종(英宗) 26년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오르고 이듬해 신미(辛未)년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뽑혔다. 공(公)은 일찍이 재주와 명망이 있어서 겨우 옷을 알아 입을 때에 문신(文臣)들의 글을 가려서 책을 만들었다. 기성랑(騎省郞 : 병조의 관직)을 거쳐 정랑(正郞)에 전직되고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를 거쳐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에 여러 번 체직(遞職)되었다. 부수찬(副修撰)으로써 한학(漢學)을 겸대하였고, 중학교수(中學敎授)와 장악원정(掌樂院正)과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산릉도청(山陵都廳)으로 노력하여 쓰임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승차(陞差)되었으며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 여러 조(曹)의 좌랑(佐郞)을 두루 거치고 부제학(副提學) 대사성(大司成)에 진배하여 다시 홍문관에 발탁되어 상소(上疏)를 올릴 때 경계할 다섯조항(陳戒五條)을 올려 상(上)이 가납(嘉納)하여 좌우명(座右銘)으로 허락하였다. 경상감사(慶尙監司)를 제배(除拜)하고 임기를 마치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승차하고 도승지(都承旨)겸 관주사(管籌司:비변사를 관장)를 하여 아경(亞卿:참판)에 이르러 재상이 되기까지 경력이 십여 사(司)를 거치면서 겸 경연(兼經筵) 춘추관(春秋館)과 성균관(成均館)에 속(屬)하기는 무려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였다. 외직(外職)으로는 다만 횡성(橫城) 경주(慶州)에 부임하였으니, 그것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보고하는 관청이었기 때문이다. 유신(儒臣)들이 북쪽으로 귀양 가는 것을 구하기 위해 풍덕부사(豊德府使)를 꾸짖고 대사헌(大司憲)으로 돌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제배(除拜)하였으나 아래 관리가 응하지 않아 평신첨사(平薪僉使)로 보(補) 하였다가 용서받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에 제배(除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호조참찬(戶曹參判)이 이조(吏曹)로 옮겼고, 이로 인하여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밖으로 북쪽 도백(道伯)으로 나가게 되어 사퇴(辭退)하였다. 이듬해인 임진(壬辰)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발탁되었다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겼다. 상(上)이 천위(踐位:왕위에 있은지)한지 50년이 되어 외척(外戚)들이 서로 각(角)을 세워 조정이 위태롭게 되었다. 적신(賊臣) 정후겸(鄭厚謙)이 그 어머니의 힘을 빙자하여 방자(放恣)하기가 심하고 홍인한(洪麟漢) 윤양후(尹養厚) 등이 결속하여 먼저 서전(西銓:兵曹)에 부임하여 있었기에 오랫동안 관료에 있던 사람들과 통(通)하고자 하였으나 후겸(厚謙)이 사간원장(死諫院長)이었음으로 공(公)의 뜻이 불가하여 병(病)을 핑계로 그만두었다. 상(上)께서 듣고 하정(下廷)의 직위를 파(罷)하였다. 다른날에 참소하였으니 실로 여기에 까닭이 있었다. 갑자기 이조(吏曹)로 다시 돌아와서 자문하고 의논하는 권위가 크게 부응하여 소진(疏陳)하는 글에 상(上)을 거스르는 뜻이 있어서 상(上)이 크게 격노(激怒)하여 정조(政曹)에 자문의 의(議)를 죄를 주어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공(公)은 삭직(削職)되는 화를 입어 가재(家宰)에 제배(除拜)된 것에 극력으로 사퇴하였으나 또한 명(命)이 내려져도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내국 제조(內局提調)로 수임되어 성스러운 벼슬로 부름이 더욱 급하고 심하였으나 명(命)에 숙연하여 대사성(大司成)의 자리가 결여되어 인조(引趙) 김종수(金鍾秀) 서명천(徐命天)의 삼망(三望)으로 그렇게 살기를 오래되었다. 상(上)의 엄한 뜻이 갑자기 내려지기를 국자감(國子監)에 천망(薦望)하여도 호응하지 않자 처음으로 파직을 시켰다가 또 간판(刊版) 하여 회양(淮陽:강원도 회양)으로 보냈다가 북청(北靑)으로 옮겨 귀양 보냈다가 다시 종성(鍾城)에 위리(圍籬)시켰다. 이 때를 당하여 상(上)의 진노(震怒)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경연(經筵)에 임하여 큰소리보다 포의(布衣)가 마음 편하다 하였다. 이 해에 과연 용서받아 다시 실천하기에 이르렀으니, 한성판윤(漢城判尹)겸 세손(世孫)의 우빈객(世孫右賓客)이 되어 처음으로 서연(書筵)에 올라 강설(講說)을 온후(溫厚)하게 하였다. 지금의 상(上)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영명(英明)하고 박학(博學)하여 어려운 것에 질문(質問)하기를 즐겼고 상(上)의 영(令)을 세손(世孫)으로 정치를 청취하여왔다. 후겸(厚謙)이 왕후의 인척임을 기대어서 겉 마음과 속마음이 세손을 가로막음에 재상 서명선(徐命善)이 소(疏)를 올려 인한(麟漢)을 논(論)하기를 요상스러운 도적 심후운(沈詡雲)은 문장으로 뜻은 명선(命善)이 빈료(賓僚)들을 말로서 비통할 정도로 배척하였다. 공(公)이 소조(小朝)에 올린 글을 생략해서 말하기를 하늘에 닿을 격랑(激浪)에 빈배(虛舟)이요 굽은 나래는 상(傷)하였지만 오히려 굽은 나무가 놀랍게도 수십년을 지난뒤이니 공(公)이 물러날 것을 간절히 소청한다고 하였다. 상(上)이 이 상소문의 구절을 외우며 칭송하였으니 군신(君臣)의 사이에 신의를 알아볼만 하였다. 병신(丙申)년 삼월에 영종(英宗)이 승하(昇遐)하였다. 이 때 빈전제조(殯殿提調)로 당상(堂上)에서 찬집(纂輯)하여 예조판서(禮曹判書)로 바꾸었고, 이 달에 좌의정(左議政)에 진배(進拜)되었으나 상소(上疏)로 사퇴하였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두터움으로 불렀으나 국옥(鞫獄)에 참여하는 것은 면하였다.
벼슬자리에 여러 번 적임자로 임명되어 조금 낮게 우의정에 나아갔으나 윤약연(尹若淵)이 소(疏)를 올려 패역(悖逆)을 범(犯)하여 상(上)이 여러 대신들을 엄중하게 검토하지 않고 명하여 함께 관직에서 삭직(削職)시키고 전임(前任)에게 돌려주게 되어 다시 좌의정(左議政)에 승차(陞差)하였다. 공(公)은 소시(少時)에 서로 어울려 말타고 달리며 유희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고, 평상시에 기거하며 일념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반역으로 일어난 친고혼가(親故婚家)가 많아 면(免)하기 어려웠으니 흉수(兇竪) 홍상범(洪相範)이 가까운 여서(女婿) 출신이어서 사람들이 간혹 공(公)이 위태롭다 하였다. 공(公)은 오직 법을 살펴서 다스렸고 또 이미 자기 스스로를 탄핵하여 진소(陳疏)하였다. 또한 친병(親病)을 끌어서 해약원(解藥院)으로 보내줄 것을 청원하였다. 상(上)이 답하여 말하기를 경(卿)이 나라를 위하여 일함에 적도(賊徒)들이 일찍부터 시기하고 있음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2년에 대부인(大夫人)이 연세가 더욱 높아 공(公)이 차자(箚子)를 올려 봉양하기를 세 번 눈물로 부르짖으며 손수 글씨로 써서 올려 소청하였다. 상(上)이 불러서 보고 허락하며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를 임면하였다. 정해(丁亥)년에 상(喪)을 당하여 별다르게 거듭 치부(致賻)하고 명(命)하여 한 길로 호송하라 또 그 아들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복(服)이 끝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 이듬해에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영의정 겸 경모관도제조(領議政 兼 景慕宮都提調)에 제배(除拜)되었다. 갑자기 풍질(風疾)을 앓게 되어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책봉(冊封)을 거행하고자 함에 공(公)은 강력하게 일어나 춘관(春官)에 봉(封)함을 청하여 마침내 세자사(世子事)를 제배(除拜)하였다. 병(病)으로 물러나기를 십여 번에 이르렀으나 윤허하지 않고 비답(批答)을 내려 이렇게 하면 볼 수 없구나 하다가 결국 체임(遞任)이 되었다. 병오(丙午)년 봄에 거듭 수상(首相 : 영의정)에 제배(除拜)되어 이로 인하여 이동형(李東馨)의 국사(鞫事)에 청(請)하여 수결(手決)하여 내고 성(城) 밖으로 나와 버렸다. 상(上)이 화가 나서 파직(罷職)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원상대로 보임하였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유시(諭示)하기를 질병을 치유하여 다시 돌아오라 하여 영부사(領府事)에 승차(陞差)되었다. 적신(賊臣) 김우진(金宇鎭)이 자기 아버지의 세력으로 장신(將臣) 구선복(具善復) 명겸(明謙) 등과 결의를 맺고 태자(太子)의 자리에 앉히는 듯이 음흉스러운 의도로 지탄 받을 일을 하여 여러 도적들을 주살(誅殺)하였다. 우진(宇鎭)과 종친(宗親) 인(裀)이 법을 바르게 하지 않고 작처(酌處 : 술 마시는 곳)에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공(公)이 질병중임에도 대신(大臣)으로 입대(入對)하니 상(上)께서 깨우쳐 이르기를 경(卿)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내가 탄복(歎服)하는 바이오 했다. 모두가 선(善)을 거듭함은 정(鄭)씨로부터 나온다 하며 공(公)과 가까운 친척이 되는 것처럼 함께 거주함에 격조(담)를 낮추고 장상(將相)의 형적(形迹)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왕래를 허락하였다. 상(上)이 먼저 그 진실함을 얻어 공(公)의 화상(畵像)을 손수 만들어 취하여 제목을 붙여 “위처주안(危處做安) 안처사위(安處思危)”라 붙여놓고 아침이면 먼저(화상을) 봄으로써 아침에 마음을 단정히 하였다. 공경하고 삼가는 모습이 의연하더니 어언 간에 공(公)의 연륜(年輪)이 칠십(七十)에 기로사(耆老社)에 들고자하니 소청(疏請)에 허(許)하며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처음으로 원상(元相)이 엎드리니 그 뜻이 어찌 우연일까 온 세상이 비뚤어져서 예악형정(禮樂刑政)에 흉칙하고 추악한 괴수들이 당치도 않은 고위(高位)에 있어 분연(奮然)히 용단(勇斷)으로 거취(去就)를 불구하고 처리 하여 보는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公)은 죽을힘을 다하였다 하였다. 갑인(甲寅)년 팔월 초육일 성남(城南)의 집에서 고종(考終)하니 수(壽)하기를 칠십 삼세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상(上)이 크게 슬퍼하시며 조회를 철폐하고 포상을 한 등급 높여서 하고 또 명하여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勤學好問好和不爭” 함으로 문안(文安)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장사(葬事)는 양주(楊州) 망우리(忘憂里) 손좌(巽坐) 언덕에 지냈다. 원배(元配)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는 부친이 하서(夏瑞)이며 이조판서(吏曹判書) 현영(顯英)의 후손이다. 나이 십 칠세인 정사(丁巳)년에 몰(沒)하여 자녀는 기르지 못하였고 과천(果川) 이당동(理當洞)에 무덤이 있다. 계배(繼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는 통덕랑(通德郞) 경(璟)의 따님으로 청백리(淸白吏) 대사헌(大司憲) 휘(暉)가 구대조이며, 생후 공(公) 일 년 선공(先公)이 몰(沒)하였고 12년에 향년 61세로 몰(沒)하여 양주(楊州) 인장리(仁章里)에 장사 지냈다. 공(公)의 묘에서 거리가 바로 삼리(三里) 아들 치수(致綬)는 전첨정(前僉正)이고 초취(初娶) 홍(洪)씨는 1남 2녀를 낳았고, 후취(後娶) 최(崔)씨는 4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딸은 이규수(李奎秀)에게 출가했다. 공(公)은 용모(容貌)가 풍절(豊晢)하고 장중(莊重)하며 위엄이 있어 장자(長子)의 풍도가 있었으며 성품은 독실하고 효심이 깊어 의정공(議政公 : 文祥)이 질병으로 위태롭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진혈(進血) 하였으며 만병(晩病)에는 꿇어 엎드려 다리가 마비되도록 정성을 다하였다. 당상(當喪)에 나머지 정성은 자신의 힘을 다하여 전헌(奠獻)하였으며, 속광(屬纊)하기 전의 수개월을 관즐부복방달간(盥櫛府伏房闥間)하며 상을 마칠 때까지 애통(哀慟)해 하였다. 어머니 섬기기를 오십년에 연령은 높고 쇠약해 졌음을 한탄하며, 재롱하기를 어린아이 같이 무릎에서 놀며 지냈고 거상(居喪)에도 예(禮)를 다 하였다고 조문(弔問)한 사람들이 전(傳)하며 일과로 알묘(謁廟)는 반드시하고, 문득 도구를 갖추어 청소를 하여 신문(神門)에는 티끌한 점이 없었고 닦고 부지런함은 묘의 언덕도 이와 같았고, 좌우에 소나무와 가나무도 모두 손수 심은 것이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게 지냈고, 영남에 있는 선영 번영(藩榮)을 위하여 별도로 준비한 칠만금(七萬金)과 또 향화에 쓰라고 모은 의연금 6천양(兩)의 돈을 봉사(奉使)에게 돌려주었다. 연경(燕京)에서 받은 물품(物品)은 모두 나라에 속물(屬物)시켰으며 집의 문정(門庭)에는 잡빈(雜賓)이 없었고, 항상 뭇 새들이 지저귀는 맑은소리를 앉아서 들으며 수많은 책(冊)속에서 화로와 벼루(硯)에 묻혀 살았을 뿐이었다. 사람을 접대할 때는 웃으면서 말하고 관계를 더욱 친근하게 하였으며 옳고 그렇지 않음의 판별을 빠르게 하여 버려야 할 것은 엄격하게 끊어 방어(防禦)하며 인정하지 않는 행색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여러 간사한 무리들의 결롱(結弄)에 때때로는 땅에 엎드려 그런 척 하였지만 홀로 자신이 초탈한 뜻을 간직하고 있어서 세상이 모두 승복하여도 스스로를 지켰다. 그런 연유로 공(公)의 덕망과 그릇됨을 알 수 있다. 어려움을 당하면 빛을 끊고 어렸을 때의 뜻을 펴내는 것 같이하고, 어려운 모임에 큰 책임을 맡아서는 준비한 모든 것을 모두 변화시켜 보였다. 질병(疾病)이 깊고 연령(年齡) 또한 노년이니 오직 그 규모(䂓模)와 풍의(風義)가 가지런히 엄숙하고 뜻이 원대하여 법을 지키고 따름이 허식이 없고 넉넉하였다. 돌아가실 때까지 조용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 수기영종(壽耆令終:늙어서 인생을 마감함)이라. 넉넉하게 한 대를 완전한 삶을 이루었구나 ! 오호라 또한 무성하지 않겠느냐 문장(文章)으로 관각(館閣)에 으뜸이다. 큰 책(冊)으로 편찬하여 글을 사마(四馬)에 포상을 주는데 견주어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구나! 시율(詩律)과 음조(音調)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였으며 아름다운 뜻은 이에 밤새도록 펴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깊고 심오함을 알게 한다.
첨정(僉正)이 묘도(墓道)에 새길 갈문(碣文)을 외람되게 나에게 부탁함에 감당하지 못할 책임이라 사양하였으나 용납되지 않아서 매양 상주(觴酒)로 서로 주고받은 기억을 더듬어 지난날을 멍하니 유사(遺事)를 엮으니 슬픔이 더하여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명(銘)에 이르기를
명문의 머리들이 왕조에 충성을 다하여
名門髦彦。王朝忠藎
영종(英宗)에 특별히 달통하여 일찍 신임이 두터워서
英宗特達。夙致孚信
여러 안팎 시험을 엮어서 천관(天官) 높은 자리 주었구나
歷試內外。畀天官尊
이었구나 조상들의 열성을(祖烈) 신령한 자손들이 비보하였다.
纘爾祖烈。俾輔神孫
처음으로 이어받아 임금도와 나랏일 바로 잡게 하였네
嗣服之初。塩梅是卜
생용(笙鏞)으로 기운을 일으킬 제 부월(鈇鉞)이 숙연 하구나
笙鏞將煥。鈇鉞方肅
누가 막을손가 대리(代理)를, 노경(老鏡)에 당한 어려운 일을
孰遏代理。耈鏡同慝
얼굴을 등지고 병권을 잡으려 돌이켜 습격하여 흉계로 도모하니
偭厥素秉。反襲兇圖
서로 용맹하고 사납게 다투어 감히 임금을 치고자 도모하여
胥爲梟獍。敢逭天誅。
요행으로 나라에 연고가 있어 간사한 계획을 따르는 자 있어도
幸國有故。踵奸闖計
병권을 잡고 종실을 옆에 끼고 원흉의 기세를 꺾었음은
握兵挾宗。元戎肆睨
가까이서 형식과 격식으로 우리 편을 끊은 처사이었기 때문이다.
屬近形格。截我所處
가히 두렵게 감싸야 하지만 저쪽을 엿보아 경계를 얻었음이다.
可畏包藏。疇得以覷。
그윽한(깊은) 구멍을 뚫어내었으니 먼저 깨달은 자 뛰어난다.
幽竇旣破。先見始著。
용단으로 살피며 팔을 걷어 강단으로 삼가하며 재목을 긁어모아
勇視斷腕。兢效集木。
조선(祖先)이 이루어 놓으니 그게 도움이고 자손이 편안해 지네
先朝作成。毗厥燕翼。
중요한 政務에 緻密하니 나아가고 들어감에 한 개인을
樞機之密。去就之介。
당시의 임금께서 포상하는 말씀이 빛나고 크게 열려있어
當宁褒辭。畢闡光大。
크게 펼쳐 돌에 새겼으니 백대(百代)에 빛나리라.
對揚銘石。耀百代
鄭在洪 번역
領議政鄭公(存謙)墓碣銘
東萊大姓。自文翼公一門拜相。前後十有餘。古所謂袁楊之四世五公未足多也。領議政致仕奉朝賀鄭公存謙。承紹家業。知遇兩朝。進退全節。名行無玷。旣沒而莫不稱爲賢宰相。公字大受。自號陽齋。以高麗左僕射穆。爲遠祖。入本朝累卿。至林塘,水竹兩世爲相。益大以顯。六代祖吏曹參判諱廣敬。生諱至和。官察訪。曾祖諱纘先。弘文應敎。祖諱亨運。贈左贊成。考諱文祥。贈領議政。以持平濟先之孫郡守亨晉之子。後於贊成。妣韓山李氏。黃州牧使思悌女。公生於景宗壬寅。擧英宗二十六年司馬兩試。明年辛未。擢庭試丙科。公早負才望。纔釋褐。見選文臣製述。徑陞騎省郞。轉正郞。兩司春坊。累拜累遞。以副修撰兼漢學,中學敎授。歷掌樂院正。爲副應敎。用仁元后山陵都廳勞。陞拜同副承旨。歷大司諫,吏曹參議。諸曹佐貳。亦遍踐。拜副提學大司成。復長玉署。上疏陳戒五條。上嘉之。許爲座右銘。除慶尙監司。秩滿。陞同知義禁府事,都承旨兼管籌司。自亞卿至作相。所經提擧十餘司。兼啣若經筵,春秋,成均之屬。又在所不錄。外邑爲養。只赴橫城,慶州。其在喉院。救儒臣北竄。譴補豊德府使。旋除大司憲,藝文館提學。以不卽膺召下吏。補平薪僉使。赦拜弘文提學。由戶曹參判移吏曹。由禮曹參判出爲北伯辭。明年壬辰擢刑曹判書。改吏曹判書。上踐位垂五十年。戚里角立。朝象危疑。賊臣鄭厚謙藉其母張甚。洪麟漢,尹養厚等。結爲援。先是公以西銓赴政席。有長僚欲通厚謙諫長。公意不可。卽稱病。上聞之。下廷尉罷。異日中讒。實由於此。俄又還吏曹。諮議權震應。陳章忤旨。上大激怒。移罪政曺授諮議者。公被削版。及拜冢宰。力辭罷。又命仍任。終不就。授內局提調。以聖候召益急。乃肅命。大司成缺。引趙,金鍾秀,徐命天擬三望。居久之。嚴旨忽下。以國子望不互擧。初命罷職。又命刊版。旣投淮陽。轉竄北靑。又鍾城圍籬。當是之時。天威震疊。猶臨筵稱詡曰。恬雅布衣也。是年果遇赦復宿踐。由漢城判尹兼世孫右賓客。初登書筵。講說溫厚。今上在東宮。英明博學。樂與問難。屬上令世孫聽政。麟漢倚厚謙。表裏沮遏。宰臣徐命善疏論麟漢。妖賊沈翔雲投章。意在命善。而攙斥賓僚語極憯。公陳書小朝。畧曰。接天之浪。傍及虛舟。傷弦之羽。猶驚曲木。後數十年。公乞退。上誦此疏句語而稱之。君臣之際可見也。丙申三月。英宗昇遐。差殯殿提調。纂輯堂上。改禮曹判書。是月進拜左議政。上疏辭。遣承旨敦召。勉出參鞫獄。適僚席重卜。降就右相。尹若淵疏犯悖逆。上以諸大臣不嚴討。命並削職。尋還授前任。復陞左議政。公少不喜交遊馳逐。居常壹意斂迹也。逆獄起。親故婚家多不免。兇竪洪相範近出女婿。人或爲公危之。公按治惟法。已又畧陳疏自劾。且引親病乞解藥院。答曰。卿之爲國。嘗爲賊徒所嫉。予已稔知。二年戊戌。太夫人年益高。公上箚乞養。涕泣三籲。用手筆寫呈。上召見許免領敦寧府事。己亥丁憂。別致貤賻。命一路護送。又命官其子致綏。服闋。判中樞府事。翌年使燕。還朝拜領議政兼景慕宮都提調。入筵猝患類風。文孝世子冊禮將擧。公強起率春官請封。遂拜世子師。退而呈病至十度。連賜不允批答。故事所未見也。竟得遞。丙午春。重拜首相。因有李東馨請鞫事。納符出城。上怒罷職。未幾復授元輔。遣承旨敦諭。復引病得解。陞領府事。賊臣金宇鎭席父勢。締交將臣具善復,明謙等。乘儲位方虛。陰圖有指擬事發。諸賊伏誅。宇鎭與宗䄄枉法酌處。公輿疾同大臣入對。上諭公曰。卿先見之明。予所嘆服。盖謂善復爲鄭氏自出。與公爲近戚。所居亦同閈。托以將相形跡。絶不許往來。上先已得其實。取公畫像。手題曰。危處做安。安處思危。試看朝端。翼翼之儀。於是公年七十。入耆社。疏乞致政得許。批旨若曰。初元卜相。意豈偶然。擧世奊詬。禮樂刑政。爲兇醜所僭竊。能奮然勇斷。去就不苟。觀者以爲公始卒盡於是矣。甲寅八月初六日。考終于城南第。壽七十三。訃聞震悼輟朝。褒以高於人一等。又命不待狀議謚。以勤學好問好和不爭。賜謚文安。公葬于楊州忘憂里巽坐原。元配贈貞敬夫人韓山李氏。父夏瑞。吏曹判書顯英後也。年十七。沒于丁巳。無育。窆果川理當洞。繼配貞敬夫人驪興閔氏。通德郞璟女。淸白吏大司憲暉。其九代祖也。生後公一年。沒先公十二年。享年六十一。葬在楊州仁章里。距公墓直三里。男致綏前僉正。初娶洪氏。生一男一女。後娶崔氏。生四男幼。女適李奎秀。公容姿豊晢莊重。儼有長者之度。性篤孝。議政公疾革。刺指進血。晩病痺莫可拜跪。能自力於喪餘奠獻。屬纊前數朔。盥櫛俯伏房闥間。至卒事哀慟。事母五十年。位高年衰。惋愉如孺子在膝。居喪盡禮。吊者相傳。日必謁廟。輒具灑掃。神門無一点塵。修飭丘墓亦然。左右松檟。皆手植者也。居官廉白。在嶺藩。別備七萬金。又爲蠲後捐六千兩錢。奉使還。所得燕物盡屬公帑。門庭無雜賓。常見翛然淸坐羣書之間。一爐一硯而已。接人言笑。欵暢可親。而辨是非决趨捨。防範峻絶。不肯徇人爲色。以故當羣邪結弄。往往有地逼跡昵而獨超身自在。世皆服其所守。然以公德宇器識。遭逢曠絶。若可以少展夙志。而受任於艱大之會。備閱百變。疾旣痼而年且耆矣。惟其䂓模風義。整肅弘遠。有足以尊矜式而鎭浮澆。卒見其靖恭勤勞。壽耈令終。允爲一代完人。嗚呼。不亦盛乎。爲文章。長於館閣。屢撰大冊。臯比文駟之賞不可計。善詩律音調警絶。而雅志不屑於此矣。不佞迂踈。辱公知奬甚深。乃者僉正猥托以墓道之碣文。不堪任而情不容辭。每憶觴酒相屬。怳如昨日。纂次遺事。益愴以涕也。銘曰。
名門髦彦。王朝忠藎。英宗特達。夙致孚信。歷試內外。畀天官尊。纘爾祖烈。俾輔神孫。嗣服之初。塩梅是卜。笙鏞將煥。鈇鉞方肅。孰遏代理。耈鏡同慝。偭厥素秉。反襲兇圖。胥爲梟獍。敢逭天誅。幸國有故。踵奸闖計。握兵挾宗。元戎肆睨。屬近形格。截我所處。可畏包藏。疇得以覷。幽竇旣破。先見始著。勇視斷腕。兢效集木。先朝作成。毗厥燕翼。樞機之密。去就之介。當宁褒辭。畢闡光大。對揚銘石。耀百代。
풍서집(豊墅集)
저자 이민보(李敏輔) 생년1720 몰년1799 간행년도 미상
주(註)
원양(袁楊) :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느려뜨림.
기성랑(騎省郞) : 병조의 낭관(郞官).
옥서(玉署) : 홍문관(弘文館). 주사(籌司)
후원(喉院) : 조선 시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여러 가지 사항들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일 을 맡아보던 관아
북찬(北竄) : 북으로 귀양.
국자(國子) : ①국자감(國子監) ②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자제(子弟)
인한(麟漢) : 왕후의 인척.
저알(沮遏) : 가로 막음.
중복)重卜) : 예전에, 의정(議政) 벼슬에 거듭 임명하는 일을 이르던 말.
왕법(枉法) : 법을 굽힘.
익익(翼翼) : ①장건(壯健)한 모양. 정돈된 모양.[詩經]疆場翼翼.
②공경하고 삼가는 모양.[詩經] 小心翼翼
혈후(奊詬) 奊詬亡節<賈誼> 2. 머리가 비뚤다. 奊 頭衺骫奊態也<說文>
참절(僭竊) : 분에 넘치는 높은 작위를 가짐.당치 않은 고위에 있음.[蘇軾]被狂奔之僭竊.
완유(惋愉) : 한탄하고 즐거워함.
유자(孺子) : 아이. 젖먹이. 孺兒 [書經]公將不利於孺子 [史記]孺子可敎.
비보(俾輔) : 도와서 보충함.
생용(笙鏞) : 만물이 생성되는 동쪽에 놓은 악기.
부월(鈇鉞) : 작은 도끼와 큰 도끼. 옛날 임금이 제후에게 생살권(生殺權)을 주는 뜻으로 임금 이 직접 주던 무기.
연익(燕翼) : 조상이 자손들의 안락을 위해 도와 편안하게 함.[詩經.文王有聲]以燕翼子.
추기(樞機) : 중추가 되는 機關.[易經)言行君子之樞機.매우 중요한 政務.
당저(當宁) : 그 당시의 임금.
점(玷) : 이즈러질점. 옥티점. 纔 : 겨우재. 비롯할재. 엷게검을삼 褐 : 베옷갈. 신갈.
찬(竄) : 숨을찬. 귀양할찬. 견(譴 : 꾸짖을 견. 허물견. 선(旋) : 돌아올선. 회전할선.
응(膺) : 받을응. 가슴응. 아(俄) : 갑자기아. 기울다아. 후(詡) : 자랑할후. 장담할후.
념(恬) : 편할념. 조용할념. 참(攙) : 찌를참. 참(憯) : 비통할참. 嫉 : 시기할질.
임(稔) : 여물임. 유(籲) : 부르짖을유. 이(貤) : 거듭할이. 수(绥) : 편안할 수.
猝 : 창졸할졸. 갑자기졸. 운이 나쁠졸. 締 : 맺을체. 연결할체. 儲 : 버금저. 세자저. 태자저.
裀 : 禋의 異體字.제사지낼인. 정조 임금의 庶弟. 托 : 손으로 밀탁. 輒 : 문득첩.
試 : 시험할시.더듬을 시. 먼저시.
혈(奊) :분개 업이 욕할혈. 머리기울혈. 1. 분개(分槪)없다. 지조 없음.
후(詬) : 꾸짖을구. 후역(恥辱)구. “후”로도 발음. 飭 : 갖출칙.신칙할칙.닦을칙.부지런할칙. 檟 : 가나무가.개오동나무가.榎와 通. 蠲 : 밝을견.정결할견. 帑 : 나라곳집랑.금고랑. 처자노.
翛 : 깃소리소. 날개 치는 소리소. 纘 : 이을찬.
※강화도령 철종(哲宗)의 가계(家系)
조선 제25대왕 철종은 강화도령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처음 이름은 원범(元範)이고 자(字)는 도승(道升)이며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철종은 사도세자로 더 잘 알려진 장조(莊祖)와 숙빈 임(林)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인(裀)의 후손이다.
※정조(正祖)는 사도세자 즉 추존 장조(莊祖)와 혜경궁(惠慶宮) 풍산홍씨 사이에 태어났다.
사도세자 ― 정조 ― 순조 ― (익종) ―헌종
― 은언군(恩彦君)인(裀) ― 상계군(常溪君)담(湛)
― 풍계군(豊溪君)당(瑭) *은전군의 양자로 감
― 전계군(全溪君)광(㼅) ― 회평군(원경)
― 영평군(경응)
― 철종(원범)
― 은신군(恩信君)진(禛) ― 남연군(南延君)구(球) ― 흥녕군(이창응)
― 흥완군(이정응)
― 흥인군(이최응)
― 흥선대원군 ―고종 ―순종
― 은전군(恩全君) 찬(禶)(자진自盡) ― 풍계군 ― 완평군
** 은언군, 은신군은 후궁 임씨의 소생이고 은전군은 사도세자에게 죽임을 당한 후궁 박씨(빙애)의 소생이다.
欵 : 항목관. 趨 : 달릴추. 빠를추. 捨 : 버릴사. 마음편할사. 徇 : 돌순. 曠 : 빛날광.
昵 : 친할닐. 아버지의 사당녜. 痼 : 고질고. 어린아이 입병. 澆 : 걸찰요. 물뿌릴요.엷을요.
耈 : 늙을구. 屑 : 가루설. 조롱할설.진실로설. 怳 : 멍할 황. 놀라서 바라볼황.
髦 : 머리모. 慝 : 간사할특. 악할특. 偭 : 향할면. 등질면.
梟 : 올빼미효. 용맹할효. 사나울효. 獍 : 맹수리름경. 逭 : 꾀할환. 도망할환.
踵 : 발꿈치종. 闖 : 엿볼츰. 왈칵거릴츰.기웃거릴츰. 挾 : 낄협. 睨 : 흘겨볼예.해기울어질예.
截 : 끊을재.말잘할재. 疇 : 밭두둑주. 경계주. 覷 : 覰와同字.엿볼처(伺視).
竇 : 구멍두.穴也.[禮記]禮義者順人情之大竇. 腕 : 팔완.팔둑완. 兢 : 삼갈긍.
毗 : 도울비.힘보탤비.闡 : 열천.開也.밝을천.明也.
첫댓글 묘갈명 번역문을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존겸(鄭存謙) 1722년(경종 2)∼1794년(정조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수(大受), 호는 양암(陽菴)·양재(陽齋)·원촌(源村).
좌의정 유길(愉吉)의 8대손, 우의정 치화(致和)의 5대손, 문상(文祥)의 아들이다.
도암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관직: 문과급제. 옥당. 승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시호: 문안(文安) 勤學好問文 好和不爭安 정조 18년(1794)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화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한다
선생은 시장 없이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댓글 주심에 감사합니다. 앞으로 카페에 자주들러 좋은 자료로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