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그대로 반복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애굽왕 바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내를 내팽개치고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가게 한 것이다. 자기방어 차원의 술책이었지만 비열하고 가장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무엇보다도 이십 년 전에 애굽에서 똑같은 실수를 범하여 바로에게 꾸중까지 듣고 하나님 백성으로 수치를 당했음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은 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한 행동이라고는 아무리 재고해 보아도 용납이 안가는 처신이다. 아직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그의 신앙이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가 하란을 떠날 때 믿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고 하지만 그것이 그의 믿음이 완전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믿음은 여전히 연약했고 더 자라야 할 필요가 있는 믿음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아비멜렉 사건이 발생했을까? 누가 아비멜렉을 충동하여 사라를 데려가게 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사탄의 충동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을 오염시키려는 계획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백 살 된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가능성 낮은 상황에서 사라가 아비멜렉과 동침하였다면 그 이후에 태어나게 될 이삭이 과연 누구의 아들인지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황급히 개입하셔서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현몽하신 것이다.
(창 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창 20: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하나님도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무죄함을 알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했고 아비멜렉은 순전한 마음으로 그녀를 데려왔으므로 무죄였다. 그래서 (창 20: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사람은 참 잘 변하지 않는다. 특히 이기적인 욕망과 연결되어 있을 경우는 더욱 그렇다. 아브라함은 자기 살려고 아내를 두 번이나 버렸다. 변한 것 같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의 사선을 넘고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철저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후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아직도 아브라함에게는 다시 이십 년 세월이 지나 백 이십 살이 되어서 모리아 산 경험이 필요한 이유였다. 그때 하나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모리아는 비로소 아브라함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는 경험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모리아는 훗날 십자가가 세워지는 장소가 된다. 사람이 변하는 장소는 십자가다. 십자가를 경험할 때 우리는 변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사람 잘 안 변한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가 변화되는 변화의 첫 장소다.
하나님 아버지! 울고불고 기도하고 난리를 쳐보지만 저를 봐도 사람 참 잘 안 변합니다. 그만하면 변할 때도 됐다고 생각되지만,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 이 옛사람이 죽지 않고서는 새사람 되기 힘듭니다. 십자가로 이끌어 주셔서 제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보게 하시고 제 손으로 내 영혼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번제로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그 고통의 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읽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내 삶이 달라지고 변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