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
윤승원
한 폭의 수묵화다. 먼 산이 고요히 좌정하고 물억새가 바람의 일필휘지에 흔들린다. 기러기 줄지어 날아오르는 강에 노을이 물든다. 반짝이는 햇살들이 발묵하며 추경(秋景)을 완성한다. 흐름이 거의 정지한 듯 보이는 강둑에 앉아 모처럼의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비수리며 쑥부쟁이들이 발끝으로 다가와 말을 건넨다. 저 강물은 이제 곧 바다에 이르리라.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 한다. 주로 물결이 고요해진 강의 하구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이름이다. 물비늘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왠지 윤슬이라는 말이 좋다. 윤슬, 윤슬 자꾸 입안에 되뇌면 마음에 윤기가 인다. 물이 담금질한 보석이라고 할까. 윤슬들이 내뿜는 광채로 강은 어느 때보다 신비로움을 더한다. 맞은 편 강둑엔 낚시꾼 몇이 강심에 휴일오후를 드리우고 있다. 뜰채로 뜨면 금방이라도 싱싱한 물고기처럼 튀어오를 것 같은 윤슬. 내 나이 어느덧 지천명이다. 상류를 지나온 강물도 지금 지천명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공자는 나이 오십을 지천명이라 일렀다. 비로소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때라는 것으로 인과를 믿고 따른다는 말이다. 벌써 그 나이에 이른 나는 내 자신의 인(因)을 생각하지 않고 좋은 결과만 바라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을까? 하늘의 뜻은 고사하고 내 존재의 의미도 찾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나는 지천명과는 거리가 먼 듯싶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숫자로는 벌써 쉰에 이르고 말았으니. 지난했을 강의 여로를 생각하며 여기까지 흘러온 시간을 돌아본다.
이십대가 될 때까진 골짜기의 물처럼 여기저기 부딪히며 급류를 탔다. 십대에는 진학문제로 숱한 날을 방황했다. 어려운 집안 환경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 태어나서 처음 좌절이란 걸 느꼈다. 가난한 시골살림과 무능력한 부모를 원망했다. 이십대의 방황은 십대로부터 고스란히 이어졌다. 몇 번의 이직과 실패를 겪으며 마침내 이십대 후반에 현실로부터 도망치듯 결혼하고 말았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나의 방황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남편의 사업이 실패하고, 빚쟁이가 들이닥치고, 삶은 끊임없이 나를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조금 나아졌다 싶으면 소(沼)를 만났고 또 조금 나아졌다 싶으면 낭떠러지를 만났다. 내게 삼십대는 추억할 것이 없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삼십대는 가고 사십대를 만났지만 생활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부서지는 물처럼 세파에 떠밀려 아무런 성취도 없이 흘러왔다. 어느 날 돌아보니 오십이었다.
겸재는 가세가 몰락한 한미한 양반 출신이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어려운 형편을 극복하고 오십대에 가장 왕성한 그림 활동을 했다. 이때가 정선화풍으로의 이행기였다. 그 후 겸재는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사람이 되었다. 여행가인 한비야는『그건, 사랑이었네』라는 책에서 인생을 축구경기에 비유했다. 쉰 살인 자신은 축구경기의 후반전 5분이 지난 경기를 뛰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남은 후반전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쉰을 넘은 나이에 훌쩍 유학길에 올랐다.
다시 윤슬을 바라본다. 윤슬은 격랑의 물에서 보다 고요히 흐르는 물에서 더 섬세한 빛을 발한다. 거센 물살에서는 차분히 자신을 들여다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강물의 손이 하염없이 금빛실을 잦는다. 그렇게 잦은 옷감으로 물고기들은 황금비늘 옷을 한 벌씩 입었을까? 어디선가 도나우의 잔물결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마음이 차분하고 평안해진다. 장엄하지만 무겁지 않고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다. 물오리가 자맥질을 한다. 물결의 파동이 강약을 더하면서 새로운 무늬가 펼쳐진다. 지천명의 나이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겸재나 한비야처럼 나도 뭔가 새로운 걸 모색해야할 것 같다. 이제까지 나는 남의 탓만 하고 살아왔다. 부모님과 남편을 원망했으며 세상을 원망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는 강을 배경으로 한 풍경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도 노을이 내려오는 강에서 아버지와 두 아들이 낚시를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포물선을 그리며 강 깊은 곳으로 던져지는 낚시 줄이며, 끊임없이 제 존재를 반짝이는 햇살이며, 서로 간에 오고가는 말없는 신뢰 같은 것들이 잔잔한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 세 사람은 무릎까지 잠기는 강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서로 위로하며 미래의 진정한 삶의 가치를 모색했다. 윤슬의 강은 이처럼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갈등을 치유하는 반성과 화해의 장소로써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바다에 이르러야할 강물은 지금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바다는 강의 마지막이다. 그러한 강은 나름대로 일말의 후회나 착잡함이 없을까? 이제까지 흘러온 골짜기며 들판을 되돌아보며 자기반성과 더불어 앞으로 만나야할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진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듯 윤슬들이 가을강을 물들이고 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윤슬들이 석양을 받아 홍옥 빛으로 변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의 생각들은 멈춘 듯 그러나 고요히 바다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다시 뭔가를 시작해야한다고 거듭 말을 하는듯. 겸재나 한비야처럼 나도 내 삶을 승화시켜보리라 각오를 다진다. 그러면 이순이나 고희 때는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되지 않을까.
조약돌을 주워 강 맞은편 쪽으로 날린다. 물수제비가 깨금발을 뛰며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윤슬의 반짝임이 동그라미를 따라간다. 내 마음도 따라 간다. 기러기 날아오르는 강의 아래쪽이 한 생각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