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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개 값
총관 남궁필상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사전에 전갈을 넣어 방문 가능 여부를 타진해야 한다.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그 집에 있을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대문을 두드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방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팔십여 명의 방문객이 정문 앞에 진을 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 거참!”
멀리 정문이 보이자 남궁필상의 걸음이 빨라졌다.
“ 어서 오십시오. 총관님.”
경비를 서고 있던 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열어라.”
남궁필상은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짧게 말했다. 그의 얼굴엔 궁금증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끼이익!
정문이 활짝 열리고 방문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궁필상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방문자들에 대해 정보가 전혀 없을 때는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자들의 행색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누추했다. 뿌연 먼지가 내려앉은 옷은 여기저기 찢겨져 있고, 검게 그을린 얼굴은 눈 코 입조차 제대로 구분가지 않았다.
저 상태에서 허리춤에 새까만줄만 감는다면 개방 거지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보통 사람은 첫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를 자세히 살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워낙 꾀죄죄하여 대충 쳐다보고 시선을 거둬버린 탓에, 그들 속에 가주인 남궁운화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치리지 못했다.
더구나 남궁운화는 남궁세가가 가까워지면서 뒤쪽으로 빠져버린 상태였다. 남자들 사이에서 키 작은 그녀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중한 어투가 나올 수 없는 건 당연했다.
“ 어떻게 오셨수?”
남궁필상은 자신을 소개하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 신분이 어떻게 되슈?”
연우강은 남궁필상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조금 전 안쪽에서 총관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신분을 물은 이유는 떠보기 위함이었다. 과거에 비해 위세가 많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남궁세가는 안휘성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다.
그런 가문의 총관이 잠룡 십조가 안휘성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모른 척 하는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그걸 알고 싶었다.
“ 경비가 총관이라고 부르는 걸 듣지 못했소?”
남궁필상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고 없는 방문이면 방문자가 먼저 이름을 밝히고 방문 목적을 말하는 게 예의인데 거꾸로 이름을 물어왔기 때문이다.
“ 그럼 댁이 고혼검 남궁필상이란 말이오?”
“ 그렇소. 그런데 당신들은.....?”
“ 난 귀 가문의 가주가 내게 진 외상값을 받으러 왔소.”
‘ 끄응! 철면피 같은 놈!’
연우강 옆에 서 있던 이자승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살다가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들은 말에 의하면 연우강이 말하는 외상값은 남궁세가 수뇌들은 전혀 모르는 돈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맡겨놓은 돈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말을 하고 있다. 공연히 옆에 있는 자신이 더 부끄러웠다.
이자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궁필상을 보았다.
“ 외, 외상값?”
남궁필상은 뜨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난 연우강이오. 총관.”
연우강은 철립을 벗으며 싱긋 웃었다.
“ 잠룡 십 조란....”
남궁필상의 눈이 재빨리 잠룡들 사이를 훑었다. 한동안 잠룡들 사이를 오가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그의 시선 끝에는 남궁운화가 서 있었다.
“ 가, 가주님!”
그는 잠룡들을 헤치고 나가며 남궁운화를 불렀다.
“ 오랜만이에요, 총관.”
남궁운화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총관인 남궁필상 또한 남궁철상을 밀었던 자다. 이 년 만이라고 하지만 남궁필상과의 만남이 편할 리가 없었다.
“ 자, 자네들은?”
남궁운화 주변에 있던 젊은이들을 발견한 남궁필상은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과거 창궁대 대원 십여 명이 남궁운화 근처에 서 있었던 것이다.
“ 오랜만입니다.”
창궁사수의 대형인 우창준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 어떻게 된 일이냐?”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경황이 없어 그런 건지 남궁필상은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물었다.
“ 그게....”
[ 일랑, 넌 창궁사수의 대형이고, 가주의 친위대다. 친위대는 가주를 편안하게 모시는 자들을 말한다. 가주를 가주답게 만드는 사람 또한 너희들이라는 걸 명심해라.]
대답을 하려는 데 연우강의 전음이 들려왔다.
우창준의 몸이 움찔했다.
“ 그게 어떻게 됐다는 거냐?”
남궁필상은 다시 물었다.
“ 가주님을 모시고 난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창준은 포권을 취한 다음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창궁대 대원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 가주님을 모셔라!”
“ 모시겠습니다. 가주님!”
창궁대 대원들은 호위하듯 남궁운화 주변을 빙 둘러치며 소리쳤다. 그들이 소리를 지르자 앞쪽에 있던 잠룡들이 일제히 길을 텄다.
“ 드십시오, 가주님!”
창궁대 대원들은 그들 사이로 길을 잡았다.
“ 그, 그래요.”
남궁운화는 어색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묘했다. 남궁세가는 분명 자신의 집이다. 그런데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하면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남궁 소저. 여긴 남궁 소저의 집입니다.]
[ 알았어요.]
남궁운화는 어깨를 활짝 폈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 가자.”
연우강은 잠룡들에게 말하며 남궁운화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잠룡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가자 대문 밖에는 남궁필상 혼자만 남았다.
남궁필상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일반적인 무림문파와 달리 무림세가는 직계가 아닌 방계 친척이라고 해도 성씨가 다른 자들에 비해 특혜를 받는다. 남궁세가도 다르지 않다.
직위가 높다고 해도 다른 성을 가진 자들은 남궁 성을 가진 자들을 대우해 준다. 하물며 총관이면서 방계 친척인 자신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남궁 성씨를 가진 것도 아니고 자신보다 직위가 높지도 않은 우창준에게 무시를 당한 것이다.
“ 허수아비 가주 옆에 있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놈!”
남궁필상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는 안쪽으로 멀어지는 잠룡 십 조를 노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곧바로 장로들의 처소인 현인전으로 향했다.
삼 층 건물로 이루어진 현인전에는 남궁세가 최고원로인 장로 열 명이 기거하고 있다. 그들을 일컬어 남궁세가에선느 삼현이로오검이라 부른다.
일층에는 다섯 명의 노인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세 명은 운사 남궁관수, 제검 남궁궐, 사풍 남궁장익의 삼현이고, 삼현보다 약간 젊어 보이는 두 사람은 남궁세가 무인이면서 검보다는 권을 택한 추풍권 남궁운현과 파옥권 남궁자승이었다.
이들 다섯 사람이 남궁세가의 실세임과 동시에 남궁철상을 가주로 밀었던 핵심인물이었다.
“ 어쩐 일이냐?”
남궁필상이 시비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창 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노인이 물었다. 볼 살이 축 늘어지고 목에 살이 쪄 이중 턱을 한 이 노인이 남궁세가의 가주 대행이자 삼현의 대형인 운사 남궁관수였다.
“ 가주가 돌아왔습니다. 태상가주님.”
남궁필상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 잠룡인가 하는 사내 녀석들 틈바구니에서 천방지축 날뛰고 있는 그 아이를 말하는 거더냐?”
놀람도 잠시 남궁관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 그렇습니다. 태상가주님. 그 사내 녀석들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 지금 어디 있느냐?”
“ 사내들을 이끌고 창궁전으로 갔습니다.”
“ 식다 대접을 할 모양이구나.”
“ 구십여 명 정도인데 거의 상거지 꼴이었습니다. 태상가주님.”
“ 음식 재료를 관리하는 자가 누구더냐?”
“ 구야자가 하고 있습니다.”
구야자는 총관 남궁필상의 심복으로 세가 내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자였다.
“ 내 허락 없이는 쌀 한 톨도 내주지 말라고 일러라.”
“ 알겠습니다. 태상가주님!”
“ 자칫 남궁세가가 욕먹을 수도 있습니다. 형님.”
옆에 앉아 있던 제검 남궁궐이 넌지시 말했다.
“ 난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니네, 궐. 그 아이가 인사를 하러 와서 부탁을 하면 창고를 활짝 열어 최고로 대접해 줄 참이네. 그런데 이 상태를 인사를 받아도 되겠는가?”
남궁관수는 양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 허허허! 태상 가주가 가주의 인사를 받는데 옷차림이 무슨 상관입니까? 아무거나 걸쳐도 상관없습니다.”
남궁궐은 웃으며 말했다.
“ 그래도 이 년 만에 보는 가준데 준비는 해야 할 것 아닌가.”
“ 난 이대로가 좋습니다. 형님.”
“ 하긴 옷을 갈아입는게 번거롭기는 하겠구나. 운화가 올 동안 차나 한잔 더 하자꾸나.”
“ 준비시키겠습니다. 태상가주님.”
남궁필상은 고개를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 너무 일찍 온 거 아닙니까?”
남궁필상이 나가자 삼현의 셋째인 사풍 남궁자익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 아니네, 아주 적당한 때에 왔네. 마침 녀석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 오! 드디어 일어섰습니까?”
네 사람이 놀라 탄성을 지른 이유는 남궁철상에 대한 말 때문이었다.
남궁철상이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는 숨만 쉬고 있을 뿐 시체에 가까웠다. 그런데 드디어 거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지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렇다네. 아직 걸음을 걷는 단계는 아니지만, 혼인식을 치를 정도는 됐다네.”
“ 하하하! 축하드립니다. 형님. 드디어 형님도 손자며느리를 보게 됐군요.”
“ 축하드립니다. 형님.”
“ 축하합니다.”
삼현의 두 명과 이로는 활짝 웃으며 축하의 말을 던졌다.
“ 고맙네. 동생들. 이따가 가주가 오면 그때 이야기를 꺼내 볼 참이네.”
“ 우리도 적극 돕겠습니다. 형님.”
“ 고마우이.”
남궁관수는 흐뭇하게 웃었다.
일행은 담소를 나누며 남궁누화가 문안인사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 시진이 지나 두 시진이 지나고, 밖이 캄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운화는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 결국 남궁관수는 남궁필상을 창궁전으로 보냈다.
창궁전에 다녀온 남궁필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 어떻게 하고 있더냐?”
남궁필상의 얼굴을 살핀 남궁관수가 물었다.
“ 그게.....”
남궁필상은 얼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 말하거라.”
“ 여, 연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 내가 했던 말을 구야자에게 전했느냐?”
남궁관수의 낯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 전했습니다. 태상가주님. 더불어 남궁세가 창고에서는 음식 재료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 하면?”
“ 회양루에서 음식 재료를 사고 요리사까지 데려왔다고 합니다.”
남궁필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그는 남궁운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두 명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거라면 그녀 선에서 처리할 수 있지만 오늘 들어온 자들은 구십여 명이나 된다. 그 인원에게 식사를 대접하려면 상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물론 그녀가 남궁세가 가주이지만 이 년 동안 세가를 떠나 있었고 현재 남궁세가를 총괄하고 있는 사람은 남궁관수 장로다.
남궁운화 입장에서는 인사도 할 겸하여 현인전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곳으로 오지 않고, 외부에서 음식을 가져와 연회를 베푼 것이었다.
“ 고얀 것.”
지옥한 모욕감에 남궁관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 아직 제 처지가 어떤지 정확하게 모르는 모양입니다. 형님.”
남궁궐 일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화가 치민 듯 네 명의 얼굴도 잔뜩 붉어져 있었다.
“ 앞장 서라.”
“ 모시겠습니다. 태상가주님.”
남궁필상은 다섯 명과 함께 처소를 나섰다.
“ 태상가주님.”
대문으로 향하는 데 무인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풍뢰단 단주 경천일검 남궁성인이었다. 남궁성인 또한 가주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긴장한 채로 남궁관수의 명령을 기다리가다 아무런 소식이 없자 현인전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남궁성인을 쳐다보는 남궁관수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 잘 왔다. 성인. 지금 이 시간 부로 창궁령을 발동하겠다. 각 단 및 대에 속한 무인들은 전투 준비를 한 후 창궁전 앞으로 집합하라고 하여라!”
“ 차, 창궁령입니까?”
“ 그렇다. 성인. 당장 시행하라.”
남궁관수의 몸에서 추상같은 위엄이 흘러나왔다.
“ 존명!”
남궁성인은 부동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창궁령은 전 가솔의 동원령을 의미하는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 서둘러라!”
“ 알겠습니다. 태상가주님.”
남궁성인은 몸을 날려 대문을 나섰다.
“ 형님!”
남궁궐이 우려 어린 얼굴로 남궁관수를 보았다.
창궁령은 가주만이 발동할 수 있는 가주의 고유권한이다. 만일 남궁세가 가솔들이 남궁관수가 발동한 창궁령을 거부하게 되면 자신들의 꼴만 우습게 되기 때문이었다.
“ 아니네, 동생. 그 계집이 날 찾아오지 않았다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 되네. 방금 자네가 했던 말처럼 남궁세가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줄 필요가 있네.”
남궁관수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쳤다.
벌써 십 년 이상 남궁세가를 총괄해 왔고, 가솔들 또한 팔할 이상은 자신을 따른다. 지금 상태를 고착화시키기 위해서 창궁령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 가세.”
그는 가슴을 활짝 펴고는 대문을 나섰다.
창궁천은 현인전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 건방진.....”
왁자지껄하게 떠더는 소리가 담을 넘어 들려오자 남궁관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콰앙!
남궁관수는 대문을 거칠게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 무슨 소리지?”
연우강은 과일을 깎다 말고 남궁운화를 보았다.
남궁운화도 대문을 걷어차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방실방실 웃던 그녀의 얼굴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얼어붙었다.
“ 자, 장로들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요.”
“ 삼현이로오검이라는 늙은 것들?”
“ 총관하고 삼현이로만 왔을 거예요.”
“ 오검은 뭐하는 자들이죠?”
“ 그들은 연공에만 몰두하고 있어요.”
“ 이도 저도 아닌 중립이란 말입니까?”
“ 그런 셈이에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둥둥! 뎅뎅뎅! 둥둥! 뎅뎅뎅!
그때 느닷없이 북소리와 종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운화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 환영식을 해주려는 종소리는 아닐 테고, 뭡니까?”
남궁운화의 얼굴을 보고 있던 연우강이 물었다.
“ 차, 창궁령이 발동됐다는 신호에요.”
“ 창궁령?”
“ 남궁세가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발동하는 전 가솔 동원령이에요.”
“ 그건 가주만 내릴 수 있는 명령 아닌가요?”
“ 원래는 그래요.”
“ 재미있는 집구석이네요.”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다시 과일을 깎았다.
그가 깎고 있는 과일은 감과(참외)라고 불리는 황금색 과일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사망마비가 움직일 때마다 감과는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 좀 그렇죠.”
남궁운화의 커다란 눈망울에 물기가 어렸다.
얼마 전 유성비검 신도영의 가문인 신검세가에 들렸을 때가 떠올랐다. 신도영의 아버지는 죽었던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자신들을 극진히 맞아주었다. 그러고는 그 지역에서 가장 잘한다는 요리사를 부르고, 최고의 음식으로 대접했다. 그러면서도 연우강이 외상값을 달라고 하자 두말없이 내주었다. 반면에 자신은....
가주가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인사하러 온 가솔은 한 명도 없고, 연회 준비도 연우강이 전부 했다.
그런데 이제는 창궁령이 발동했다는 비상종까지 울리고 있다. 가주의 직위가 남궁관수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통고하는 것이 분명했다. 문득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 일랑!”
곁눈질로 남궁운화를 보고 있던 연우강은 우창준을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조장님.”
“ 가주님을 안으로 모셔라.”
“ 알겠습니다. 조장님.”
우창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니에요. 난 이곳에 있을 거예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저었다.
“ 험한 꼴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 상관없어요. 여긴 아직 내 집이잖아요.”
그녀는 마음을 추슬렀다.
스스로 당당하지 않으면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하였던 연우강의 말이 떠올랐다. 가주 직위를 박탈당하고 가문에서 쫓겨난다고 해도 당당하게 떠날 생각이었다.
“ 아직?”
“ 네, 아직.”
“ 아직은 창랑의 집이란다, 전부 즐겨.”
연우강은 잠룡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잠룡들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은 지금껏 남궁운화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남궁세가라는 대단한 배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처지는 자신들보다 더 못했다.
자신들은 잘난 가문의 자식들에게는 무시를 당했을지언정 가문에서만큼은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남궁운화는 아니었다.
이 년 만에 가문으로 돌아왔지만, 인사를 오는 가솔은 단 한 명도 없고, 아제는 가주인 그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궁령까지 발동됐다고 한다. 부모님도 없는 그녀는 가문에서도 멸시와 냉대를 받고 있었던 거였다.
남궁운화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인해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오르며 화가 났다.
드드드! 드드드!
잠룡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으로 탁자 위 접시들이 들썩였다.
“ 본인이 괜찮다는데 왜 너희들이 화를 내는 거냐, 기운을 거둬들여라.”
약간은 메마른 듯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잠룡들은 일제히 내기를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연우강을 보았다.
“ 여긴 아직은 창랑의 집이다.”
“ 맞아요, 아직은 제 집이니까 연회를 즐겨요. 제가 술 한잔 따를게요. 조장님.”
남궁운화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연우강 앞에 있던 술병이 둥실 떠올랐다.
“ 좋습니다. 남궁 소저.”
연우강은 사망마비를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그가 술잔을 들어올리자 허공에 머물러 있던 술병이 기울어지며 술이 흘러나왔다.
“ 하하하! 술잔이 넘치는 건 정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남궁 소저.”
“ 그럼 많이 넘치게 따라야겠네요.”
남궁운화는 정마롤 술이 줄줄 흐르도록 따랐다.
“ 무슨 짓인가, 가주!”
바로 그때 문일 벌컥 열리며 날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룡들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 앞에는 총관 남궁필상을 비롯하여 여섯 명이 이 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 어, 어서 오세요, 운사 장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하지만 남궁관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남궁운화는 말을 더듬었다.
“ 무슨 짓이냐고 물었소이다. 가주.”
“ 잠룡 십 조 조장께 술을 따라주고 있는 거예요.”
“ 가주는 대남궁세가의 가주요. 혹시 가주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니오?”
“ 내가 남궁세가의 가주였던가요?”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과거 같았으면 남궁관수의 호통에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물론이고 입이 절로 열리고 있었다.
“ 그러면 가주가 아니란 말이오?”
“ 그럼
“ 사 장로는 직책이 어떻게 되죠?”
그녀는 침착하게 잦아든 목소리로 남궁관수를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 난 태상가주, 아니 남궁세가의 제일 장로요.”
“ 재미있는 말이네요. 언제부터 남궁세가에 태상가주라는 직책이 있었죠. 대답해 보세요. 총관.”
이번엔 남궁운화의 시선이 남궁필상에게로 향했다.
“ 그건 장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 장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면 가주에게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 그 결정이 있을 당시 가주님은 대야벌에 있었습니다.”
“ 난 대야벌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두 달이 걸렸어요. 총관. 그냥 온 것도 아니고 전투를 두 번이나 치렀어요. 그런데 총관에게는 대야벌이 지옥보다 더 먼 곳이었나 보네요.”
“ 그건.....”
남궁필상은 할 말을 잃었다.
남궁세가의 가법상 전대 가주가 아닌 자는 태상가주에 오를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잘못된 사항이었다.
“ 이래도 내가 가준가요?”
남궁운화의 시선이 남궁관수에게로 옮겨갔다.
“ 내가 태상가주가 된 건 가주가 없는 동안에 남궁세가를 좀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였네.”
“ 효과가 있었나요?”
“ 물론이네. 가주. 풍뢰단, 검뢰단, 무적대, 천풍대가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줘서 그 어느 때보다 잘 다스리고 있었네.”
“ 천뢰단은 장로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나 보죠?”
태연했던 남궁운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풍뢰단, 검뢰단, 무적대, 천풍대가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기로 했다는 말은 천뢰단을 제외한 전부가 남궁관수를 따르기로 했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이미 남궁세가는 남궁관수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그들도 곧 협조.....”
휙! 휘리릭! 휙! 휘리릭!
느닷없이 바람소리가 들려오자 남궁관수를 비롯한 여섯 명은 시선을 돌렸다. 연우강이 뭔가를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가 받고, 또다시 던져 올렸다가 받는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니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튕겨올리고 있다고 해야 했다.
남궁관수 일행은 저도 모르게 연우강이 가지고 노는 물체에 시선을 집중했다.
‘ 응?’
남궁관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놀랍게도 그건 날이 바짝 선 비수였다. 남궁관수는 시선을 들어 연우강을 보았다.
‘ 으음!’
그는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연우강 또한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연우강은 비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빙글빙글 빠르게 돌아가는 비수의 손잡이 끝을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 그들도 곧 협조라는 말까지 했어, 영감.”
연우강은 사망묵의에서 비수 하나를 더 꺼내 오른손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 천천히 돌렸다. 검지와 중지에 있던 비수가, 중지와 약지 사이로 옮겨가고, 중지와 약지 사이에 있던 비수가 다시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로 옴겨갔다. 마지막까지 간 비수는 다시 되짚어왔다.
툭!
그러면서도 빙글빙글 도는 비수를 검지로 다시 쳐 올린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이 아닐 수 없었다.
“ 금릉 연씨 세가의 장자라던데.... 맞느냐?”
남궁관수는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말을 올려줄 수도 있었지만, 남궁운화를 조원으로 거느리고 있는 자라 일부러 반말을 했다.
“ 알면서 뭘 물어. 그리고 갑자기 대화 상대를 바꾸는 건 예의가 아냐, 영감. 특히 상관하고 이야기하는 도중이라면 더더욱 그래선 안 되는 거야.”
연우강은 또다시 비수 하나를 꺼내 오른손 손가락에 끼우며 말했다.
“ 그건 우리 남궁세가 일이다.”
“ 내가 군에 있었단 말을 했던가?”
연우강은 또다시 비수를 꺼내 허공으로 던져 올리며 물었다.
“ 듣기는 했다.”
“ 군에서 그런 놈이 간혹 있었어.”
“ 어떤 놈 말이냐?”
남궁관수의 시선은 어느새 연우강의 손에서 노니는 비수에 가 있었다. 다섯 개의 비수 중 세 개는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두 개는 손가락 사이를 넘나들고 있었다.
숨 가쁘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도 다섯 개의 비수는 한 번도 멈추거나 엉키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 볼 살이 축 늘어져 귀와 볼 살이 구분이 안 될 정도고, 병영에서 처먹고 놀아서 그런지 턱도 늘어나 걸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돼지 같은 놈이었어.”
남궁관수의 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방금 연우강이 묘사한 몸매는 정확하게 자신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 그놈이 어쨌다는 거냐?”
남궁관수는 차갑게 물었다.
“ 그놈은 늙어서 병영에 있고, 나는 흑랑기를 이끌다 보니까 수시로 작전을 나가는 데 하루는 두 달 동안 작전을 나갔다 돌아와 보니 사고가 생긴 거야. 그런데 보고할 놈은 그놈 밖에 없었어. 볼 살이 늘어지고 이중 턱인 그놈은 한창 내게 보고를 하다가 갑자기 딴 짓을 한 거야. 사실 그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어. 원래 나이를 처먹으면 노망 증세가 있어서 깜빡깜빡 하잖아. 그런데 이 새끼를 가만히 보니까 내가 어리다고 일부러 그랬던 거란 말이야. 그놈을 내가 어떻게 했을까?”
어느새 연우강의 오른손에는 일곱 개의 비수가 들려 있었다. 허공으로 올라가는 비수의 수는 다섯 개가 됐고, 속도는 점점 빨라져 오르락내리락 하는 비수가 겹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연우강의 시선은 여전히 남궁관수를 향한 채였다.
“ 어떻게 했느냐?”
“ 여물통을 박살내 버렸어. 여기서 여물통은 당나귀의 주둥일 말해. 볼 살이 축 늘어지고 게으른 게 꼭 늙은 당나귀처럼 생겼거든. 그러고 보니 그 늙은 새끼하고 영감이 많이 닮았네. 혹시 늙은 당나귀란 별명으로 불리지 않아?”
“ 놈!”
결국 듣다 못한 남궁필상이 오른발을 구르며 으르렁댔다.
“ 남궁필상, 말조심해라.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네놈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서 허접쓰레기보다 못한 가문의 총관이 주둥일 놀리느냐.”
“ 정녕.”
남궁필상은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 그 검을 뽑는 순간 남궁필상 넌 죽는다. 내 전 재산을 걸고 내기를 해도 좋다.”
검을 뽑으려던 남궁필상의 손이 우뚝 멈췄다.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십 군데에서 자신을 향해 살기가 밀려든 탓이었다. 남궁필상은 흘끔 남궁관수의 눈치를 살폈다.
“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남궁필상.”
“ 알겠습니다. 태상가주님.”
남궁필상은 천천히 손을 뗐다.
“ 바로 그거야. 남궁필상. 개는 머리를 굴리면 안 돼. 주인이 짖으라면 왈왈 짖고, 꼬리를 흔들라면 살랑살랑 흔들면 돼. 물론 그땐 혓바닥도 헬헬거리며 내밀어야 하고, 그 이상의 짓을 하면 솥 안으로 들어가 푹 삶아지게 된단 말이야.”
연우강은 또다시 비수를 꺼내 조금 전 깎아두었던 감과를 작은 조각으로 자르며 말했다.
“ 언젠가는 널 죽여버리겠다. 개자식.”
남궁필상은 연우강을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 그건 나중 일이고, 늙은 당나귀 영감은 남궁 소저와 할 말이 없어?”
“ 가주와 이야기는 네가 네 일행을 데리고 나간 다음에 할 참이다.”
“ 축객령?”
연우강은 잘라놓은 감과를 비수로 푹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 그렇다, 연우강. 네 일행을 데리고 당장 남궁세가에서 나가라.”
“ 이 감과는 최상급인 모양이야. 아주 달아, 그런데 늙은 당나귀 너도 이거 먹을 줄 알아?‘
“ 전쟁을 원하느냐?”
“ 전쟁?”
“ 그렇다. 연우강. 비록 몰락했다지만 우리 남궁세가를 무시하고 살아난 자는 아직 없었다!”
남궁관수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우렁우렁 커졌다.
“ 나도 밖에 늙은 당나귀 네 부하들이 들이닥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소리 좀 죽여, 일랑, 잡랑, 환랑, 백랑, 거랑!”
“ 하명하십시오. 광랑!”
연우강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자 우창준을 비롯한 네 명이 버럭 소리치며 일어났다.
“ 밖에 있는 잡것들이 여길 볼 수 있게 창문을 전부 부숴라.”
“ 존명!”
다섯 사람은 동시에 창문을 향해 쌍장을 뻗어냈다.
콰앙! 쾅쾅! 우지끈!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정원으로 통하는 벽이 기둥만 남기고 통째 날아갔다. 창궁전 밖에는 남궁세가 무인 사백여 명이 이편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잡것들이란 말 때문인 듯 남궁세가 가솔들의 몸에서는 진득한 살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 네 부하들?”
연우강의 시선이 다시 남궁관수에게로 향했다.
“ 저들은 남궁세가 가솔들이다, 연우강.”
남궁관수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가주가 발동한 창궁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세가 가솔들이 전부 집합해 있었다. 심지어 그들 사이엔 여간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오검까지 있었다.
‘ 시세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는 말을 깨달은 모양이구나. 남궁유향.’
그는 오검의 대형인 철흔일검 남궁유향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 그럼 이상하잖아.”
그때 귓전으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뭐가 말이냐?”
“ 남궁세가 가솔들이라면 창궁령을 발동할 수 있는 사람은 가주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고, 조금 전 발동한 창궁령은 가주가 발동한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텐데, 여기 왜 온 거지? 어이, 당신.”
연우강의 시선이 조금 전 남궁관수가 보고 있던 철흔일검 남궁유향에게로 향했다.
“ 말하시오!”
남궁유향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 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 걸 보면 이 년 만에 돌아온 가주를 환영하기 위해 온 건 아닌 것 같고, 이곳에 온 이유가 뭐지?”
“ .....”
하지만 남궁유향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 쓰레기들 속에 섞에 살다 보니까 쓰레기가 돼버린 모양이네.”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 결정해라, 연우강. 우리 남궁세가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궁관수는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 어이쿠! 이거 무서워서, 부하 집에 들러 밥 한끼 얻어먹고 가려다가 초상 치르게 생겼네. 좋아, 가지.”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 당장 일어나라.”
“ 그 전에 먼저 해결할 게 있어.”
“ 무슨 말이냐?”
“ 늙은 당나귀 네 옆에 있는 그 똥개에게도 말했지만 난 외상값을 받으러 남궁세가에 왔어. 그 돈만 받으면 미련 없이 나갈 거야.”
“ 외상값?”
“ 잘 알면서 모른 척하면 안되지. 늙은 당나귀, 남궁철상 그놈이 내게 물건을 사가면서 쓴돈 삼십만 냥을 결제해 주었잖아.”
“ 가주도 네게 물건을 가져다 썼단 말이냐?”
“ 잠룡들 중에서 내게 물건을 가져다 쓰지 않은 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돼.”
“ 좋다. 얼마냐?”
“ 전부 천이백 오십칠만 오천 냥이야.”
“ ......?”
남궁관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에 있던 자들은 물론이고 밖에 있는 자들까지도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천이백오십칠만 오천 냥.
얼마나 많은 돈인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아니 남궁세가 전 재산을 판다고 해도 그 돈을 마련할 수 없을 터였다.
“ 정녕 전쟁을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남궁관수는 연우강을 향해 으르렁댔다.
“ 내 말부터 듣고 화를 내도 늦지 않아. 늙은 당나귀, 창궁대 출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라.”
연우강은 잠룡들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잠룡들 사이에서 열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세가 가솔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설마 잠룡들 사이에 창궁대 대원들이 들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 저들이 어떻게 대야벌로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해?”
“ 가주가 네게서 잠룡쟁패를 샀단 말이냐?”
“ 물론이야. 늙은 당나귀. 내가 담대무궁 그놈에게 잠룡쟁패를 딴 내기에 대해서는 너도 들었을 거야. 그때 열두 개를 산 사람이 남궁 소저야.”
“ 잠룡쟁패 하나에 백만 냥이란 말이냐?”
“ 아니.”
“ 그럼?”
“ 원래는 삼백 만 냥씩 받았어. 남궁세가 가주에게도 그렇게 받아야 하는데, 늙은 당나귀 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녀는 거지보다 나을 게 없는 상황이었잖아. 더구나 그녀를 호위하는 창궁대라는 작자들은 검기를 간신히 발출하는 수준이었단 말이야. 그런 자들을 이끌고 잠룡대전에 살아났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고. 그래서 원래 가격의 삼분의 일로 깎아준 거야. 내가 부를 테니까 누구 계산 좀 할 사람!”
“ 내가 하마.”
듣고 있던 이자승이 나섰다.
“ 남궁소저를 포함하면 잠룡쟁패는 열두 갭니다.”
“ 천이백만 냥이다.”
“ 암살대전을 대비해 호위무사를 고용했는데 그 값이 오십 만 냥입니다.”
“ 남궁세가에 저렇게 많은 무인이 있는데, 돈을 주고 호위를 고용했단 말이냐?”
이자승 역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남궁세가 가솔들을 보는 그의 눈에 경멸의 빛이 가득했고, 목소리엔 살기마저 어려 있었다.
“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랬겠지요. 남궁철상 그 놈에게는 현찰로 수십만 냥을 주었던 놈들이 제 놈들의 가주에게는 땡전 한 푼도 주지 않았더군요.”
“ 그런데 남궁철상은 누구냐?”
“ 저기 늙은 당나귀 자식의 손잡니다. 담대무궁 옆에 빌붙어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가 주화입마에 들어 지금은 폐인이 됐습니다.”
“ 그랬구나. 총 천이백 오십만 냥이다.”
“ 거기에 남궁 소저가 일 년 육개월 동안 내게서 가져다 쓴 물건 값이 칠만 오천 냥입니다.”
“ 일 년 육 개월 동안 쓴 것 치고는 너무 많구나.”
연우강은 신검세가의 장자인 유성비검 신도영에게 물었다.
“신도영 넌 얼마썼지?”
“ 이십만 냥 썼습니다.”
“ 마장웅 너는?”
“ 이십오만 냥 썼습니다.”
“ 사후린 너는?”
“ 이십사만 냥 썼습니다.”
“ 차남승 너는?”
“ 이십육만 냥 썼습니다.”
“ 종리웅 너는?”
“ 삼십이만 냥 썼습니다.”
“ 들었습니까?”
“ 최하 이십만 냥 이상을 썼단 말이냐?”
“ 저 늙은 당나귀의 손자는 삼십 만 냥을 썼습니다. 영감님. 그리고 잡랑 저 녀석처럼 하오밀문 출신이나 사문도 가문도 없이 혼자인 녀석을 빼면 남궁소저가 가장 적게 쓴 겁니다.”
“ 절약에 절약을 했단 말이냐?”
“ 여자 잠룡이 백 명 있었는데, 속옷이 걸레가 되도록 입은 사람은 남궁 소저가 유일합니다. 반면에 남궁철상 그놈은 속옷을 두 번 이상 입는 꼴을 보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창궁전 밖에서 듣고 있던 남궁세가 무인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아무리 버린 가주라고 하지만 그녀가 속옷이 걸레가 될 때까지 입었다는 말을 듣자, 울컥하고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 그렇구나. 아무튼 남궁 가주가 네게 빚진 돈은 총 천이백칠십오만 냥이구나.”
이자승은 남궁세가 무인들을 흘끔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 늙은 당나귀, 들었어?”
“ 정말이오?”
남궁관수는 남궁운화를 보며 물었다.
“ 맞아요. 운사 장로, 난 저분에게 그 돈을 빚졌어요.”
“ 저놈하고 짠 거요?”
늙은 생각이 맵다는 말이 공연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천이백오십만 냥이라는 빚을 졌다고 남궁운화가 시인하자 남궁관수는 연우강과 짰냐고 취조하듯 물은 것이다. 즉 연우강과 짜고 남궁세가 재산을 빼돌리기로 했냐는 말이었다.
“ 내가 짤 이유라도 있나요?”
“ 가주는 대야벌 연공이 끝나면 가주 직위를 박탈당할 걸 알고 있었소. 더구나 저놈은 업둥이요,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가주와 금릉 연씨 세가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상속받을 재산이 한 푼도 없는 업둥이는 아주 멋진 궁합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가주 생각은 어떻소?”
“ 어이, 늙은 당나귀.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면 내가 섭섭해. 남궁 소저가 가주 직위를 박탈당한다 해도 계약을 했던 당시에는 남궁세가 가주였어. 돈은 무조건 내야 해.”
“ 주지 않으면 어쩔 참이냐?”
“ 남궁세가의 가치가 얼만지 알게 되겠지.”
“ 무슨 말이냐?”
[총관 준비해라.]
남궁관수는 연웅강에게 질문을 하고 난 후 남궁필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슨 준비를 말입니까?]
[ 조금 전 모욕을 갚을 기회를 주겠다.]
[놈을 없애란 말입니까?]
[ 죽이진 말고, 놈을 생포해라.]
[ 알겠습니다. 태상가주님.]
남궁필상은 연우강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연우강이 앉아 있는 곳까지는 반 장, 옆에 늙은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몸을 날림과 동시에 검을 뽑으면 늙은이들이 제지할 사이도 없이 일을 끝낼 수 있을 듯했다.
그는 내공을 끌어올려 발끝으로 모았다.
“ 총 사백 냥이 넘지 않는다는 쪽에 난 내 재산 전부를 걸겠다. 늙은 당나귀!”
‘ 걸렸다 놈.’
남궁관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백 냥이란 말이 나오자 창궁전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궁세가 무인들도 지독한 모욕감을 느꼈다는 말이 된다. 지금 상황에서 남궁필상이 놈들에게 죽어준다면 남궁운화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셈이 된다.
“ 우리 남궁세가 가솔들의 머리가 기껏 한 냥이란 말이냐?”
“ 지금 내린 평가는 그래, 하지만 그보다 더 낮아질 수도 있어.”
“ 어느 정도까지 낮아진단 말이냐?”
“ 상전은 개무시하면서 제 명예는 지키겠다고 발광하는 잡것들을 보고 우린 보통 개종자 새끼들이 지랄한다고 해. 더불어 그런 것들은 대부분 패 죽여. 너희 같은 싸구려들에게는 개값도 아까워!”
“ 개자식!”
파악!
개 값이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궁필상이 욕설을 뱉어내며 몸을 날렸다.
“ 역시 넌 개종자야.”
연우강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철컥!
그리고 그의 왼손에 끼워져 있던 사망낭조가 차가운 금속성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