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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누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든지 또한 어떤 도전을 겪은 후에는 종종 더 강해지고 발전하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사자성어로 우후지실이라고 말하죠. 비 온 후에 땅이 굳는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성령 충만하여서 든든히 세워져 가고 있던 초대교회 가운데에 마치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매우 불미스러운 사건이었다는 것이죠. 사실 어떤 공동체든 간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기게 되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한번 이들의 상황을 그려보면서 내적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반드시 유불리에 따라서 의견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죠 또한 옳고 그름을 따지기 시작하면 긍정의 말도 하게 되지만 부정적인 말도 서슴없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당시 성도들이 사도들의 이야기했던 말과 벌어졌던 사건들을 보면서 같은 마음이었을까요?
지금 찾아왔던 돈을 들고 헌금이라고 찾아왔던 그에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모두가 동일하게 반응을 했냐는 것이죠.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나니아 사비라의 그 모습을 보면서 왜 저런 일을 저질렀을까라면서 매우 소극적이지만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얼마 감추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들을 희생했는데 감춘 것이 도대체 얼마이기에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만큼 큰 문제인가 생명의 문제잖아요. 그거 좀 감췄다고 해서 생명을 빼앗아 간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나 극단적인 결과로 사도들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었겠죠. 만약에 그 사람이 내 가족 친지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쉽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죠? 왜 그러실까? 사도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할 법합니다. 이처럼 어떤 공동체든지 간에 사건이 생기면 각자 자기만의 생각이 작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각기 다른 생각들로 인해서 내적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인 것이죠. 이것은 특정 공동체만 지칭할 수 없는 거 모든 공동체가 동일합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내 의도하고는 상관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하는 거예요. 이쪽에서 보면 이쪽의 해석이 나오는 것이 이쪽에서 보면 이쪽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작은 사건 하나만 터져도요. 공동체 가운데는 술렁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사건이 작은 사건입니까? 그 공동체 안에서는 결코 작은 사건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이 공동체 안에 충분한 갈등이 유발될 수 있을 만한 그러한 사건이었다. 매우 강력한 사건이었다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여러분 외적으로는 어떻게 보일까요? 그것이 좋게 보일까요? 저 공동체가 있는데 두 사람이 죽었어 이유를 들어보니 헌금을 제대로 안 했다는 거 이것을 듣는 사람들 여러모로 소문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좋은 소문도 한 사람 한 사람 거치면 왜곡이 되어지는데 별로 좋지 않은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질 때에 그 진실이 왜곡되겠죠.
그리고 이 왜곡된 진실은 한 사람을 거칠 때마다 점점점 좋지 않은 모습으로 마치 우리가 눈사람을 부릴 때 처음에 연탄 하나를 굴렸는데 나중에는 큰 눈사람이 되는 것처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죠 부풀려지고 또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점점 빠르게 확산되는 그런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불미스러운 사건이 공동체 안에 생기면 내적 갈등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경우들이 허다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난주 말씀과 더불어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 초대교회 가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인해서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보았더니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다. 지난주에는 그렇게 표현하고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신앙 공동체가 이 순결함과 거룩함을 되찾아 오히려 더 좋은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있다는 것이죠.
이로 인해 초대교회는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더욱 부흥하게 되었고요. 확장되고 성숙되어지는 기회를 얻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후에 어떻게 믿고 나오는 자가 더 많아지게 되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번 함께 살펴보고 교훈을 갖고자 합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더 견고하고 잘 세워지고 부흥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해 줍니다. 12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의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남에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이들의 마음과 생각을 나눌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사건이었죠. 하지만 초대교회 공동체는 오히려 믿는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했다. 그렇게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앞서 제기했던 내적 문제의 불씨를 완전히 제거해 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믿는 사람들이 다 같이 했다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이들이 무엇을 같이 했는가라는 거예요. 무엇을 같이 했길래 어려운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발전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구절을 통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2절을 다시 보시면 앞부분에 사도들을 통해서 기적과 표적이 초대교회 가운데 풍성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기적과 표적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죠.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어요. 그런데 그게 진리인지 아닌지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해요.
그런데 이 표적과 기사를 보면서 야 이게 진리가 맞겠구나라고 하는 마음의 변화들이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꼭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나게 된 비결이 무엇인가라는 비결 여러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도들을 통해서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 비결은 사실 한 가지밖에 없어요. 성령이 충만하여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셔서인 것이죠.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 충만한 사도들에게 임했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했다는 거예요. 그 사역에 함께 동참했다는 것이죠. 즉 믿음의 사람들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날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했다. 그것이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앞선 4장 30절에 보시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신문을 받고 돌아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그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전해준 후에 이들이 기도한 내용이죠.
우리 사도행전 4장 30절 이들의 기도 내용 중에 이런 기도가 있었어요. 같이 읽어봅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낳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이 공동체가 모여서 지금 뜨겁게 계속해서 기도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손을 내밀어 병을 낳게 하여 주시옵소서.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이것을요. 모두가 함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열납하셔서 신속하게 풍성한 표적과 기사를 사도들을 통해서 베풀어주신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의 공동체와 같이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것이 너무 거창하다면 우리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어서 응답의 역사로 삶의 자리에서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까?
적어도 우리가 기도하는데 그 정도는 소망해야 되지 않겠어요? 하나님 이런 기도를 합니다.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삶의 현장에서 열매 맺게 해 주십시오.
그것을 원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요. 성도가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가져야 된다. 즉 주님에 대한 사랑, 주를 믿는 믿음, 주님이 주신 소망으로 하나 되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게 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공동체 안에 그 어떤 분쟁도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분쟁이라는 것 왜 일어날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간단합니다. 생각과 뜻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예요.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지면 절대 분쟁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잖아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나 다툼이나 허용 허용으로 하지 말아라.
하나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감옥에서 편지를 써서 보낸 거 아니겠어요? 또한 빌립보교회의 핵심 인물이었던 유디아와 순두교에게 권면하죠.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라.
이때 당시에 유디아와 순두게는 교회 공동체 가운데 굉장히 열심으로 했던 두 사람. 어떻게 보면 권사회장, 여전도 회장 될 만 열심히 있는 사람. 그런데 이들이 하나 되지 못했던 것. 그래서 너희 공동체를 위해서 주 안에서 하나 되라 그렇게 권면했던 것이죠.
우리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망한다면 먼저 성도들끼리 주의 말씀 안에서 한 뜻 한마음으로 연합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하나 됨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우리 안에 꼭 문제가 생길 때 사단이 좋아하는 분쟁과 다툼과 원망 시기 질투가 아닌 성령 충만하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하나됨이 있었는데 또 뒤편에 보니까 12절 뒤쪽에 보니까 하나 됨의 모습이 또 나타납니다.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서 솔로몬 가게에 모였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솔로몬 행각은 기둥이 무려 160개나 되는 엄청난 건물이었습니다. 전에도 솔로몬 행각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렸지만 그곳의 성전에 오가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듣고 말씀도 듣고 그렇게 보냈던 자리이죠.
결국 이 공동체가 이전에는 다락방에만 모여 있다가 다락방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이들이 뒷골목에 모여서 끼리끼리 모였던 작은 단체가 아니라 당당하게 솔로몬 행각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앞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있은 후에 사람들이 몰려든 곳이 어디였습니까?
솔로몬 행각이었죠. 거기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5천 명의 개종자가 일어나게 되었죠.
그로 인해서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되어서 사에드린 공회에서 신문을 받게 되었죠.
그리고 그 신문 가운데 그들이 요구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렇게 위협하고 석방을 해주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솔로몬 생각에 같이 공동체가 모여서 갔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말할까요? 공회가 협박했던 그 말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너희들이 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본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
이것은요. 환란과 핍박을 감내하면서라도 우리가 사명 감당해야겠다는 공동체적 마음이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절대 숨어 모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이들에게 있었던 것이죠. 마치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다는 그런 일사각오로 왕에게 갔던 것처럼, 이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 것이라는 그러한 각오로 솔로몬 행각에 함께 모여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과 표적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각오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늘 평안과 안정만 추구하는 것이니라. 물론 맞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평안해야지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저는 매우 찬성합니다. 특별히 우리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어야 된다고 저는 강조합니다.
있어야 돼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이 있어야 되고 복음을 위해서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어야 되고 복음을 위해서 손해 볼 줄 아는 공동체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어떤 특정인만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라면 함께 그 일을 해나가야 된다는 것이죠. 그때 힘 있고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공동체가 복음을 위해서 함께 모여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서 우리가 모일 때에 또한 희생의 자리, 불편의 자리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기는 아멘이 안 나오시네요. 여러분 기쁜 일이 있을 때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쁨을 나누며 두 배가 되고 조금 힘든 일이 있을 때 함께함으로 고통을 반으로 줄이는 그런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2024년도에 들어오면서 월마다 하는 게 있죠.
오늘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뭡니까? 동네 한 바퀴 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공동체가 한 달에 한 번 복음을 위해 지역을 섬기는 우리의 작은 헌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죠 제가 주변 동네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어요.
목사님 청소하시던데요. 감사해요.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지금의 사람들은 교회를 달리 부릅니다. 예수 믿는 공동체로서 참 귀한 일을 하십니다고 이야기를 해요. 여러분 어쩌면 우리에게 불편한 일이죠. 교회 와서 편안하게 예배드리고 편안하게 집에 가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갑자기 목사님 이번 올해는 한 달에 한 번씩 동네를 청소하라 하니 얼마나 불편합니까? 더운 여름에 나가기 얼마나 또 힘이 들어요. 그런데 그 수고가 지역에는 복음의 역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조금 불편한 자리이긴 하지만 여러분 그것이 복음의 자리라고 믿어진다면 함께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10월 6일날 우리 전교인 체육대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지난주 1차 준비 모임을 잘 마쳤습니다. 그리고 학교 대화도 신청이 이미 끝났습니다. 제가 TF팀 모임할 때 이야기했어요. 이번 목표는 신은의 총동원이다. 함께 나오지 못하는 분들 다 모으고 또한 가족들이나 지인들 중에 함께 운동하고 싶은 사람들 초청해도 좋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선교회 모임할 때 참여 여부를 아마 회장님들이 확인하실 거예요.
누가 들어도 이것은 참여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여러분 다 동참해 주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러한 자리도 함께 하면서 공동체가 세워가는 것 중요한 것은 기도의 자리, 복음의 자리, 연합의 자리에 함께하는 지혜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된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은총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두 번째 이들이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부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13절 말씀 읽어보실까요?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이 구절에서 그 나머지라는 이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기록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선 12절과의 비교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 이들이 믿지 않는 사람이구나 왜 12절에 믿는 사람들이라고 했으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 즉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를 보았지만 여전히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말하는 것 같아요.
이들이 상종하지 않았대요. 믿음의 공동체와 아예 상종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들이 상종하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두 가지로 예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먼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와 및 사도들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믿지도 않는데 이들과 함께하면 괜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 박칠 수 있거든요. 적대시될 수 있거든요. 그러니 굳이 이들과 상종할 필요가 뭐 있냐 그래서 상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이들과 같이 했다가 괜히 저도 예수 믿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라고 오해받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어 또 다른 이유는 마나니아와 삽비라의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벌이 무엇인지를 들었잖아요.
그래서 두려워했다라고 성경은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즉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이죠. 믿는 자들의 모임 가운데 참석해서 저런 어려움을 당하면 어떨까라는 그러한 염려 걱정들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13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칭송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13절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함께했던 이 교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존경받는 자들이었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 표현은 사도행전에 처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20장 37절에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온 백성이 칭송을 받았다.
그만큼 믿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공동체는 또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 한 사람은 하나님께도 칭찬받아야 하지만 사람들에게도 칭찬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해서 기록해 주고 있어요. 예수님이 어떻게 성장했는가? 우리 누가복음 2장 52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같이 큰소리로 읽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하시더라.
예수님께서 키가 자랍니다. 육체의 자랑이죠. 지혜가 자랍니다. 정신적으로 모든 것이 잘 자라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뒤에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하시더라.
여기에서 중요한 건 뭐예요? 더욱이죠. 더욱 가면 갈수록 점점점 사랑받는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 성도 한 사람은요. 또한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께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점점 더 사랑받고 점점 더 인정받는 개인 공동체가 되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말 묻습니다. 현실은 어떤가요? 현실 우리의 현실 한국 교회의 현실, 우리 교회 현실 나의 현실을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과연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고 박수받고 있는가 아니면 한국 교회가 지탄의 대상거리가 되어 있는가 우리 교회는 이 지역의 주민들로 인해서 칭찬받고 있는가 아니면 손가락질 받고 있는가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가 이곳에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평안하고 기쁘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떠난다고 그러니까 잘 떠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러면 안 되잖아요. 적어도 우리가 있을 때에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주변에 흘러가서 우리 키는 교회가 날마다 이곳에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죠. 우리 교회가 과연 그 사명을 지역 가운데 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나의 삶을 통해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잘 뿜어내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성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가 세월이 흘러갈수록 하나님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칭찬받고 더욱 인정받고 더욱 사랑받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한 은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 번째는요. 다나음을 입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앞에 두 가지는 내적인 것 외적인 거잖아요. 내적으로 문제가 생길 것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요. 외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이 오히려 칭찬과 사랑받는 공동체로 보여졌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다 나을 때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있었다. 우리 15절 16절 같이 읽어보십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에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다음을 얻으니라.
여기 보니까 다 나음을 얻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이죠. 병든 자나 귀신 들린 자 모두가 다 나음을 입은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 앞 구절에 15절에 보십시오. 어떤 노력이 있었는가? 이들의 모습 가운데는 병든 사람을 메고 길거리로 나옵니다. 그래서 침대와 요 위에 이 사람을 눕혀놓지요. 그리고 이들이 생각했던 건 뭐예요?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림자라도 그에게 영향이 있어서 낫기를 소망한다. 그런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베드로 사도의 그림자만으로도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죠.
이것은 훗날의 사도바울의 경우와도 같은 그러한 맥락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 손수건으로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는 사건들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베드로의 그림자, 바울의 손수건 자체에 신비한 위염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조차도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현상은 결코 보편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초대 교회였기 때문에 특별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시는 것이죠. 그들에게는 여러분 오늘날같이 뭘 보고 듣고 믿을 수 있는 성경이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어떠한 확실한 보고 들을 만한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런 기적적 현상들이 더 많이 나타나게 하신 것이죠. 특별한 상황하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다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여러분 교회가 모두 다 기적이 그렇게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 기적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다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말씀을 듣고 믿음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기적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지금도 하나님은 필요한 것에서 영혼을 살리는 사역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 공동체 가운데도 없을 법한 일이 아니죠.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정말 우리 공동체에 필요하다면 그것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오늘 이 시간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적을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기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있었지만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림자라도 덮일까라는 마음의 열정이 이들에게 있었던 거죠. 나음과 회복을 얻고자 하는 간절함이 이들에게 있었던 것이죠. 반드시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이들 마음 가운데 있었다는 거예요.
믿음도 없고 간절함도 없으면서 하나님 한번 우리에게도 기적을 일으켜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이것은요. 오히려 하나님을 없이 여기고 조롱하는 태도인 것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열정, 사모한 간절함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과 열정과 사모함과 간절함을 통해 우리 예배 가운데 치유가 있고 예배 가운데 문제가 해결되어지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기쁨과 은총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우리가 금요일 기도회를 통해서 기도하잖아요. 여러분 뜨겁게 기도할 시간이 언제 있습니까? 내 하루의 삶을 돌아봅시오. 내가 집에서 뜨겁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 1시간도 없어요.
왜 금요 기도를 하시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그래도 그때만큼은 뜨겁게 기도할 수 있어요. 지금은 조금 빈약하고 약해 보이지만 이 금요일 기도회가 점점 더 부응하고 더 뜨거워져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 기도 가운데 놀랍게 이루어져서 우리가 기도할 때 치유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고 또한 기도할 때에 우리가 중부하는 그들에게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놀라운 은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소망과 간절함이 있어야 우리 모임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존귀하신 성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6절을 다시 보니까 여러분 예루살렘 부근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요.
병든 사람 또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이 사람들이 다 나음을 입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죠.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요. 다라는 거예요. 다 모인 사람 다 나음을 입었다. 여러분 예수께로 오는 사람 모두가 다 구원의 은혜를 입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만한 치유가 어디 있어요? 이만한 회복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내가 죽어도 영원히 사는 이 놀라운 기적과 같은 축복은 이 세상에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예수께로 나오는 자 모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축복.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유의 은총을 입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육신의 연약함은 있죠. 이거는 죄된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세상에 안 죽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다 죽잖아요. 죄로 인한 결과예요. 그것은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죽지만 영원히 사는 축복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영원히 살잖아요. 이것은 이미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치유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에 내가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되는 것이고,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기도자가 되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치유받았다면 아직도 우리 하나님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 주변에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해 치유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모두가 다 나와서 치유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는 그러한 은총이 저와 여러분들의 축복의 통로로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초대교회 가운데 복음에 확산될 수 있었던 것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사람이 많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공동체 안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가 되어서 뭐 했습니까? 기도했고 하나가 되어서 복음을 위해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의 시간, 복음의 시간을 특별하게 생각해서 하나 되어져야 된다는 것이죠.
초대교회 공동체는요.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지만 외부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공동체가 아니라 칭찬받는 공동체였다. 그들이 얼마나 섬겼으며 얼마나 희생했으면 칭찬받는 공동체가 되었을까. 저와 여러분들도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 여러분 이 세 가지를 다 종합해 보면 딱 한 가지예요. 그건 뭐냐 하면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이들이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하나 될 수 있었고,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었고,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사역 가운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성령 충만하여서 한 주간의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삶 속에서 경험하고 고백하고 증거할 수 있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