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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원문보기 글쓴이: 박정원
문밖 체류 외 13편
박해람
소리들에겐 저마다 문이 있어 문을 열고 닫는 것을 본다. 경첩의 일이란 계절을 편애하는 것이고 훗날엔 바람을 편애하는 소리가 된다.
묶여 있는 소리가 생겨나고 그 후 바람이 생겨났을 것이다
기울어진 과일들, 온갖 소리를 내려놓는 나무 밑 텅 빈 돌 같은 그늘위에 잠시 앉았다 간 불편한 여름 문 안으로 간간이 들어오는 계절의 소리를 먹고 살았다 작은 쪽문 하나를 밀고 당기는 것들에게서 소리도 얻었다 문 밖의 체류 가을에 피는 꽃들을 격려하려 소리의 밖에서 앉아 있는 바람의 문들 긴 회랑을 지나 문에 다다른 계절에 푸른 물이끼가 돋아나 있다
한참을 울다 제 이름을 닫고 나간 저녁이 있고 문 밖의 체류를 버리려 급히 문을 닫는다. 그늘마다 어울리지 않는 코사지를 달고 있다 세상의 樂節들은 모두 문밖에서 사라지고 허공의 지층을 캐내면 거기,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소리들이 돋아나 있을 것이다. 문 닫지 않는 耳鳴들에는 구애의 흔적이 있다
耳鳴을 귀에 꽂고 모든 소리를 밖에 세워두고 울게 한다. 먼 곳까지 가서 우는 이들은 없다지만, 또한 문 안에서 우는 일도 없다 세상의 모든 밀봉은 흔들리고 풀리어 간다.
왼쪽의 습관
습관이 있던 곳은 분주했던 부위라는 뜻
비스듬히 앉아 옆자리를 누이던 무릎의 달이 있는 곳
하지만 왼쪽은 손을 놓치기 쉬운 곳
밤이면 왼쪽의 풍치들은 다 날아가고 울음이 썩어 참을성이 되는 곳
왼쪽부터 천천히 굳어가는 파악들
헛구역질을 흘리는 흰 나무들의 들썩임.
한쪽의 습관을 천천히 풀어 버리듯 봄은, 흘리는 것들의 제철이다
불편에 기대었던 갸우뚱,
꽃송이들을 흘리는 나무들에게 물었다
고작 이 점파點播의 편애를 위해 기울어졌냐고
오른쪽 손가락을 떠난 셈이
왼쪽 손을 돌아오는 철
가성假聲으로 부르는 모든 노래에는 왼쪽의 후렴이 없다
한쪽의 고민으로 둥둥 떠오르는 그늘들
바뀌는 계절에는 바뀌는 의미가 적당하고
고개를 돌려 한쪽으로 꽃을 흘리고 있는 왼쪽의 습관 밑에는 너무 먼 곳까지 다녀온 상상이 쌓여 있다
흔들린 불빛으로 수놓은 무늬의 달
밤새운 불안이 모여 있는 왼쪽의 습관.
花無三日紅
바람이 불고 弔燈이 흔들린다
어느 상가에서 북적이다 가는 중일까
여름비에 꽃 조등 다 떨어져 있다
뒤늦은 슬픔은 괜히 떨어진 꽃송이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장마는 물의 소리만 키워놓았다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긴 끈 같은 물소리
오늘 그 끈에 목을 맨 이가 있는 마을에 있다
왁자한 집의 대문 옆에서만 핀다는 저 燈
어지러운 劃들이 씨앗처럼 베어 나와 검다
저 왁자한 며칠은 죽은 이로부터 빌려 오는 기간이 아닐까.
그 사이 음식과 나무젓가락은 늙거나 수척해졌다
잠잠해진 물소리를 끊어다 망자를 꽁꽁 묶는 아침
저 꽃 하필이면 죽은 이의 시간에 피어허름한 비에 젖다 가는지
三日葬 동안 집집마다엔 누런 물소리가 가득해서 어떤 斷愛는 목이 다 쉬었다. 한밤 물길을 끊으려 둑길에 나왔다가 이미 흘러간 끈을 감으려 따라간 귀를 기다릴 뿐이다
귀 없는 검은 돌이 오래 앉아 있다.
구불구불 오래 흘러갈 끈
허공의 편도에 어두운 구름이 후진으로 산을 넘어간다.
늙은 음식들도 다 바닥나고, 슬픔 같은 건 이미 다 상했다
불 꺼진 꽃을 꺾어 가는 사람이 있고
열 개의 발가락이 다 젖어 있다
별의 블록
깊은 새벽 인부들은
人道의 보도블록을 깐다 따, 딱,
모래 위에 단순한 모양을 맞추어 깔리는
밤의 집합
야참이 오고 잠시 새벽이 앉아 쉬고
남은 부스러기 모양들이 새벽의 노동을 끝내듯
반듯한 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열된 이들, 서로 무늬가 맞지 않는 것들은
큰길을 막고 싸움을 한다
차들은 비껴가거나 먼 곳의 도착지를 우회하고 있을 뿐.
아주 오래 전 서역의 어느 산중에서도
무늬 촘촘한 한 비단길이 스스로 깔렸겠지
밤이 온전한 밤으로 존재하고
그 밤에 복종의 허리를 굽히며 길들은 잠시 잠이 들곤 했겠지
길이 일어나야 비로소
뒤따라 일어나는 걸음들이 있었겠지
그 많던 걸음들도 다른 새벽에서 잠들어 있고
유독 조각조각 맞추어지는 새벽
별의 블록들이 제 스스로 촘촘히 깔리고 있는 어두운 노동
서역의 산등성이 그 높은 곳의 비단길들이 내려와
아침이면 정연하게 펼쳐질 무늬의 길들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을 걸음들이
화려한 비단들이 끝없는 무늬 위를 또각또각 질질질
버들잎 經典
물가에 버드나무 한 그루
제 마음에 붓을 드리우고 있는지
휘어 늘어진 제 몸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휙휙 낙서를 써 갈기고 있다
어찌보면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헹굼필법의 머리카락 붓 같다
발 담그고 머리감는 갠지스강의
순례객 같기도 하고
낙서로도 몇 마리의 물고기를
허탕치게 하는 재주도 부럽고
낙서하기 위해
몇 십 년을 허공으로 오른 다음에야 그 줄기를
늘어트릴 줄 아는 것도 사실 부럽다
쓰자 말자 지워지는
저만 아는 낙서 經典
지우고 또 지우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며 흐를 뿐이지만
물 묻은 제 마음이 물 묻은 제 문장을 읽는
저가 저를 속이는 獨經
지구의 모든 문장이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참 대책 없다
천공의 城 랴퓨타
동사무소 이층 복지회관 러닝머신 위를
몇 명의 여자들이 걷고 또 걷는다
넓은 통 유리가 마치 일생의 한 화면 같다
아침까지 갔다가 다시
통유리의 넓은 저녁으로 돌아오는 유영
38, 29, 50, 17, 다양한 나이와 문수의 걸음들이 걷고 또 걷는다
아무 목적지도 없는 걸음
다만 몇 킬로의 또는 몇 그램의 일생을 줄이며.
랴퓨타. 가끔 구름 속을 나와 유영하는 城
어디에도 없는 내 몸에 꼭 맞는
내 몸을 찾는 사람들
둥둥 떠서 아니, 둥둥 걸어서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
그러다 남편의 귀가시간이라는 역에, 끼니때라는 지상의 역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걷고 또 걷는.
앞도 뒤도 없이
그저 흘러갈 뿐인 풍경
지상에서 망가진 것들의 구름 같은 오후를
가는 일도 없고 되돌아오는 일도 없는
그저 유영하는 저 악착같은 걸음들,
둥둥 떠가는 동사무소 이층 천공의 성
타이머에 맞추어진 길의 시간을 걷고 또 걷는
단 한번도 지상에는 내려서지 않겠다는 듯
러닝벨트 위를 규격품처럼 걷고 또 걷는,
불쌍한 승객들.
채널 38
정규방송 사이에 겨우 끼여 있는 채널 38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팔아야만 하는 채널 38번
시장판에서 소리치는 떨이의 무식한 상술쯤은
슬쩍 비웃으면서
고급화, 단단함, 세련됨 뭐 그런 것들을 적당히 강조하면서
팔아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짧은 생각들이 나열된 진열장
식욕, 성욕, 지식 같은 것들. 타인의 감정에 방문하여
정해진 방송시간 안에 팔아야 하는 것들
화려하게 부풀려진 내용 없는 포장품
그러다 누군가 채널을 돌리면
한 생애를 잠시 쉬어야 하는
더 이상 팔 물건이 없어지면 사라지는 채널
내가 매진된 뒤에는 내가 사라지는 채널
팔고 간 사치의 품목들이
벼룩시장에 헐값에 나도는
낡아 가는 일만 남은 흔적이라는 물품들
한 채널을 부여받고
열심히 팔고 있는 이 生이라는 나날들
서른여덟 살 먹은 남자의 일터 채널 38번
다양한 증정품도 없고
정규 채널 사이에 잠시 묻어 넘어가는
누군가 그의 채널에 걸려들어 아내가 되고 딸아이가 되고 부모가 되는
재방송 없는 정규프로그램 채널 38번
꽃피는 얼룩
거미들
몇 개의 고지서들이 날아온다
속도, 신호위반, 부음장 등등
때론, 이미 전생이나 후생으로 돌아간 이의 앞으로도
벌금이나 미수금들의 고지서가 날아온다
모양만 남겨놓는 거미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미줄
우리는 어쩌면 어느 먼 생과 연결된 면직류일지도 모른다
잠시 신호대기 중이거나
과속의 찰나 그 너머의 아찔한(다만 아찔할 뿐인) 생으로
길게 흔적들을 뽑으며 지나다니는
실이라는, 그러다 아내의 잔소리 몇 마디에
아차 하고 깨어나는 이 끈끈한 느낌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딸이라는, 아내라는, 가족이라는 껍질들.
무엇인가를 쌓아 놓기에는 너무 헐거운 거미줄,
빈 껍질들 사이로 마른 관계들만 쌓여 있는 거미줄
다시 이사를 가기 위해 실을 뽑는 거미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길
지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는.
구름나무
오래 전 죽은 나무 위에
아침부터 새들이 날아와 논다
소란스러운 죽음
땅에서 한 일생을 마친 저 나무가
새로 뿌리를 내린 곳은 하늘이다
전생의 기억을 땅 속으로부터 불러올리는 乾木
그 위로 가끔 흰구름의 잎이 돋아난다
흔들이는 법이 없는 나뭇잎
바람이 불고
그동안 잎을 흔든 것이 바람이 아니라
스스로 한 생 흘러가는 마른 것들의 소란스러움인 것
잎이 있다는 것은
줄기가, 뿌리가, 몸통이 있다는 뜻이다
하늘의 그 흐린 지층에다 새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우는 구름나무
심심하지 않게 색깔과 잎 모양을 달리하며 놀고 있는 구름나무
오늘은 하늘의 숲이 온통
검은 잎으로 뒤덮인 것을 보니
비라도 내릴 모양이다
그 커다란 잎을 흔들어 물기를 뿌리는 잎
땅 속이나 저 위나
다 같은 하늘이라고
한번쯤 누워본 이들은 다 안다고
울창한 하늘의 숲이 스스스 흔들리고 있다.
잎이라는 말
바람과 가장 절친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잎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葉綠의 프로펠러들이 없었다면 바람은
날아오르는 종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듯,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듯, 서로의 무거운 그늘과 햇빛을 털어주는,
아니, 서로가 할퀴는
절친한 것들의 흔들림
나라는 잎
바람에 속아서 너무 빨리 팔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바람과 가장 불편한 말이 있다면 그것 또한 잎이라는 말이다.
뭉툭한 인사
사내의 손을 잡고 놀던 딸아이가 아빠 손은 나뭇잎 같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손등에 푸른 정맥이 줄기처럼 이어져 있는 사내의 손. 아이는 그의 손을 들어 신기하게도 바람을 만들어 제 얼굴 쪽에다 팔랑거리고 있다.
달랑 하나 남은 나뭇잎 손
방향을 가리킬 때나 무엇을 설명할 때도
사내는 온 가지를 흔들어 그 뭉툭한 말들을 쏟아낸다
뭉툭해서 잘 스며들지도 못하는
나는 사내나무의 한쪽 잎도 알고 있다
지금은 주머니 속에 그 뭉툭한 잎을 감추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잎을 통해
둥글고 따뜻한 말을 참 많이도 배웠다
一生의 父女가 돌아간 뒤 나도 내 손을 들고 팔랑거려 보다. 잘 가라고 나도 주먹 쥔 손으로 부녀의 등에다 흔든다. 한 잎으로는 아이의 손을 잡고 뭉툭한 잎이 주머니에서 나와 힘차게 흔들어 보이는 뭉툭한 인사.
푸른 새싹이라도 피어나려는지 주먹 쥔 손안에
따뜻한 땀이 배어 나와 있다
달랑 이 두 잎의 팔랑거림으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인사의 뭉툭할 뿐인 이 저녁 말고는 말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그곳에는 磁力이 있어 쇳가루가 묻어있는 몸들이 쉽게 이끌려 간다
흩어지지 않으면 붙을 수 없는 곳
지구의 거대한 磁石
새들이 페루에 가서 붙는 일과 같이
더 이상 알을 슬 수 없는 새들과 같이. 블랙박스처럼 달고 다니는 골은 기억들로 무거울 때, 새들이 따뜻한 백사장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이
새의 무게가 새를 날게 하는 것과 같이. 그 무게가 온전히 바람을 넘겨 천천히 읽는 것과 같이
조용히 책장을 덮는 것과 같이. 내가 그 책 속의 한 문장이 되는 것과 같이.
양귀비
몸에 칼집을 내면 흘러 나오는 저 독은
사실 독이 아니다.
라오스 깊은 계곡에서 살다 간 어느 처녀의 순진한 저주다.
상처에서 새살이 흘러나오듯
모든 상처에서 흐르는 것들은 제각기 천국을 갖고 있다.
세상과 세상을 이어주는 칼날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
누구도 그 경계에 베이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저주와 몸을 섞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세상에서 세상으로 가는 길은 무수히 많다.
여기 한 인간이 있다.
(그는 잠시 몸을 말리러 이곳에 온다고 했다. 많은 순례객들 사이에 섞어 이곳저곳을 여행하다 들르는 이곳은 단지 하나의 재미없는 코스에 불과하다고 했다. 축축한 옷을 말리면서 다시 독이 고이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스스로 독을 만들지 못하면 아무 곳도 갈 수 없다고, 이곳은 그저 평범한 환각일 뿐이라고.)
서둘러 보호색을 띄며 그가 말했다.
젊은 날 나의 뒤꼍은 수십 그루의 천국이 은밀히 자라는 음지였다.
아무도 몰래 피었다 사라지는 그 천국의 속국이었다
지금도 그 누구의 천국이 되지 못하는 나는
아직 이곳의 손님이다.
나의 지랄 같은 염병할 인생에.
* 박해람 : 1968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랜덤하우스중앙, 2006)가 있음. '耕雲書堂'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