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창작 발상의 몇 가지 체험 / 조연희
I. 발상(착상)의 의미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무심히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모든 것이 덤덤하고 무의미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순간에 낯익고 익숙한 생활 속에서도 갑자기 감동스럽고 경이로운 현상(現象)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런 순간 그 같은 감동이나 충격 또는 경이로움을 글로 써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몰리게 된다. 이런 순간의 충동이야말로 예술창작의 원동력이 되고 창작활동의 발상(發想), 즉 동기가 되는 것이다.
다음의 철이가 하교길에서 겪은 일들을 예로 들어 '발상'의 의미를 확실히 하고자 한다.
예문1) 철이가 탄 자전거와 마주오던 자전거가 부딪칠 뻔했다.
예문2) 철이는 시장 입구에서 초등학교 동창생 명희를 만났다.
예문3) 숲 속 떡갈나무 밑에서 철이는 독사에게 물린 까투리가 새끼를 품은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철이는 위의 세 가지 사건 중에서 (3)의 까투리 모습에서 숭고한 모성애를 깨닫고 당장 글로 표현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았다. 이때 철이는 '모성애'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한 '발상'의 준비단계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글감(소재)을 발견함과 동시에 주제(모성애)가 설정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대개 주제가 설정된 후 글감(소재)을 선택하는 것이 순서지만, 더러는 주제와 소재의 순서가 뒤바뀔 때도 있는 것이다.
주제와 소재가 정해진 뒤에 글의 정리, 구상을 해야 되며 이때 무엇보다도 남과는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적인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여야 한다. 누구나 똑같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사실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II. 발상의 기법(실제) 원고청탁서의 지시사항에 따라서 '수필의 발상이론'은 위와 같이 간단히 서술하고 이제는 실제로 '나 자신의 창작체험'에 관해서 쓰려고 한다. 실은 나의 졸작들에 대해서 논하기가 솔직히 쑥스럽고 민망스럽지만, 한편 내 글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냉정히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먼저 다음의 네 가지 측면에서 내 졸작들의 발상과정을 생각해 보겠다. 1. 체험적 발상 수필에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1인칭 문학이니만큼 누구나 직접적인 체험의 세계에서 가장 손쉽게 발상의 계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수필의 특성상 자기 고백적이므로 자연히 작가의 인격이 가장 숨김없이 반영되기 때문에 활자화된 후에도 나는 언제나 체험적 글감을 다룰 땐 조심스럽고, 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때도 있다.
「가정 복귀 신드롬」은 최근(97년도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연봉을 받는 펩시콜라의 여사장이 자기 자녀들의 엄마 없는 생일파티 광경을 비디오로 보고는 당장 가정으로 돌아가겠다고 사표를 내던졌다는 신문기사에서 발상을 했다.
과거 30년 전 그때 초년 과부인 여교장 밑에서 여교사들이 입덧 임신 출산 등으로 시집살이하던 일이 떠올랐다. 마침 연년생으로 출산을 했던 나는 마치 죄인같이 쉬는 시간이면 양호실 가리개 뒤에 숨어서 유축기로 젖을 짜버리면서 울었던 일, 또 젖이 브래지어 속에 넣은 탈지면 위로 배어나와서 블라우스까지 적셨던 일, 유종(乳腫)으로 아프면서도 수업을 했던 일 등등 절절한 체험에서 나온 글감들인지라 꽤 감동받았다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IMF 경제위기의 여성들에게 마치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투의 주제가 시대적 상황에 역행하는 듯했고 그 발상이 사회 분위기와 동떨어진 것임을 알았다.
「시련의 참뜻」은 10여 년 전 망막수술로 두 눈에 모두 안대(眼帶)를 한채 암흑 속에서 병상생활을 하던 때의 고통을 토해 놓은 글이다. '혹시 실명(失明)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절망감,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참회를 하면서 시력과 함께 영안(靈眼)까지도 뜨게 됨을 감사한다는 내용인데 이 투병기가 나에게 문단 등단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병상생활의 체험이 소중한 글감이 되어준 것이다. 2. 인간에 대한 편중적 발상 내 글에는 사물(事物)이나 현상(現象) 또는 화조풍월(花鳥風月)과 같은 자연에 대한 글감보다는 인간에 대한 흥미, 관심, 애정 그런 류의 글감이 편중적으로 많은 편이다.
「시드니의 파리떼」도 뉴질랜드로부터 호주에 걸친 일종의 기행수필이지만 시드니 관광 도중 기습해 오던 파리떼에 대한 기억 이외엔 별반 글감으로서 강렬한 느낌의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2주일 간의 여정(旅程) 중에서도 단 5분간, 우리가 호주에서 묵고 있던 스템포드호텔의 식당에서 아침식사 때 우연히 만난 숙진이의 기억만이 클로즈업되는 것이다.
30대 초반의 숙진이는 황량한 그곳에서 혼자 관광버스의 가이드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그동안 참 사연도 많았어요. 서울 가면 찾아뵐게요" 하며 글썽이는 눈망울로 헤어졌을 뿐인데, 여행기간 내내 그리고 귀국 후 2년이 지난 지금에도 '과연 그 사연이란 게 뭘까…?' 궁금해지며 아직도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단 5분간의 만남이 사실은 발상의 내적동기가 되어준 셈이다.
「합리적 사고」는 주제부터 말하자면 모든 일에 간단히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 천만한 일이고 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것도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이다.
작고한 문필가 S씨의 신문 칼럼에서 발상(착상)을 한 셈인데 칼럼내용인즉 이렇다. S씨가 시골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짝아이의 도시락에 자주 긴 머리카락이 들어 있기에 그의 엄마는 얼마나 더럽고 게으른 여자일까 그 아이까지 싫어서 함께 놀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우연히 그애 집에 가보니 엄마가 장님이더라는 유년 시절의 회고담이다. 장님 엄마였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슬프고 충격적이었다.
그 후 나는 담임반의 학생지도를 할 때나 상담교사로 지낼 때에도 늘 그 칼럼이 생각나서 함부로 학생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속단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역시 나는 인간에 대해서만 편중적으로 관심을 갖고 애정을 쏟으려는 것 같다. 3. 직업의식적 발상 30여 년 간 교단생활을 해왔다. 매사에 교사로서의 직업의식이 발동하고 그 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이리라. 요즘도 나는 늘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함께 어울리는 꿈을 많이 꾼다.
「닮은 꼴」은 우연히 버스 속에서 두 여인의 대화를 듣는 중에 발상을 하게 되었다. 내용인즉, 학부모들이 돈을 걷어서 청소부를 고용하면 될 텐데 입시준비로 피곤한 애들에게 꼭 교실 청소까지 시켜야만 되겠느냐는 교사에 대한 불평이었다. 순간 반사적으로 나는 '청소도 학교 교육의 일환'이라고 소리지를 뻔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요, 얼굴'이라는 주제로 쓰게 되었는데 마치 항변하듯 웅변조로 써졌다. 내가 30여 년 교단생활에서 얻은 교육철학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직업의식에 치우친 교훈 일변도식의 글이어서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사고방식에 식상(食傷)을 하는 사람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필이야말로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스스로 깨닫게 하는 글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북경과 한성(漢城)」은 1997년도 북경의 여행길에서 거리의 간판글자를 읽을 수 없음에 당혹감과 충격을 받아서 쓰게 되었다. 한자의 본거지인 중국은 획수를 줄여 약자(略字)를 쓰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아직도 그 어려운 한자공부를 음과 훈, 획수와 획순, 부수를 외우기까지 하느라고 애쓰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어문(語文)정책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북경공항 내의 서울로 가는 출구에 아직도 한성(漢城)이라고 써 있는 사실이었다. 당장 어디에 가서 항변을 해야 되는 것인가. 직업의식으로 흥분되었다. 이 글은 '한성'에서 발상을 하게 된 셈이다. 4. 자기도취적 발상 작가는 모름지기 자기 자신의 눈을 통해서 타인을, 세상을, 우주를 보며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까지 깊이 사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는 이런 면에서 너무도 미흡하여 나 자신밖에 볼 줄 모르는 근시안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상의 행복」은 글의 발상이 오랜 직장생활 탓으로 친구들이 가사노동에 염증을 느끼는 나이에 뒤늦게 전업주부로 변신하여 주방일을 하면서 시작된다. 양파의 속살을 벗기면서 여인의 속옷을 연상하여 관능적, 탐미적 이미지를 생각하고 표고버섯을 썰다가 그 측면의 무늬에서 미국 그랜드캐년의 지층을 상상하는 등 나에겐 매우 새롭고 경이로운 발견들이지만 역시 너무 쉽게 '자기도취'에 빠진 결함을 알게 되었다.
「만휴당(晩休堂)」은 제목을 연암 박지원의 산문집 속에서 별장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조기(早期)퇴직을 하고 여유있게 노년(老年)을 즐긴다는 주제를 먼저 설정한 후에 글감(소재)을 찾은 경우였다.
딸애가 곧 시집을 가고나면 나 혼자만의 서재를 꾸밀 수 있다는 등의 아주 소박한 꿈과 기대를 적은 글이다. 청빈락도(淸貧樂道)의 삶을 살기 원한다는 진솔한 글이기는 하지만 너무 일찍 조급하게 자기 만족감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짙다고 느껴졌다. 이상으로 글의 발상 측면에서 본 '나의 창작체험'을 미흡하지만 끝마치려고 한다. 그동안 어떠한 '수필작법론'에서도 '발상'이론에 관한 부분은 거의 한 줄도 읽어본 기억이 없다. 그만큼 '발상'이 글의 근본적 단계이고 또 누구나 다 이미 주지하고 있는 당연한 과정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너무도 기초적인, 상식적인 부분에 대해서 오히려 나의 부족한 이론이 읽는 이에게 혼란과 혼선을 가져오지나 않을지 다소 염려스러운 마음도 든다.
결론적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작가는 단순히 신선하고 감격스러운 글감들을 찾으려고만 조급하게 서두를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작가 스스로가 일종의 '구도자(求道者)의 길'과 같은 '수필적인 삶'을 영위함으로써만 저절로 글감을 발견해내는 시각이 신선해지고 더욱 심오해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