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두 달 동안 무슨 놈의 비가 그리도 많이 왔었던지, 우린 어쩌면 우리가 동남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세상과 기후의 변화에 어느덧 체념한 눈치들이 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 구월의 첫 일요일 개강 날 서울 근교 장흥에서 바라본 우리의 산천 풍광은 영락없는 우리만의 가을 맛이 지천에 깔려 마냥 풍요롭고 아늑하기만 하였다. 하늘은 푸르고 높았으며 실개천 바닥은 막 잡아 올린 갈치의 은회색만큼이나 싱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무거운 화구 박스를 동네 어느 구석인가에 적당하게 내 팽개쳐 두고 동네를 휘적휘적 한 바퀴 돌았다. 구십이 넘으셨다는 노인이 100년 넘은 고택 앞에 멍석을 깔아놓고 그 위에 편히 앉으셔서 빨간 고추를 널어 말리고 계신다. 노인이 사시는 집 담장에는 벌써 수확해 놓은 들깨 단들이 의젓하게 직립 도열하여 햇빛의 사열을 받고 있다.
정원이 아름다워 보이는 집 하나를 발견하고는 시골 인심만 믿고 담도 없이 열린 그 집안정원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조각들이 산재하여 있는데 나는 대번에 이 집이 그 유명한 조각가 조성묵 선생님의 아틀리에임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가나아트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의 대작들을 대거 한꺼번에 잔뜩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화우들 대부분이 돌담이 멋들어진 솔숲 그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직 한낮 태양은 여름의 열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어 아무래도 온 몸을 드러내 자연 앞에 그냥 위풍당당하게 서 있기는 역시 무리인 듯싶기도 한 날씨다.
점심은 개천가의 차양막이 쳐있는 야외식당에서 닭볶음탕으로 포식을 하였다. 오늘 참가 인원이 60여명도 넘어 보이는데 그 많은 인원이 개천가에 연하여 길게 일렬로 차려진 밥상에 앉아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하였다. 마침 개강 날에 생일이 겹쳐진 윤희성 이사가 자진 신고하겠노라 아침에 던킨 도넛을 버스에서 돌렸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 점심상 자리가 그의 생일상 자리인 듯도 싶어 보여 그의 행운(?)이 은근히 부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닭볶음탕 같은 안주가 남아있으니 주당들의 술자리가 일찍 끝날 성 싶지 않아, 나름 일찌감치 도망친다고 도망쳐온 것이 두시. 그제야 붓을 잡고 반은 누워있다 싶은 소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
인사동에 도착하여 윤이사 생일상을 정식으로 차려주었다. 30여명 넘게 참석하였다. 가족 모두가 외국에 나가있는 외로운 기러기 아빠가 오늘 평소보다 더 부산한(강물에 빠트리는 퍼포먼스까지 벌인) 생일상을 받아 행복한 눈치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우리도 덩달아 행복해한 개강 날 풍경이다.
2011.9.4
첫댓글 빨간 고추를 말리며 곁에 앉은 할머니 모습에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입니다.
언제나 맛깔나는 글로 기록을 남겨주시는 윈디박의 그 부지런 함을 배우고 싶은 날입니다.
단 하루만 지나도 아스라이 사라져버리는 기억 공간의 잔혹함 때문에 하루하루를 의무처럼 기록합니다.
졸필에 언제나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콜롬보 형님의 덕에 다행히 매일 한 글에 또 한 자투리를 붙여 놓을 뿐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며 경작했던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할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순간순간 임하는 한적한 시골풍경 사진 감사합니다.
사진기에 대한 고마움을 깨우쳐 가고 있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담아내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도구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욕심 같아서는 똑딱이 보다는 DSLR카메라를 동원해야 하는데, 짐이 장난이 아니라서…….
아직 덜 미쳐있는 증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