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무장 입국을 시도했던 조선의용군은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특히 해방 정국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역사학자들은 거대한 빙산 속에서 자신의 사관, 사상과 이념에 맞는 것을 취사선택하여 조직하며 해석하여 우리에게 소개를 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지식은 편향적이기 너무 쉽다.
우리는 미군정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정통 정부의 공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의 자격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런 미군정에 대한 강한 불만과 분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 내에서도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임정요인들 중 김구, 엄항섭, 조완구는 법통을 내세우며 정부 요인으로 입국할 것을 주장하였고 김규식, 김원봉, 장건상은 미군정이 실시되는 남한의 현실에서 중경의 임시정부가 전민족적 의사를 집약 • 대변하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임시정부의 총사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한독당의 목소리가 컸으므로 귀국이 지연되었다.
임정대표들은 중경의 미대사관을 방문하여 미국의 도움으로 입국하면 미 점령군이나 국무성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입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무성은 미군정이 특정 개인과 특정 집단을 지지하는 것은 소련군을 자극하여 북한에 특정 개인과 특정 집단을 세우게 하여 통일한국의 건설을 지연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당시 극동국장이었던 존 빈센트의 말을 들었다.
미국의 강경 입장 때문에 임정의 요인들은 11월 23일, 김구, 김규식, 이시영, 김상덕 등 15명이 1진으로 입국하였다.
입국 후에 김구는 “대외적으로는 개인 자격이지만, 우리 한국 사람의 입장으로 보면 임시정부가 환국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남한에 독립군을 이끌고 들어올 수 있는 임시정부는 지역상의 문제와 미국의 비협조로 기회를 놓쳤다.
해방 직후 북한에는 네 개의 파가 있었다.
국내파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오기섭, 정달헌, 최용달 등이다. 그들은 함경도지역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벌였고 1945년 8월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박헌영이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을 세우자 그들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으로 활동했다.
민족주의 계열의 국내파인 조만식은 1945년 11월 3일에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소련파가 있다.
소련군 사령부는 북한점령통치체제를 재편성하고자 1945년 11월 소련 국방 인민위원회에 지시하여 민정담당부사령관직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는 정치, 경제를 조직하거나 조정할 능력이 있는 인적자원이 부족하였으므로 소련파 472명을 북한에 파견했다. 이들은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자들이 아니다. 허가이, 남일, 박창옥 등이다.
만주파가 있다.
그들은 1936년에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조직된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에서 무장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만주국의 대토벌에 직면하여 1940년경에 소련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대략 590명 정도였고 1942년 7월에 소련 극동전선군 88독립보병여단(88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여기에는 190여 명 정도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주요임무는 소만 국경에서 정찰임무였다.
소규모부대로 만주에 들어가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비밀조직을 만드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3년부터는 모든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 88여단에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이 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극동전선군의 전면적인 대일정을 앞두고 여단의 소련국적 344명은 다른 부대로 차출되어 나갔고 290여 명의 조선과 중국의 대원들은 만주지역 정찰 업무에 동원되었다. 대일전이 개시되고 난 직후, 남은 병력은 참전 대기명령을 받고 전투준비에 들어갔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실질적인 전투 참여는 없었다.
소련군정은 88여단의 김일성을 후원하여 국내 백그라운드가 없고 연안파처럼 막강한 전투부대가 없는 그와 그 집단을 다른 세력과 연합시키고 세력을 잡으면서 반대파를 추방하는 것을 통하여 그의 입지를 세워주었다.
연안파가 있다.
중국 화남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이 조직한 민족혁명당의 군사조직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최창익, 윤세주와 함께 화북으로 이동해 조선의용대화북지대가 되었다. 그들은 1942년 화북조선독립동맹이 조직되면서 그 산하의 무장조직으로 편제되어 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의용군은 화북지대에서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였다. 사령관은 무정, 참모장은 박효삼 이었으며 박일우, 최창익, 한빈, 김두봉, 윤세주 등이 함께 하였다.
일본 항복 이후에 조선의용군은 동북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고 3개 지대로 나뉘어 동북으로 이동하며 팔로군을 도와 장개석 부대와 싸웠다.
연안파, 조선의용군은 해방 이후 무장한 채 입국하고자 했다. 그들은 두 차례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소련군과 김일성에 의하여 무장해제를 당하고 출국하였다.
첫째는 1945년 10월 중순경, 이유민, 한청과 주연이 1,500여 명의 조선인들 선견종대(先遣從隊)를 이끌고 입북하였으나 10월 12일 소련군과 보안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한청은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사 선견종대를 중심으로 군관학교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건부 당하였다. 선견종대는 중국으로 돌아가 11월 초에 선양으로 돌아갔다.
둘째는 1945년 10월 하순 압록강지대에 의한 것이다.
2,000여 명의 조선의용군이 김호와 김강이 소련군 평북경비사령부와 여락을 취하여 도강을 시도하였다. 11월 초 소련군이 입국을 허가하였다. 사흘 후에 압록강 철교를 건너서 들어갈 때 의용군의 수는 4천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들은 신의주에 들어가서 시가행진을 하였고 신의주 역 앞의 동중학교에서 유숙을 하였다. 그러나 그 밤에 소련군과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의 사주를 받은 한웅의 보안대의 야습을 받아 무장해제를 당하였으며 곧 바로 추방을 당해 만주로 돌아갔다. 당시 소련군 제25군 참모장 벤코프스키 중장이 평안북도 정치사령관 크라코프 대령에게 직접 지시하고 크라코프가 당시 평안북도 제 1서기로 있던 김일과 공모해 한웅을 행동대로 세워 조선의용군 무장해제를 단행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조선인민공화국에서 만주파 김일성의 체제가 공고해졌을 때, 장개석 군인이 본토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완전히 물러나 중국에서 모택동의 체제가 확고해졌을 때 연안파 조선의용군은 북한으로 건너가 5사단, 6사단, 12사단의 인민군 부대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동북조선의용군은 북한군 전체의 3분의 1을 구성하며 북한군의 전력 강화에 기여하였으며 6•25전쟁을 일으키는 한 축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임정요인들이 공인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만 알고 있고 북한으로 들어간 연안파, 조선의용군이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추방당한 사실은 모른다.
역사의 기록이 좌편향이거나 우편향이면 후손들이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의 강대국의 휘두름의 강권과 질곡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는 미, 영, 불, 러에 의해 강제점령 되었지만 그들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하나를 이루어서 곧 바로 통합을 이룰 수가 있었다. 주변 강대국은 언제나 있는 것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지구촌의 현실이다. 주변 강대국에게 견제할 수 있는 물리적인 능력과 지식, 지혜를 갖추는 것도 가장 중요하지만 국민들이 사상과 이념, 지역과 출신을 떠나서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무정평전을 읽으며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역사학자들이 그들의 취향대로 써놓은 것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과 분노를 느꼈다.
2022.3.2.수 오전
우담초라하니
참고서적
안문석 저 ⌜무정평전⌟, 일조각, 일조각, 2019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인물과 사상사, 2017
박영실 저 ⌜8월 종파사건⌟, 백년동안, 2014
브루스 커밍스 저 김동노 외 3인 번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