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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성(慰禮城)은 백제의 첫번째 도읍이다. 필자는 이 논고에서 위례성(慰禮城)의 위치는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또 봉산군에 접해있는 광활한 재령평야가 고대에는 바다였다는 사실과 백제 영토였던 황해도를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빼앗은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이런 학설은 지난 천년 이래 필자가 처음이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고,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나왔으므로 먼저 부여(夫餘)의 건국부터 살펴보자. 부여의 건국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후한(後漢, 25년 ~ 220년) 전기(前期)에 왕충(王充, 27년 ~ 103년)이 저술한 논형(論衡)의 길험편(吉驗篇)이다. 다음과 같다.
◇ 論衡 第九 吉驗篇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王欲殺之. 婢對曰. 有氣大如鷄子, 從天而下我, 故有娠. 後産子, 捐於猪溷中, 猪以口氣噓之, 不死. 復徙置馬欄中, 欲使馬藉殺之, 馬復以口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 令其母收取奴畜之. 名東明, 令牧牛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南至掩淲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渡, 魚鼈解散, 追兵不得渡. 因都王夫餘, 故北夷有夫餘國焉.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왕의 시비(侍婢)가 임신하였다. 왕이 죽이려고 하자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 크기가 달걀만한 기(氣)가 있었는데 하늘에서 나에게 내려오더니 임신하였습니다. 」 라고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아서 (왕이) 돼지우리에 버렸는데 돼지가 입김을 불어서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옮겨 두고 말이 밟아 죽이기를 바랬으나 말이 또다시 입김을 불어서 죽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하늘의 아들인가 의아하여 그 어미가 거두게 하고 노비로 삼아 길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동명이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뒤쫓던 병사들은 건너지 못했다. 이로써 부여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북이(北夷)에 부여국(夫餘國)이 있는 것이다.
논형(論衡)은 30권 8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자기편(自紀篇)은 왕충(王充)의 자서전인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왕충은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3년(서기 27년)에 출생하였다. ... 장화(章和) 2년(서기 88년)에 관직에서 은퇴했다.(章和二年 罷州家居) 나이가 일흔(서기 96년)에 가까워지면서(年漸七十) 해가 갈 수록(曆數冉冉 역수염염) 심신이 쇠약해져 양성서(養性書) 16편을 저술하고 섭생에 힘썼으나 수명을 연장할 수 없어 탄식하며 슬퍼하노라. 命以不延 吁嘆悲哉
후한서(後漢書) 왕충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後漢書 王充列傳 : 年漸七十,志力衰耗,乃造養性書十六篇,裁節嗜欲,頤神自守。永元中,病卒於家
왕충(王充)은 나이가 일흔(서기 96년)에 가까워지면서 기력이 쇠잔하자 양성서(養性書) 16편(篇)을 저술하고 절제하며 섭생에 힘썼다. 영원중(永元中) 집에서 병사했다.
영원(永元)은 후한(後漢) 화제(和帝)의 연호(年號)로 89년부터 105년 3월까지 사용하였다.
왕충(王充)은 서기 80년에 논형(論衡)을 저술했고, 71세인 97년에 사망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 이는 낭설이다. 왕충(王充)은 62세(서기 88년)에 관직에서 은퇴하고 집필에 몰두하여 논형(論衡)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서기 97년 이후에 양성서(養性書) 16편(篇)을 저술했고, 그 후에 논형(論衡) 자기편(自紀篇)을 작성했다. 필자는 왕충(王充)이 서기 100년경 논형(論衡)을 완성하였고 77세인 103년에 사망했을 것으로 본다.
논형(論衡)이 나오고 이백 년 후 어환(魚豢)이 위략(魏略)을 저술하였다. 어환(魚豢)은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의 저자 진수(陳壽, 233 ~ 297)와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행적이 미상이다. 진수(陳壽)가 290년 무렵 편찬한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 훗날 남조(南朝) 송(宋, 420년 ~ 479년)에서 배송지(裵松之, 372 ~ 451)가 위략(魏略) 등 140 종류의 서책을 인용하여 방대한 주석을 달았다. 송(宋) 문제(文帝, 재위 424년 ~ 453년)의 명으로 429년에 착수하여 완성본을 문제(文帝)에게 올렸는데 완료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음 대목은 배송지의 주석이다.
◇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 부여전(夫餘傳)
魏略 曰 , 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 , 後生子,王捐之於溷中,豬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爲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擊水,魚鱉浮爲橋,東明得度,魚鱉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위략(魏略) : 옛 서지(書志)에 이르기를, 옛날 북방에 고리국(高離之國)이 있었다. 그 왕의 시비(侍婢)가 임신하여 왕이 죽이려 하자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 달걀같은 기(氣)가 있다가 내려오더니 내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아서 왕이 돼지 우리에 버렸더니 돼지들이 입(喙 훼)으로 불어주었다. 마굿간으로 옮기자 말이 기(氣)를 불어주었다. 아이가 죽지 않자 왕이 하늘의 아들인가 의아하여 거두어 기르도록 그 어미에게 명하였다. 동명(東明)이라 이름 짓고 말을 키우라고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동명이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이내 흩어져 뒤쫓던 병사들은 건너지 못했다. 이리하여 동명은 부여(夫餘) 땅에서 왕이 되었다.
위략(魏略)의 동명설화는 줄거리가 논형(論衡)과 동일하나 탁리국(橐離國)을 고리국(高離國)이라 하고 엄호수(掩淲水)를 시엄수(施掩水)라 했다. 위략(魏略) 원본은 훗날 망실되었다.
남조(南朝) 송(宋, 420년 ~ 479년)에서 배송지와 동시대에 범엽(范曄, 398년 ~ 445년)이 440년 ~ 445년에 후한서(後漢書)를 저술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은 논형(論衡)의 동명설화를 옮겨 적었는데 탁리국(橐離國)을 색리국(索離國)이라 했다. 색(索)은 삭으로도 읽는다.
◇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後漢書 東夷列傳 夫餘國)
初,北夷索離國王出行,其侍兒於後妊身,王還,欲殺之。侍兒曰:“前見天上有氣,大如雞子,來降我,因以有身。”王囚之,後遂生男。王令置於豕牢,豕以口氣嘘之,不死。復徙於馬蘭,馬亦如之。王以為神,乃听母收養,名曰東明。東明長而善射,王忌其猛,復欲殺之。東明奔走,南至掩淲水,以弓擊水,魚鳖皆聚浮水上,東明乘之得度,因至夫餘而王之焉。
처음에 북이(北夷) 색리국(索離國)의 왕이 출행하였는데, 그 시녀가 후에 임신하였다. 왕이 돌아와서 죽이고자 하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 위에 달걀 크기 만한 기운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에게 내려왔고 이로 인하여 임신했습니다." 하였다. 왕이 시녀를 가두었는데 후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명하여 돼지 우리에 두었더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으로 옮겼더니 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어미가 거두어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쏘기를 잘하니, 왕이 그 용맹함을 꺼려해 다시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렀는데 활로 강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모여 물위에 떠올랐다. 동명이 올라가 강을 건너갔고, 부여에 이르러 왕(王)이 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374년에 태어나 391년에 왕위에 오르고 412년 음력 10월에 39세로 별세하였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산릉(山陵) 공사를 414년 9월에 완료하고, 선왕(先王)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높이 6.39 m의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
고구려의 옛 도읍 환도성(丸都城) 인근에 있는 광개토왕릉 비석에 고구려 건국설화가 새겨져 있다.
◇ 광개토왕릉 비문(碑文)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即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옛적에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다. 북부여에서 나왔고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 : 江을 관장하는 神)의 따님이다. 알을 부수고 세상에 내려왔는데 태어나면서 성스러움이 있었다. ▨▨▨▨▨▨ 길을 떠나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부여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루터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황천(皇天 : 天帝)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하백(河伯)의 따님인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이어붙이고 거북이가 물에 떠오르거라." 하니, 이 소리에 응하여 즉시 갈대가 이어붙고 거북이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추모왕(鄒牟王)과 동명왕(東明王)은 출생의 내력이 다르지만 건국과정은 똑같다. 고구려에서 부여의 동명설화를 가져다가 추모왕으로 바꾸고 출생 내력을 윤색하여 고구려 건국설화로 삼은 듯하다.
위서(魏書)는 북위(北魏 , 386 ~ 534)의 정사(正史)이다. 북제(北齊 , 550 ~ 577)에서 위수(魏收)가 저술했는데 본기 14권과 열전 96권은 554년에, 지(志) 20권은 559년에 완성했다. 위서(魏書) 고구려열전(高句麗列傳)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위서 고구려열전(魏書 高句麗列傳)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朱蒙母河伯女, 爲夫餘王閉於室中.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 旣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棄之與豕, 豕又不食. 棄之於路, 牛馬避之. 後棄之野, 衆鳥以毛茹之. 夫餘王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破殼而出. 及其長也,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將有異志,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每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乘, 以瘦者給朱蒙. 後狩于田, 以朱蒙善射, 限之一矢. 朱蒙雖矢少, 殪獸甚多. 夫餘之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 告朱蒙曰, 國將害汝. 以汝才略, 宜遠適四方. 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人, 棄夫餘, 東南走.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 於是魚鼈並浮, 爲之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其一人著麻衣, 一人著納衣, 一人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初, 朱蒙在夫餘時, 妻懷孕. 朱蒙逃後生一子, 字始閭諧. 及長, 知朱蒙爲國主, 卽與母亡而歸之. 名之曰閭達, 委之國事. 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代立. 如栗死, 子莫來代立, 乃征夫餘, 夫餘大敗, 遂統屬焉.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인데 부여(夫餘) 왕에 의해 방 안에 갇히게 되었다. 햇빛이 비치기에 몸을 이끌고 피하자 햇빛이 다시 따라왔다. 얼마 후 잉태하여 알을 하나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만 하였다. 부여 왕이 알을 버려서 개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알을 버려서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하였다. 뒤에 알을 들판에 버렸더니 새들이 깃털로 감싸 주었다. 부여 왕이 그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드디어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그가 자라자 이름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는데 부여 말로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라서 장차 다른 뜻을 품을 것이니 그를 없애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매양 몰래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음을 알아내서 준마는 먹이를 줄여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키워 살찌게 하였다. 부여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후 들에서 사냥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화살을 한 개만 주었다. 주몽은 비록 화살은 적었으나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주몽의 어머니가 몰래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에게는 재주와 지략이 있으니 어디로든 적당한 곳으로 멀리 떠나거라.”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인(烏引) 오위(烏違)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길을 가다 큰 강을 만났는데, 건너려고 했으나 다리가 없었고 부여 사람들의 추격이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강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치는데 추격하는 병사가 거의 쫓아 오니 어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물고기와 자라는 금새 흩어져 추격하는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麻衣)을 입고, 한 사람은 장삼 옷(納衣)을 입고, 한 사람은 마름 옷(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주몽은 그들과 더불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그곳에 거주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高)를 성씨(姓氏)로 삼았다.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아내가 임신하였다. 주몽이 도망한 뒤 아들을 낳으니, 처음에는 이름을 여해(閭諧)라고 하였다. 자라서 주몽이 왕이 되었음을 알고, 어머니와 함께 찾아왔다. 그의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부르고, 나라 일을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대를 이었고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대를 이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가 대를 이었다. 막래가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가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속하였다.
논형(論衡), 위략(魏略), 후한서(後漢書)에 수록된 동명(東明)의 부여 건국설화가 위서(魏書)에서는 주몽(朱蒙)의 고구려 건국설화로 바뀌었다. 주몽이 추모왕이다. 주몽의 시호(諡號)가 동명성왕(東明聖王)인 것으로 미루어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했음을 알 수 있고, 위서(魏書)는 고구려 사람들이 주몽설화를 주장한다고 기술했다. 북위(北魏)에서는 논형(論衡), 위략(魏略), 후한서(後漢書)에 수록된 동명(東明) 설화를 알고 있었겠지만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였기에 고구려의 주장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618년에 건국한 당(唐) 왕조에서 636년에 양서(梁書), 진서(陳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를 한꺼번에 편찬했다. 이 중에 양서(梁書)는 논형(論衡)의 동명설화를 옮겨 적고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이라 했다.
◇ 양서(梁書) 고구려열전
高句驪者,其先出自東明。東明本北夷橐離王之子。離王出行,其侍兒於後任娠,離王還,欲殺之。侍兒曰:「前見天上有氣如大雞子,來降我,因以有娠 」 , 王囚之,後遂生男。王置之豕牢,豕以口氣噓之,不死,王以爲神,乃聽收養。長而善射,王忌其猛,復欲殺之,東明乃奔走,南至淹滯水,以弓擊水,魚鱉皆浮爲橋,東明乘之得渡,至夫餘而王焉。其後支別爲句驪種也。
고구려는 그 선조가 동명(東明)에서 나왔다. 동명은 본래 북이(北夷) 탁리왕(橐離王)의 아들이다. 탁리왕이 출행한 후에 그 시녀가 임신했다. 왕이 돌아와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하기를, 「 앞서 큰 계란만한 기(氣)가 하늘 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에게 내려와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시녀를 가두었다. 후에 사내아이를 낳아서 왕이 돼지 우리에 두었는데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했다.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그 용맹을 꺼려하여 다시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올라가서 강을 건넜고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그 후손이 갈라져서 고구려 종족이 되었다.
주서(周書)와 수서(隋書)는 위서(魏書)의 주몽설화를 옮겨 적었다.
◇ 주서(周書) 고구려열전
高麗者,其先出於夫餘。自言始祖曰朱蒙,河伯女感日影所孕也。朱蒙長而有材畧,夫餘人惡而逐之。土于紇斗骨城,自號曰高句麗,仍以高為氏。
고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가 주몽이라 한다. 하백의 딸이 햇빛에 감응하여 잉태하였다. 주몽이 자라서 재주가 있었는데 부여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냈다. 주몽은 흘두골성(紇斗骨城)을 쌓아 고구려라 이름 짓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 수서(隋書) 고구려열전
高麗之先出自夫餘。夫餘王嘗得河伯女,因閉於室內,為日光隨而照之,感而遂孕,生一大卵,有一男子破殼而出,名曰朱蒙。夫餘之臣以朱蒙非人所生,咸請殺之,王不聽。及壯,因從獵,所獲居多,又請殺之。其母以告朱蒙,朱蒙棄夫餘東南走。遇一大水,深不可越。朱蒙曰:「我是河伯外孫,日之子也。今有難,而追兵且及,如何得渡」 於是魚鼈積而成橋,朱蒙遂渡。追騎不得濟而還. 朱蒙建國,自號高句麗,以高為氏。朱蒙死,子閭達嗣。
고려의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하백의 딸을 만나 방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이 따라와 비추었다. 이에 감응하여 잉태해서 큰 알을 낳았다. 사내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는데. 주몽이라 이름 지었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죽이자고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몽이 장성하여 사냥을 따라 가서 무척 많이 잡으니 또 죽이자고 청했다. 그 어머니가 주몽에게 알려 부여을 떠나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큰 강을 마주쳤는데 깊어서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 나는 하백의 외손이고 태양의 아들이다. 추격하는 병사들이 가까이 이르러 어려움에 처했는데 어찌하면 건널 수 있는가? " 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만들어 주몽이 건너갔고 추격병은 건너지 못하고 돌아갔다. 주몽이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부르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주몽이 죽고 아들 여달(閭達)이 뒤를 이었다.
당(唐) 왕조에서 659년에 이연수가 편찬한 북사(北史)는 고구려열전에 위서(魏書)의 주몽설화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동명의 출신국을 논형(論衡)과 양서(梁書)는 탁리국(橐離国), 위략(魏略)은 고리국(高離國), 후한서(後漢書)는 색리국(索離國)이라 했다.
고려에서 김부식(金富軾)이 주관하여 1145년에 편찬한 삼국사기는 광개토왕 비문과 위서(魏書)의 주몽설화에 다른 내용을 추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디.
◇ 三國史記 第十三卷
高句麗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 一云鄒牟 一云衆解 先是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蛙 一作蝸 ,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後其相阿蘭弗曰 日者 天降我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 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綠邊室中 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 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嶷然異常 自作弓矢 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減食令瘦 駑者 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 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而朱蒙殪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朱蒙乃與烏伊 摩離 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水, 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 魏書云 至普術水,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黙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黙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 , 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 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 時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며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늙어서도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의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금빛 개구리(蛙)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와(蛙)는 와(蝸)라고도 한다. 왕이 기뻐하며 "이 아이는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그를 데려와 길렀다.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훗날 국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기를,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 하였다.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금와는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면서 나를 웅신산(熊神山)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그녀에게 햇빛이 비쳤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한 그녀를 따라 가면서 비쳤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다섯 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버려서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다시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나중에 들에 버렸으나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서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그것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속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의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고 그 사람됨이 용맹하여 만약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빨리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키워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 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간들 살지 못하겠는가? 여기에서 주저하다가 해를 당하기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淹淲水)에 이르렀는데 일명 개사수(盖斯水)로 지금의 압록강 동북에 있다. 거기에서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추격해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 때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서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 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術水)에 이르렀다.’고 한다 ,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장삼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과 이름이 무엇인가?" 삼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재사라고 대답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무골이라고 대답했고,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라고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라는 성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려 하는데, 마침 세 분의 어진 인물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위서(魏書)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험고한 것을 보고, 도읍으로 정하고자 하였으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일설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이 해(고구려를 건국한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기원전 37년에 주몽은 22세라고 했는데 고려 시대에도 세는 나이로 계산했으니 주몽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58년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을 졸본천(卒本川)으로, 지금의 환인(桓仁)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을 졸본성으로 추정한다.
◇ 삼국사기 제13권
東明聖王 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德.
동명성왕 14년(기원전 24년) 가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동부여에서 돌아가셨다. 그 왕 금와(金蛙)가 태후의 예로 장사를 치르고 사당을 세웠다. 겨울 10월,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바쳐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
東明聖王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동명성왕 19년(기원전 19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유리가 그 어머니와 함께 부여에서 도망해 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이 때 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 불렀다.
瑠璃明王立. 諱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初朱蒙在扶餘, 娶禮氏. 女有娠.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 幼年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頑如此." 類利慙, 歸問母氏: "我父何人, 今在何處?" 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曰: '汝若生男子, 則言我有遺物, 藏在七稜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 類利聞之, 乃往山谷, 索之不得, 倦而還. 一旦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稜.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句鄒都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己所有斷劒, 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子, 至是繼位.
유리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리인데, 혹은 유류라고도 한다. 주몽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에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에게 태기가 있었고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가 어렸을 때,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애비가 없어서 이렇게 논다"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어서 나라에서 용납하지 않았기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고 말했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바로 산골로 들어가 그것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지친 상태로 돌아왔다. 하루는 유리가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냈다. 그는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옥지, 구추, 도조 등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조각을 꺼내어 맞추어 보니 하나의 칼로 이어졌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된 것이다.
당(唐)에서 636년에 편찬한 양서(梁書), 주서(周書), 수서(隋書)는 백제(百濟)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梁書 百濟列傳
百濟者,其先東夷, 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弁韓、辰韓各十二國,馬韓有五十四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百濟卽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東夷)이다. 세 한국(韓國)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 12국이고 마한은 54국이다. 큰 나라는 만여 가(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로서 모두 십여만 호(戶)이다. 백제는 그 하나인데 후에 점차 강대해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병하였다.
◇ 周書 百濟列傳
百濟者,其先蓋馬韓之屬國,夫餘之別種。有仇台者,始國於帶方。故其地界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治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夫餘氏
백제는 그 선조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었고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仇台)가 있어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 그리하여 땅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에 면한다. 왕의 성(姓)은 부여씨(夫餘氏)이다.
◇ 隋書 百濟列傳
百濟之先,出自高麗國。其國王有一侍婢,忽懷孕,王欲殺之。婢云:「有物狀如雞子,來感於我,故有娠也」 , 王捨之。後遂生一男,棄之廁溷,久而不死,以為神,命養之,名曰東明。及長,高麗王忌之,東明懼,逃至淹水,夫餘人共奉之。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
백제의 선조는 고려에서 나왔다. 그 나라 왕의 시녀 하나가 홀연히 잉태해서 왕이 죽이려고 했다. 시녀가 말하기를, " 달걀처럼 생긴 물체가 나에게 오는 느낌이었고 그리하여 임신했습니다." 라고 하여 왕이 죽이기를 포기했다. 후에 사내아이를 낳아서 돼지우리에 버렸는데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이에 신기하게 여겨 아이를 기르라고 명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장성하자 고려 왕이 꺼려했다. 동명이 두려워 달아나 엄수(淹水)에 이르렀고 부여 사람들이 모두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었는데 인자함과 신의가 두터웠고 대방군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구태에게 시집 보냈다. 점차 창성하여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에 백가가 바다를 건넜기에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다.
수서(隋書)는 당(唐)에서 위징(魏徵)과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이 감독하고, 안사고(顔師古)와 공영달(孔穎達) 등이 집필하여 636년에 본기 5권, 열전 50권을 완성하였다. 수서(隋書)는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기술하면서 고구려열전에서는 위서(魏書)의 주몽설화를 옮겨 적고, 백제열전에서는 위략(魏略)의 동명설화를 옮겨 적었는데 동명이 태어난 고리국(高離國)을 고려(高麗)라고 오기(誤記)했다. 엉망진창이라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
당(唐)에서 이연수가 659년에 완성한 북사(北史)는 백제열전에 후한서의 동명설화와 수서(隋書)의 구태(仇台) 설화를 옮겨 적었다.
◇ 北史 百濟列傳
百濟之國, 蓋馬韓之屬也, 出自索離國. 其王出行, 其侍兒於後姙娠, 王還, 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如大鷄子來降, 感, 故有娠.」, 王捨之. 後生男, 王置之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後徙於馬闌, 亦如之. 王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乃奔走, 南至淹滯水, 以弓擊水, 魚鼈皆爲橋, 東明乘之得度, 至夫餘而王焉.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백제는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었다.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 그 왕이 출행하였는데 그 시녀가 뒤에 임신하였다. 왕이 돌아와서 시녀를 죽이고자 하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 위에 큰 달걀만한 기운이 있는 것을 보았고 내려오는 것을 느꼈는데 그리하여 임신했습니다." 왕이 죽이기를 포기했다. 후에 사내아이를 낳아서 왕이 아이를 돼지우리에 두었는데 돼지들이 입으로 기운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후에 마굿간으로 옮겼으나 마찬가지였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아이를 기르라 명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했다. 장성해서 활을 잘 쏘니 왕이 그 용맹함을 꺼려하여 다시 동명을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도망쳐서 남쪽으로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다리가 되어 동명이 올라가 강을 건넜고 부여(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가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했으며 처음에 대방(帶方)의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구태에게 시집 보냈다.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처음에 백가(百家)가 건너왔기에 백제(百濟)라 하였다.
이연수가 북사(北史)와 같은 해에 완성한 남사(南史)는 백제열전에 양서( 梁書)를 옮겨 적었다.
◇ 南史 百濟列傳
百濟者,其先東夷 , 有三韓國 , 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弁韓、辰韓各十二國,馬韓有五十四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百濟即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東夷)이다. 세 한국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 12국이고 마한은 54국이다. 큰 나라는 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십여만 호이다. 백제는 그 하나인데 후에 점차 강대해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병하였다.
주서(周書) , 수서(隋書) , 북사(北史)는 동명이 부여를 세웠고 동명의 후손 구태(仇台)가 대방( 帶方)의 옛땅에 백제를 세웠다고 했다. 동명의 출신국을 논형(論衡)과 양서(梁書)는 탁리국(橐離国), 위략(魏略)은 고리국(高離國), 후한서(後漢書) 및 북사(北史) 백제열전은 색리국(索離國)이라 했다.
북사(北史)는 고구려열전에 위서(魏書)의 주몽설화를 옮겨 적고 백제열전에서는 후한서(後漢書)의 동명설화를 옮겨 적어서 같은 책에 모순되는 내용을 수록하였다. 659년에 이연수가 북사(北史)와 함께 완성한 남사(南史)는 고구려열전에 북사(北史)를 보라 하고 백제열전은 북사(北史)와 전혀 다른 양서( 梁書)를 옮겨 적었다. 북사(北史)는 또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의 백제건국 이야기를 수서(隋書)에서 옮겨 적었다. 공손도( 公孫度)는 후한말 189년에 요동군 태수가 되었고 204년에 사망했는데 이 시기에 백제가 건국했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너무나 어긋난다. 중국 사서의 백제 건국사는 뒤죽박죽이라 신뢰할 수 없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시조로 온조왕(溫祚王) 설과 비류왕(沸流王) 설을 기록했는데 온조왕 시조설이 지금까지 정설로 통해 왔다. 다음과 같다.
◇ 삼국사기 제23권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弥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왔다. 졸본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이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얼마 후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둘째는 온조(溫祚)이다. 또 이르기를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越郡)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서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떠났는데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 싶어 하자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생각컨데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띠를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자리하고, 남쪽은 비옥한 땅을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에 막혀 있으니 그 천험과 지리가 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에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서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 죽었다. 비류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이 올 때 기뻐하며 따랐기에 뒤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승려 일연(一然)이 1281년에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에서 온조왕 시조설만 옮겨 적어 정설로 삼고 비류왕 시조설은 누락시켰다.
◇ 三國遺事 紀異 第二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
史本記云 百濟始祖溫祚. 其父雛牟王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州之王無子, 只有三女, 見朱蒙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州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恐後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岳,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歸彌雛忽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漢成帝鴻佳三年也. 沸流以彌雛忽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城, 後以來時百姓樂悅,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後至聖王, 移都於泗泚, 今扶餘郡. 彌雛忽仁州 慰禮今稷山.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이(第二)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南扶餘 前百濟 北扶餘)
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本記)에 이르기를,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그는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왔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다만 딸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扶餘州)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가 비류(沸流)이고 다음이 온조(溫祚)이다. 그들은 후에 태자(太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드디어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가서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들이 간하기를 “생각컨데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띠를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자리하고, 남쪽은 비옥한 땅을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에 막혀 있으니 그 천험과 지리가 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에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輔弼)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 때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佳) 3년(기원전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서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 죽었다. 비류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이 올 때 기뻐했기에 뒤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 후에 성왕(聖王)에 이르러 사비(泗泚)로 도읍을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군이다. 미추홀(彌雛忽)은 인주(仁州)이고 위례(慰禮)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 조선왕조에서는 삼국유사의 역사관에 따라 온조왕 시조설을 정설로 삼고 더욱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이 어느 산(山)인지 말하지 않았으나 조선 중종(中宗) 25년(1530년)에 편찬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漢城府) : 삼각산(三角山)은 도성(都城) 북쪽 30리 양주(楊州) 땅에 있는데 일명 화산(華山)이요,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으니 바로 이 산(山)이다.
삼각산(三角山)은 지금의 북한산이다. 고려에서도 삼각산이라 했는데 중봉(中峰), 부아봉(負兒峰), 국망봉(國望峰)이 세 개의 뿔처럼 솟아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만 부아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시기가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중봉을 백운대(白雲臺 835.6 m), 부아봉을 인수봉(仁壽峰 810.5 m), 국망봉을 만경봉(萬景峰 800.6 m)이라 불렀고 삼각산의 별칭이 북한산(北漢山)이었다. 이런 내력으로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한산(漢山)을 북한산으로, 부아악(負兒嶽)을 인수봉으로 해석하였다.
부아악에서 내려온 다음 온조는 한수(漢水) 남쪽에 위례성을 지어 도읍으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위례성의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삼국유사는 위례성이 직산(稷山)이라고 했다. 삼국유사는 위례성이 직산이라는 근거를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았으나 조선왕조에서는 삼국유사를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은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 온조왕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세조(世祖) 11년(1465년), 현의 동북쪽에 온조왕의 사당을 세우고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위례성은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1690척(尺), 높이가 8척(尺)이고 성안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조선시대의 직산현(稷山縣)은 지금 천안시(天安市)에 속한다. 직산읍 군동리(郡東里)에 직산현 관아가 있었다. 옛 관아 동남쪽에 해발 579 m인 성거산(聖居山)이 있고 정상에 성거산성이 있다. 여지승람의 기록과 달리 지금은 성거산 인근에 해발 523 m인 위례산(慰禮山)이 있고 정상에 위례산성(慰禮山城)이 있다.
조선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산(漢山)은 북한산이고 부아악(負兒嶽)은 인수봉이라고 해석했는데 필자는 이를 오류라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인수봉은 사면(四面)이 깎아지른 암벽이라 걸어서 올라갈 수 없는 곳이니 비류와 온조가 걸어서 올라간 부아악은 인수봉이 아니다.
둘째 : 인수봉의 남쪽 바로 앞에 백운대와 만경대가 전망을 가로 막고 있어서 인수봉에서 남쪽으로는 산 아래 평지가 보이지 않는다.
백운대와 인수봉
걸어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백운대를 부아악으로 간주하는 편이 합리적이지만 백운대에서 남쪽으로는 남한산, 청계산, 관악산까지만 보인다.
백운대에서 조망한 남쪽 방면
충청도 직산현은 백운대에서 90 km 떨어져 있어서 보이지도 않는데 직산이 살만한 땅인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 사이에는 살만한 곳이 없어서 직산까지 갔다는 말인가? 부아악은 북한산 인수봉이나 백운대이고 위례성은 직산이라는 주장은 이치에 어긋나는 궤변이다.
삼국사기를 제대로 해석하면 한산(漢山)은 산의 이름이 아니라 한산군(漢山郡)을 뜻하고 한산군(漢山郡)은 고려의 광주군(廣州郡)이다.
◇삼국사기 제35권 :
漢州, 本高句麗漢山郡, 新羅取之, 景德王改爲漢州, 今廣州.
한주는 본래 고구려의 한산군인데 신라가 빼앗았다. 경덕왕이 한주(漢州)로 고쳤는데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2권 기이제이(紀異第二)
溫祚王 十四年丙辰, 移都漢山 今廣州,
온조왕 14년 병진에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은 본래 백제의 남한산성이다. 시조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에 위례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년)에 다시 남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조선)의 경도(京都)이다. 신라가 남한산성을 한산주(漢山州)로 고쳤고 남한산주(南漢山州)라고도 불렀다. 경덕왕 15년(756년)에 한주(漢州)로 고치고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온조왕의 고성(古城)이 있다.
※ 조선왕조 문종(文宗) 원년(1451년)에 완성한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광주목(廣州牧)은 천녕군, 이천군, 용구현, 양근현, 지평현, 죽주, 과주를 관할했다. 조선시대에 천녕군은 광주군, 용구현은 용인군, 양근현과 지평현을 합쳐서 양평군, 과주는 과천현으로 고쳤다. 조선시대의 광주목(廣州牧)은 지금의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 및 서울시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를 아울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종합하면 한산(漢山)은 한산군(漢山郡)을 뜻하며 고려와 조선의 광주군(廣州郡)이다. 한산(漢山)은 산의 이름이 아니라 한산군(漢山郡)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직산(稷山)이 직산현(稷山縣)을 가리키 듯이 한산(漢山)은 한산군(漢山郡)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비류와 온조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갔다는 대목은 한산군(漢山郡)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갔다는 뜻이다. 한산군(漢山郡)에 해발 522 m인 남한산이 있으니 부아악은 남한산이다. 필자는 온조왕시조설화에서 한산 부아악과 하남 위례성 대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비류와 온조는 한산군(漢山郡)에 이르러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열 명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가 띠를 두르고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을 부아악 위에서 했거나 산을 내려온 직후에 했을 것이다. "이 하남(河南) 땅"은 부아악 주변 땅을 가리키는 것이니 부아악이 한수(漢水)의 남쪽에 있다는 뜻이다. 북한산에서 한강 남쪽을 가리키며 "이 하남 땅(此河南之地)"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북한산에서 이백 리 떨어진 직산을 가리킨 것이 아님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삼국유사가 위례성을 직산(稷山)이라고 주장한 것은 문맥상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온조왕시조설화를 올바로 해석하면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강이고, 한산은 한산군으로서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부아악은 남한산이고, 위례성은 광주(廣州)다.
삼국사기는 미추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삼국사기 제35권 :
栗津郡 領縣三 穀壤縣 孔巖縣 邵城縣 ... 邵城縣, 本高句麗 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 一云慶源買召 一作彌鄒
율진군은 3개 현, 곡양현, 공암현 소성현을 거느린다. .... 소성현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의 인주(仁州)인데 경원매소라고도 하고 미추(彌鄒)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제37권 :
買召忽縣 一云 彌鄒忽
매소홀현을 미추홀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제35권에 미추홀은 "지금"의 인주(仁州)라고 했는데 여기서 "지금"이란 삼국사기를 편찬한 1145년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145년 당시 고려의 인주(仁州)는 조선의 인천(仁川)이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인천도호부는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이고 미추홀(彌趨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소성현(邵城縣)으로 고쳐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 1009~!1031) 9년에 수주(樹州)에 붙였고,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이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하였고,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이 인주(仁州)로 고치고,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 2년(1391)에 경원부(慶源府)로 승격하였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원년(1393)에 다시 인주(仁州)로 만들었고, 태종(太宗) 13년(1413)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인천군(仁川郡)으로 만들었고, 세조(世祖) 6년(1461)에 인천도호부로 만들었다.
삼국사기 제35권과 제37권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온조왕시조설의 미추홀은 조선의 인천군(仁川郡)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제20권에는 또 다른 내용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
아산현(牙山縣)은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 아술현(牙述縣)이다. 신라 때 음봉(陰峯) - 음잠(陰岑)이라고도 했다 - 으로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인주(仁州)로 고쳤다.
삼국유사에 미추홀인주 위례금직산(彌雛忽仁州 慰禮今稷山)이라 했는데 삼국유사가 편찬된 1281년 당시 인천의 명칭은 인주(仁州)였다. 그렇다면 위례금직산(慰禮今稷山)이라 했듯이 미추홀금인주(彌雛忽今仁州)라고 했어야 한다. 금(今)을 빼고 그저 미추홀인주(彌雛忽仁州)라고 한 것은 1281년 당시가 아니라 고려초의 인주(仁州)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탕정군(湯井郡) 아술현(牙述縣)이 신라 때의 음봉현(陰峯縣)이고 고려초의 인주(仁州)이고 조선의 아산현(牙山縣)이다. 지금의 아산시 인주면(仁州面)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필자는 삼국유사가 미추홀로 지목한 인주(仁州)는 지금의 인천(仁川)이 아니라 아산시 인주면(仁州面)이라고 본다. 삼국유사는 위례성을 직산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미추홀은 지금의 아산시 인주면(仁州面)이라야 이치에 맞다. 인천은 직산에서 너무 멀다.
지금의 용인시(龍仁市)에는 해발 403 m인 부아산(負兒山)이 있는데 직산현 위례산에서 40 km 북쪽이다. 혹자는 용인(龍仁) 부아산(負兒山)이 삼국사기의 부아악(負兒嶽)이고, 직산현이 위례성이며, 직산현 북쪽을 흐르는 안성천(安城川)이 한수(漢水)이고, 아산만 바다에 접한 아산시 인주면(仁州面)이 삼국사기의 인주(仁州)이자 미추홀이라고 주장한다. 천안시에서는 직산현이 위례성이라고 홍보하면서 임진왜란 때 소실된 온조왕 사당을 2015년에 새로 지었다. 그러나 용인 부아산이 온조왕 시조설의 부아악이라면 용인이 한산군(漢山郡)이라야 하고 안성천이 한수(漢水)라야 하는데 문헌적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주장은 근거 없는 낭설이다.
온조왕 시조설을 올바로 해석하면 한산군 부아악은 조선의 광주군 남한산이고 위례성의 위치는 광주군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의 여러 기록들은 온조왕 시조설과 상충된다. 다음과 같다.
◇ 삼국사기 제 23권
溫祚王 十三年 夏五月 王謂臣下曰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溫祚王 十四年 春正月 遷都 秋七月 築城漢江西北分漢城民.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제 나가 순찰하면서 한수(漢水) 남쪽을 바라보았더니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오래도록 편안할 계책을 도모함이 마땅하다.”
가을 7월,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성채를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온조왕 14년 (기원전 5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가을 7월, 한강(漢江)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 백성을 나누었다.
※ 온조왕 13년 기사의 한수(漢水) 남쪽 한산(漢山)은 한산군(漢山郡)으로 해석해야 한다. 한수(漢水) 남쪽 한산군(漢山郡)에 성을 쌓아 한성(漢城)이라 부르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킨 다음 온조왕 14년에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이는 위례성이 한수(漢水) 이북이라는 뜻이다.
溫祚王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온조왕 17년 (기원전 2년) 봄, 낙랑이 침입해서 위례성을 불 태웠다.
※ 위례성에서 한수(漢水) 남쪽 한산군으로 천도한지 3년 후의 사건이다. 위례성의 북쪽에 낙랑이 있고 위례성의 남쪽에 한수(漢水)가 있고 한수(漢水) 남쪽에 한산군이 있음을 말해 준다.
溫祚王 四十一年 春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온조왕 41년(서기 23년) 봄 2월, 한수 동북쪽 여러 부락에서 15세 이상 되는 사람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했다.
※ 위례성이 한수(漢水) 이북에 있으니까 한수 북쪽 주민들을 위례성 수리에 동원한 것이다.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순행을 나가 한수 남쪽 한산군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한수 북쪽에서 강 건너 남쪽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위례성이 직산이고 온조왕이 순행을 나가서 광주(廣州)에 왔다면 한수 남쪽 한산군에서 강 건너 북쪽을 바라보게 되니 삼국사기의 기록과 어긋난다. 또 온조왕은 순행을 나갔다가 당일에 돌아왔는데 직산에서 광주(廣州)는 말 타고 달려도 당일에 다녀올 수 없다. 이것으로 보아도 위례성은 직산이 아니다.
김부식은 낙랑과 마한의 경계를 지금의 한강으로 보았고 광주(廣州)는 한강에 접해 있다. 직산은 한강에서 이백 리 남쪽인데 한강 이북에 있는 낙랑의 위협을 피해 천도하면서 낙랑과 인접한 광주(廣州)로 가는 것이 이치에 맞는가?
백제의 도읍에 관한 사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제37권 :
按古典記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高句麗南平壤, 都漢城,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 移都熊川,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年一百二十二.
고전기(古典記)에 따르면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 계묘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389년이 지나(371년) 13대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 105년을 지냈으며, 22대 문주왕에 이르러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26대 성왕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는데,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2년을 지냈다.
위의 대목에는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한산군(漢山郡)으로 천도한 사실이 누락되었고 삼국유사는 이를 보완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2권 기이 제이(紀異 第二)
按《古典記》云: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佳三年癸酉,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 十四年丙辰, 移都漢山今廣州,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咸安元年, 取高句麗南平壤, 移都北漢城今楊州,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卽位, 元徽三年乙卯, 移都熊川今公州,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一百二十年 至唐顯慶五年, 是義慈王在位二十年
고전기(古典記)에 이르기를,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 온조(溫祚)가 전한(前漢) 홍가(鴻佳) 3년 (기원전 18년) 계유(癸酉)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군(漢山郡)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廣州)다. 389년이 지나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양주(楊州)다. 105년이 지나 22세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여 원휘(元徽) 3년(475년) 을묘(乙卯)에 도읍을 웅천(熊川)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공주(公州)다. 63년이 지나(538년) 26세 성왕(聖王)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세 의자왕(義慈王)에 이르렀다. 120년을 지나 당(唐 ) 현경 5년, 의자왕 재위 20년에 이르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백제 온조왕이 세운 첫번째 도읍 위례성(慰禮城)은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이고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한산군(漢山郡)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남한성(南漢城)이다. 근초고왕 26년(371년)에 북한성(北漢城)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신라 경덕왕 때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 충렬왕 때에 한양부(漢陽府)라 고치고 우리 태조 3년(1394년)에 도읍을 이곳에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백제 개로왕(蓋鹵王) 때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피살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公州)로 도읍을 옮겼다. 성왕(聖王)이 옮긴 다섯 번째 도읍 소부리(所夫里)는 사비성(泗沘城)으로 부여군(扶餘郡)이다.
삼국사기 온조왕 시조설에는 위례성이 한수(漢水) 남쪽이라고 했으나 온조왕 본기에 의하면 위례성은 한수(漢水) 이북이고 온조왕 14년 (기원전 5년) 정월 한수(漢水) 남쪽 한산군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러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 이후 육백 년 동안 위례성 직산설이 정설로 통한 것이 너무나 기이하다. 조선시대에 위례성 직산설을 부정한 사람은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 뿐이다. 정약용은 1812년에 편찬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의 위례고(慰禮考)에서 한양성 동북방을 위례성으로 지목했다.
◇慰禮考 :
慰禮城者 百濟始祖首都之地 其故址在今漢陽城東北 ..... 北慰禮故址蓋在今京城東北十里之地 三角山之東麓。居民誤謂之漢陽古縣。金富軾地志云 漢陽郡本高句麗北漢山郡。鏞案漢陽古縣卽今京城北坊漢陽洞是也。詳見漢城考。惠化門外未十里有古城遺痕。居民指之爲漢陽古縣者。豈非慰禮城之古址乎。當時皆樹柵而築土 故今有痕而無石也
위례고(慰禮考) :
위례성은 백제 시조의 수도이다. 그 옛터는 지금의 한양성 동북쪽에 있다. .... 북위례성 옛터는 지금 경성 동북 십리 땅 삼각산 동쪽 기슭에 있다. 주민들은 그곳을 한양 옛고을이라고 잘못 말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지리지에 한양군은 본래 고구려 북한산군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한양 옛고을은 지금의 경성 북방(北坊=北區) 한양동(漢陽洞)이다. 한성고(漢城考)를 상세히 보라. 혜화문(惠化門) 밖 십리 못가서 고성(古城)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주민들은 한양 옛고을이라고 한다. 다들 위례성의 옛터가 아니라고 한다. 당시에는 나무와 흙으로 성채를 쌓았기 때문에 지금 흔적은 있으나 돌은 없다.
※ 정약용이 위례성으로 지목한 곳은 지금의 미아리다. 여지승람은 온조왕시조설화에서 비류와 온조가 올라간 한산 부아악이 삼각산이라고 했는데 정약용은 이 해석을 인정하고 온조가 삼각산 동쪽에 위례성을 지어 도읍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와 함께 정약용은 그때까지 막연히 광주군(廣州郡) 남한산으로 인식했던 두번 째 도읍 한성(漢城)은 광주군(廣州郡) 춘궁리(春宮里)라고 주장했다.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이다.
삼국사기 온조왕본기에 위례성은 한수(漢水) 이북이라 했으니 정약용이 위례성 직산설을 부정하고 한수 이북 미아리를 위례성으로 지목한 것은 온조왕 본기에 근거한 합리적 해석이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온조왕 시조설이 모순됨을 지적하고 폐기했어야 하는데 이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의 조선 강점 후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온조왕시조설에 의거하여 부아악은 북한산 인수봉이라는 기존 학설을 따르면서도 위례성은 광주(廣州) 남한산 아래 춘궁리이며 475년에 웅진으로 천도할 때까지 위례성이 백제의 도읍이었다고 주장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옛 문헌은 위례성에 도읍한 기간이 13년이라 했는데 이를 무려 493년으로 늘린 것이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학설은 옛 문헌의 기록들을 아무 근거 없이 도외시한 반역사학적 주장이다.
광복 후 한국의 역사학계는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주장을 추종했다. 이병도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위례성 광주설을 추종하다가 뒤늦게 오류를 깨닫고 1976년에 한양 북쪽 세검정(洗劍亭) 일대를 첫번째 도읍 위례성으로 지목하고 광주군 춘궁리(春宮里)는 두번째 도읍 한성이라고 주장했다. 정약용의 주장과 유사하다.
1984년부터 서울 잠실에서 몽촌토성(夢村土城)이 발굴되어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자 고고학계는 이 곳을 백제의 첫번째 도읍 위례성으로 추정했다. 정약용과 이병도의 학설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다가 1997년부터 풍납토성(風納土城)이 발굴되어 더 많은 유물이 나오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혹자는 규모가 더 큰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 했고 혹자는 두 곳을 합친 것이 위례성이라 했으며 혹자는 하나가 위례성이고 다른 하나는 한성이라고 했다. 역사학계가 장막 뒤에 감추었던 한성을 고고학계가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고고학계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합친 것이 위례성이고 위례성의 다른 이름이 한성이며,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백제의 도읍이었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역사학계와 타협하였다. 이렇듯 위례성과 한성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채 2012년 몽촌토성 입구에 한성백제박물관이 들어섰고, 이 무렵 남한산 서쪽에 조성된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위례신도시라고 이름지었다. 지금 몽촌토성 입구 지하철역 이름은 한성백제역이고 그 앞을 지나가는 2.7 km의 10차선 도로는 위례성대로(慰禮城大路)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면적이 몽촌토성은 14만 6천 평이고 풍납토성은 12만 평이다. 한양성이 5백만 평이고 경복궁이 13만 평이니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도성으로 보기에 무척 협소하다. 지금은 풍납토성이 한강에 붙어 있고 몽촌토성은 한강에서 1 km쯤 떨어져 있지만 1970년대에 잠실이 개발되기 전에는 몽촌토성도 한강 바로 옆이었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일대는 한강과 성내천(城內川)의 범람에 매우 취약해서 20세기 말에도 상습 침수지대였으니 도성을 세우기에 부적합한 곳이다. 대량의 고대 유물이 출토된 것도 하천 범람으로 인해 양쪽 토성 모두 토사(土沙)에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거의 모두 토기류와 기왓장이고 장신구는 금(金) 귀걸이 한 쌍뿐이다. 이곳이 위례성이나 한성임을 명확하게 입증하는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오백 년 왕성(王城) 터라면 이럴 수는 없다.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O 신공(神功) 52년 (252년)에 백제 초고왕(肖古王)이 칠지도(七支刀)를 헌상했다
O 응신(應神) 14년 (283년)에 백제왕이 봉의공녀(縫衣工女) 진모진(眞毛津)을 왜국에 보내 옷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필자 주 : 당시 왜인들은 제대로 된 의상을 만들줄 몰라 천을 두르거나 천 중앙에 구멍을 내어 머리를 내놓는 판초를 겉쳤다.)
O 응신(應神) 15년 (284년)에 백제왕의 명으로 아직기(阿直岐)가 암수 한 쌍의 말(馬)을 왜국에 가지고 가서 사육하였고 왜인들에게 기마(騎馬)를 가르쳤다.
O 응신(應神) 16년 (285년)에 백제왕이 왕인(王仁)을 왜국에 보내 왜인들에게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가르쳤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은 사실 관계에 오류가 많아 현대 일본의 사학계는 120년을 늦춰 372년에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주장하는데 역사적 상황에 배치되고 이치에도 어긋나 타당성이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 ~ 405)은 397년에 전지태자(腆支太子)를 왜국(倭國)에 파견했다. 근자에 한국인 역사학자 홍성화는 아신왕(阿莘王)의 뒤를 이은 전지왕(腆支王, 재위 405년 ~ 420년)이 408년에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倭王)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했는데 필자는 이 견해를 지지한다.
칠지도(七支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와 칠지도를 보건데 한성시대(漢城時代, 371 ~ 475)의 백제는 고도의 문명국이었다. 371년에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하였다. 이 시기 백제의 도읍이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라는 주류학계의 주장이 맞다면 이곳에서 백성들이 사용한 토기류만 출토되겠는가? 왕과 귀족이 사용한 물품도 출토되어야 한다. 한성시대(漢城時代)를 이은 웅진시대(熊津時代, 475 ~ 538)와 사비시대(泗沘時代, 538 ~ 660)의 유물은 휘황찬란하다. 아래와 같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위례성이자 한성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모든 역사서는 위례성과 한성을 명확히 구분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漢城府)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인데 백제 온조왕이 빼앗아 성을 쌓았고 근초고왕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0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때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피살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 경덕왕 때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초에 양주(楊州)로 고치고 문종(文宗) 때에 남경(南京)이라 하고 충렬왕 때에 한양부(漢陽府)라 고치고 우리 태조 3년(1394년)에 도읍을 이곳에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고적] 남평양성이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년)에 성과 궁궐을 세워 도읍을 옮겼으며 진사왕(辰斯王) 7년에 궁실을 중수하고 개로왕(蓋鹵王)이 궁실을 크게 세워 웅장하고 수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조선왕조의 한성부는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인데 온조왕이 빼앗았다고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온조왕(재위 기원전 18년 ~ 서기 28년) 때에 고구려의 영토는 청천강 이북이었고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낙랑(樂浪)이 존재했다.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의하면 근초고왕이 371년에 새로운 도읍으로 삼은 한성과 475년에 장수왕이 함락시킨 한성은 같은 곳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742 ~ 765) 16년(757년)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초에 양주(楊州)라 했고 고려 문종(文宗, 재위 1046 ~ 1083) 21년(1067년)에 남경(南京)으로 삼았고 고려말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298) 34년(1308년)에 한양부(漢陽府)로 고쳤으며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도읍으로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삼국유사 이후 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온조왕시조설이 정설로 통해왔으나 온조왕시조설은 삼국사기의 후속 기록과 충돌하므로 낭설로 보아야 한다.
◇ 삼국사기 제23권
溫祚王 十三年 春二月 王母薨 年六十一歲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봄 2월,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이 61세였다.
온조의 생모는 기원전 6년에 세는 나이 61세로 사망했으니 기원전 66년에 출생하였고 기원전 37년, 세는 나이 30세에 주몽과 결혼하였다. 주몽은 22세였다. 온조왕시조설에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는 졸본부여(卒本扶餘) 왕의 둘째 딸이라고 했다. 왕녀의 신분으로 30세에 결혼했다는 것은 당시의 풍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만으로도 온조왕시조설은 신뢰할 수 없다. 또 주몽 이후 고구려 왕가(王家)는 고(高)를 성씨로 삼았는데 온조 이후 백제 왕가(王家)는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이것은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온조왕시조설이 답변하지 못하는 이러한 의문을 명쾌하게 해명하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는 비류왕시조설이다. 다음과 같다.
◇ 삼국사기 제23권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년에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勤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일설에는 시조가 비류왕(沸流王)이라고 한다. 그 아버지 우태(優台)는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陁勃)의 딸이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가 온조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한(漢)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달아나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했다. 소서노와 결혼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나라를 세우고 기틀을 잡는 데에 소서노의 내조가 많았기에 주몽이 그녀를 특별히 총애하였고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와의 사이에 낳은 유류(孺留)가 오자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도망왔을 때, 어머니는 집안의 전 재산을 기울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큰 힘을 쏟았다. 대왕이 돌아가시고 나라는 유류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 남아 우울하게 지내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느니만 못하다.”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 주몽은 기원전 58년에 출생해서 22세이던 기원전 37년 2월에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로 갔다. 그 때 부인 예씨(禮氏)가 유리를 임신하고 있었으니 유리(瑠璃)는 기원전 37년에 출생했다. 소서노는 기원전 66년생이고 30세이던 기원전 37년에 22세인 주몽과 결혼했다. 주몽은 그야말로 적수공권(赤手空拳)인데 소서노는 큰 부자여서 주몽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했다.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주몽이 40세, 소서노가 48세인 기원전 19년 4월에 주몽의 첫부인 예씨(禮氏)가 19세 아들 유류(孺留)와 함께 부여에서 도망쳐 주몽을 찾아왔다. 주몽이 유류를 태자로 삼았으니 예씨(禮氏)를 왕비로 인정한 셈이다. 소서노의 나이로 미루어 비류가 유류보다 10세 정도 많아서 이 때 30세에 가까웠으니 이미 태자로 책봉되어 있었을 터인데 태자를 비류에서 유류로 바꾼 것이다. 그 해 9월에 주몽이 죽고 유류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는 통상적으로 내전이 벌어지기 마련인데 소서노와 두 아들은 그 해 겨울을 보내고 다음해(기원전 18년) 이른 봄에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졸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서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자리 잡았다. 아래는 삼국사기 제23권 온조왕본기다. 온조 일행이 기원전 18년 이른 봄에 졸본에서 떠난 것을 알 수 있다.
◇ 溫祚王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온조왕 원년(기원전 18년) 여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여기에 나오는 동명왕은 주몽이 아니라 위략 등 중국 사서에 부여국의 시조로 기록된 동명(東明)을 가리킨다. 백제는 성왕(聖王) 16년(538년)에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고쳤는데 이는 백제의 뿌리가 북부여(北扶餘)이고 부여국의 시조는 동명(東明)이라고 믿었다는 반증이다. 온조는 주몽의 친아들이 아닌 것이다.
백제가 낙랑과 접경한 것을 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다.
◇ 溫祚王 四年,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온조왕 4년(기원전 15년)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마한의 북부 땅 미추홀에 위례성을 세운 것이 다음 기록에 나온다.
◇ 溫祚王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온조왕 8년 (기원전 11년) 봄 2월, 말갈병(靺鞨兵)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말갈은 식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현(大斧峴)까지 추격하여 단번에 이기고, 오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 溫祚王 八年,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온조왕 8년(기원전 11년)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신을 보내 이르기를 “지난 날 서로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기고 있는 터에, 지금 우리의 강역에 다가와 성과 목책을 세우니, 혹시 우리 땅을 잠식하려는 계획인가? 만약 예전의 우호관계를 변치 않으려면, 성을 허물고 목책을 제거하라. 그래야 의심이 없어진다. 혹시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면 한번 싸워 승부를 결정하자.” 왕이 이에 대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다. 어찌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이는 의당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내보낸다면 우리 또한 기다릴 것이다.” 이리하여 낙랑과 우호관계가 사라졌다.
◇ 溫祚王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온조왕 11년(기원전 8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해서 점령하고 백여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가을 7월, 독산책과 구천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 溫祚王 十三年 春二月 王母薨 年六十一歲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봄 2월,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이 61세였다.
※ 이 기록으로 보아 소서노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66년이다. 비류와 온조가 졸본부여를 떠날 때 어머니도 함께 떠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비류왕시조설에 부합한다. 온조왕은 소서노의 장례를 치른 뒤 도읍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 溫祚王 十三年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况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더구나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 순행하면서 한수(漢水) 남쪽을 바라보았더니 토양이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오래도록 편안할 계책을 도모함이 마땅하다.”
※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한 것은 낙랑과 말갈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중국 사서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 낙랑군(樂浪郡)은 북쪽으로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고 남쪽으로 마한(馬韓)과 경계를 접했다고 했다. 온조가 마한의 북부에 자리잡았으니 백제의 북쪽은 낙랑이다.
소서노와 비류와 온조는 미추홀에 자리 잡고 위례성을 세워 도읍으로 삼았는데 북쪽에 있는 낙랑이 거듭 침입했다. 낙랑의 위협 때문에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미추홀과 위례성이 한수 북쪽에 있다는 뜻이다. 온조왕이 "어제 나가 순행하며 한수 남쪽을 바라보았다."라고 말한 것은 한수 북쪽에서 한수 남쪽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문맥상 온조왕은 그 날 한수를 건너가지 않았다. 설령 강을 건너 갔다고 해도 천천히 돌아 다니며 살펴보다가 당일에 다녀왔다는 뜻이니 온조왕이 살펴본 곳은 위례성에서 백 리를 넘지 않는다.
◇ 溫祚王 十三年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가을 7월,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울타리를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세 모자가 건넜던 패수(浿水)가 마한의 북쪽 경계인 것을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다.
◇ 溫祚王 十三年 秋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가을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고 알렸다. 마침내 나라의 강역을 획정하였다. 북으로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에 성과 궁궐을 세웠다.
웅천(熊川) 또는 웅진(熊津)은 통상 지금의 공주(公州)로 알려져 있으나 이 대목의 웅천(熊川)은 공주(公州)로 보기 어렵다. 일본인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와 그의 제자 이병도는 이 대목의 패하를 예성강으로, 웅천을 안성천(安城川)으로 보는데 필자는 패하를 대동강의 남쪽 지류 남강(南江)으로, 웅천을 임진강으로 본다. 조선시대에 패하(浿河)나 패수(浿水)는 대동강으로 인식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京都) : 서경(西京)은 지대가 가장 평탄하고 넓어서 그 지세에 따라 평양(平壤)이라 하였다. 부벽루(浮碧樓)는 아래로 도도히 흐르는 패수(浿水)를 굽어본다. 대동강이 바로 옛날 패수(浿水)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평양부 : 패수(浿水)는 셋인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한(漢)과 조선의 경계라고 한 패수는 압록강이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낙랑군이고 남쪽이 패수에 연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대동강이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북쪽으로 패하(浿河)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세 곳 패수 중에 누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동강뿐이다.
◇ 삼국사기
溫祚王 十四年 春正月 遷都 秋七月 築城漢江西北分漢城民.
온조왕 14년 (기원전 5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가을 7월, 한강(漢江)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 백성을 나누었다.
溫祚王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온조왕 17년 (기원전 2년) 봄, 낙랑이 침입해서 위례성을 불 태웠다.
※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천도한지 3년 후의 사건이다. 지금의 한강이 낙랑과 백제의 국경이고 위례성이 직산이고 한산이 광주(廣州)라면 낙랑이 광주(廣州)에서 이백 리 남쪽인 직산을 공격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기사는 위례성이 한수 이북이고 한산은 한수 남쪽임을 말해준다.
온조왕 13년에 백제의 북쪽 국경이 패하(浿河)인 것은 마한의 북쪽 경계가 패하임을 말해준다. 패하 즉 대동강에서 남쪽으로 백리 안쪽에 위례성이 있고 위례성에서 남쪽으로 백리 안쪽에 한산이 있다. 따라서 한수(漢水)는 대동강에서 남쪽으로 이백 리를 넘지 않는다. 대동강 남쪽 이백 리에 서흥강(瑞興江)이 동서로 흐른다. 필자는 서흥강을 한수(漢水)로 본다. 대동강에서 오백 리 남쪽인 한강은 한수가 아니다.
서흥호는 1961년, 은파호는 1977년에 완공한 인공호수이다.
온조 일행이 마한(馬韓)에 들어왔을 때 마한왕은 마한(馬韓)의 북쪽 일백 리 땅을 내주었고 이곳이 미추홀이다.
◇ 溫祚王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 遂壞其柵
온조왕 24년(서기 6년) 가을 7월, 왕이 웅천(熊川)에 목책을 세웠다. 마한왕(馬韓王)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이르기를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 일백 리의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그러니 내가 왕을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이다. 의당 이에 보답할 생각을 가져야 하건만 지금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드니까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의 강토를 침범하니 이를 어찌 의롭다고 하겠는가?" 온조왕이 부끄러워 하며 목책을 허물었다.
※ 고구려에도 한성(漢城)이 있었다. 당(唐)나라 태종 때 636년에 편찬한 주서(周書)와 수서(隋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
高句麗 治平壤城。其城,東西六里,南臨浿水 , 其外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
고구려의 국도(國都)는 평양성으로 동서 6리(里)이며 남으로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 그 밖에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으니 다른 도읍(別都)이다.
◇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高句麗 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復有國內城、漢城,並其都會之所 其國中呼為三京
고구려의 국도(國都)는 평양성인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동서 6리이며 산을 따라 구불구불하고 남쪽은 패수에 면해 있다. 또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모두 도읍으로서 그 나라에서는 삼경(三京)이라 일컫는다.
※ 오늘날 한국의 역사학계는 현재의 평양성을 장안성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수서(隋書)에 장안성은 산을 따라 구불구불한 형상이고 남으로 패수에 닿아 있다 했으니 대동강과 보통강 사이의 평지에 있는 현재의 평양성이 아니다. 장안성은 아래의 그림에서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둘러싸고 남으로 대동강에 면해 있는 자리이다. 552년에 양원왕(陽原王)이 대동강변에 장안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여 586년에 평원왕(平原王)이 도읍을 이전했고 보통강을 끼고 있는 현재의 평양성은 고려 태조가 922년에 착공하여 6년만에 완성했다.
◇ 삼국사기 제37권
한산주(漢山州) 한성군(漢城郡)을 한홀(漢忽), 식성(息城), 내홀(乃忽)이라고도 한다.
漢山州 漢城郡 一云漢忽, 一云息城, 一云乃忽
◇ 삼국사기 제6권
신라 문무왕(文武王) 8년(668년) 6월 22일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 한성(漢城) 등 2군(郡) 12성(城)이 항복하였다. 668년 9월 21일 신라가 당(唐) 나라와 연합해서 평양을 포위하였고 년말에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670년 고구려 사람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이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패강(浿江) 남쪽에서 당(唐) 나라 관리들을 죽였다. 검모잠은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가는 도중 안승(安勝)을 찾아 고구려 임금으로 추대하고 한성(漢城)을 거점으로 고구려 부흥을 추진했다.
553년 이후 신라가 경기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668년에 항복한 고구려의 한성과 670년에 검모잠(劍牟岑)이 점령한 한성은 같은 곳이며 황해도에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42권
황해도 재령군(載寧郡)은 본래 고구려의 식성군(息城郡)이다. 한성군(漢城郡)이라고도 하고 내홀(乃忽), 또는 한홀(漢忽)이라고도 한다.
황해도 재령군 장수산(長水山) 남쪽 하성면(下聖面) 아양리(峨洋里)와 월당리(月堂里) 일대에는 1천여 기(基)의 석실 고분이 밀집해 있다. 1980년대에 북한에서 이 지역의 발굴에 착수하여 대규모 도시 유적과 궁궐 및 다수의 왕릉급 고분이 발굴되었다. 도시의 규모가 동서 5km, 남북 4km라고 하니 한양성과 같은 규모이다. 영가 칠년(永嘉 七年)이라고 새겨진 벽돌이 발굴되었는데 영가(永嘉)는 중국 서진(西晉)의 마지막 황제 회제(懷帝, 재위 307 ~ 313)의 연호로서 영가 7년은 서기 313년이다.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아양리와 월당리는 현재 신원군(新院郡)에 속한다. 북한 고고학연구소는 아양리가 고구려의 한성이자 남평양이라고 발표했으나 고구려가 언제 이 지역을 차지하여 한성을 건설했다고 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남한의 주류학계는 고구려가 313년에 평양의 낙랑군을 멸하고 314년에 황해도의 대방군을 멸하여 임진강에서 백제와 접경했다고 주장하는데 필자는 이를 낭설로 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근초고왕 26년(371년)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살해했으며 그 해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북한성이라 불렀다. 그 후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했다. 371년부터 475년까지 백제의 도읍은 동일한 곳인데 북한의 발표에 의하면 황해도 재령군 장수산(長水山) 남쪽 하성면(下聖面) 아양리(峨洋里)와 월당리(月堂里) 일대라는 것이다.
필자는 기원전 5년에 온조왕이 봉산군 위례성에서 장수산(長水山) 아래 아양리(峨洋里)로 천도했으며 371년부터 475년까지 백제의 도읍은 한강변 한양성이라고 본다. 주서(周書)에 기록된 고구려의 다른 도읍(別都) 한성(漢城), 수서(隋書)에 기록된 고구려의 삼경(三京) 한성(漢城),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한성(漢城), 온조왕이 한수 남쪽에 건설한 두번째 도읍 한성(漢城)은 같은 곳으로서 황해도 재령군 아양리(峨洋里)다. 아양리(峨洋里) 발굴의 전모를 알지 못하지만 고구려가 한성을 도읍으로 삼은 적이 없으니 필자의 소견이 맞을 것이다.
위례성과 한성 - 이광헌 설
백제가 황해도에서 일어섰다는 것을 말해 주는 기록이 있다.
◇ 삼국사기 제23권 :
溫祚王 四十三年 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 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온조왕 43년 (서기 25년) 10월에 남옥저에서 구파해 등 20여 가구가 부양(斧壤)에 와서 귀순했다.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하도록 했다. [온조왕본기]
※ 북옥저(北沃沮)는 함경북도 해안이고 남옥저(南沃沮)는 함경남도 해안이다. 옛날 대가족제에서는 한 가구가 수십 명이니 20여 가구는 약 1천 명이다. 남옥저 사람 1천 명이 백제 영토인 부양(斧壤)에 온 것은 부양(斧壤)이 남옥저와의 접경 지역임을 말한다. 사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삼국사기 제35권 :
富平郡, 本高句麗夫如郡 景德王改名, 今金化縣. 領縣一 廣平縣, 本高句麗斧壤縣 景德王改名, 今平康縣.
부평군은 본래 고구려 부여군(夫如郡)인데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의 금화현이다. 거느리는 현은 하나다. 광평현은 본래 고구려의 부양현(斧壤縣)인데 경덕왕 때 개명했고 지금(고려)의 평강현(平康縣)이다.
◇ 삼국사기 제37권 :
夫如郡 於斯內縣 一云 斧壤.
부여군 어사내현(於斯內縣)을 부양현(斧壤縣)이라고도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7권 :
강원도 평강현(平康縣)은 본래 고구려의 부양현(斧壤縣)이며 어사내(於斯內)라고도 한다. 신라 때 광평(廣平)으로 고치고 고려 현종 9년(서기 1018)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조선시대의 강원도 평강군(平康郡)이 온조왕대의 부양(斧壤)이고 훗날 고구려가 차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에 의하여 강원도 평강군과 접해있는 함경남도 안변군(安邊郡)이 남옥저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주류학계는 안변이 동예에 속했다고 주장하지만 온조왕 43년 (서기 25년)에 안변은 남옥저에 속해 있었다. 오늘날 안변과 평강을 잇는 고개가 추가령(楸哥嶺)이다. 남옥저 사람들이 추가령을 넘어와 백제로 귀순한 것이다.
※ 2천년 전의 부양(斧壤)이 지금의 평강(平康)이며 온조왕 43년에 백제 영토였다. 필자는 백제가 부양(斧壤)을 차지한 시기를 다음 기록에 의거해서 온조왕 8년으로 본다.
◇ 삼국사기 제 23권
溫祚王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온조왕 8년 (기원전 11) 봄 2월, 말갈병(靺鞨兵)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말갈은 식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현(大斧峴)까지 추격하여 단번에 이기고, 오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날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어디였는가? 고구려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서기 290년경 중국 서진(西晉, 265 ~ 316) 왕조에서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이다. 다음과 같다.
◇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戶八萬 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爲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 漢時賜鼓吹技人,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高句麗令主其名籍。後稍驕恣,不復詣郡,於東界築小城,置朝服衣幘其中,歲時來取之,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溝漊者,句麗名城也 . [三國志魏書東夷傳]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 조선과 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한다. 환도성에 도읍하며 사방 이천리이고 3만 호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늪이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서 비록 힘써 밭을 경작해도 식량이 부족하다. 한(漢)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재주꾼(악공)을 하사했으며 (고구려는) 항상 현도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옷과 모자)을 받았다. 고구려현 현령이 그 명부를 기록했다. 후에 점차 교만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현도군이)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짓고 조복과 옷과 모자를 그 곳에 두었고 (고구려인이) 새해 첫날에 와서 가져 갔다. 지금도 호(胡)는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라 부르는데 구루(溝漊)는 구려에서 성(城)을 이르는 말이다.
◇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時, 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領>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 <漢>建武 六年, 省邊郡, 都尉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其土地肥美, 背山向海, < 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 <北沃沮>畏之, 夏月 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 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王 > 別遣追討宮, 盡其東界.[三國志魏書東夷傳]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닷가에 거주한다. 그 지형이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 천리는 된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 남쪽으로 예맥과 접한다. 가구는 5천이다. 대군왕은 없고, 읍락마다 장수(長帥)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대동소이하다. 한(漢)나라 초에 연(燕)에서 도망해온 위만이 조선왕으로 있을 때 옥저가 복속했다. 한(漢) 무제 원봉 2년(BC 109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사군을 만들었는데 옥저성(沃沮城)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후에 이맥(夷貊)이 침략하기에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다. 지금 이른바 현도군의 옛 고을이 이것이다. 옥저는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는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는 토지가 넓고 멀어서 '동부도위'를 따로 설치하고 '불내성'을 치소로 하여 단단대령 동쪽 7현을 다스렸다. 이 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漢) 광무제 건무 6년(서기 30년)에 변방의 군(郡)을 없애고 도위를 폐지했다. 그 후 현의 거수들을 모두 현후로 삼았고 불내, 화려, 옥저 제현은 모두 후국이 되었다. 동옥저는 나라가 작아 큰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구려'에 복속 되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관구검이 구려를 칠 때, 구려왕 궁(동천왕)이 옥저로 달아나니 진격하여 격파했다. 옥저의 읍락이 모두 깨지고,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자가 삼천이었다. '궁'은 북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라 하고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고 읍루와 접한다. 읍루는 배를 타고 노략질하기를 즐겨해서 북옥저가 두려워 하여 여름에는 산속 깊은 동굴 속에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얼어서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 거주한다. 궁을 추격하여 토벌하라고 왕기(王頎)를 따로 보내 (북옥저의) 동쪽 경계에 이르렀다.
◇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 ,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예(濊)는 남쪽으로 진한,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며 동으로 큰 바다에 달한다. 지금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단단대산령의 서쪽은 낙랑군에 속한다.
◇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凡五十餘國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한(韓)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하며 남쪽은 왜와 접한다. 사방 사천리이다.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고, 셋은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다. 오십여 나라이다. 또한 주호가 있는데,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 후한서 동이열전 삼한(三韓)
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馬韓之西,海島上有州胡國。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국이며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국이며 북으로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역시 12국이며 남으로 왜와 접한다. 마한의 서쪽 바다 섬에 주호국이 있다.
개마대산은 백두산이고 단단대령은 백두대간이다. 동옥저는 함경도 동해안이며 북옥저와 남옥저로 구분된다. 남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했는데 개마고원 방면의 이맥이 침입하는 까닭에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현도군의 고구려현령이 고구려와의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낙랑군은 옥저의 서쪽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옥저는 남옥저를 가리키며 낙랑군의 위치는 평안도를 말한다. 또 예(濊)는 강원도 동해안이고 그 서쪽은 낙랑군이라고 했으니 황해도와 경기도 및 강원도 영서지방은 낙랑군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삼한의 영역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인데 마한이 서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고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다고 했다. 마한은 충청도와 전라도, 진한은 경상북도, 변진은 경상남도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한과 변진은 남쪽에서 왜와 접한다고 했다. 주호국은 제주도다.
고려에서 1145년에 편찬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東明聖王 六年, 冬十月, 王命烏伊扶芬奴, 伐大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
동명성왕(BC37~BC19) 6년(BC 32년) 겨울 10월,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대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을 정벌하고 그 땅을 차지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 東明聖王 十年, 冬十一月, 王命扶尉猒, 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동명성왕 10년 (BC 28년)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 大武神王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禁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 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대무신왕 9년(서기 26년) 겨울 10월,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약탈을 금하고 그 지역을 군현으로 만들었다. 12월, 구다국 왕은 개마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영토가 점점 넓어졌다.
◇ 大武神王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太守將兵來伐. 入尉那巖城, 固守數旬, 漢兵圍不解.... 遂引退. .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 가을 7월, 한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왕이 위나암성에 들어가서 수십일 동안 굳게 수비하였으나 한 나라 군사는 포위를 풀지 않았다. (요동태수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 위나암성(尉那巖城)은 국내성의 다른 이름이다. 유리명왕 22년(서기 3년) 졸본성에서 옮겨왔다. 대백산(大白山)은 지금의 백두산이다. 백두산 동남쪽에 행인국이 있고 그 동쪽 해안에 북옥저가 있다. 백두산 남쪽이고 동옥저의 서쪽인 개마고원에 개마국과 구다국이 있다. 위의 기록으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졸본부여의 위치는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중상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건국 시기를 BC 37년이라고 했으나 삼국지는 한무제가 조선을 멸한 BC 108년 이전에 고구려가 조선의 북쪽에 존재했고 조선이 멸망한 후에도 존속했다고 기술했다. 한무제는 조선 땅에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을 설치했다. 삼국지는 현도군을 옥저 땅에 설치했다가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이전했다고 기록했는데 학계에서는 그 때를 기원전 75년으로 본다. 낙랑군은 옥저의 서쪽이라고 했는데 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해안이니 낙랑군의 위치는 대동강 유역이다.
삼국지위서동이전의 형세는 위의 지도와 같다. 낙랑군과 마한의 경계는 지금의 안성천 근방인데 조선시대에는 삼한의 영역을 삼국지위서동이전과 매우 다르게 인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
평안도는 본래 고조선의 땅이다. ... 평양부는 본래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에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檀君)이라 일컬었으니 이것이 전(前)조선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여기에 봉하니 이것이 후(後)조선이다. 전하여 41대 손 준(准)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漢) 나라의 명을 받들지 않으므로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 토벌하여 사군을 설치하고 왕험성으로 낙랑군을 삼았다.
여지승람은 평안도를 낙랑군, 평양을 왕험성, 함경도 동해안 남부를 현도군, 강원도 동해안을 임둔군이라 했고 진번군은 압록강 바깥으로 보아서 따로 기술하지 않았다.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는 마한 (本古朝鮮馬韓之域), 전라도는 변한(弁韓), 경상도는 진한(辰韓), 강원도는 예맥(濊貊)이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역사인식에서 고구려와 현도군의 영역은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일치하고 평양을 왕험성이라 한 것은 구당서(舊唐書)와 일치한다. 나머지는 중국의 사서들과 차이가 커서 무엇을 근거로 삼았는지 알 수 없다. 후한서 부여전과 고구려전에는 낙랑군을 요서 지역이라 했고 한서에는 낙랑군이 요동에 있다고 해서 지금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삼국사기 온조왕본기에 위례성은 마한의 북부라 했고 여지승람에는 황해도가 마한의 땅이라 했다. 그렇다면 위례성의 위치는 대동강에서 가까운 황해도 북부라야 한다. 온조 일행이 대동강을 건너 마한 땅에 들어와서도 오백리를 내려가 한강 주변에 자리잡았다는 주장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르고 인간사의 상식에도 어긋난다. 이에 이병도는 황해도 및 북부 경기도를 진번군이라 하여 마한의 북쪽 경계를 대동강에서 한강으로 끌어내렸다.
한사군 - 이병도 설(1956)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왕험성에 설치되었고 진번군은 진번국에 설치되었다. 사기 조선열전과 삼국지 동이열전에 의하면 진번국은 왕험성의 서쪽이다. 진번국과 진번군이 왕험성의 남쪽이라는 기록은 어떤 사서에도 없다. 임둔군과 현도군의 위치에 대한 이병도의 주장도 삼국지와 후한서 등 사서의 기록과 전혀 다르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이병도의 주장에서 다소나마 사서에 근거가 있는 것은 낙랑군뿐이다. 이병도의 제자들은 진번군의 남쪽 경계를 임진강으로 수정하였다.
한사군 - 주류설
온조 남하시 형세 - 주류설
지금까지 사학계에서는 진수(陳壽)의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의거하여 마한을 54개의 소국(小國)이 할거하고 있는 지리적 호칭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마한이 북으로는 패하 즉 대동강에서 남으로는 탕정(湯井)과 아산(牙山)까지 지배한 왕국이라 한다. 마한의 도읍은 사서에 기록이 없는데 필자는 한양성(漢陽城)일 것으로 본다.
백제 건국 직전 형세 - 이광헌 설
온조왕의 마한 정복 과정에서 마한의 영역이 드러난다.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지 12년 후 백제는 마한을 침공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온조왕 26년 (서기 8년) 가을 7월, 왕이 말했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마음이 갈라졌으니, 그 세력이 오래 갈 수 없다. 만약 다른 나라가 이들을 합병하면 순망치한인즉 후회해도 소용없다. 남보다 먼저 빼앗아 후환을 없애니만 못하다." 겨울 10월, 왕이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마한을 기습하였다. 마침내 마한의 도읍을 병합했으나 오직 원산성과 금현성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溫祚王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又久, 儻爲他所幷, 則唇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온조왕 27년 (서기 9년) 여름 4월, 두 성이 항복하였고 그 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
溫祚王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온조왕 34년 (서기 16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신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까지 주살하였다.
溫祚王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온조왕 36년 (서기 18년) 가을 7월,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8월, 원산·금현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溫祚王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 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 삼국사기 제36권
탕정군은 본래 백제의 군(郡)이었는데 문무왕 11년 당(唐) 함형 2년에 주(州)로 만들어 총관을 두었고 함형 12년에 주를 폐하고 군으로 만들었으며 경덕왕이 그 명칭대로 두었다. 지금의 온수군이다. 다스리는 현은 둘이다. 음봉현은 음잠현이라고도 하며 본래 백제의 아술현이었는데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의 아주이다. 기량현은 본래 백제의 굴직현이었는데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의 신창현이다.
湯井郡, 本百濟郡, 文武王十一年, 唐咸亨二年, 爲州寘摠管. 咸亨十二年, 廢州爲郡, 景德王因之, 今溫水郡. 領縣二 陰峯一云陰岑縣 本百濟牙述縣, 景德王改名, 今牙州; 祁梁縣 本百濟屈直縣, 景德王改名, 今新昌縣.
※ 탕정군은 백제 시대부터 있었다. 탕정군의 속현이던 아술현을 신라 경덕왕이 탕정군 음봉현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온수군 아주(牙州)로 고치고 조선에서 아산군(牙山郡)이라 했다. 백제의 탕정군 굴직현을 신라 경덕왕이 탕정군 기량현으로 고치고 고려 때 온수군 신창현으로 고치고 조선에서 온양군이라 했는데 탕정면이 온양군에 속했다.
탕정(湯井)은 끓는 물이 솟아오르는 온천을 말하며 천 년이 지난 지금도 탕정면에 인접해서 온양온천이 있다. 온조왕 27년(서기 9년)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고 온조왕 36년(서기 18년) 대두산성 인근에 탕정성(湯井城)을 쌓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명으로 탕정(湯井), 음봉(陰峯), 신창(新昌)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이곳이 마한왕국의 남쪽 변방이다. 백제의 탕정군은 직산현과 접해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도 직산은 위례성이 아니다.
옛 탕정군 - 조선 아산군, 온양군 - 현 아산시
온조왕 26년(서기 8년) 10월에 마한을 습격하여 도읍을 점령했으나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이 6개월 동안 저항하다 다음해 4월에 항복하면서 마한이 멸망했다. 이것은 두 성이 마한왕국의 남쪽 변방임을 말해 주는데 김부식은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금현성을 단양(丹陽)으로 비정하고 원산성은 중구난방인데 아마도 괴산(槐山)이 아닐까 싶다.
온조왕 13년에 패하(浿河)를 나라의 북쪽 경계로 삼고 웅천(熊川)을 남쪽 경계로 삼았다. 삼국사기 제37권에 문주왕이 웅천(熊川)으로 도읍을 옮겼다 (文周王 移都熊川)고 했는데 여기서 웅천(熊川)은 지금의 공주를 가리킨다. 온조왕 13년에 북으로 대동강에서 남으로 공주까지 백제의 영토였다면 마한의 영역은 공주 이남이어야 한다. 이것은 탕정과 아산이 마한의 남쪽 변경이라고 한 기록과 모순된다. 따라서 온조왕 13년 기사에 나오는 웅천은 지금의 공주가 아니다.
온조왕 13년에 백제와 마한의 세력은 비등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백제의 북쪽 국경은 대동강이니 백제와 마한의 세력이 비등해지는 지점은 임진강(臨津江)이다. 이래야 백제의 마한 정복 과정이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필자는 임진강을 웅천으로 본다.
BC 6년 ~ AD 8년 형세 - 이광헌 설
일본인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위례성을 광주 남한산으로, 패하(浿河)를 예성강으로, 웅천(熊川)을 안성천으로, 주양(走壤)을 춘천으로 보았다. 그리고 온조왕 13년 당시 마한의 영토는 안성천 이남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이라고 했다. 위례성은 광주 남한산이라는 주장이 낭설임을 필자가 앞에서 밝힌 바 있고 안성천이 웅천(熊川)이라는 주장은 온조왕의 마한 정복 과정과 어긋나므로 성립될 수 없다. 예성강이 패하(浿河)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낭설이다.
◇온조왕 36년 (서기 18)에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溫祚王 三十六年, 築古沙夫里城.
삼국사기 37권에 따르면 신라가 옛 백제 땅에 설치한 완산주(完山州) 관내에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이 있다. 완산주는 대체로 지금의 전라북도를 관할했다. 내장산(內藏山) 인근 정읍시 고부리(古阜里)에서 발굴된 고성(古城)이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으로 알려져 있다. 온조왕 때 백제의 영토는 북으로 대동강에서 남으로 내장산(內藏山)에 이르렀다.
◇온조왕 38년 (서기 20년) 봄 2월, 왕이 순무하여 동으로 주양, 북으로 패하까지 갔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溫祚王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온조왕 43년 (서기 25년) 가을 8월, 왕이 아산(牙山)의 들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溫祚王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온조왕 46년 (서기 28년) 봄 2월, 왕이 돌아가셨다
溫祚王 .四十六年, 春二月, 王薨.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황해도 지도
위의 지도는 정조(1776~1800) 때 제작되었는데 재령군 북쪽이 바다로 되어 있다. 이보다 150년전 인조(1623~1649) 때 재령만 간척공사를 시작했다. 지질학에 의하면 광활한 재령평야는 원래 바다였는데 조선시대에 해저융기와 주변 하천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습지로 변했다고 한다. 한반도 서해안은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가 세계적으로 심한 지역이라 재령만은 만조시에는 바다였다가 간조시에는 갯벌로 변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봉산군(鳳山郡)의 서쪽은 바다이고 남쪽으로 재령군(載寧郡)에 접하며, 황주군(黃州郡)도 서쪽이 바다이고, 안악군(安岳郡)은 동쪽이 바다라고 했다. 필자는 위례성을 봉산군으로 본다.
봉산군 위례성 - 이광헌 설
신천군(信川郡)은 바다에 면해 있다고 명시하지 않았으나, 누교천(樓橋川)과 부정천(婦貞川)이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고을 북쪽에 있는 우산포(牛山浦)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여기서 말한 하천은 지금의 서강(西江)이며 재령강으로 들어간다. 현재 신천군의 동북쪽에 있는 우산리(牛山里)가 바다에 면한 포구(浦口)였던 것이다.
신천군에는 본래 바다였던 큰 호수(海跡湖)가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오백년 전 호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더운 물이 솟아올라 겨울에도 호수가 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곳이 온천면 온천리로 신천읍에서 동쪽으로 4 km 떨어져 있다. 신천온천은 염기성(鹽氣性) 온천으로 이곳이 바다였음을 말해 준다. 이것으로 신천군의 동부인 온천면이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재령군이 바다에 면했다는 명시적인 기록은 없고 북쪽은 봉산군이라고 했다. 그러나 기탄(岐灘)까지 조수(潮水)가 드나든다고 해서 북쪽이 바다임을 말해준다. 기탄(岐灘)은 예전 관아(官衙)에서 북쪽으로 62里라고 했다. 재령군(載寧郡) 관아는 본래 장수산(長水山) 남쪽 5里에 있다가 중종(中宗) 14년(1519년)에 60리(里) 북쪽 검산(劍山)으로 이전했다. 지금의 재령읍 일신리(日新里)이다. 구 관아 소재지는 하성면(下聖面) 아양리(峨洋里)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은 봉산군이 재령군의 동쪽인데 여지승람에 재령군의 북쪽이라고 한 것은 재령군의 북반부가 당시에는 바다였기 때문이다.
일신리에서 동쪽으로 가면 삼강면(三江面) 상해리(上海里)가 나오는데 이름이 말해주듯이 상해(上海)는 옛날에 포구(浦口)였다. 일신리(日新里)가 재령군의 본래 관아에서 북으로 60 里이니 북으로 62 里인 기탄(岐灘)에 부합하는 곳은 바로 상해(上海)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들은 지금 재령군의 북률면(北栗面), 남률면(南栗面), 서호면(西湖面) 및 삼강면(三江面)과 재령읍의 일부 그리고 신천군(信川郡)의 노월면(盧月面), 가산면(加山面), 온천면(溫泉面)이 오백년 전에 바다였음을 말해 준다. 이 바다를 재령만(載寧彎)이라고 부른다. 2천년 전에는 재령만이 조선 초기보다 훨씬 더 넓었을 것이다.
백제는 온조왕대에 패하(浿河)에서 낙랑과 접경했고 훗날 패하(浿河)에서 고구려와 접경했다. 필자는 패하가 대동강이며 백제의 최대 판도는 다음과 같다고 본다.
369년 백제 영토 - 이광헌 설
삼국시대에 재령평야가 바다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삼국사기를 보자. 고구려 대무신왕은 서기 37년에 최씨 낙랑을 멸하고 살수(청천강)와 패하(대동강) 사이의 땅을 차지하여 패하에서 백제와 국경을 접하였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20년(246년)에 위(魏)나라 관구검의 침공으로 도읍 환도성이 함락되었다. 동천왕은 도주했다가 반격하여 관구검을 물리쳤으나 환도성이 폐허가 되어 247년에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342년 8월에 고국원왕은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11월에 연(燕) 나라왕 모용황이 침입하여 환도성이 함락되었다. 모용황은 곧 철수했으나 환도성이 폐허가 되어 고국원왕은 343년 7월에 다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서쪽으로의 영토확장이 저지된 고국원왕은 남쪽으로 눈을 돌려 백제를 공격했다. 아래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 369년 : 고국원왕 39년 가을 9월, 왕이 2만 병력으로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치양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고국원왕본기]
故國原王 三十九年, 秋九月,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續
◇369년 : 근초고왕(재위 346~375) 24년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斯由, 고국원왕, 재위 331~371)가 보병과 기병을 합쳐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백성을 침탈했다. 근초고왕이 태자(근구수)를 파견하니 군사를 이끌고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군을 급습해서 격파했다. 5천여 명을 죽이고 포로들을 장수와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근초고왕본기]
近肖古王 二十四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 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삼국사기는 온조왕 13년에 백제의 북쪽 경계가 패하(浿河)라고 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패하를 예성강(禮成江)이라 주장했고 이에 따라 역사학계는 치양(雉壤)을 지금의 배천군(白川郡)으로 추정하지만 사료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 설
예성강이 국경이면 치양은 고구려 영토인데 근초고왕본기에 기록된 치양(雉壤)은 문맥상 백제의 영토로 해석된다. 패하(浿河)가 예성강이라는 주장은 근거도 없을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모순된다. 또 온조왕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삼국사기 제23권 :
溫祚王 四十三年 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 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온조왕 43년 (서기 25년) 10월에 남옥저에서 구파해 등 20여 가구가 부양(斧壤)에 와서 귀순했다.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하도록 했다. [온조왕본기]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부양(斧壤)은 지금의 평강군으로 온조왕 때 이미 백제의 영토였는데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부양(斧壤)을 백제의 영토에서 제외시켰다. 그의 주장이 얼마나 어수룩한지 알만하다. 삼국사기의 후속 기록을 보아도 예성강은 패하가 아니다.
◇ 371년 : 고국원왕 41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3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공격했다. 왕이 출전하여 싸우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그 달 23일에 돌아가셨다. 고국원에 장사지냈다. [고국원왕본기]
故國原王 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帥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 薨. 葬于故國之原
◇ 371년 : 근초고왕 26년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백제에 침입하였다. 근초고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가에 매복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려 급습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에 백제 근초고왕은 태자와 더불어 정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항전하다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근초고)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근초고왕본기]
近肖古王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근초고왕이 고구려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패하 가에 매복해서 고구려군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패하가 두 나라의 국경임을 말해 준다. 패하는 대동강이다. 필자는 이 기사에 등장하는 평양성을 대성산성으로 본다.
백제는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위례성에서 한수 남쪽 한산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성(漢城)이라 했다. 근초고왕 26년(371년)에 다시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기고 새로운 도읍을 한성(漢城)이라 했다. 둘 다 한산 한성이라 해서 이곳이 어디인지 밝혀야 한다. 사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삼국사기 제37권 :
고전기(古典記)에 따르면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 3년 계묘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389년이 지나 13대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 105년을 지냈으며, 22대 문주왕에 이르러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26대 성왕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는데,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2년을 지냈다.
按古典記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高句麗南平壤, 都漢城,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 移都熊川,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年一百二十二.
◇ 삼국사기 제35권 :
한양군은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이다. 평양이라고도 한다. 진흥왕이 주(州)로 만들어 군주(軍主)를 두었고 경덕왕이 한양군으로 개명하였다. 지금의 양주(楊州) 옛터이다. 한양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황양현은 원래 고구려의 골의노현이고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의 풍양현이다. 우왕현은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이고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의 행주이다.
漢陽郡 本高句麗北漢山郡 一云平壤 眞興王爲州, 置軍主, 景德王改名, 今楊州舊墟. 領縣二: 荒壤縣, 本高句麗骨衣奴縣, 景德王改名, 今豐壤縣 遇王縣 本高句麗皆伯縣 景德王改名 今幸州.
◇ 삼국유사
근초고왕(近肖古王)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양주(楊州)다.
近肖古王, 咸安元年, 取高句麗南平壤, 移都北漢城今楊州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경기 광주목(廣州牧)
본래 백제의 남한산성이다. 시조 온조왕 13년에 (직산) 위례성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 26년(371년)에 다시 지금의 경도(京都)인 남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漢城府)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인데 백제 온조왕이 빼앗아 성을 쌓았고 근초고왕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371년) 105년을 지나(475년) 개로왕(蓋鹵王) 때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피살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 경덕왕 때(757년)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초에 양주(楊州)로 고치고 문종(文宗) 때에 남경(南京)이라 하고 충렬왕 때에 한양부(漢陽府)라 고치고 우리 태조 3년(1394년)에 도읍을 이곳에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고적] 남평양성이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년)에 성과 궁궐을 세워 도읍을 옮겼으며 진사왕(辰斯王) 7년에 궁실을 중수하고 개로왕(蓋鹵王)이 궁실을 크게 세워 웅장하고 수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여지승람에 온조왕이 고구려의 북한산군을 빼앗았다는 것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 아닌데 잘못 알고 기록한 것이다. 온조왕 시대(기원전 18 ~ 서기 28)에 백제의 북쪽 국경은 패하 즉 대동강이었고, 고구려의 영토는 청천강 이북이었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낙랑이 있었다. 여지승람은 온조왕 14년에 옮겨간 한산이 광주군 남한산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북한산군을 남평양이라고 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16년(757년)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초에 양주(楊州)라 했고 고려 문종 21년(1067년)에 남경(南京)이라 했고 고려말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298) 34년(1308년)에 한양부(漢陽府)로 고쳤고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한성부(漢城府)로 고치고 도읍으로 삼았다. 근초고왕이 371년에 천도한 한성은 북한산군으로서 조선왕조의 한성과 같은 곳이다.
◇ 373년 : 근초고왕 28년 가을 7월 청목령(靑木嶺)에 성을 쌓았다. [근초고왕본기]
近肖古王 二十八年,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 375년 : 근초고왕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백제의 북쪽 변방 수곡성(水谷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근초고왕이 장수를 보내 항거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어 이루지 못했다. [근초고왕본기]
近肖古王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수곡성은 황해도 동북부 신계현으로 이는 온조왕 이래 백제의 북쪽 국경이었던 패하가 대동강이라는 증거이다. 사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삼국사기 제35권 :
영풍군은 본래 고구려의 대곡군인데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의 평주이다. 두 개 군을 다스린다. 단계현은 본래 고구려의 수곡성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의 협계현이다. 진단현은 본래 고구려의 십곡성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의 곡주이다.
永豐郡, 本高句麗大谷郡, 景德王改名, 今平州. 領縣二: 檀溪縣, 本高句麗水谷城縣, 景德王改名, 今俠溪縣; 鎭湍縣, 本高句麗十谷城縣, 景德王改名, 今谷州.
◇ 고려사 : 곡주에는 신은현, 협계현, 수안현이 속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2권 :
신계현(新溪縣)은 본래 고려의 신은현(新恩縣)이다. 본조(本朝) 태조 5년에 협계현(俠溪縣)을 여기에 속하게 했으며 세종 27년에 두 고을 이름을 따서 신계현으로 고쳤다. 협계폐현(俠溪廢縣)이 고을 남쪽 30리에 있는데 본래 고구려의 수곡성현(水谷城縣)이며 매차홀(買且忽)이라고도 하였다.
※신계현은 예성강 상류인 황해도 동북부 지역으로 대동강 상류에서 남쪽으로 가깝다. 371년에 백제군이 패하에 매복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하였고 375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곡성을 점령한 것은 백제의 북쪽 국경인 패하가 대동강임을 말해준다.
백제 초기 형세 - 이광헌 설
◇ 376년 : 소수림왕 6년 겨울 11월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공했다. [소수림왕본기]
小獸林王 六年, 冬十一月, 侵百濟北鄙.
◇ 377년 : 근구수왕 3년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했다. 11월에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근구수왕본기]
近仇首王 三年,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十一月, 高句麗來侵.
◇ 377년 : 소수림왕 7년 겨울 10월, 백제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남쪽으로 백제를 쳤다. [소수림왕본기]
小獸林王 七年, 冬十月, 百濟將兵三萬, 來侵平壤城. 十一月, 南伐百濟.
◇ 386년 : 진사왕(辰斯王) 2년 봄 국내의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요새를 건설했다. 청목령으로부터 북쪽으로 팔곤성과 떨어져 있고 서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진사왕본기]
辰斯王 二年, 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한양과 평양 사이에서 위와 같은 지형에 부합하는 곳은 자비령(慈悲嶺) 뿐이다. 자비령에서 서쪽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가면 재령평야에 도달하는데 삼국시대에는 이곳이 재령만 바다였다. 온조왕 본기에 청목산이 등장한다. 필자는 청목산과 청목령은 같은 곳이며 지금의 자비령이라고 본다.
◇ 기원전 9년 : 온조왕 10년 가을 9월 왕이 사냥을 나가 신기한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 겨울 10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입했다. 왕이 병사 이백을 보내 곤미천에서 싸웠으나 아군이 패하고 청목산에 의지하여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일백기를 거느리고 봉현을 나가 구하니 적이 이를 보고 즉시 물러갔다. [온조왕본기]
溫祚王 十年, 秋九月, 王出獵, 獲神鹿, 以送馬韓. 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 救之. 賊見之卽退.
◇ 392년 : 진사왕(辰斯王) 8년 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점령했다. 진사왕(辰斯王)은 광개토왕이 용병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출전하지 않았다. 한수(漢水) 북부의 여러 부락이 많이 함락되었다.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진사왕본기]
辰斯王 八年,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 392년 : 광개토왕 2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인데 바닷물이 에워싸고 있어 광개토왕은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한지 20일만에 점령했다.[광개토왕본기]
廣開土王 二年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 393년 : 아신왕 2년 가을 8월 왕이 진무(眞武)에게 말했다. 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어 과인은 이를 애통히 여긴다. 경은 이를 마음에 두고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마침내 군사 1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치기로 계획하였다. 진무가 석현성 등 5개 성을 수복할 생각으로 사졸들의 선두에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싸우며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으나 고구려군이 성을 굳게 지켰다. 진무는 식량보급로가 끊어져 돌아왔다. [아신왕본기]
阿莘王 二年,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耻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嬰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 394년 : 아신왕 3년 가을 7월 백제가 고구려에 침입하여 수곡성(水谷城) 아래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아신왕본기]
阿莘王 三年 秋七月, 與高句麗戰於水谷城下, 敗績.
◇ 394년 : 광개토왕 3년 가을 7월 백제가 침입해 왔다. 광개토왕이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역습하여 격파하니 나머지 백제군은 밤에 도주하였다. 8월에 나라의 남쪽에 7개 성을 쌓아 백제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광개토왕본기]
廣開土王 三年, 秋七月, 百濟來侵. 王率精騎五千, 逆擊敗之, 餘寇夜走. 八月, 築國南七城, 以備百濟之寇.
◇ 395년 : 8월 아신왕(阿莘王) 4년 가을 8월 왕은 좌장(左將) 진무(眞武)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고구려왕 담덕(광개토왕)이 친히 병사 7천을 이끌고 패수(浿水)에 진을 치고 항전하여 백제군이 대패하고 8천명이 죽었다. 겨울 11월 아신왕은 패수(浿水)의 패전을 보복하고자 친히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넜으나 청목령(靑木嶺) 아래에서 큰 눈을 만나 많은 사졸이 동사(凍死)하므로 군사를 되돌려 한산성으로 가서 병사를 위로했다. [아신왕본기]
阿莘王 四年, 秋八月, 王命左將眞武等, 伐高句麗, 麗王談德親帥兵七千, 陣於浿水之上, 拒戰. 我軍大敗, 死者八千人. 冬十一月,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 次於靑木嶺下. 會大雪, 士卒多凍死. 廻軍至漢山城, 勞軍士.
이상의 기록에서 수곡성(水谷城), 청목령( 靑木嶺), 한수(漢水) , 패수(浿水)가 백제와 고구려의 국경 부근인데 청목령에서 남쪽으로 머지 않은 곳에 한수(漢水)가 동서로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지금의 자비령을 청목령으로 보고, 지금의 서흥강을 한수(漢水)로 본다. 관미성은 한수 이북 재령만 해변에 있다.
375~395 고구려의 영토확장(녹색지역) - 이광헌 설
※고구려는 언제 황해도를 차지한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고 광개토왕릉 비문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以六年丙申 王躬率▨軍討伐殘國 軍▨▨ 首攻取 .....(五十餘城)..... 逼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殘兵歸穴 就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跪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迷之愆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영락) 6년 병신년(丙申年) (396년)에 왕은 몸소 군(軍)을 인솔하고 잔국(殘國)을 토벌했다. 軍이 진격해서 먼저 58개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58개 城의 이름 열거) 잔국(殘國)이 의(義)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맞서 싸우니 왕이 격노해서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압박하자 백잔병은 소굴로 돌아갔다. 진격하여 도성을 포위하니 잔국(殘國) 왕이 곤궁하여 남녀 1천인과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치며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서약하였다. 태왕은 순종한 정성을 기특히 여겨 은혜를 베풀어 허물을 용서했다. 58개 성과 700개 촌락을 획득하고 잔국(殘國) 왕의 아우와 대신(大臣) 10인을 이끌고 도성으로 개선해 돌아왔다.
※아리수를 건너기 전에 점령한 58개 성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특기할 것은 이 중에 미추성(彌鄒城)이 있다는 것이다.
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氐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 ▨▨城, ▨而耶羅城, 瑑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彡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 ▨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 ▨▨, ▨▨,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 기국성
※잔국(殘國)은 백제를 가리킨다. 396년 고구려군은 미추성 등 58 성을 점령한 뒤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백제의 도성을 포위했다. 백제 아신왕(阿莘王)이 항복하고 고구려는 58개 성과 7백개 촌락을 빼앗았다. 아리수(阿利水) 이북의 백제 영토가 고구려로 넘어간 것이다.
기원전 5년에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옮겨와 371년까지 백제의 두번째 도읍이었던 한성(漢城)은 황해도 재령군 하성면 아양리이며 396년에 고구려에 합병되었다. 고구려는 평양성, 국내성, 한성을 삼경(三京)으로 삼았다. 필자는 한수(漢水)가 황해도 서흥강(瑞興江)이고 아리수(阿利水)는 임진강(臨津江)이며 396년 당시 백제의 도성은 한양이라고 본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371년부터 475년까지 백제의 도성은 한양성이라고 했다.
396년 광개토왕의 영토확장(분홍색지역) - 이광헌 설
광개토왕이 아리수를 건너기 전에 점령한 58 성에는 미추성(彌鄒城)이 들어 있다. 광개토왕릉 비문에 기록된 미추성(彌鄒城)은 백제가 황해도에서 일어섰다는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371년에 근초고왕은 온조왕이 세운 황해도 재령 땅의 한성에서 북한산에 인접한 한성으로 천도했는데 조선왕조의 한양성(漢陽城)과 같은 곳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훗날 고구려에도 한성(漢城)이 있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삼국사기 37권 : 한성군을 한홀군, 식성군, 내홀군이라고도 한다.
漢城郡 一云 漢忽, 一云 息城, 一云 乃忽.
성(城)과 홀(忽)은 같은 뜻이니 광개토왕릉 비문의 미추성은 미추홀이다. 비류왕 시조설화에서 소서노와 비류와 온조 일행은 기원전 18년 이른 봄에 졸본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서 패수를 건너 미추홀에 자리잡고 그곳에 위례성을 세워 도읍으로 삼았다. 필자는 미추홀, 미추성, 위례성은 같은 곳이며 황해도 봉산군이라고 본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미추성 등 58 성을 점령한 후 아리수를 건너 백제의 도성을 포위했으니 미추홀은 아리수 이북에 있다. 주류학계는 미추홀은 인천이고 아리수는 한강이며 이 당시 백제의 도성은 지금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광개토왕이 인천을 점령한 후 한강을 건넜다는 것이니 말이 되는가? 아리수는 임진강이고 백제의 도성은 한양성이라야 광개토왕릉 비문이 이치에 맞게 해석된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릉 비문의 백제 정벌 기사가 누락되었고 비문의 내용은 조선왕조 말기에 알려졌다. 비문의 일부 내용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었지만 396년의 백제 정벌은 아직까지 한국사에서 취급하지 않고 있다. 이를 역사에 반영하면 주류학계가 주장해온 한국사의 체계가 뿌리채 뒤집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비석에 표기된 백잔(百殘) 또는 잔국(殘國)에 대하여 여지껏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 백제는 396년에 광개토왕에게 항복했으므로 비석을 세운 414년 당시의 고구려인들은 백제를 옛 백제의 남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백잔(百殘) 또는 잔국(殘國)이라 칭한 것이다.
396년에 광개토왕은 한양성을 포위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회군하였다. 훗날 백제의 개로왕은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구상하고 중국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양국이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자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런 정황을 알게 된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에 백제를 침공했다.
◇삼국사기 제18권
長壽王 六十三年, 秋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장수왕 63년(475년) 가을 9월, 왕은 병사 3만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왕도(王都) 한성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천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장수왕본기]
◇삼국사기 제25권 :
盖鹵王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 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 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
개로왕(盖鹵王) 21년(475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을 이끌고 쳐들어와 왕도(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했다. 개로왕은 성문을 닫고 싸우러 나가지 않았다. 고구려인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였고 또 바람을 타고 불이 퍼져 성문을 불 태웠다. 인심이 두려워하여 성을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북성(北城)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이동하여 공격했다. 성안이 위태로워 개로왕은 기병 수십 기를 이끌고 성을 나와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추격해온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아차성(阿且城)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개로왕본기]
※ 거련(巨璉)은 장수왕(長壽王)이다. 백제의 도읍 한성은 한양성이다. 한양성 동대문에서 동쪽 이십 리에 아차산(峨嵯山)이 있는데 학계에서는 개로왕이 살해된 아차성(阿且城)과 같은 곳으로 본다.
주류학계는 풍납토성이 한성(漢城)의 북성(北城)이고 몽촌토성이 남성(南城)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은 풍납토성이 한강에 붙어 있고 몽촌토성은 한강에서 1 km쯤 떨어져 있지만 1970년대에 잠실이 개발되기 전에는 몽촌토성도 한강 바로 옆이었다. 삼국사기에 개로왕이 남성(南城)을 나와 서쪽으로 달아났다고 했는데 몽촌토성의 서쪽은 한강에 가로막혀 달아날 곳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475년 당시 백제의 도성이 아니다.
삼국사기 비류왕 시조설에 의하면 기원전 18년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 소서너와 함께 기원전 18년 졸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서 마한(馬韓)의 북쪽 땅 일백 리를 얻어 위례성을 짓고 백제를 세웠다.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 한수(漢水) 남쪽 한산군에 한성을 지어 도읍을 옮기고, 근초고왕 26년(371년) 북한산군 한양으로 옮기고, 475년에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옮기고, 538년에 성왕이 사비(부여)로 옮겼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 ~ 765) 16년 (757년)에 북한산군을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초에 양주(楊州)라 했고, 고려 문종(文宗, 재위 1046 ~ 1083) 21년(1067년)에 남경(南京)으로 정했고, 고려말 충렬왕 34년(1308년)에 한양부(漢陽府)로 고치고,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도읍으로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이런 내력으로 조선왕조에서 한성의 별칭이 한양이었다.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황해도는 본래 마한(馬韓) 땅이었고 마한의 북쪽 경계는 대동강이었다. 고대에 황해도 재령평야는 바다였다. 백제는 황해도에서 일어섰다. 위례성은 황해도 봉산군이고, 한수(漢水)는 서흥강이고, 기원전 5년에 온조왕이 천도한 두번째 도읍은 황해도 재령군 하성면(下聖面) 아양리(峨洋里)이다. 371년에 근초고왕이 북한산군 한성(漢城)으로 천도했는데 조선왕조의 한양과 같은 곳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국경은 본래 대동강이었는데 396년에 광개토왕이 한양성을 포위하여 백제의 아신왕이 항복했고 광개토왕이 백제에게서 아리수 이북 땅을 빼앗았다. 아리수(阿利水)는 임진강이다. 475년에 장수왕이 침공하여 함락시킨 백제의 도읍 한성 역시 조선왕조의 한양성과 같은 곳이다. 이런 학설은 누구나 금시초문일 터인데 필자의 연구를 통하여 사실로 밝혀졌다.
진실을 찾는 첫걸음은 전래의 통설을 의심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삼국사기가 홀대 받고 있는 사학계의 풍토에서 삼국사기를 근거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학설을 제시함에 있어 삼국사기에 누락된 부분을 광개토왕릉 비석이 채워 주었다. 천년 동안 잘못 알려져온 역사의 진실을 밝혀낸 필자의 논고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에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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