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사이인 A와 B가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A가 오늘 아침 행정고시 2차 시험에 불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술 한 잔 하고 싶다는 A의 연락을 받자 B는 여자친구와의 약속도 취소하고 A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무려 네 번째로 시험에 떨어진 A가 너무 우울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매달 아파트 대출금을 갚느라 등골이 이미 휘어질 대로 휘어진 B이지만 오늘만큼은 A에게 비싼 술집에서 비싼 술을 사주기로 다짐한다.
A가 자취하고 있는 낙성대역으로 가기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독 가볍다.
A와 B는 낙성대역 2번 출구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한 뒤, 유명한 일본식 선술집인 H로 향한다.
A는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H에서 술을 사냐며 B를 만류했지만 B는 걱정하지말라고 내가 산다고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A를 끌고 간다.
A는 B의 예상과는 달리 크게 우울해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아쉽게 떨어졌지만 다음 번에는 무조건 합격할 것 같다며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떠들어댄다.
B는 A가 작년에도 불합격하고 나서 똑같은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다.
'그래 네 머리라면 다음 번에는 반드시 붙을거야.' 라고 위로해준다.
A는 고등학교 시절 항상 전교 1등이었으며 서울대에 진학했던 수재다. 친구지만 공부와 관련해서는 경외스러운 존재였던 A가 무려 네 번이나 시험에 낙방하는 모습을 보니 B는 무척 안쓰럽다.
차라리 본인처럼 분수를 알고 적당한 기업에 취직을 하거나 좀 더 쉬운 7급 공무원을 준비했으면 훨씬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B는 혹시 A가 다음 시험 마저도 낙방하게 되면 폐인이 되지않을까 걱정된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부터 나이 서른이 된 지금까지 공부만 하느라 연애도 한번 제대로 못해본 A가 너무 불쌍하다.
A는 솔직히 못생긴 편에 키는 중간쯤, 공부만 하느라 사회성이 결여되고 외모관리에도 소홀하니까 아무리 학벌이 좋고 집이 잘 살아도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본인처럼 키크고 잘생긴 남자가 여자들로부터 받는 선망의 눈빛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을, 아니 아마도 평생 느껴볼 일 없을 A가 참 안됐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결국 시험에 합격만 하면 소문대로 결혼 정보 업체나 마담뚜를 통해서 적당히 예쁘고 집안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본인처럼 젊은 시절에 수많은 여자와 불타는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조건만으로 결혼하게 될 A가 전혀 부럽지는 않고 안타깝다.
B는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라는 명언이 갑자기 떠올라 격하게 공감한다. A가 시험이라도 꼭 합격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A는 시험에 떨어진 자신을 위로해주겠다고 분수에 맞지 않는 비싼 술집까지 데려온 B가 기특하다.
1년 혹은 늦어도 2년 뒤, 시험에 합격하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될 본인에 비해 비전이 보이지 않는 중소 기업에서 아둥바둥 일하고 있는 B를 보면 참 안됐다고 생각한다.
정년이 보장되고, 퇴직 후에도 연금을 수령하는 공무원과는 달리 높은 확률로 나이 50이 되기 전에 해고당하게 될 B가 진심으로 걱정된다.
먼 훗날 혹시나 일이 잘 풀려서 정치 쪽으로 진출하게 된다면 퇴직 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걱정하고 있을 B를 본인의 선거캠프에 채용해야겠다고 생각한다.
A는 고등학생 때의 성적으로 인생이 판가름 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지능의 차이로 사회적 지위가 나뉘는 현실이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B는 아까전부터 A에게 본인의 여자친구를 입이 마르고 닳도록 자랑하고 사진을 보여주며 애정을 과시한다.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말한다.
A는 B의 여자친구 사진을 보면서 외모가 나쁘진 않지만 예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예뻐서도 안되고 실제로 예쁘지 않다. 그냥 평범하다.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직업과 집안을 가진 평범 그 자체인 B의 여자친구를 보면서 B는 눈이 낮아서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그런 평범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나이 서른까지 공부만 한 게 아니라고, 남자가 아무리 키크고 잘생겼어도 능력이 없으면 결국 평범한 여자를 만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예쁘고 직업도 집안도 좋은 여자친구를 만나게 되더라도 B처럼 남들에게 여자친구 자랑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A는 자가용도 없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아낀 돈으로 고작 서울 외곽의 20평대 아파트 구입에 들인 대출금을 갚느라 애를 쓰고 있는 B가 안쓰럽다. 저래서 언제 자동차를 사고,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키울 수 있을지 걱정된다.
본인은 이미 대학생 때 아버지에게서 강남역 근처에 있는 50평 대의 아파트를 증여 받았는데 B가 취직하고 나서 4년 동안 모은 저축금보다 본인이 4년 동안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오른 집값이 대략 10배 정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B가 많이 우울해 할 것 같아서 이건 말하지 않기로 한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의 재력에 의해 출발선이 너무도 다르게 시작한다는 게 참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B가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A는 30만원 가량 나온 술값을 계산해 버린다.
B는 A에게 '왜 그랬느냐 내가 계산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따졌지만 속으론 안도가 되었다. 한 달 식비에 가까운 금액을 아꼈기 때문이다.
A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네가 내 걱정해서 여기까지 와줬으니까 내가 사야지'라고 대답한다.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B에게 더 비싸고 좋은 곳에 데려가서 술을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B는 A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꼭 합격하라는 말을 남기고 지하철 역으로 들어간다. A는 B가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택시를 타고 1km 정도 떨어진 본인의 오피스텔로 향한다.
첫댓글 있을법한 이야기네요!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모임 못가서 이제 읽었는데 어쩐지 씁쓸해지는 이야기네요. 친구사이가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줄 수 있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텐데, 우린 항상 다른 사람의 상황을 보며 자신의 행복을 저울질하는것 같기도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제가 의도한 바를 잘 짚어내신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