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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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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티벳사자의서/티베트불교의 가르침]③ 탄트라-밀교
최남석 추천 0 조회 180 15.01.30 17:18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티벳사자의서/티벳불교의 가르침]③ 탄트라-밀교

 

 

흔히들 티벳불교는 일종의 탄트리즘일 뿐이며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티벳의 고유한 무속신앙과 곧 습합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들은 요 근래 티벳불교에 대한 신빙성 있는 문헌이 증가함에 따라 수정되고 있지만, 불교에 있어서 탄트라 수행의 기원과 역할에 대해 아직도 상당한 혼란이 남아 있다.106)

 

앞 절에서 보았듯이 티벳불교는 그 기본적인 방향과 외형이 인도 불교의 고전적 전통에 확고히 기반을 두고 있다. 세계관과 인간의 존재 이유는 탄트라나 티벳의 토속 신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불교 사상에 따라 결정된다. 더군다나 탄트라 가르침 자체도 고유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인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주된 탄트라 경전 대부분은 산스크리트어에서의 번역본이며 밀교 수행의 계보는 인도 스승에서부터 이어져 온다.

 

인도와 마찬가지로 티벳인들도 밀교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자신이 처음 교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깨달음을 얻은 존재가 많은 모습으로 동시에 현현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석가모니가 특별한 밀교적 형태로 화현하여 선택받은 제자들에게 비전(秘傳)의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믿는다.

 

붓다가 가르친 밀교는 전수자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지혜를 전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또한 인간이 충분히 진보되어 그 땅에 널리 퍼지게 되기까지는 인간계가 아닌 영역에서 보존되어 왔다고 한다.

티벳밀교의 시조는 인도인인 빠드마삼바바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빠드마삼바바는 연꽃 송이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는 붓다가 열반한 8년 후에 지금의 북 파키스탄 지방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그가 가진 탄트라 힘 때문에 천 년 이상 살았다고 한다. 또한 많은 티벳인들은 그가 아직도 랏사 지방에 살아 있어서 고도의 영적 성취를 얻은 사람들은 그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9세기에 티송 데첸 왕의 초청으로 티벳에 왔다. 그에게 부과된 임무는, 최초의 주요 수도원인 삼예(Samye)사원을 짓는 데에 방해하는 악령을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이 악령의 힘을 격파하고 나서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승불교와 탄트라의 가르침을 설파하였고 또한 불교 전파를 방해하는 그 지방의 악령을 굴복시켰다.

 

탄트라 수행에서 얻은 힘을 보여줌으로써 빠드마삼바바는 고유의 무속(巫俗)사제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고, 티벳인들의 종교적인 심성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던 영성(靈性)의 수준에 곧바로 호소할 수 있었다. 그가 반불교적인 악령의 힘을 ‘굴복’시키고 ‘개종’시킨 의미는 티벳인들에게 보다 고차원적이고 보편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소개함으로써 그들의 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속신을 부셔버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 교리나 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불교의 가르침을 순수 개념적 형태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상징적 형태로 구체화시켰다.

 

빠드마삼바바는 탄트라의 힘이라는 매체를 통해 불교를 전래함으로써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티벳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자신이 일단 굳건한 형태로 구체화하고 체험한 종교적 진리에는 쉽게 반응하는 티벳인들의 내면적인 영적 성향 때문에 탄트라는 곧이어 대중 속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불교의 가르침은 티벳인들 속에 살아있게 되고 절대적인 사상과 교의로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티벳불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한 탄트라의 등장이 아니라, 비탄트라적인 것과 탄트라가 하나의 체계적인 전체로서 통일하는 방식이다. 티벳의 주요학파들은 각기 인도로부터 전래된 여러 다양한 전통들을 결합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한 총괄적인 구도를 제시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탄트라’(tantra)라는 산스크리트어는 탄트라 가르침이 수록된 문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티벳인들이 ‘탄트라’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대부분 주요 경전을 가리키는 수트라(sutra)와 구별되는 일련의 불교 문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탄트리즘’과 ‘탄트라 불교’라는 말은 현대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로 티벳어에는 정확히 이에 대응하는 표현이 없다. 티벳인들은 탄트라 문헌들에 수록된 가르침과 수행법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밀주’(密呪, guhyamantra)라는 표현을 쓴다. 탄트라 문헌 속에서 가르치는 수행을 활용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일러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이라고 한다.

 

탄트라 문헌에는 강규, 즉 석가모니의 말씀을 모은 경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4부로 나뉜다. 각 부는 모두 탄트라를 수행하는 각 단계를 묘사하고 있는 여러 글들을 담고 있다. 4부란 크리야 탄트라, 챠리야 탄트라, 요가 탄트라, 그리고 아누타라요가 탄트라이다. 4가지 탄트라 문헌의 교의는 모두 티벳에 보전되어 있으나, 티벳인들은 실제 수행에서는 크리야 탄트라와 아누타라요가 탄트라를 주로한다. 닝마빠에서는 더욱이 아누타라요가 탄트라 대신 마하 요가(Maha Yoga), 아누 요가(Anu Yoga), 아티 요가(Ati Toga)의 세 가지 내면적 탄트라를 들고 있다.

 

이들 탄트라 가르침의 4가지(닝마빠의 경우 6가지) 부분은 일차적으로 신격107)(神格, deva)과 맺는 관계의 유형에 따라 계위가 나뉜다. 여기서 신격이란 말은 기독교나 힌두의 신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이것은 특히 붓다로서 인격화되고 구체화된 빛나는 상징적 존재를 가리킨다. 탄트라를 수행하는 목적은 첫째로 어떤 사람을 깨달음의 상태로 들어서도록 하고 나서 점차적으로 그 상태를 자신의 의식 속으로 수렴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신격(神格)과 일치되는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얻어지며 신격이 상징하는 특징에 대한 통찰이 점차 심화되어 자기 자신의 것으로 되는 것이다. 탄트라에서 깨달음을 통해 얻는 관계란 원인과 결과라는 형식이 아니며 인격 상호간의 굳건한 관계라는 형식을 취한다. 특히 탄트라 문헌의 네 부분 각각에서는 이러한 신격과의 관계 유형을 남녀간의 성적 결합의 단계와 비교하면서 뚜렷이 설명하고 있다.

 

우선 크리야 탄트라를 수행할 때에는 자신과 분리되어 주체성을 갖는다고 여기는 신격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한다. 자기 앞에 있는 공간에 신격을 재현하여 영상화하는 법을 배우며,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자신의 마음의 성질에 대해 깊이 명상한다. 그리고는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찬미와 기도를 올리며 만트라를 음송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빛으로 해체되어 자신의 육체언어마음속으로 녹아 들어오는 것을 상상한다. 이 탄트라의 계위에 속하는 신격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觀世音菩薩도 같은 인물이다), 문수보살(文殊菩薩, Manjusri), 금강역사(金剛力士, Vajrapani), 금강살타(金剛薩, Vajrasattva), 따라(多羅, Tara) 등이다. 그들은 각각 자비지혜청정함깨달음의 작용을 상징한다.

 

크리야 탄트라는 더럽고 오염된 인간조건과, 청정하며 더럽혀지지 않은 신격이 대조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격과의 관계 정립을 통해 그들이 대표하는 특질을 흡수해 가면서 점차로 자기 자신에게서 더러움을 제거하여 결국 신격의 상태에 이르고자 한다. 그러나 아누타라요가 탄트라를 훈련하는 데에는 신격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즉 신격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자신이 사는 곳과 신격의 정토를 동일시한다. ‘자신이 곧 신격’이라는 자부심을 기르기 위해 신격과 다르다는 어떤 생각도 버려야 한다. 그런 수행을 통해 자신이 하는 행위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행위로 여기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 방식은 아누타라요가 탄트라에만 독특한 것으로, ‘붓다의 삼신108)(三身)을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삼는 것’이라 부른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을 먼 목표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현 존재의 매 국면 내에서 깨달음을 이루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탄트라 수행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신격과 진정한 합일을 이룸으로써 자신의 정신이나 말이나 몸으로 드러나는 표현이 붓다의 깨달음이 상태를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합일을 실현하는 것은 깨달음 자체를 성취하는 것과 동등하다. 신격들과 합일하는 여러 다양한 단계는 깨달음을 실현하려는 탄트라의 독특한 접근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티벳불교를 돌아보면 자비와 지혜를 점진적으로 습득하는 것도, 깨달음의 최종 결과도, 대승 경전에서 묘사되는 것과 같다.

 

수트라와 탄트라 문헌들과는 그 목표의 본질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 다를 뿐이다. 티벳인들이 대개 탄트라 문헌의 가르침을 수트라의 교리보다 우위에 두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즉 탄트라 수행의 결과가 어떤 점에서 다르거나 우월해서가 아니라, 탄트라 수행의 ‘방법’이 비탄트라 수행법보다 짧은 시간 내에 신속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월한 것이다. 그래서 금강승을 ‘신속한 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신속한 방법은 단지 쉽기만 한 지름길은 아니다. 수행자에게 최고의 노력을 요하는 모진 수련이 요구된다. 신격과 합일하려면 첫 단계를 수련하기 전에 엄격한 도덕적 계율을 지킬 각오가 되어야 하며 길고 험한 예비단계를 거쳐야 한다. 출가를 위한 기본적인 자질을 배양해야 할 뿐 아니라, 이타적인 보리심109)일으켜야 하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 일정 수준의 통찰력을 기른 후에 또 특수한 다섯 가지 예비 수련을 해야 한다.

 

그 예비 수련이란 첫째 오체투지(五體投地)를 오십만 번 행하고, 둘째 오백 음절로 된 금강살타 만트라를 십만 번 암송하고, 세 번째 불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맹세를 십만 번 읊조리고, 네 번째 수행자 각각의 스승(Lama)이 내려준 만트라를 십만 번 암송하는 것이다. 이 예비수련의 목적은 탄트라 수행에 대한 수행자의 결심과 신념을 강화시키고 그 마음속에서 수행을 방해하는 성향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일단 예비 수련이 끝나면, 어느 한 신격의 만달라110)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입문, 즉 ‘관정(灌頂)’이란 해당 신격과 관련된 수행에 들어가기 위해 탄트라 전수자로부터 권위를 부여받는 과정이다 이것은 전수자가 그 신격의 상태를 실현했음을 수행자가 완전히 알아보아야만 가능하다. 한 신격의 만달라는 그 신격의 독특한 세계와 같은 것이다. 흔히 만달라는 대칭인 원형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실은 실제의 만달라계() 2차원의 다이아그램으로 단순화시킨 것이다. 실제로 만달라는 거대한 공간이며 그 정 중앙에는 천인이 사는 궁전이 있다. 만달라 전체는 신격된 지혜의 현현(顯現)이며 그 깨달음의 상태와 분리될 수 없다. 또한 투명하고 빛나는 세계이며, 그 각 부분 부분은 모두 깨달음의 모습을 상징한다.

 

신격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아누타라요가 탄트라의 첫 번째 기본단계는 자신과 세계에 대해 가졌던 ‘일상적’ 관념들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자신을 신격으로, 그리고 이 세상을 만달라로 여기고 생각하는 것을 배움으로서 이것은 달성된다. 이렇게 일상적인 생각들을 전환시키려면 신격과 만달라의 각 부분 부분을 계속해서 영상화하고 조합해 나가야 한다. 순수하고 텅 빈 공간을 확장해 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부분에서 부분으로 신격과 만달라의 형상을 현현해 내도록 수련한다. 모든 형상과 색채를 수행자가 손을 뻗어 만질 수 있다고 느낄 정도로 사실적으로 보일 때까지 마음의 눈에 확고하게 고정한다. 그리고 수행자는 이 우주를 조각조각 분해한다. 만달라의 외부계는 점차 안으로 녹아 들어오고 다시 신격 속으로 녹아 들어온다. 그러면 실격은 점차 그의 마음 정중앙점으로 흡수되는데, 이는 최종적으로 텅 빈 공간 속으로 다시 분해되어 버린다.

 

자신 및 세계에 대한 일상적인 관념을 전환시키는 외에 신격과 만달라의 형태를 반복해서 영상화시키고 분해하는 수행은 집중력과 상상력을 강화시켜준다. 그런데 이 영상이 수행자에게 아무리 생생하게 느껴진다 해도 오로지 집중된 상상력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수행자가 깨달은 존재와 그의 세계의 외적 형상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제 이 형상에 깨달음의 실질적인 힘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렇게 신격과 만달라의 모습을 영상화하는 탄트라 수행의 첫 단계를〈생성의 단계(生起次第)〉라고 하며 이러한 위에서 깨달음이 실현되는 최종단계를〈완성의 단계(圓滿次第)〉라고 한다.

 

아누타라요가 탄트라의 가르침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육체와 정신을 삼중(三重)구조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육체와 정신에는 거친 수준, 미세한 수준, 극히 미세한 수준이 있다. 거친 수준이란 육체로 보면 물리적 형체에 해당하며, 정신으로 보면 정상적으로 깨어있는 의식 상태를 말한다. 미세한 수준이란 생명력(prana), 혈맥(nadi), 챠크라(cakra)를 말하며, 정신에서는 꿈꾸는 상태를 말한다. 극히 미세한 수준은 심장 속의 불멸의 에너지 방울(bindu)이며, 정신적으로는 깊은 수면상태의 의식이다.

 

수트라에서의 불교 수행이란 대체로 물리적 존재와 깨어있는 의식인 거친 수준에 한정된다. 그러나 탄트라에서는 특히 완성의 단계 동안에는 육체와 정신 모두 미세한 내지 극히 미세한 수준에서 수행하도록 한다.

 

이렇게 육체와 정신을 여러 층으로 분화시킴으로써 심신(心身)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불교 이해 또한 달라진다. 육체와 정신은 단지 거친 수준에서만 서로 다르고 분리된 것이다. 그러나 미세한 수준에서는 정신을 생명력과 분리해 볼 수 없다. 정신 혹은 의식이 있는 곳에는 항상 욕망 내지 충동을 동반하는 미세한 육체적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극히 미세한 수준에서는 마음과 몸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정신과 육체란 단일한 현상인데 점차 거칠어져 가는 과정을 통해서 둘 간에 분화가 생기고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와 정신에 대한 견해를 통해 죽음에서 환생하는 과정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육체 및 정신의 세 수준은 죽음, 죽음과 환생의 중간기, 즉 중음(中陰, Tib. bardo)의 상태, 그리고 특정 계로 환생하는 세 단계에 유비(類比)해서 이해할 수 있다. 24시간 동안에 육체와 정신은 죽음→중간기→환생의 과정과 같은 단계를 경험한다. 즉 모든 의식과 에너지가 심장으로 모여 깊은 수면에 빠지는 것은 죽음과 같고, 깊은 수면에서 빠져 나와 꿈을 꾸는 것은 중간기와 같으며, 깨어나서 외부 세상과 육체를 의식하는 것은 환생에 비견된다. 두 경우 모두 해체와 생성의 동일한 유형을 취한다. 죽음과 깊은 수면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통일되고 극히 미세한 형태로 작용하며, 중간기와 꿈꾸는 동안에 몸과 마음은 미세한 수준으로 움직이며, 환생과 깨어있는 의식에서는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거친 상태로 나타난다.

인생을 이같이 기본적인 유형으로 규정하고 나서, 탄트라에서는 붓다의 삼신설(三身說)을 철저히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해 나간다. 전통적인 대승의 교리를 따르면, 이 삼신(三身, trikaya)은 붓다의 세 가지 기본적 측면을 나타낸다. 법신(法身)은 보편적이고 근본적이며 깨달음의 영적인 핵심이다. 보신(報身)은 정토에 계시는 영묘한 붓다의 모습이며 고도의 단계에 있는 보살만이 직접 접할 수 있다. 그리고 화신(化身, 혹은 應身)은 실제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물리적인 모습이다. 탄트라 가르침에서는 붓다의 삼신이 육체와 정신의 세 수준 및 죽음중간기환생의 세 가지 과정과도 관련된다.

 

대승 경전의 약간 형이상학적인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탄트라의 권위자들은 깊은 수면깨어있음의 과정과, 죽음중간기환생의 과정에 기반이 되는 해체와 생성의 원칙이 법신화신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탄트라 수행의 목적은 깊은 수면깨어있음 그리고 죽음중간기환생이라는 오염되고 불만족스러운 과정을 법신보신화신이라는 정화된 측면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수트라에서 가르치듯이 먼저 삶과 죽음의 윤회로 몰고 가는 힘을 끊고서, 다음에 법신이라는 초월적 상태를 실현하며 끝으로 존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보신과 화신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을 죽음과 중간기와 환생으로 이끄는 해체와 생성의 과정은 법신이 보신과 화신의 모습을 취하도록 하는 바로 그것과 본질적으로는 같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트라에서는 욕망과 증오의 힘을 극도로 제거하지만 탄트라에서는 에너지와 의식의 보다 미세한 수준이 단지 거칠게 나타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들의 중성적인 활동적 본성을 파악하여 정신의 건전한 자질로 재구성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

물론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미세하거나 극히 미세한 수준의 움직임에 대해서 우리는 보통 의식하지 못하거나 통제하지 못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완성의 단계에서 명상의 힘을 통해 미세한 혹은 미세한 수준의 정신과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고양시키는 여러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시작하기 전에〈생성의 단계〉에서 신격과 만달라의 형상을 생성분해하면서 개발한 집중력을 완전히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존재의 육체적 정신적 힘을 미세한 내지 극히 미세한 수준에서 실제로 고양시키고 효율적으로 변환재조정하는 능력은 그러한 집중력을 통해서만 습득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생성의 단계는 깨달음을 준비하기 위한 리허설과도 같다. 죽음중간기환생의 과정을 법신보신화신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세밀하고도 상징적으로 연습해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 잇따른 완성의 단계는 실제 공연으로 비유될 수 있다.

 

완성의 단계로 진행한 수행자는 미세한 및 극히 미세한 수준의 의식을 활동시키기 위해 육체의 에너지 조절에 대해 여러 수행을 해야 한다. 이 수행에서는 특히 극히 미세한 수준에서 육체 및 정신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다른 육체적정신적 기능이 발생하는 심오한 근원이다.

 

이것을 달성하려면 거친 내지 미세한 수준의 모든 에너지와 정신을 모아서, 심장에 있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에너지 방울로 분해시켜야 한다. 이 과정은 죽음의 과정과 유사하다. 이 수행에서 채택하는 방법의 하나는 성적 흥분을 통해 생성되는 강력한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적’(性的) 수행은 절대로 난잡하게 배워서는 안되며 완성단계라는 고도의 수준에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일단 극히 미세한 수준에서 육체와 정신이 활성화되고 나면 그것의 중성적인 상태에서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집중된 자각 상태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수행자는 법신의 기초를 확립하며, 탄트라 식으로 말하면 신격의 마음 가장 깊숙한 수준과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상태를 이룬다. 그리고 나서 미세한 내지 거친 수준의 육체적정신적 활동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미세한 수준에서 수행자는 신격과 만달라의 빛나는 모습을 다시 영상화한다. 이것은 붓다의 보신의 측면으로서, 꿈과 그리고 죽음 환생의 중간기에서 변화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물질성과 깨어있는 상태의 거친 수준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붓다의 화신의 측면으로 깨어나서 신격의 모든 측면과 합일을 이루고 전환하는 과정을 끝맺는다.

 

아누타라요가 탄트라 수행에 참여하길 원하면, 먼저 자격을 갖추고 있으며 어떤 특정 신격의 만달라를 그에게 전수해 주고자 하는 스승을 찾아야 한다. 스승의 충고와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여러 가지 신격 중 하나를 선택하여 수행법을 전수 받는다. 이러한 신격들 중 흔히 택하는 것으로는 구햐사마쟈, 챠크라삼바라, 야만타카, 마하칼라, 바즈라요기니 등이다. 일단 전수 받고 나면 그 신격과 만다라를 묘사하는 짤막한 경전을 매일 참구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 수행의 목표와 기본 윤곽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생성 및 완성 단계의 수행에 전적으로 몰두하려면 엄격한 명상훈련에 돌입해야 한다. 이 명상훈련은 혼자서 혹은 동료수행자들 소집단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수행은 삼년, 석달, 삼일 이런 식으로 진행되며, 그 동안 수행의 전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 티벳의 라마승들은 흔히 탄트라 수행의 삼년 과정을 몇 번 반복하여 이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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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1.31 22:11

    첫댓글 티벳밀교 금강승은 일반적인 불교수행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선도와 많이 닮아있고 극낙왕생이나 열반 같은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 작성자 15.01.31 22:15

    티벳의 관세음보살은 [한단고기]에 나오는 도태산의 관음진신이며 티벳사람들은 관세음보살(=관자재보살)이 자기들의 조상님이라고 한다 이는 여성상으로 표현되는 동남아의 관세음보살이 아니다

  • 작성자 15.02.13 20:56

    티벳의 관자재보살은 이마 한가운데 제3의눈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 눈이 바로 전시안이며 이 전시안을 가지고 계시기에 아바로기 데스바라 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하늘에서 우리를 관찰하시는 천주 라는 말이다 관자재에서 자재는 스스로 있는자라는 뜻인데 불교에서는 자재천 과 타화자재천을 말하고 있다 관재재 보살은 32응화신을 나투기 때문에 타화자재천 이다

  • 작성자 15.01.31 22:31

    타화자재천을 멸업 염세주의 소승불교에서는 마왕이라고 부르는데 염세멸업사상과 타화자재천의 관자재보살은 그 사상이 정반대 이기 때문이다 아바로기에서 아바는 예호바 인데 여호와라고도 한다 여호와라고 하니까그 구약성경의 여호와를 생각하는데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는 관재재보살의 위신력 이미지를 도용한 나쁜놈 일 뿐이다

  • 작성자 15.02.01 05:53

    예흐바= 위에서 아래를 관찰하는이 / 데스바라= 천주님 / 이다 관자재는 광자재(光自在) 또는 光世音 이라고도 한다 이는 소리를 빛으로 빛을 소리로 바꾸어 중생을 관찰하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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