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사랑의 치유 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철호 목사
※ “다스리라”는 우리말의 어원은 “다 살리라”는 뜻입니다. |
“복을 주시며” 이 말씀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우두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두머리로 세우셨다는 이 말씀은 억압하고, 군림하고, 지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생육하고 번성 할 수 있도록 다 살리라는 말인 것입니다.
※ 복(福)자는 장자권과 제사권과 그리고 축복권이 있는 글자입니다. |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생기를 받아 생령이 된 첫 사람은 하나님과 영생 줄로 연결 되어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갖추어진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을 다스리며
두려움과 걱정 근심 없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이는 마치 자궁 안의 태아가 엄마와 연결된 탯줄인 생명줄을 통하여 엄마와 교감하며
엄마의 자양분을 먹으며 두려움과 걱정 근심 없이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 하신 선악과를 아담은 먹고 말았습니다.
먹으면“죽으리라”고 창세기 2:17절에 말씀 하셨는데 말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의문이 하나 생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라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즉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창 5:5절을 보니까 아담은 죽지 않고 버젓이 구백삼십 세를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이 “죽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냥 아담에게 겁만 주시려고 “죽으리라” 라고 하시지는 않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이나 식언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민 23:19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식언)을 하지 않으시고”
그렇다면 무엇이 “죽으리라” 라고 하셨는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에스겔 18:4절과 욥기 27:8절 외에 많은 곳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욥 27:8)
영혼이“죽으리라”또는 영혼을“거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으리라는 말씀의 뜻은 흙으로 지음 받아 구백삼십 세를 산 육체는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이 죽는다. 또는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영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의 끈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선악과를 먹음으로 이 영생의 끈이 끊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연의 실이 끊어지므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1970년도 이야기인데 제가 살던 옆집이 형편이 몹시 어려워 전기세를 납부하지 못하자
한전 직원들이 나와 전기 끊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전기를 끊으려는 한전 직원에게 옆집 아주머니는 조금만 봐 달라고 사정 하였습니다.
그러자 전기를 끊은 한전 직원은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주머니! 밀린 전기세만 내시면 바로 전기를 살려드린 다고...
전기 공사하는 사람들은 전기가 죽었다. 전기가 살았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전기가 끊겨 죽은 옆집 사람들은 밤만 되면 컴컴한 방에 촛불 하나 켜놓고서
불편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희미한 촛불 아래서 생활한다는 것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위의 사례처럼 아담도 범죄 하므로 하나님의 영이 끊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담에게서 끊어지거나 죽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겠습니까?
말 할 것도 없이 빛이신 하나님의 영이 끊어지는 순간 어둠의 영이 찾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으리라는 말씀에 어둠의 영이 즉시 찾아온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두운 실내에 환하게 켜져 있는 전기 스위치를 내리면
그 즉시로 어두움이 찾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에게도 하나님의 빛이 떠나자 어두움이 즉시로 찾아 왔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어두움이란 죄이며, 지옥이며, 사망이며, 악령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 어둠의 권세를 잡은 사탄 마귀,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성경 사무엘 상 16:14절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다시 말씀 드려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서 없으면 그 빈자리에
사망 권세 잡은 어두움의 악한 영들이 찾아와 자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빛(하나님, 생명)가운데 살다가 빛이 떠나면 그 자리에 칠흑 같은 어둠(사망)이 찾아와
영혼을 붙잡아 지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 12:35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라고
왜냐 하면 이 어둠에 붙잡히면 사망이기 때문에 붙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바울은 롬 13:12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한 국가가 유지 되려면 국가가 제정한 국법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는 이 국법으로 국가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국가와 사회의 안녕 그리고 질서를 유지 하는
차원에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국법이 정한 대로 형벌을 가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말씀 하신 대로 형벌은 내리셨는데
그 형벌은 하나님과 영적 단절인 죽음과 함께 에덴으로부터 추방 이였습니다.
이 때 부터 인류는 영적 죽음으로 단절된 하나님과 연결을 위해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로서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가 이어지므로 자기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아
하나님의 심판인 사망으로부터 벗어나 영생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는 영적인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수단인 것 이였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들 가운데 침팬지의 유전자가 인간과 가장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과 가장 유전자가 비슷한 침팬지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종교성이 없으므로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또한 드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제사의 기원과 제사는 누구에게 왜 드렸는지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4:3~4절에 제사의 모습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祭物)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앞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께로부터 영혼을 받은 사람은 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곧 종교 본능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이며, 종교 본능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악기를 만들어
아름다운 노래로서 찬송을 하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 하고 있습니다.
창 4:21절“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 31:27절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출 15:20절“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을 추니”
그러므로 오늘날의 악기, 노래, 춤 그리고 술은 제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지에 제례악(祭禮樂)이 남아 있습니다.
평양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선교사가 새벽에 기도를 마치고 마을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여인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선교사는 기도 소리가 나는 곳에 가보았더니 나이든 여인이 하얀 그릇에 물을 떠 놓고
손을 비벼대며 하나님(하늘님)을 부르며 기도 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아직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을 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심이 강한 우리 선조들은 선교사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조상 대대로 내려온 하나님께 이미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 없듯이 아버지, 할아버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리고 할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존재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 5:1~32“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눅 3:23~38“.........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니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또 아버지를 낳으신 아버지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할아버지가 나오고 결국 아담이 나오고 마침내 하나님과 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가르쳐 말하길 조상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말 합니다.
이는 기독교를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3~37절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부모를 경외하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실 때는 말 할 것도 없이 돌아가신 후에도 부모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엄밀히 말해 하나님 경외, 부모 경외, 이웃 사랑 실천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른들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핵심 교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이라고 하니까 옆집 사는 이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모 형제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0:27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또한 바울은 딤전 5:8절에서“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죽음과 부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천국과 죄와 지옥을 빼면 윤리, 도덕 복락을 가르치는 종교들과 같은 것입니다.
예전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기독교와 종교는 다릅니다.
종교라는 말은 불가에서 처음 사용한 말로서 불교 경전이 중국에서 능가경(楞伽經)으로
번역될 때 처음 쓰였던 말로서 궁극적인 진리, 불교의 종파, 불교 교리의 요지 등을
의미하는 용어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신적인 신앙에 초점을 두고 있는“religion”입니다.
이“Religion”이란 말은 라틴어로서 Re는“다시”란 의미이며, ligion(ligio)은
“주워 올린다(take up). 연결, 묶다. 결합 한다”의 의미인 것입니다.
“주워 올린다”의 어원을 밝힌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세로(BC 106-43)라는 사람은
렐레제레(Re-legere)라는 말에서“다시 읽어 본다”는 뜻이 유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읽어 본다.”무엇을 성경 또는 의례문(儀禮文)을 반복해 읽는 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나 의례문을 다시 읽어 봄으로 이전에 알았던 신(하나님)을 재인식하여
제사로서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가 다시 연결하다. 다시 결합하다. 다시 묶인다는 것이
“Religion”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총독으로 파송 된 이스라엘 영적 지도자 느헤미야는 훼파된 성벽을 건축하기 앞서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다 낭독하고 그 뜻 즉,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였습니다.
느 8:8~“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깨닫게 하니”
또한 기독교 철학자 락탄티우스(Lactantius, AD 3C)란 사람은
렐리가레(Religare)라는 말은“다시 묶어 맨다, 또는 다시 연결한다. 다시 결합한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Religion”이란 범죄로 끊어진 하나님과 관계를 다시 연결 한다는 것인데,
이 연결은 인간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화목제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다시 연결, 또는 끈으로 묶인 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Religion”이란 말을 일본 학자들이 이에 해당하는 마땅한 용어가 없자
본래 뜻과는 거리가 있는 불가에서 사용하는“종교”라는 말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윤리와 도덕과 그리고 착한 행실과 세상 복락을 가르치는 행위 종교가 아니라
영적인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영이신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 회복을 위하여
제사 또는 예배를 통해 다시 연결되는, 다시 묶이는“Religion”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아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가 회복 되므로
제사권자가 되어 먼저는 하나님께 예배를 그리고 이웃을 사랑 하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는 하나님과 제사를 통한 영적인 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는 제사권이 있는 왕이며, 장자인 것입니다.
벧전 2:9“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러므로 기독교에 있어서 제사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제사는 앞서도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과 영적 연결을 위한 제천의식인 것입니다.
또한 제사는 영혼을 가지고 사는 인간이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수단이 바로 제사인 것입니다.
신 26:17“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이렇게 드려지는 제천의식은 나라의 임금이나 왕이나 또는 족장이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께 아름다운 노래와 음악과 춤으로 나아가 나라의 안녕과 그리고 평안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국가적 부족적 행사였던 것입니다.
※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등은 모두 제천의식 이였습니다. |
이렇게 황제나 임금이나 또는 부족의 족장이 제사장이 되어 제천의식을 드렸는가 하면
씨족이나 가문의 제사는 장자가 제사장이 되어 자기 자신들을 이 땅에 있게 해 주신
하나님과 그리고 조상들의 은덕을 추모하며 기념하는 행위가 제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적 행사인 제천의식이나 또는 씨족이나 가문이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백성들이나 또는 친지 가족들이 음식을 골고루 나눠 먹는데
이것을“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잔치”라는 말은 제사에서 파생된 말인 것입니다.
왕상 3:15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복덕방(福德房)이란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집이나 소개를 해주는 곳이 아니라
원래의 의미는 제사를 드리고 난 후 가족이나 친족들이나 또는 이웃들이 함께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나눔의 장, 막힌 담을 허무는 장. 화합의 장, 축제의 장이였으며,
이곳에서 서로 소식을 듣고, 소식을 전하는 방, 잔치 마당이 복덕방 이였던 것입니다.
복(福)자에는 제사라는 뜻과 그리고 덕(德)자에 베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드려지던 제사가 사망 권세 잡은 어둠의 영들에 의해 본래 목적을 잃어버리고
죽은 귀신들과 인간의 목적에 따라 만든 우상에게 드려지는 제사로
다양하게 왜곡되고 변질 되어 종교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아마존 밀림 깊은 곳에 사는 원시부족에 관한 방송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나무 잎으로 주요한 부분만 가린 남녀들이 갈대로 지은 신전 같은 곳 마당에 모여
자기 조상들이 섬기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몸을 울긋불긋하게 색칠을 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무당을 중심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마구 흔들어 춤을 추며
제사 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문명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브라질의 아마존 밀림 깊은 오지에서 살아가는
아프리카나 남방의 미개한 사람들도 조차 자기 조상들이 믿었던 신과의 접촉을 위하여
왜곡되고 변질 된 종교 의식인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영적이며, 종교적 동물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60년도에 섬에서 잠깐 산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전기는 물론 요즘 흔하디 흔한 라디오 한데 없는 증도라는 섬 이였습니다.
저는 해만 지면 형이 생활하는 사랑방으로 건너갑니다.
그러면 그 곳에는 형 친구들이 모여 있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이야기들이 시작됩니다.
자신들이 가보지 않고 말로만 들었던 서울역이나 남대문, 이야기 등등...
그런데 형들 가운데 이야기를 잘 하는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자기 할머니에게 들었다는
동네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아주 재미있게 잘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동네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들....
문자가 없었던 그 때도 이야기 잘 하는 사람에 의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이야기,
무서운 노아의 홍수 이야기 그리고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언어가 혼잡해진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성경과 한자(漢字) 관계를 공부하는데 고문을 통해 한자를 살펴보면
한자 자체가 성경 말씀과 너무 동일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한자(漢字) 한 글자를 설문해자라는 고문을 통하여 깊이 있게 해석을 하면,
성경이 쓰여 질 당시의 생활과 문화를 히브리어나 헬라어 없이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특히 제사(祭祀)에 관련된 상형문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 제물을 뜻하는 고기 육(肉)자와 오른 손이나 오른 쪽을 뜻하는 우(又)자 그리고 하늘에 해, 달, 별로 보여 준다는 시(示)자로 제(祭)자는 구성 되 있습니다. |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범죄를 한 인류는 하나님과의 연결, 또는 결합을 위하여
제사는 일상 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아담과 아담의 후손들은 제사에 집착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범죄로 인해 오는 죽으리라는 두려움이 제사라는 수단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죽으리라는 말씀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전혀 경험 해 보지 못한 일이였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무서움과 두려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무서움이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보이는 현상,
하얀 소복을 하고 머리를 푼 여자 귀신을 무섭다고 하지 두렵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이란 아직 경험 해보지 못한 어떤 현상들이나 또는 생각 속에 있으면서
아직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일로 불안한 것이 두려움인 것입니다.
욥 21:6“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이 두려움은 이전에 지은 죄, 나만 혼자 알고 있는 죄로 인해 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두려움이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앞으로 오는 죽음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영육간의 죽음이라는 것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란 이 두려움 넘어 오는 경배이며, 예배이며,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으로 바뀐 것입니다. 구 찬송가 455장 2절 가사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창 3:20절 말씀대로
흙으로 돌아기지만 흙속에 불어 넣어 주신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으면 천국,
반대로 믿지 않으면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돌아가셨다. 또는 별세 하셨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어디로 그리고 무엇이 어떤 다른 세상으로 갔다는 것입니까?
이 말은 영혼을 두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영혼이라는 실체를 찾기 위하여 과학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보았지만,
결국 영혼의 실체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 과연 영혼이 있는 것인가?
성경은 영혼에 대해 약 195회나 언급 하고 있는데 이중 시편 6:3절에서만 보겠습니다.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라고 다윗은 고백을 합니다.
떨린다는 말은 벌거벗은 죄인으로서 두렵다는 겁입니다.
창세기 3:10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은 벗어서 숨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 때문에 두려워서 숨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아담은 죽으리라는 하나님 말씀, 즉 자신이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모르는 죽으리라는 미래형의 말씀에 두려워 숨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유는 다윗의 고백처럼“...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시51:5)”때문입니다.
인류 최초의 옷은 피부를 보호하거나 가리거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입은 것이 아니라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부끄러운 죄를 가리기 위하여 입은 것입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나뭇잎으로 치마를 엮어 입었습니다.
창 3:7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여러분! 무화고 나뭇잎으로 엮어 만든 치마가 그렇게 오래 아니 영원히 가겠습니까?
빛이 나고, 바람이 불면 이내 말라져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값 비싼 유명 브랜드의 두껍고 튼튼한 옷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빛에 의하여
그리고 성령에 바람에 의하여 말라 부셔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죄를 가리거나 죄를 사함 받을 수는 없습니다.
죄를 가리거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하얀 세마포 옷을 입는 방법 뿐 입니다.
갈 3:27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계 18: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아담의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란 이 고백은 내가 죄를 지었으므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고백이며,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숨길 수 없다는
고백이 두려워하여 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어떤 사람이든 죄가 없으면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말에 도둑놈 제 발 절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은 죄가 없으면 경찰서 앞을 지나가도 두렵지가 않은데 그런데 지은 죄가 있으면,
멀리 있는 경찰만 봐도 벌벌 떠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6절과 요한복음 5:29절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자는 영생으로 악한 자는 영벌에”(마 25:46)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요 5:29)
이 말씀들은 영혼이 영생과 영벌에 그리고 영혼이 부활로 심판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복(福)자를 고문헌을 통해 공부 하다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복(福)자가 답(答)자와 서로 모양은 다르지만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복(福)이 곧 답(答)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에 한계가 있는데 그 중 한계는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일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은 죄로 인해 오는 죽음인 영원형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제사라는 수단을 통하여 끊어졌던 하나님과 영적 연결을 하여
죽음인 영원형벌은 물론 인생의 문제를 해결 해보려고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영적으로 죽었던 인간들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을 하여
자신들로서는 해결 할 수 없는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을 신(하나님)께 올려드리므로
답(答)을 구하는 행위가 제사라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저는 오래전에 복(福)자를 살피다가 이런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 (示玉) (示貝) (示金) 이런 문자라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복(福)과 맞을 텐데 말입니다. |
왜! 복(福)자는 복이라고 하면서 보일 시(示) 옆에 보물이나 또는 재물을 상징하는
옥(玉), 패(貝), 금(金)자를 붙여 놓지 않고 술을 뜻하는 (畐)항아리 모양을 붙였을까?
신(하나님)께서 술을 좋아 하셔서 술을 상징하는 (畐)항아리를 붙여 놓은 것인가?
저는 여러 날 고문을 뒤적여 보았습니다.
답은 복(福)자에 있었습니다.
복자에는 여러 뜻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제사에 쓴 고기와 술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옛날의 술은 오늘 날의 술과는 만드는 방법과 그리고 이용하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오늘날의 술은 화학적인 방법으로 만들어 누구든지 원하면 아무 때나 마셔서 취합니다.
물론 농경사회 때 막 걸러 먹는 술이라 하여 막걸리라는 곡주가 있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사에 올리는 술을 여느 일반 가정에서는 마음대로 빚을 수 없었음은 물론,
또한 이 술은 누구든지 원하면 아무 때나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제사에 올려지는 술은 오직 족장이나 또는 가문의 유업을 이어 받을 또는 이어 받은,
맏아들인 장자의 종가에서만이 전통으로 내려오는 방법으로 곡식이나 과일을 발효시켜
증류하여 만들어 제사 때, 장자가 제사권자가 되어 악기와 노래 춤으로 올려드렸으므로
술은 장자권과 제사권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장자 계승 문화 이지만 성경 또한 장자 계승 문화입니다.
창 25: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장자는 부족 통치권, 제사권, 축복권 그리고 유업 상속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종가에서 빚어진 천연 알코올인 술은 때론 약으로도 사용 하였습니다.
상처 난 부위에 술을 부어 소독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깊은 상처를 치료 할 때
환자에게 마시게 하여 마취 또는 진통을 억제하는데 쓰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눅 10: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그리고 술은 풍요와 함께 기쁨을 나타내기도 하므로 잔치에 꼭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요 2:1~3“혼인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공동번역)
아마도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도 종가집의 술이 명주라고 매스컴에서 소개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술을 올려 드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술은 모든 곡식과 과일로 만들기 때문에 술은 모든 음식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에서 술이 빠지면 안 되는 것 이였습니다.
때를 따라 비와 바람과 햇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맏아들인 장자가
좋은 곡식으로 빚은 술, 모든 음식을 대표하는 술을 찬송과 함께 올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福)자에 술 항아리 모양의 상형문자가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11:14“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는 일설에 의하면 왜! 제사 때 술을 올려 드렸는가에 대하여 말하기를
무서운 홍수 심판이후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실수를 하였으므로 술을 올려 드리므로
다시는 술에 취하여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술을 올렸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술에 취하여 실수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창 9:21절“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그러면 왜 복(福)이 답인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답(答)은 복(福)자 앞에 있는 시(示)자에 있습니다.
이 시(示)자는 이(二)자와 소(小)자처럼 생긴 문자가 모여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여기서 알아 야 할 것은 소(小)자처럼 생긴 글자 위의 두 이(二)자는 二자가 아니라
고문(古文) 하늘 또는 위를 나타내는 상(上)자이며,
그리고 밑에 소(小)자 같은 문자는 해, 달, 별을 나타낸 상형문자인 것입니다.
창 1:14절“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 하신 해, 달, 별들을 통하여 앞으로 나타날 일들
다시 말해 징조로 인생들에게 앞으로 일어 날 일들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 받은 사람은 하늘에 뜻을 볼 수 있는 사람이며,
그리고 하나님께 답을 받은 사람이며, 그리고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사람이며,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천국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문자 모양은 달라도 복(福)과 답(答)을 같은 뜻으로 해석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복이란 신(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받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진정한 복이란 하늘의 뜻, 하늘로부터 오는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국 사람들은 복(福)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여
복(福)자를 뒤집어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중국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복(福)이 답(答)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답을 알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시험 때만 되면 누군가 꼭 나타나 답을 알려준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 학생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답(答)을 받아 사는 인생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학교에서는 선생이 문제를 내고 학생이 답을 쓰지만,
복된 인생은 하나님께 문제를 올려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걱정, 근심, 염려, 불안해하며 어렵고 힘들게 사는 줄 아십니까?
이유는 돈, 권력, 명예, 육신적 성공이 답인 줄 알고 이 답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답은 정답이 아닌 오답이며, 이 오답으로 인한 결과는 지옥인 것입니다.
인생의 정답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렇게 정답을 받아 복된 삶을 살려면 요 14:6절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밑으로 나오기만 하면 답을 얻어 쉼과 함께 평안히 살 수 있습니다.
마 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제사를 드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답으로 살던 사람들이
사탄의 계략에 빠져 자신들을 위해 전쟁의 신, 다산의 신, 풍요의 신등을 만들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며, 그리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우상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시편 115:5절에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망한다고 말입니다.
신 27:15“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또한 우상은 쇠붙이나 돌이 나무 따위로 형태를 만들어 세워 섬기는 것도 우상이지만
진짜 우상은 하나님보다 무엇이든 더 사랑하며 경외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마땅히 여호와를 경외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경외”로 번역된 히브리어“이르아”는 인간이 느끼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 또는 외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인 것입니다.
한자 경외나 외경(敬畏,畏敬)이란 뜻도 위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 경(敬)자는 제사(경배, 예배), 감사란 뜻과 외(畏)자는 두려워 하다는 뜻입니다. |
신 10:20“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섬기며”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또는 제사(예배)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출애굽한지 삼 개월이 되던 날에 시내 광야에 이르러 모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나며,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산양 뿔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자 진에 있는 모든 백성이 두려워서 떨었다”(표준 새 번역 출 19:16)
그렇다면 왜 이들은 두려워 떨었을까요?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기 까지 먹고(출16:3) 마시고(출17:2) 정력 문제(민11:5)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를 대적하므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끼고 천둥과 함께 시퍼런 번개가 치면
아무리 담이 큰 사람이라 할지라도 두려워하며 떨 수밖에 없습니다.
심리학자나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람이 천둥번개가 치면 두려워하는 것은 지축을 흔드는 소리나 번쩍이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외적인 현상이고, 정작 사람이 놀라며,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 안에 감추어진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사람이 지축을 흔드는 소리나 번개에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은
노아의 대 홍수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면 유독 더 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옆 사람이 몹시 놀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느냐고,
이 두렵고, 떨림이 변하여 경외가 되고 그리고 제사(예배)로 승화 된 것입니다.
두렵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이 신비한 힘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이 경외 또는 외경인 것입니다.
저는 매주 월요일 등산을 합니다.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 말에 의하면 높은 산 앞에 서면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킨 스쿠버들이 넓고 깊은 바다 속을 들어가려면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묘한 힘이 자신들을 오르게 하고, 뛰어 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르고, 뛰어들면 거기에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경의로움이 있다고 합니다.
저 또한 높은 산은 두렵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고 오르면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
신비로운 아름다운 풍광 앞에 저도 모르게 하나님을 찬송하곤 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두려움 넘어 오는 경배, 즉 경외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경외를 잘 나타낸 성경 구절이 창세기 39:9절의 요셉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요셉은“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을 하며, 음탕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며 그 자리를 나왔습니다.
저 같았으면 하나님 딱 한 번만 그리고 잘 되면 더 큰일 할께요! 라고 했을 텐데,
그런데 요셉은 그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심이며, 경배이며 신앙이며,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식과 지혜였던 것입니다.
잠 3:7“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물론 이일로 인해 감옥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또한 이일로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자기 민족을 아사(굶주림)에서 구원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경배하는 것은 앞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인간의 영혼에 내재 되어 있는 종교성 때문인 것입니다.
이 종교성은 영적인 인간 누구나에게 있는 본능으로서 과거에도 작용을 하였고,
현재도 작용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그 날 까지
어떤 민족, 어느 누구에게라도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h 매슬로우라는 사람은 인간에게는 7대 욕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존 욕구, 안전 욕구, 소속감 욕구, 자존감 욕구, 지식 욕구, 미적 욕구, 자아실현 욕구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본능인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인 이러한 욕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에게 이러한 욕구가 없다면 그 사람은 짐승인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영, 혼, 몸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데전 5:23“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인간은 나이가 들면 육체는 하나님 말씀대로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러나 육체 안에 있던
영혼은 비 물질로서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없는 불멸체로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마태는 10:28절에 이렇게 기록 하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고 말입니다.
종교성이 없는 이 땅의 모든 짐승들은 그저 먹을 것과 잠자는 둥지만 있으면 되지만
그러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과 질병들,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종교성을 작용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거룩한 종교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더러운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각자 자신들의 목적에 맞는 우상들을 만들어 세워놓고 그것들 앞에 나아가 절을 하며
자기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 달라고 시간과 그리고 많은 물질들을 바치며,
심지어 사람의 생명까지도 바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레 20:2)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 사람들은 지금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이 세상 모두를 가졌다고 한들 만족을 못 느낄 것입니다.
인간의 만족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하므로
하나님과 교통 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될 때, 비로소 만족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 성령님의 역사로“예수를 주”(고전 12:3) 라고 고백을 하는 사람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시편 23:1)라고 고백을 하므로 만족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며 살 수 있지만 반대로 세상 것에 만족을 하려고 하면
만족 할 수도 없지만 그 끝은 모든 것을 가졌던 솔로몬이 전 1:2절에서 말 한 것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 고백은 돈, 권력, 명예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이 고백은 자기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부귀를 누려 보았지만
하나님이 없으면 헛것이다.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라는 고백인 것입니다.(시 23:1~)
그렇습니다.
종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좋은 집에서 산해진미와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고 살아도
그 마음은 무언가 비어있는 듯 허전 하게 느껴 질 것입니다.
전도서 1:14절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라고 말입니다.
저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이란 죄로 인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아이가 잘못을 하였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엄마 아빠가 알까봐서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망과 벌이 두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책망과 벌이 없다면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부모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종교적 본능이란 소속감과 그리고 안전에 대한 보호 본능의 작용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맛있는 과자를 먹으며, 그리고 각종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자기 눈앞에 무서운 상황이 일어나면“엄마, 아빠”를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맛있는 과자, 좋은 옷과 장난감이 아니라 자신의 곁에 엄마 아빠가 계셔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아이는 불안해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비록 여기 저기 꿰맨 옷을 입고, 보리 개떡을 먹으며, 나무로 만든 칼을 가지고 놀아도
엄마 아빠가 곁에 있는 아이는 절대로 불안 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엄마 아빠가 곁에 있어서 보호 해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장년이 되어서도 자신에게 생각지 못한 상황이 갑자기 발생을 하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엄마! 또는 아버지! 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삶이 고달프고, 힘들고, 어렵고, 몸과 마음이 아프면 엄마 아빠에게 달려가
위로를 받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는 기독교 문화를 가지고 사는 서양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Oh My God” 오! 나의 하느님! 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이 있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로부터 보호 받고 싶은 본능이 작용을 하는데
이 보호 본능이 바로 종교 본능인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본능들에 의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이 다가오면
도교든, 유교든, 흰두교든, 불교든 또는 신자든 무신론자든 엄마 아빠를 부르듯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오! 나의 하나님! 이라고 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토록 하나님을 찾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를 솔로몬은 잠언 20:2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하나님)의 등불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22:29절 외에 성경 여러 곳에서 기록하기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인간의 영혼을 밝히는 것은 여호와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니까 이 등불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하여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 된 사람, 하나님께 묶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시편 65:4절 말씀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
에베소서 1:4절 말씀“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신”사람,
또는 요 3:5절 말씀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는 어리석은 말입니다.
인간의 죽음이란 영과 육의 분리로서 흙으로 지음을 받은 육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러나 불멸체인 영은 죽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영생복락의 부활로(마태 25:46)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자기 배를 신으로 삼아 돈, 권력, 명예를 쫒는 자는
그 영혼이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막 9:48) 뜨거운 유황불에 던져저
영원히 형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죽으면 썩어질 “육체”인지 아니면 영원히 사는 “영혼”인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 사람들의 자기 사랑은 영원히 사는 영혼 사랑이 아니라
때가 되면 죽어 썩어질 육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썩어질 육체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썩어질 육체를 위해 좋은 음식을 찾고
유명 메이커 옷을 입고 피부 건강을 위해 미용실에 가서 시간과 많은 돈을 들입니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 썩어 없어질 몸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행위는 어디까지나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나 또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행위인 것이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보물이 고급스러운 상자에 담겨 있다고 합시다.
고급스러운 상자가 보물이겠습니까? 아니면 안에 담긴 내용물이 보물이겠습니까?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고급스러운 상자를 보물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육체는 그릇 즉, 영혼을 담는 상자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랑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육체라는 상자 안에 담긴 영원 불멸체인 영혼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상자가 아무리 문양이 화려하고 그리고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상자는 상자일뿐이지
상자가 보물이 될 수는 없는데도 사람들은 이 상자에 돈이라는 황금으로 덧칠을 하고
권력이라는 문양을 새겨 명예라는 이름으로 높은 곳에 올려놓고 자랑 하고 있습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껍데기인 상자만을 치장 할 줄 알지 정작 상자 안에 담겨있는
보물인 영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보물을 도적맞고 가슴을 치며 후회 할 때가 올 곳입니다.
이제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사랑 할 수 있도록
먼저 구원 받은 우리들이 삶으로 영혼 사랑을 보여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인간은 먼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여호와를 경외함이 인생의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근본이라는 말씀에서“지식”으로 번역이 된 히브리어“레쉬트 다아트”라는
이 단어는 지혜의 출발점 혹은 최상의 지혜를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인간에게 있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이 말은
하나님 경외가 지혜의 삶의 출발점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최상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솔로몬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상 3:9“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정성껏 구한 지혜로운 마음이란 히브리어로“레브 쇼메아”인데
여기서“쇼메아”는“쉐마”에서 온 단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인 것입니다.
지혜라고 하니까 남 보다 뛰어난 생각이나 또는 말이나 행동이 아닙니다.
지혜란 바로 하나님에 말씀을 듣는 마음이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있어 하나님 경외는 제사(예배)이며,
이 제사는 하나님과 연결이며, 이 제사는 하나님께 지혜와 답을 구하는 행위인 것이며,
또한 사망의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절대적인 능력인 것이며,
성도들의 삶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면,
경외는 제사(예배)이며, 지혜이며, 능력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답(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답(答)으로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복(福)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두려움을 넘은 경배라면 지식의 근본이라 함은
세상을 경영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지혜로운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로 세상을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지만 여호와를 경외함이란 하나님 안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지혜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미련한 사람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합니다.
여기에서 미련에 해당되는 히브리어“에빌”은 “두껍다. 어리석다”라는 뜻으로서
감각이 예민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미련 “에빌”은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 떠났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민감하지 못한 인간은 탐욕으로 인하여 마음이 어리석고 둔해졌으며,
이런 사람은 매사에 돈, 권력, 명예, 인기가 그리고 쾌락이 최고다. 라고 외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줘도 못 먹느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줘도 못 먹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며, 방황하는 사람이며,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에 대해 시편 14:1절과 53:1절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라고 말입니다.
“없다 하는 도다.” 이 말에 뜻은 “보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웃기는 이야기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썩어서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말씀인 것이지
윤리와 도덕적으로 좋은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 안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 안 되었다는 것이며,
우리말 어원으로는 곡물의 껍질이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는 뜻인 것입니다.
곡물이 우리의 입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껍질이 벗겨져야 합니다.
곡물에 껍질이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요 곡물의 껍질이 벗겨진 것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담의 원죄로 인해 영적으로 완전히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이 절구에 의해 껍질이 완전히 벗겨지고 그리고 맷돌에 갈려 가루가 되어 빵이 되어 우리의 양식이 되어 주시고, 술틀에 짜여 우리에 음료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 53:5절“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렇습니다.
곡물 껍질이 벗겨져야 사람들의 양식이 될 수 있듯이 우리 또한 벗기고, 갈리어지고 짜져서
이웃의 양식과 음료가 되어야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요 이웃과 연결되어 있는
삶으로 예배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살리려면 반드시 누군가는 벗기고, 갈리어지고 짜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돈, 권력, 명예, 인기, 건강, 쾌락 등은 물론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들의 껍질은 더욱 두꺼워져 사망의 길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끝은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지옥의 영원 형벌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참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눅 12:19~20절에서 누가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구원 받은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일에는 둔감하여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세상을 앞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 늘 깨어 있어 하나님께 민감해야 세상을 본받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롬 12: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으로
또는 환경과 각종 재난과 메스컴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보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잘 못 가고 있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개개인의 삶을 통해 메시지를 전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은 성도들 안에 성령으로 역사(役事)하시므로
성도들의 모든 삶을 주관 섭리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감시나 감독이나 간섭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이 바로 미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항상 깨어있어서 매사에 민감하기 때문에
항상 신중하고 모든 일에 사려가 깊어 지혜롭게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에서 오는 지혜요,
실질적인 성령 충만이며,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물론 예전에도 신령과 진정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경외 하시므로 예배하며 사셨겠지만
이 시간 이후로 더욱더 마음과 뜻과 그리고 정성을 다해 사랑의 하나님을 경외하셔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생에 모든 문제의 답인 지식과 지혜와 그리고 능력을 받으셔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여러분에 삶에는 평안과 기쁨이 넘쳐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고전 14:20절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되라고 말입니다.
jykch2002, 2015, 7, 26
惟爺 金 鐵 鎬 牧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