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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을 바른 뒤 금을 입힌 칠박도금(漆箔鍍金) 기법이 사용된 보살상이다.
상투를 높게 틀은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얹기 위한 턱을 만들었고, 몸에는 화려한 장식을 덧붙였다.
이러한 보살상은 원元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부터 많이 만들어졌다.
등을 굽힌 자세 또한 고려 후기 불상에 자주 나타난다.
고려시대 금동보살상 중에서 큰 편에 속하며, 장식이 섬세하고 상태 또한 양호해서
고려시대 금속공예와 불교미술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정병, 향완, 주전자 처럼 널리 쓰이는 종류의 그릇은 도기, 자기, 금속기 같은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지곤 했다.
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태와 기법을 다듬어나갔다.
특히 청자는 청도기와 도기, 곧 질그릇의 다양한 형태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고려의 질그릇은 상당히 많이 전해지며, 일상에서는 질그릇을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봉형 숟가락>
<약시형 숟가락>
<제비꼬리 모양 숟가락>
숟가락은 물기 있는 음식 또는 국물을 떠 먹기 위한 도구로, 음식을 뜨는 부분인 술잎과 자루로 구성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羅津) 초도(草島) 조개무지에서 뼈로 만든 숟가락이 출토된 적이 있고,
공주 무령왕릉이나 경주 금관총・월지 등의 유적에서 청동 숟가락이 나와
늦어도 삼국시대부터는 숟가락을 널리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숟가락의 모양이 정형화되어
대체로 음식을 뜨는 부분은 납작하고, 크게 휘어진 자루의 끝이 제비꼬리 모양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숟가락은 고려시대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 사람들이 식생활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같이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옛날부터 숟가락을 사용했지만,
중국의 숟가락은 액체를 뜨는 국자에 가까운 것이었고 일본의 숟가락은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에서나 쓰이던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식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와 중국, 일본의 식생활 방식은 예전부터 크게 달랐다.
이러한 습관의 차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석가모니의 열반에 대해 말한 불교 경전으로, 중국 북량의 인도 승려 담무참[Dharmakema]이 번역한 것이다.
현존 열반경류 경전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내용이 완비된 이 경전은, 여래의 법신은 생기고 사라짐의 변화가 없으며,
모든 중생은 불성(부처로서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대승大乘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유물은 1241년(고려 고종 28)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반열반경의 유일본으로,
각 경판 맨 앞의 판수제에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권차, 장차, 함차를 표시하였다.
장차의 단위는 장丈자를 쓴 초조대장경판과 달리 장張자를 썼다.
간혹 함차 아래에 쓴 것은 경판을 직접 새긴 각수의 이름이다.
[역사의 길]
불교에서는 존경받는 승려가 죽으면 탑을 세우고 승려의 생애와 그 뜻을 높이 기리는 비석을 세운다.
이러한 탑을 승탑, 또는 부도라고 하며 비석은 탑비라고 합니다.
이 탑비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월광사를 크게 일으킨 신라 말의 고승 원랑선사(816-883)의 일생을 기록한 비석이다.
원랑선사가 죽은 뒤 헌강왕(憲康王)은 탑에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 김영(金潁)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탑비의 받침은 거북이 모양이고 비석 위에는 용 모양을 새긴 머릿돌이 얹혀 있다.
이러한 탑비의 모습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했다.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堤川 月光寺址 圓朗禪師塔碑)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60호로 지정되었다.
1922년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이렇게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조선실]
측우기는 세종23년(1441년) 세계 최초로 발명되어 이듬해 전국적으로 강우량 측정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그 전에 땅 속에 스며든 비의 양을 잴 수 없던 비합리적 방법에서 벗어난 15세기의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는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측우기로 1837년(현종 3년)에 제작되었다.
금영은 충남 공주에 있던 충청감영(관찰사가 일하던 곳)의 다른 이름이다.
실제 금영측우기는 1915년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1971년 반환받아 현재는 기상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관상감 측우대(觀象監 測雨臺)는 조선시대 측우기를 올려 놓고 강우량을 측정하던 것으로 지금은 대석(臺石)만 남아있다.
세종때의 것으로 원래 관상감에 있던 것을 서울 매동초등학교가 이사하면서 가져가 교정에 있던 것을
지금은 기상청에 옮겨 놓았다.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를 창업한 태조太祖(재위 1392-1398)의 4대조인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와 태조, 태종太宗(재위 1400-1418)까지 6대 임금의 행적과 조선의 건국 과정, 관련 설화 등을 담은 장편 서사시입니다. 총 125장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글(훈민정음)로 지은 본문 뒤에 한문으로 주석을 달았습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1년 전인 1445년(세종 27)에 완성되었으며, 1447년(세종 29)에 처음 간행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실용적이며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기까지 세종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은 연구와 시험을 거듭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이 과정에서 처음 쓴 작품으로 15세기 언어와 문학, 서체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또한 훈민정음을 사용해 조선 왕조 창업을 노래함으로써 문자의 권위를 높이려 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입니다.
세종이 박연에게 편경을 만들 돌을 찾으라고 명을 내렸다는... 그 편경
ㄱ자 모양의 돌 16개를 나무틀에 매달아 두드려 소리가 날 수 있도록 만든 악기다.
돌이 두꺼우면 높은 소리가 나고, 얇으면 낮은 소리가 난다.
1441년(세종 23년) 측우기의 제작과 함께 하천의 수위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청계천과 한강에 수표를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441년(세종 23) 8월에 마전교(馬前橋)의 서쪽 물 가운데에 넓적한 돌[薄石]을 놓고,
그 위를 깎아 받침돌[趺石] 두 개를 세운 다음 그 사이에 모난 나무 기둥을 끼워 넣었다”고 한다.
받침돌과 나무 기둥은 쇠갈고리[鐵鉤]로 묶어 고정시키고, 나무 기둥에 척(尺)·촌(寸)·분(分)의 수를 새겨
호조의 낭청(郎廳)으로 하여금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한편 한강변의 암석에도 동일한 형태의 수표를 세우고 나루터를 관리하는 도승(渡丞)으로 하여금
수위를 측정하여 호조에 보고토록 하였다. 청계천에 수표를 설치한 이후 마전교는 수표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
'달항아리'라는 명칭은 둥근 달을 연상시킨다 하여 높이 40cm가 넘는 백자 항아리에 붙이는 이름이다.
커다란 대접 두 개를 잇대어 만들기 때문에 달하아리의 선은 정형화된 원이 아니라 살짝 이지러져
실제의 달과 같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충신, 효자, 열녀의 바른 행실을 모은 책
삼강은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어버이와 자식(父爲子綱),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1431년(세종 13) 집현전 부제학 설순(偰循) 등이 왕명에 따라 삼강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하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1481년 한글로 번역되어 간행되었고, 그 뒤 1511년(중종 6)과 명종·선조·영조 때 각각 중간되어
이후 지속적으로 도덕서(道德書)로 보급되어 유교윤리 전파에 활용되었다.
‘조선 국왕’ 글자가 있는 금탁: 조선왕실의 불교 후원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은 회암사(檜巖寺) 보광전에 매달았던 전체 높이 31.7cm나 되는 규모가 매우 큰 풍경으로
회암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풍경에는 13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에서 풍경을 ‘금탁(琴鐸)’으로 지칭했기에 이 풍경을 금탁으로 부른다.
금탁 상단 표면에 ‘왕사 묘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자’라는 글자가,
테두리에 조선이 만세토록 전해질 것을 발원한 내용과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조선 왕실과 사찰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국왕은 태조 이성계, 왕현비는 신덕왕후 강씨, 세자는 이방석이다.
왕사 묘엄존자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무학대사이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도 승려를 임금의 스승으로 두는 고려의 왕사 제도를 유지했고
왕실 인사들이 불교 관련 활동을 지속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금탁 테두리의 글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 보광전의 네 모퉁이는 금벽으로 화려하게 꾸미어 천궁보다 훌륭하다.
금탁을 달아놓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바란다.
우리가 이 신묘하고 아름다운 연기를 받들어 조선의 국호가 만세에 전해지도록 하소서.
화려하게 장식된 왕의 의자
경복궁 근정전 내부 중앙에 화려하게 장식된 닫집과 왕이 앉는 어좌(御座)가 놓여 있다.
어좌 뒤에는 태양,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소나무를 그린 일월오봉(日月五峰) 병풍을 설치했다.
왕이 공식적으로 머무는 공간에 이 병풍을 설치하여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권을 상징했다.
근정전과 닫집 천장은 용 문양으로 장식하여 왕의 위엄을 높였다.
왕이 앉는 의자를 어좌, 용상, 옥좌라고 한다. 왕의 권위와 존귀함을 표현하기 위해 어좌 주변은 특별하게 장식되어 있다.
한 단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뒤편으로는 다섯 봉우리의 산과 바다, 태양, 달 등을 그린 일월오봉도의 병풍이 서 있고
위쪽으로는 두 마리 용이 천장에 그려진 신비감과 위엄을 자아내는 닫집이 달려 있다.
이처럼 어좌·일월오봉도·닫집은 서로 어우러져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왕권·왕조를 상징하고 있다.
준(尊)은 제사 때 술이나 물을 담았던 제기(祭器)이다.
조선초 상준(象尊)과 희준(犧尊)은 코끼리와 소 문양이 있는 그릇 형태였으나
성종때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가 간행된 이후
수록된 도판의 모습대로 코끼리와 소의 형상을 본뜬 제기가 제작되었다.
국가의례에서는 금속 제기를 사용했으나 지방 향교에서 지내는 소규모 제례에서는 점차 도자기를 사용하였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도이며 동아시아에서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다.
태종 2년(1402) 김사형·이무·이회 등이 제작한 이 지도는 중국 원나라에서 들여온 세계 지도를 바탕으로
조선과 일본에 대한 부분을 보완하고 세계의 땅에 대한 당시의 정보를 모아서 완성했다.
중국과 한반도를 유난히 크게 그리긴 했지만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한 조선 초의 세계 인식을 잘 보여준다.
세계 여러 나라의 지명 130여 개를 표시하는 등 당시의 지리 정보를 충실히 담아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로가 부정확하지만, 중남부 지방의 해안선과 하천은 비교적 정확하다.
풍수지리 관념에 따라 산줄기의 흐름을 중시하여, 중요한 산줄기를 상세히 표시하였다.
천명사상을 담은 별자리 지도
각석의 전체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윗부분에는 짧은 설명과 함께 별자리 그림이 새겨져 있고,
아래 부분에는 천문도의 이름, 작성 배경과 과정, 만든 사람의 이름 및 만든 때가 새겨져 있다.
중앙에 있는 둥근 별자리 그림에는 중심에 북극을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와 남북극 가운데로 적도를 나타내었다.
또한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 등분 한 후 1,464개의 별들을 점으로 표시하였다.
이 그림을 통해 해와 달, 그리고 5행성(수성, 금성, 화성,목성, 토성)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그 위치에 따라 절기를 구분할 수도 있다.
왕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고 한다. 조선 초기에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할 전각 여섯 곳이 세워졌다.
태조의 초상화는 모두 26점 만들어졌지만, 전주시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던 초상화만 유일하게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초상화는 태종 10년(1410) 전주부에 봉안되었고 영조 39년(1763) 한 차례 수리를 거친 후
고종 9년(1872)에 다시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일본 주력 조총과 조선의 주력 활과 화살을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특히 삼안총은 처음보는데 깜놀!
승자총통이나 현자총통은 이순신 장군 덕분에 많이 들어봤는데... 삼안총은 처음 들어봤다.
삼안총(三眼銃)은 한번에 3발을 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명군이 참전하면서 도입된 무기다.
제작자 이름과 목판의 판각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도면 속에 1776년(영조 52) 건립한 경모궁(景慕宮)이 기입되어 있고, 1824년에 세운 경우궁(景祐宮)도 기입되어 있으며,
경복궁은 폐허된 것으로 표현된 바 1825년경의 제작이며, 그 필법으로 보아서 김정호의 제작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목판>
김정호(金正浩)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인쇄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이다.
대동여지도가 1861년에 간행되었으니 목판은 그즈음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목판에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바탕으로 고을, 교통로와 통신 시설, 군사 시설 등 각종 정보를 정교하게 조각했다.
목판의 크기는 대개 가로 43cm, 세로 32cm 안팎이며,
목판 하나에는 남북 약 47km(120리), 동서 63km(160리)의 지리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100년쯤 된 피나무를 사용했으며 목판의 앞뒤 양면에 앞뒷면을 모두 사용해 조각했다.
대동여지도 전체를 조각하려면 목판 60매 정도가 필요하며,
목판으로 인쇄한 지도를 모두 이어 붙이면 세로 약 6.7m, 가로 약 3.8m 크기의 대형 전국 지도가 만들어진다.
오늘날 남아 있는 12개의 목판 중 11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목판에는 〈대동여지도〉를 처음 간행한 뒤에도
김정호가 교정과 수정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김정호의 열정을 잘 보여준다.
고산자 김정호가 백두산을 8번 오르내리고 전국을 세바퀴나 돌며 완성했다는 대동여지도...
대원군(1820-1898)이 국가기밀누설죄로 김정호 부녀를 죽이고 대동여지도와 목판을 모두 불태웠다고 전해졌는데...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대동여지도 목판11장이 발견되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 원본이 남아있지 않아 그와 가장 유사한 <동국대지도>는 그 가치가 높다.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필사본은 2007년 12월 31일 보물 제1538호로 지정되었다.
<능엄경언해를 찍은 한글 활자>
"1461년에 간행된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에 사용한 한글 활자이다.
『능엄경』은 ‘큰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이 되기 위해 보살들이 닦는 수행법을 설한 경’이며,
‘언해’란 한문을 한글로 풀어서 쓴다는 뜻이다.
『능엄경언해』는 세조가 한글로 풀이한 『능엄경』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것으로,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먼저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본문의 한문 부분은 1455년에 강희안(姜希顔)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만든 을해자乙亥字로 찍었다.
이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는 ‘을해자 병용 한글 활자’, 즉 ‘을해자와 함께 쓴 한글 활자’라고하며,
『능엄경언해』에 처음 사용해 ‘능엄한글자’라고도 한다.
이 한글 활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을해자가 주조된 1455년과 『능엄경언해』를 인쇄한 1461년(세조 7년) 사이로 추정된다.
조선은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계승해 국가주도로 수십 차례 금속활자를 만들어 다양한 서적을 인쇄하는 데 사용했다.
이는 서양의 여러 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다른 한자 문화권 국가와도 다른 조선 인쇄문화의 특징이다.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자였지만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만든 활자 가운데는 한글 금속활자도 있다.
특히 『능엄경』을 찍은 이 금속활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활자일 뿐 아니라 한글 활자라는 점에서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다. "
<외규장각의궤>
의궤(儀軌)는 ‘의식의 본보기가 되는 책’이라는 뜻으로, 왕실의 혼례와 장례, 국왕의 즉위식 등 중요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뒤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다.
의궤를 비롯해 왕실의 중요한 자료들은 정조(正祖)가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인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대부분 불에 타 없어졌다.
그 가운데 의궤 297책은 프랑스군이 약탈해 가져갔다가 145년 만인 2011년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외규장각 의궤는 고급 종이에 정성껏 글을 쓰고 천연 안료로 곱게 그림을 그린 뒤
고급 비단으로 표지를 싸서 놋쇠 물림으로 묶었다.
우리나라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왕이 보기 위한 것으로 당대 최고의 도서 수준과 예술적 품격을 보여 주며,
특히 국내외에 한 점밖에 없는 유일본이 상당수 포함되어 더욱 중요하다.
의궤는 같은 유교 문화권을 형성했던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기록 유산이다.
<정리자>
정리자(整理字)는 정조 20년(1796) 『정리의궤(整理儀軌)』를 찍기 위해 만든 활자다.
글씨체는 청나라 때 만든 사전인 『강희자전』을 바탕으로 했다.
철종 8년(1857) 활자를 보관해 두었던 주자소의 화재로 정리자가 불타버리자 이듬해 다시 정리자를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정리자 인쇄본)>
이 의궤(儀軌)는 1794년(정조 18년) 1월부터 1796년(정조 20년) 8월까지, 수원 화성 성곽을 축조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화성 성곽은 원래 10년 예정의 계획을 세웠으나 정조가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지시한 축성의 방략(御製城華籌略)에 따라 착공되어 32개월 만인 1796년(정조 20년) 완성되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축성법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축성에 사용한 각종 기계들이 그려져 있다.
이 중에서 거중기(擧重機)는 서양의 과학 기술에 정통한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역학기술서(力學技術書)인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하여 제작하였다.
당시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만 5000근의 돌을 들어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운현궁에서 만든 서구식 대포인 운현궁 화포가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는 비석인 척화비 앞에 나름의 구성을 한 듯하다.
[대한제국실]
1897년 10월, 고종은 서울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皇帝)에 오르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선포하였다.
이후 고종은 정부조직, 관직 명칭, 제례를 포함한 의식 및 예절을 바꾸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그 조치 중 하나가 이전에 사용하던 국새(國璽)를 황제국가의 품격에 맞게 다시 만드는 것이었다.
즉 기존의 거북이 장식을 황제를 상징하는 용으로 바꾸었다.
일제강점 후 잠시 일본에 빼앗겼던 이들 국새와 어보(御寶)는 해방 후 되찾아 총무처에서 관리하던 중
한국전쟁으로 많은 수가 산실되고 현재는
‘대원수보(大元帥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3개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대원수보는 군대 운영과 관련된 업무에 사용한 것이고, 제고지보는 고급 관원의 임명에 사용하였다.
칙명지보는 통신조서에 사용한 것이다. 이 국새는 천은(天銀)에다 금으로 도금한 것으로 인수(印綬)는 없어진 상태다.
<궁내부 현판>
궁내부는 갑오개혁 때 입헌군주제를 실현하고자 만들었으나
대한제국에 들어서는 전제군주관을 강화하는 황제직속 기구가 되었다.
<기념장>
대한제국기에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기념장이다.
대한제국은 모두 다섯 번 기념장을 발행했다.
1901년 고종 황제 성수(聖壽) 50주년 기념장,
1902년 고종 황제 망육순(望六旬)과 등극 40주년 기념장,
1907년 황태자의 가례 기념장과 순종 황제 즉위 기념장,
1909년 순종 황제의 민정시찰을 기념하기 위한 남서 지역 순행 기념장 등이다.
<금책>
금책은 대한제국 수립 후 권위와 격식이 높아진 데 따라
황제와 황후에게 존호나 시호를 올릴 때 지어 바쳤던 송덕문을 금판에 새긴 것이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아들로 이미 두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선포에 따라 황태자로 격상되어 책봉되었다.
순종 금책은 고종 황제가 태자 척拓을 황태자로 삼으면서 내린 것이다.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평상복인 황룡포(黃龍袍)를 입고 어좌御座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이 그림과 같이 황룡포를 착용하였다.
<상투 튼 사람들과 함께한 15년>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조선에서의 체험을 서술한 책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의 부인인 그녀는 조선의 첫인상부터 직접 목격한 궁중 생활과 궁중의 숨은 이야기,
관서·관북 지방 여행, 한국 초대 교회의 어려움 등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명성왕후의 전용 의사로서
갑신정변,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한국 근대사의 중요 사건들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이를 기록했다.
"나는 지도자에 대한 조선 국민들의 엄격한 감시와
국민들에 대한 관대하며 일관된 정직한 통치가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더라면
조선사람들은 훌륭한 민족으로 육성되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 센즈, <조선 비망록>
"서양 사람들은 신문 보는 일을 인생의 일대 쾌락이라고 한다. (중략)
세계의 물정을 훤하게 알고 자기의 견문을 넓혀 처세하는 길을 닦는 데에는 신문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 유길준 <서유견문>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시대에 1904년 7월 18일 양기탁이 영국인 베델과 함께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한 항일 신문으로
뒤에 국한문판도 발행되었다.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고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에 앞장섰으며 애국계몽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순한글판은 여성들의 개화와 자주의식 고취에 공헌했고 우리말 보급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1910년 8월 28일 일제 강점을 앞두고 종간되었다.
문화의 힘을 믿었던 백범 김구의 꿈은 전세계에 퍼진 K문화로 실현된 것일까?
이제 2층으로 올라간다.
[사유의 방]
<사유의 방>
국보로 지정된 두 점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상설 전시하는 공간이 사유의 방이다.
"두로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Time to lose yourself
deep in wandering thought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단순하고도 균형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이 인상적이다.
분명하개 조각된 눈, 코, 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두 보살이 같은 듯 다른 콜라보레이션이 위의 원형을 이루는 조명과 더불어 정말 사색의 순간을 연출해 낸다.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돈자형(墩子形) 의자 위에 앉아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왼쪽 다리 위에 걸쳤으며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명상에 잠긴 이른바 반가사유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 특이한 형태의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 위에 초생달과 둥근 해를 얹어놓은 일월식(日月飾)의 장식이 표현되어 있어
일명 '일월식삼산관사유상(日月飾三山冠思惟像)' 이라고도 한다.
얇은 천의(天衣)는 양쪽 어깨에서 넓게 펴져서 양끝이 뻗어 있고
몸 앞쪽으로 내려온 천의자락은 무릎 부분에서 교차하여 다시 양 팔에 걸쳐 내려오다가 대좌 양쪽에서 리본으로 묶여져 있다.
얼굴은 약간 네모난 편으로 눈을 가늘게 떴으며 코는 유난히 오똑하게 표현되어 있고 입가의 미묘한 미소 등에서
사색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매우 날씬하게 표현되었는데 좁은 어깨와 가는 허리ㆍ팔 등에서 부드러운 곡선미가 잘 드러나 있다.
그동안 번갈아 전시되었던 6세기 후반경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인 두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이렇게 동시에 관람하게 된 매우 의미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감동적인 순간이라 처음에 동영상을 찍으려고 하다가 직원이 동영상 촬영금지라는 안내를 받고 바로 지웠다.
아쉽지만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고 하니... 괜찮다.
사유와 사색은 이렇게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해야 함을 깨닫고 갑니다.
긍정적 사고의 힘을 믿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사유하고 사색했던 지난 날을 반성합니다.
[서화실]
봉화 태사자 낭공대사탑비(奉化 太子寺 朗空大師塔碑)는 2015년 4월 22일 보물 제1877호로 지정되었다.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로,
낭공대사(朗空大師, 832~916)의 탑비이다.
이 비석은 우리나라 서예 신품사현(神品四賢) 김생(金生, 711~791?)의 글씨를 모아 정리하여 만든 집자(集字) 비석으로
김생의 글씨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 서예사에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김생은 '해동(海東)의 서성(書聖)', '신라의 왕희지(王羲之)'로 추앙받는 명필로,
그의 글씨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연구된 바 있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작지만 김생의 힘찬 필치를 잘 보여준다.
집자된 김생 필적을 통해 통일신라 서예의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다.
비석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새겨져 있는데, 낭공대사는 916년 2월에 열반하였다.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문신이자 명필의 한사람인 최언위(崔彦撝, 868-944)가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낭공대사의 문하인 단목(端目)이 김생의 글을 집자하였다.
<어필석각>
조선의 임금들은 대부분 문예에 뛰어났습니다. 세자 시절부터 오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위에 올라서도 공부를 계속했기에 문장과 서예에 남다른 필력을 뽐낸 인물이 많았습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임금은 선대 임금들의 글씨를 수집하고 돌에 새기는 이른바 ‘어필석각御筆石刻’을 제작했습니다. 이는 역대 임금의 위업을 계승하고 효를 다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역대 임금의 문예文藝가 새겨진 어필석각은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 왕실의 문화적 우월성과 정통성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어필석각을 만든 또 하나의 목적은 임금들의 글씨를 탑본搨本해 널리 보급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열성어필列聖御筆』은 어필석각을 탑본해 엮은 서첩으로, 여러 부를 제작하여 유포했습니다. 역대 임금 가운데서도 선조宣祖는 명필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선조는 스스로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석봉石峯 한호韓濩라는 당대 최고의 명필을 발탁하고 후원해 한국 서예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서화실에는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문종, 성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의 글씨를 새긴 어필석각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어필석각에는 왕이 쓴 시문과 서찰, 큰 글씨의 서예 작품 등 다양한 글씨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격조 높은 문예의 자취가 돌에 새겨져 영원히 전해집니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을 맞아 호랑이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검은 호랑이의 해"
소나무와 기이한 바위를 배경으로 날카로운 눈매와 이빨을 드러낸 사나운 줄범과 표범 13마리가 등장한다.
예로부터 줄범과 표범은 '범(호랑이)'으로 불렸다. 그림 곳곳에 까치도 등장하는데, 까치와 호랑이는
'좋은 소식을 부르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나무 아래 다소곳이 앉아 있는 호랑이가 고개를 돌려 까치를 바라보고 있다.
호랑이는 새빨간 입과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고 있지만 무섭지 않다.
부리부리한 눈알과 익살스러운 표정이 귀여워서 미소를 짓게 한다.
또한 쫑긋 서 있는 귀와 검은 털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네 발은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를 보는 듯하다.
이 그림은 매년 정초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그렸던 세화(歲畫)로 보인다.
호랑이가 땅에 바짝 엎드린 채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다.
이빨을 드러낸 채 동그란 눈을 부라리고 있지만 전혀 무섭지 않다.
새하얀 눈썹과 널찍하고 두툼한 다리, 심술 난 호랑이 표정과 자세는 커다란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부리부리한 눈을 뜬 채 기다란 수염을 드리운 호랑이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호랑이를 친근하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냈지만,
동그란 눈 위에는 ‘왕王’자처럼 보이는 줄무늬가 있는데 호랑이가 동물의 왕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또한 호랑이의 털을 가는 선으로 길게 내리그어 표현한 점이 흥미롭다.
산의 군자는 엎으려 있으나, 모든 사물의 헤아림을 알고 있다네. "山君蹲伏 志在商量"
인문:「雲逋之印」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다는 의미가 담긴 그림이다.
호랑이는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표현되었고 입을 벌리고 있어,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살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가는 붓으로 짧은 선을 교차하며 호랑이의 털을 꼼꼼하고 그렸는데, 호랑이 털이 풍성해 보인다.
자연에서 누리는 우아한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다.
전시된 오른쪽 그림은 마음 가는 대로 책을 읽는 ‘수의독서(隨意讀書)’이고
왼쪽 그림은 거친 보리밥을 달게 먹는 ‘맥반흔포(麥飯欣飽)’ 장면이다.
그림은 화원 이인문이 능숙한 묘법으로 그렸고 글씨는 서예가 유한지가 예서(隸書)로 썼다.
그림 위쪽의 시구는 중국 남송 문인 나대경(羅大經)(1196-1242)이 지은 「산거山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시와 그림, 글씨가 잘 어우러진 작품인데 유한지의 실수로 이 두 그림은 글이 서로 바뀌었다.
원래 여덟 폭이었으나 일부만 전하고 있다.
2-1
마음 가는 대로 『주역(周易)』, 『국풍(國風)(시경)』,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이소경(離騷經)』, 『사기(史記)』와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한유(韓愈)와 소동파(蘇東坡)의 작품을 읽는다.
隨意讀周易, 國風, 左氏傳, 離騷, 太史公書, 及陶杜詩, 韓蘇文數篇.
2-2
집으로 돌아가 창문 아래 쉬면 산골 아내와 어린 아이가 죽순과 고사리에 보리밥을 지어주어 흔쾌히 먹는다.
旣歸臥窓下, 則山妻稚子. 作筍蕨供麥飯, 欣然一飽.
깊은 먹빛으로 무성한 여름 숲의 촉촉한 공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대작 산수화이다.
정선은 이 그림에서 자신 있는 기법을 모두 발휘했다.
재빠른 붓질의 피마준(披麻皴)과 미점(米點), 붓을 눕혀서 쓸어내리는 쇄찰법(刷擦法)을 적절하게 구사했다.
그림 위쪽에는 서화 품평을 잘했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글을 남겼다.
그는 "먹빛이 매우 깊고 흥건하며(極淋漓) 뜻을 충분히 펼친 걸작(得意作)"이라 평가했고,
도시에서도 그림으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보배 같은 작품이라 썼다.
그림에 산과 돌이 푸르게 예스럽고 기이하다.
흐르는 물이 쏟아지고, 높은 버드나무, 우거진 대나무, 초가집 사립문이 흐릿한 구름과 안개 사이로 보이다 말다 한다.
먹빛이 깊고 흥건하며 수목이 울창하므로, 겸재의 중년 작품 중에서 가장 득의작이라 하겠다.
정말 보배롭게 감상할 만하다. 이 복잡한 도성 안에서 우연히 펼쳐 놓고 감상하니 흐린 눈이 갑자기 밝아지는 듯하다.
어쩌면 내 자신이 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며 시를 읊는 사람과 자리를 같이 하고,
마주 앉아 세상을 떠나 맑고 고상한 재미를 함께 누릴 수 있으리라.
동기창(董其昌)은 〈망천도(輞川圖)〉에
"이것은 세상을 아주 잊어버리게 하는 가구家具"라 썼다.
"이 복잡한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다”고 누가 말하던가. 계사년(1773) 10월, 표암(豹菴) 쓰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중국 강서성 여산(廬山) 폭포를 상상하여 그린 작품이다.
수직으로 내리꽂는 폭포를 중심에 두고 수직준垂直皴으로 절벽의 거친 질감을 묘사했으며
붉은 물감을 곳곳에 칠해 단풍 든 가을 분위기를 살렸다.
그림 오른쪽에는 여산 소나무와 폭포의 기세를 찬탄하는 글을 썼다.
여산은 예로부터 많은 문인이 은거한 명산이었다.
여산 폭포는 당나라 이백李白(701-762)의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로 널리 알려져서
동아시아 서화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높은 소나무 울창하니 일천 병사가 늘어선 듯,
성난 폭포 급히 뿜어대니 만 마리 말이 울부짖는 듯. 여산 폭포. 겸재.
長松鬱立千兵列, 怒瀑急噴萬馬喧. 廬山瀑, 謙齋
백악산(북악산) 아래 경복궁의 봄날을 그린 그림이다.
안개와 신록이 새벽의 정취를 전해주는데 해태상이 지키는 육조거리는 텅 비어있다.
한일 강제합병 5년째인 1915년, 조선총독부는 여러 전각을 헐고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장으로 경복궁을 사용했다.
그해 심전心田 안중식이 그린 〈백악춘효〉 속의 온전한 궁궐은 화가가 기억 속에서 불러낸 옛 왕조의 영광이었다.
안중식은 조선의 마지막 도화서 화원으로, 근대 미술에 서화의 전통을 전달해준 인물이다.
백악산의 봄 새벽, 을묘년(1915) 여름날 심전이 그리다.
白岳春曉, 乙卯夏日心田寫.
총석정의 주상절리를 기묘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바다에서 수많은 돌기둥이 솟아올라 삼각형 구도를 이루었는데, 돌기둥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 기이하게 느껴진다.
기둥 위에 위태롭게 자라난 소나무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묘사 덕분에 실경의 웅장함이 한층 강조되었다.
상산일로(商山逸老)라는 사람이 1557년에 금강산과 관동 지역을 유람하고 여행기를 지었고,
시간이 흐른 뒤 그중 몇몇 명승지를 그려 병풍을 만들었다는 글이 그림 왼쪽에 쓰여있다.
시와 실경산수화로 산수 유람을 기념하는 전통이 조선 전기부터 이어졌음을 알려주는 귀한 작품이다.
나는 정사년(1557) 봄에 홍군洪君 덕원德遠과 관동 지방을 유람하기로 약속하여서
금강산과 대관령 동쪽 뛰어난 풍광을 두루 다 관람할 수 있었다.
그곳의 높고 빼어난 봉우리와 깊고 그윽한 골짜기, 천태만상의 구름과 산 기운, 아득히 넘실대는 호수와 바다를
모두 다 『유산록(遊山錄)』에 써서 들여놓고는 때때로 펼쳐보곤 했다.
그러나 속세의 인연이 이내 몸에 얽혀 있고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다 보니,
자연의 참모습은 한갓 꿈결에서나 떠올려볼 뿐이었다.
매번 옛사람들이 산수 속에 구름처럼 누워서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았던 것을 볼 적마다
그 고매하고 탁월함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다.
드디어는 몇몇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병풍을 짓고,
이 참에 옛날 유람할 적에 지은 칠언절구를 뽑아서 그림에 써서는,
내 다시는 갈 수 없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풀리지 않는 그리움을 자위할 따름이다. 상산일로가 글을 짓다.
강릉 경포대를 동해 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렸다.
단청이 선명한 경포대 누각 앞으로 석호인 경포 호수가 펼쳐져 있다.
오른쪽에는 소나무와 해당화가 무성한 백사장이 남북으로 이어지다가
아래쪽 강문교(江門橋)와 죽도(竹島), 초당(草堂)으로 연결된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오대산이다.
중요한 곳은 글로 지명을 써 넣어서 회화식 지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 그림은 조선 전기 관동 지역 실경산수의 드문 사례로,
왼쪽에 걸린 〈총석정〉과 함께 원래 하나의 병풍에서 분리된 그림이다.
오른쪽에 전시된 〈화성전도〉(본관8937)와 구도가 거의 비슷하지만 국왕의 행렬과 사람들이 등장하는 점이 다르다.
국왕의 행차는 그림 오른쪽 위 지지현(遲遲峴) 고개를 넘어 화성의 동문 장안문(長安門)으로 들어와 행궁으로 향하고 있다.
곳곳에서는 활 쏘기와 군사훈련이 벌어지고 있다.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조 사후에도 순조, 헌종, 철종이 여러 차례 화성에 행차했으므로
그림 속 행렬이 어느 임금의 행차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제6폭 행궁 위쪽에 1801년 건립한 정조의 사당 화령전(華寧殿)이 보이고,
제1폭 지지현 고개에 1807년 세운 비각(碑閣)이 그려져 있어 그 뒤에 제작된 병풍임을 알 수 있다.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세운 화성 일대를 조망한 병풍으로, 지형과 건축물을 지도처럼 알기 쉽게 묘사했다.
정조는 군사 요새이자 상업 도시로 화성을 건설했고, 저수지를 설치해 주변을 비옥한 농토로 바꾸었다.
화성 건설 과정은 『화성성역의궤』에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기록했다.
의궤에 실린 〈화성전도〉 그림은 이 병풍의 구도와 비슷하다.
의궤에는 화성 완공 후 큰 병풍의 〈화성전도〉를 세 틀 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병풍은 그 모습을 전해주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성이 병풍으로 널리 그려진 평양에 비견될만한 이상적인 도시임을 과시하는 그림이다.
북악산이 가운데 솟은 한양 시가지를 남산 자락에서 조망한 그림이다.
북악산 아래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1868년 경복궁 중건 이전의 풍경을 보여준다.
산세에 안긴 도성에는 수많은 살림집이 물고기 비늘같이 가득 늘어서있다.
그 사이로 원각사 석탑과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이 높게 묘사되었다.
오른쪽 위 삼각산과 도봉산을 엷은 쪽빛으로 그려 아득하게 먼 거리를 표현했다.
화가는 18세기 후반부터 인구가 폭증하고 있었던 한양의 도시경관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평화롭게 포착했다.
금수정(金水亭)은 조선 전기에 지어진 정자로, 예전부터 영평8경(永平八景)의 하나로 꼽혀왔다고 한다.
영평천 변의 수면에서 8m가량 되는 절벽 위 평평한 곳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림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금수정 건너편 절벽이 창옥병(蒼玉屛)이다.
푸른 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 있다 하여 생긴 이름으로 역시 영평8경 중의 하나였다.
쌍상투를 튼 아이들이 닭싸움, 잠자리 잡기, 멱 감기, 연날리기, 원숭이 놀리기, 수레타기 같은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장난치는 천진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이들의 차림새와 건물은 중국풍이지만 얼레를 풀어가며 방패연을 날리는 모습에 조선의 풍속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백동자도 병풍은 다산과 가족의 행복을 소망하며 주로 안방에 펼쳐놓았다.
백동자도는 중국 당나라 장군 곽자의(郭子儀)(697-781)의
행복한 노년을 그린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곽분양행락도에는 즐겁게 노는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자손 번창을 기원하며 이를 별도의 주제로 독립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에는 한 가지 소재를 전문으로 잘 그리는 화가들이 많았다.
문인화가 남계우는 평생 나비를 관찰하고 사생해서 생물학자 못지않게 사실적으로 포착했다.
도화서 화원 박기준은 그림 속에 부채를 그리고 그 안에 갖가지 화풍의 그림을 그려 넣어 실물처럼 보이게 하는데 뛰어났다.
사물의 물성을 만져질 듯 재현한 서화는 19세기에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서화를 도덕적, 실용적 쓸모로 판단했던 효용론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이 병풍은 홀수 폭에 남계우의 나비 그림, 짝수 폭에 박기준의 부채 그림을 담았다.
화려한 그림을 선호했던 당대의 호사가가 두 화가의 그림을 병풍으로 꾸몄을 가능성이 있다.
바위 위로 새로 돋아난 초여름 대나무를 그렸다.
막 펼쳐진 작은 댓잎을 짙은 먹으로 그리고 뒤쪽에 웃자란 죽순을 옅은 먹으로 그려 공간감을 살렸다.
수운(峀雲) 유덕장은 이정(李霆)(1554-1626)의 묵죽도 전통을 계승한 문인화가였다.
안개가 낀 듯 뒤쪽으로 갈수록 옅은 먹으로 그리는 수법은 이정을 본받은 것이다.
유덕장의 대나무 그림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정과 닮았지만 골기(骨氣)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신미년(1751) 5월에 팔십 노인 유덕장이 젊은 벗 김자송을 위해 그리다.
歲辛未仲夏峀雲, 八耋 翁爲少友金子松作.
여덟 폭의 대나무 그림 가운데 여섯 폭이다. 금박을 흩뿌린 갖은 색 냉금지(冷金紙)에 대나무를 서너 그루씩 그렸다.
가느다란 줄기 위에 활달한 필치로 댓잎을 그려 생동감을 살렸다.
우봉(又峰) 조희룡은 중인 출신의 문인화가로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문인(門人) 가운데서도 지도적인 인물이었다.
이 묵죽도는 임자도 유배시절 거처 주위에 대나무를 가꾸며 그린 작품으로,
화제에 묵죽에 대한 조희룡의 화론(畫論)이 잘 나타나있다.
줄기가 통처럼 두꺼운 고죽(苦竹)과 그 앞에 새로 돋아난 손죽(孫竹)을 묘사한 그림이다.
늙은 대나무는 윤곽선 없이 먹을 선염해서 그렸으며,
새로 난 대나무는 먹으로 윤곽을 그린 후 안쪽을 석록(石綠)으로 선명하게 채색해서 대조의 효과를 노렸다.
땅에는 엷은 색점을 거듭 찍어 이끼 덮인 대숲의 정취를 표현했다.
16세기 공필 채색화 화풍과 연관된 작품으로, 조선 중기의 문인 조익의 작품으로 전하지만 분명히 알기 어렵다.
[불교회화]
화승 축연(竺演)이 그린 쌍월당 성활(雙月堂 性闊)의 진영(眞影)이다.
축연은 ‘불화의 명인’으로 신문 기사에 소개될 정도로 1900년대 초에 이름을 날린 화승이다.
화면 왼쪽의 붉은 족자에는 쌍월당 대선사를 기리는 찬문이 적혀 있고,
족자의 동그란 축에는 ‘혜산蕙山’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혜산은 축연이 1910년경까지 썼던 당호(堂號)이다.
일반 문인화가처럼 개인의 이름을 명확하게 그림 안에 남기는 모습은
전통적인 불화 제작 관습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근대의 새로운 현상이다.
변화하는 근대의 흐름 속에서 창작 주체로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기 시작한 승려 장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신겸(信謙)을 비롯해 화승 세 명이 소백산 삼봉암(三峰庵)에서 그린 신중도다.
신겸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일구어 낸 화승이자
‘대선사大禪師’라고 불릴 정도로 수행자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승려 장인이다.
이 불화에는 병풍을 배경으로 천인을 거느린 제석천과 털 투구를 쓴 무장신 세 명을 함께 그렸다.
큰 코를 중심으로 이목구비가 몰려 있는 제석천의 얼굴 형태에서 신겸 특유의 인물 표현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각수승 연희(演熙)가 울산 운흥사에서 새긴 목판화다.
청정한 수행(정업, 淨業)을 권하고 바르게 닦아 극락에 왕생할 것을 권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서로운 구름으로 가득한 상단에는 극락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과 팔대보살이,
하단에는 각자의 업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뉘어 극락에 태어나는 사람을 표현했다.
연희는 약 20년 간 15종류의 불교 경전 간행에 참여하며 경전을 새겼던 승려다.
문인 정시한(丁時翰)(1625-1707)은
연희가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11년째 경천 수천 매를 새기고 있다고 기록했다.
깨달음을 향한 정진과도 같았던 승려 장인의 작업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묘법연화경 제4권 변상도(妙法蓮華經 第四卷 變相圖)>
화면 오른쪽에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장면을 그리고, 왼쪽 편에 경문(經文)의 설화 내용을 그린 『법화경』 제4권의 변상도이다.
석가 설법 장면은 오른손을 들어 설법에 열중하고 있는 부처와
그 주위를 아난과 가섭존자, 8대보살, 그리고 사천왕이 에워 싼 모습과,
그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청문중(聽聞衆)을 표현하였다.
청문중 위쪽으로는 전각과 같이 생긴 탑이 보이는데,
그 안에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 그려져 있어 「견보탑품(見寶塔品)」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옆에는 파도 위로 솟아오른 연화좌에 보살 모양을 한 용녀가 앉아있는 모습의 「제바달다품(堤婆達多品)」을 표현하였다.
괘불(掛佛)은 야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큰 법회나 의식을 할 때 걸어 두는 대형 불화(佛畫)이다.
대체로 8-9m 정도의 높이이며, 큰 괘불은 12m가 넘기도 한다.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찰 마당에 걸린 괘불을 보며 마치 부처가 의식 도량에 강림했다고 느낄 것이다.
괘불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시대의 특징적인 불화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과 자연재해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은 부모와 형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에서 천도(薦度) 의식을 빈번하게 행했다.
괘불은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미리 공덕을 쌓는 예수재(豫修齋)나 죽은 이를 위로하는 수륙재(水陸齋)에 걸려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했다.
영산재(靈山齋), 관음재(觀音齋) 같은 다양한 불교 의식에도 괘불을 사용했다.
괘불과 조선시대 불교 의식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한국 불교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한 축이 되었다.
[목칠공예]
고려시대 경함(經函)의 형태와 무늬를 따른 작품이다.
금속선으로 구역을 구분하고 자개, 거북등껍질을 연꽃, 국화, 구슬, 마름모꼴 무늬로 오려 넣었다.
비교적 좁은 면적에 여러 무늬로 장식했지만, 복잡하지 않고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나전 칠 연꽃 모란넝쿨무늬 상자>
나전은 전복, 조개 등의 껍데기를 얇게 갈아 여러 가지 무늬로 오려내어 물건의 표면에 붙여 넣는 장식기법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우리나라 나전칠기는 대부분 12세기 이후의 유물이다.
고려시대 작품으로는 작은 국화, 모란, 넝쿨 무늬가 촘촘하게 새겨 넣어진 경전함(經典函)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크고 대담한 무늬가 새겨지거나 회화적으로 표현된 함, 상자, 장롱 등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졌다.
뚜껑을 위에서 덮어 씌우는 형태의 이 상자는 관복이나 의복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뚜껑의 겉면과 몸체의 옆면에 연꽃넝쿨 무늬를 새겼다.
연꽃 무늬는 활짝 핀 꽃과 봉오리를 섞어가며 배치하였는데 전체 무늬는 휘날리는 듯 하지만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균형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연꽃 무늬나 넝쿨무늬의 잎은 휘어져 있는 상태의 자개를 무늬대로 오려낸 후
망치로 때려 붙이는 방법[打撥法, 打?法]을 사용하였는데 무늬의 면에 생긴 균열이 또 하나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다.
줄기는 자개를 길쭉하게 끊어 연결하는 끊음질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작고 촘촘한 꽃 무늬에서 벗어나 무늬가 커지고 바탕의 여백이 넓어지는 등
새로운 무늬 표현 방법을 보여주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빗이나 머리단장에 사용하는 도구, 화장용품 등을 보관하는 함이다.
몸체에는 여러 종류의 화장 도구를 정리하여 보관할 수 있는 서랍을 설치하였다.
상단에는 거울을 보관하는 공간을 만들기도 하였다.
여성용 빗접은 나전이나 화각으로 장식하여 화사한 느낌을 준다.
<화각 함>
화각(華角) 기법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선의 독창적인 장식 수법이다.
소의 뿔을 펼쳐 얇게 깎아낸 각지(角紙) 뒷면에 그림을 그리고, 이를 목가구 등의 기물 표면에 부착하는 것이다.
원래 바다거북의 등딱지인 대모(玳瑁) 뒷면에 색을 칠하여 장식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모는 열대지방에서 수입하는 값비싼 재료였기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뿔을 반투명하게 가공하는 기술이 개발된 것으로 생각된다.
소뿔의 크기에는 제한이 있어 각지는 작은 크기로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작은 물건에도 수십 장의 각지가 사용되었다.
각지에 적색, 황색, 녹색 등의 안료로 그림을 그렸기에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인다.
주로 안방가구와 빗 등의 여성용품에 화각이 사용되었다.
이 함을 장식한 화각에는 상상력 가득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용, 호랑이, 해태, 코끼리 등의 환상적 동물들을 비롯해 동자와 모란 등 복을 부르는 상징물들이
각지 한 장 한 장에 따로 그려져 조합되었다.
바탕을 칠한 붉은색은 잡귀를 쫒고 공간을 화사하게 꾸며주는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안온한 삶과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을 이 화각함에 담아 소중히 다루었을 것이다.
사랑방 가구 배치도를 실제로 옮겨놓았다.
목칠공예실을 나오니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이층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제 디지털 실감 영상관2를 소개하려 한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 실내전시(3) 2022년 5월 19일
이어서 설명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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