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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그렁 밤송이의 한숨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무르익은 열매를 내놓고 하늘 땅이 혁명의 선서식을 거행하는 때가 왔습니다.
씨알을 말한다면서 이 소리 하나도 알차게 내지 못해 마음 아픕니다. 이 슬픈 고백을 여러분의 사랑의 입술로 마셔, 영원의 농사꾼이 오시어서 땅을 고르고 여러분의 받치는 씨를 받아 거기 뿌리실 때에, 그것으로 물을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확신은 어느 정도 없지 않습니다. 역사 구원의 사명이 씨알에게 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의심이 없습니다. 전에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 임금이요 영웅이요 정치가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키우느라고 광주리를 흔들어 주던 때에 그 옆에서 불렀던 자장노래입니다. 이제 임금이요 영웅은 다 꿈나라로 물러가 버렸습니다. 그들보다 꾀 많고 잇속 따지는 정치가는, 이름은 주고 속살은 뽑아 먹자는 속셈에, 지도자다, 영도자다 하며, 때로는 공복이라기까지도 아끼지 않으면서 악착 같이 쥐고 놓지 않으려지만, 시대는 이미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세계 각 나라 정치 현상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혼란과 타락 없는 나라 없습니다. 모양은 가지가지지만 문제는 다만 하나, 씨알에 있습니다. 스스로 역사의 주인으로 하늘 땅 사이에 전 나무 숲처럼 일어서려는 씨알들을 그 팔 다리를 걷어잡고 그 코와 입을 틀어막으려니 혼란이 아니 일어날 수 없고, 적도지대의 폭풍처럼, 남북극의 눈보라처럼 일어나는 정신을 폭력으로 누르고, 돈으로 달래고, 이론으로 속이고, 교육으로 병신 만들고, 예술로 취하도록 하려니, 타락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씨알이 스스로 깨달아, 누구의 다스림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함으로,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 아니라 전체에 봉사하기 위해,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하는 살림이 되면 역사는 살아날 것이요, 인간은 영원히 새롭는 우주의 씨알이 될 것입니다만, 그러지 못 한다면 운명은 결정된 것입니다.
그 새 씨알을 어디서 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거기는 예수의 말씀 이상의 말이 없습니다. “겸손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동서 고금의 모든 어진 스승은 다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씨알 여러분, 생각할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세계에서 우리 같이 낮아진 자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낮추어 겸손히 한 것 아닙니다. 대가리를 눌리워 입이 땅에 닿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누가했습니까? 역사입니다. 하늘입니다. 반만년 역사의 종국은 우리 입이 땅에 닿은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중국 옛날 큰 스승의 하나였던 맹자는 역사가 누구에게 큰 사명을 맡기려 할 때는 그 사람을 몸과 마음을 괴롭게하고 그 하는 일마다를 방해해서, 그렇게 하여서 그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길러준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 능히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갖은 고통을 다 겪게 해서 그것을 길러낸다 할 때는 그것이야말로 역사 구원에 가장 긴요한 것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强이 아니고 智가 아닌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치고, 더구나 역사의 앞장을 서려는 사람으로 강하지 않으려 하고 지혜롭게, 아니하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은 아닙니다.
맹자가 가장 어렵게 안 것은 이 겸손입니다. 왜요? 언제나 싸움의 원인, 멸망의 원인은 强에 있고 智에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자기보다 더 강하고 간악한 强과 智의 대적을 불러내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인간관계를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보기 시작했던 일입니다. 근본은 그와 반대로 서로 알아줌이요, 서로 도움이요 하나됨인데 처음에 있었던 힘과 재주로 잘났던 사람들이 그런 잘못을 저질러 그 나쁜 전통이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알고 오늘까지 왔습니다. 학문도 철학도 종교까지도 그렇게 보아 왔습니다. 이제와서야 그것이 큰 잘못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이 정치주의 문명은 제 한 일로 자멸할 문명이겠지만, 역사를 건지려면 다른 종자는 반드시 그와는 다른 것, 곧 겸손을 그 특징으로 하는 성격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망하기로 결정 받은 민족이나 개인이 아닌 다음에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받는 이 터무니없는 고난의 까닭은 여기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나의 30 청년 이래의 오늘까지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이때에 욥의 자리에 섭니다. 우리 민족이 죄 없단 말 아닙니다. 그것 모를 인간 양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이 운명은 터무니없다는 말입니다. 터무니는 인간의 면목입니다. 그러므로 터무니없는 시험에 통과하려면 無, 無理, 無條件에 이르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强과 智를 하나님으로 섬기며 약하고 불쌍한 것들은 당연히 착취하고 잡아먹어도 마땅하다 하는 이 문명을 걷어치우고 생명의 근본 원리인 사랑과 평화 위에 서는 새 역사를 일으키려면 겸손과 봉사의 마음이 아니고는 안된단 말입니다. 그래 그 본보기를 우선 하나 내잔 것이 우리에게 떨어진 운명이란 말입니다.
씨알 여러분, 내가 이것을 압니다.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힘이 없습니다. 어찌 내가 슬프고 부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마 더 심한 시련을 받아 찌꺼기, 죽을 인간의 찌꺼기, 과거 수만년 역사의 찌꺼기가 내 마음에서, 신경 조직에서, 뇌세포 속에서 빠져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여 그리 하시옵소서!
장자 공부를 하려고 밤거리를 걸으려니, 골목 골목에 군밤 장사가 앉은 것이 보였습니다. 주먹 같은 밤 이 밤 빛에 진주처럼 번쩍거리고 있었습니다. 저거야말로 씨알의 상징인데 하는 생각을 하노라니 어린 시절에 읽었던 덕부노화(德富蘆花)의 밤은 들사람이다. (栗は野人なリ)이라는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속에는 대지의 어머니의 속알 그대로를 나타내는 누런 알을 품으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떫은 맛의 속껍질, 그 위에 또 어마어마한 가시송이까지를 쓴 밤은 확실히 겸손한 들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하고 나는 자신에 물었습니다. “그걸 먹는 사람은 누구지?” 생각을 하니, 씨알의 운명은, 계절의 시련을 다 겪어가면서 일껏 알을 들여놓으면 무심한 놈팽들이 심심풀이로 먹어 치우는 밤알 처럼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그것이 씨알입니다. 먹는 사람을 물었을 때 나는 씨알임을 잊었습니다. 정치주의, 문명주의로 인해 받은 중독을 내가 아직 채 뽑지 못해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자연에는 낭비 같이 뵈는 점이 많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본성이 평화적인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씨알은 무한히 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땅을 차지하는 자격입니다. 자연의 낭비는 곧 하나님의 관대입니다. 무한의 용서입니다. 경륜의 크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적 아니 하는 것이 씨알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적하는 것은 밑지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문명이요 그것이 정치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인류의 앞을 캄캄케 하는 전쟁과 공해입니다. 장자가 무위를 말하면서 날로 계산하면 밑지는데 해로 계산하니 남는다고 했습니다. 정치주의는 반대로 날로는 남는 것 같은데 해로 보면 밑지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밑진 역사입니다. 자연의 대조화에 도전하고 어떤 벌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오늘의 꼴입니다.
이것은 오늘만 아니라 역사상에 여러 번 증거 된 것입니다. 다만 현대의 것이 대규모의 과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거기 스스로 속는 것이 있습니다.
속담에 “쭈구렁 밤송이 삼년을 달려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알았는데,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르게 됐습니다.
알차지 못한 것을 비웃어서 하는 말인가, 동정해서 하는 말인가, 아니면 알 아닌 알을 그 속에서 받아먹고 놀라서 하는 말일까?
전에 그 쭈구렁이를 “나무에 달아 놓고” 볼 때는 나도 비웃는 편이었는데, 썩 잘한다 해도 잔혹하게 실패의 본보기로 쳐드는 교사로서 했는데, 이제 나 자신이 그 자리에 달려 보니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나는 알 못든 밤송이입니다.
속담은 누구의 말이 아닙니다. 씨의 소리입니다. 거기 우리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씨알들은 왜 군밤을 다 먹은 다음에 돌아서서 손은 씻지 않고, 그 쭈구렁 송이를 바라봤던가? 그걸 보고 침을 뱉기 위해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 얼굴에 도로 떨어져 올 것을 잘 알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 상 주지 않는 예수님이 좋아요. 차마 벌을 줄 수 없어서 상을 아니 주셨을 것입니다.
여러 십년 전 오산에 있을 때입니다. 요새 보다 좀 더 늦은 가을날 입니다. 들국화도 이제 향기가 다 되고,푸른 빛이라고는 거의 볼 수없는 때인데, 해가 넘어갈 무렵 고읍역에 나가느라고 용동 앞 모래 동 위를 걸어가고 있노라니 길가 흙 속에 뭔가가 움질거리고 있었습니다. 허리를 구부려 넘어가는 황혼 빛에 들여다보니 그때에는 별로 볼 수 없는 메뚜기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한 여름을 다 지나고 늙어 나래가 다 떨어진데다가 어느 발길에 밟혀 다리가 부러지고 창자가 다 나오고 이제 다 죽게 된 목숨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다 망가진 밑구멍을 가지고 흙을 파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메뚜기는 본래 가을에 알을 땅 속에 낳아 오는 해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놈이 그 종족의 의무를 다하려고 길가 부드러운 흙속에 구멍을 파다가 불행히 어느 생각 없는 발길에 밟힌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 죽게 됐는데 이놈은 여전히 본능적으로 그 작업을 하려고 그야말로 죽는 힘을 다해서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도 놀라 언젠지 모르게 내 입에서 “야, 생명의 명령이란 지독하구나!”하는 소리가 나갔습니다. 그놈은 지금도 내 마음의 바닥을 그 다 망가진 밑구멍으로 파고 있습니다. 낳으려다 못 낳은 알, 죽으면서라도 낳아야지! 알은 물질로만 낳는 것 아닙니다. 다른 놈은 몇 알을 낳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놈은 억억 만만의 알, 영원한 메뚜기를 낳고 있는 것을 나는 압니다. 이제 메뚜기가 하늘을 가리우는 때 아니올까?
쭈구렁 밤송이도 그런 것 아닐까? 그래 그런지 그것도 그림이 하나있습니다. 몇 사람을 거지만 만들고만 강원도 간성 안반덕 농장 4,5년에 남은 것 아무 것도 없지만, 그 움막 뒤에 서 있던 늙은 밤나무에 달려 있었던 3년 묵었는지 5년 묵었는지 모르지만 달려 있었던 쭈그렁 밤송이만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겨울 밤 사나운 서풍에 달랑달랑 울던 그 소리 그 밑에서 동정해 울어 주던 골짜기 물소리와 함께 귓가에 들립니다. 그 나무 밑에서 주은 밤 다람쥐도 아니 주고 서울 사람들 먹이겠다고 지고 2미터 눈 속 내려오다가 죽을 뻔 하면서 가지고 와서 먹었던 밤알, 이제 어디가 찾을 길 없지만, 내 가슴 속에 서는 늙은 밤나무 가지 끝에 알 들지 못해 3년 달려 앓는 그 알 소리는 지금도 알알히 울고 있습니다.
나를 웃지 마셔요. 웃기에는 너무도 지독한 명령을 듣고 있습니다.
씨알의 소리는 쭈구렁 밤송이입니다. 알든 놈도 떨어지는데 알도 못 든 것이 떨어지지도 않고 왜 그 꼴이냐 한다면 너무도 잔혹한 비판입니다. 떨어지지 않는다고 욕심이 연연해서 그렇다고 비웃습니까? 그러면 나는 그 심판을 받아도 좋습니다마는, 그러나 당신이 씨알이 못됩니다. 씨알은 비평하지 않습니다. 비꼬지도 않습니다.
씨알 여러분, 이것은 안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못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못하는데 깊은 호소와 설움이 있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깊은 겨울 밤 눈보라 속에 우는건 또 좋습니다. 봄 돌아와 꽃이 피고 여름에 푸름의 물결이 천지에 넘칠 때에도 그 모양을 하고 달려 울어야 하는 것이 어찌 내 욕심 때문만이요 내 게으름 둔함 때문만이겠습니까? 아, 나는 알 못들어 우는 역사의 쭈구렁송이로다!
나 아닌 것이 있습니다. 나는 알이 들어 땅 끝까지 굴러가 육십배 백배의 씨알은 못내더라도 뿌리 밑으로 들어가 썩어 그 나무를 가꾸잔 생각은 있습니다. 알이 어찌 입으로만 들어가야 알입니까? 그런데 썩으려 해도 썩지도 못하는 것은 무슨 운명입니까?
영원의 골고다 위 나무에 달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했던 사람아! 너는 누구냐? 너는 쭈그렁이는 아니지. 너무도 알이 들지 않았나? 그런데 왜 쭈구렁 밤송이 마냥 가시를 쓰고 우느냐? 그래, 못든 알의 무거운 짐에 눌려 허덕이는 쭈구렁 송이들을 불러, 한번 걸핏 봐주심으로 그 역사적 카르마를 대번에 벗겨준 다음허공에 날려, 장차 오는 나라의 첩보대로 삼으려고 그랬던가?
오, 나를 오늘 당신 곁에 둡소서!
씨알의소리 1976년 10월호 58호 (금지된 씨알의소리 생각사)
저작집30; 9-93
전집20; 8-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