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곡 오만의 죄
오만의 죄를 범한 자들의 영혼들이 자신들이 지은 죄를 씻기 위해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죄의 무게에 따라 다른 벌을 받으며 자기들만 위한 것이 아니고, 뒤에 남은 영혼들을 위해서도 찬송가를 부르며 첫 번째 둘레를 오릅니다.
당신들이 정의와 연민으로 무거운 짐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빕니다. 그래서 날개를 펼치고
당신들이 바라는 곳으로 높이 날아오르기를!
이라고 기원하며 베르길리우스는 나와 함께 가는 이 사람도 아담의 육신을 지니고 있어 올라가기 힘드니 지름길로 쉽게 올라 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묻습니다.
우리와 함께 오른편 언덕을 따라 가면 살아 있는 사람도 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나의 오만한 목덜미를 짓누르는 이 돌의 방해만 받지 않아도 살아있는 사람이 혹시나 아는 사람인지 올려다보고 동정을 구하고 싶다고 합니다.
나는 라틴 사람. 위대한 토스카나 사람인
굴리엘모 알도브란테스코의 아들(움베르토)이었지.
그 이름을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구려.
굴리엘모 알도브란테스코는 시에나 코무네(자치공동체, 상인과 토지 소유의 계층이 교회와 봉건 귀족에 맞선)의 무자비한 적이었습니다. 그 아들 옴베르트는 자신의 영지 근처에서 시에나와 전투 중 전사하였습니다.
내 이름은 움베르토. 교만의 죄는 나 하나만
황폐하게 한 것이 아니라 집안 모두를
모조리 재앙에 빠뜨렸소.
"고귀한 업적을 쌓은 오랜 가문으로 나는 극도로 거만해져서 모든 사람을 깔보았고 끝내 그것 때문에 죽었다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낮게 숙였는데 다른 누군가가 무거운 짐 아래서 몸을 비틀어 나를 알아보며 나를 불렀습니다.
그는 구비오 태생의 유명한 미세화가 오데리시였습니다. 자기보다 볼로냐 사람 프란코의 그림이 더 생생하여 영예는 그의 것이며 나의 것은 일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살아있던 동안에는 욕망 밖에 없어 프란코에게 친절하지 못해 그 교만의 대가를 여기서 치르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공허한 영광이고 허망하게 져버린다고 치마부에와 조토를 예로 듭니다.
화가로서 한 획을 그었던 치마부에였건만
이제는 조토가 휘젓자
명성의 광택이 흐려지고 있소.
당시에는 조토의 출현으로 치마부에의 광택이 흐려졌다고 하지만 세월이 흘러 현대에 와서는 치마부에와 조토를 비교하여 누가 더 위대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조반니 치마부에는 13세기 피렌체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조토 디 본조네는 그의 제자였으나 그의 그림이 치마부에를 능가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예술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는 것.
치마부에는 비잔틴 전통인 이차원적 회화 양식에서 사실주의 양식으로 변환을 시도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풍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최고의 화가였습니다.
성 치마부에, 산타 트리니타 마에스타, 1285∼1286, 우피치 미술관
- 2012년 피렌체 여행에서
조토, 온니산티 마돈나, 1310년 , 우피치미술관
- 2012년 피렌체 여행에서
조토는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입니다. 조토는 유럽 회화의 흐름을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바꾸어 놓은 혁신의 주인공입니다.
성모와 성자를 입체감과 중량감이 느껴지도록 표현하여 신체의 구조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했습니다.
특히 성인들이 옥좌를 둘러싸고 서 있는 모습이 평면이 아닌 삼차원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두 천사가 옥좌 앞 공간에 꿇어 앉아 공간의 깊이가 보입니다.
조토는 그 당시 최고의 화가입니다.
조토 다음에는 조토에 버금가는 마사초가 나옵니다.
치마부에는 치마부에 당시 그 시대의 흐름에 맞는 화가이고, 조토는 뒤이어 온 시대의 예술 흐름에 맞는 화가로서 대가입니다. 그 분들의 그림이 누구의 작품이 좋은지는 그 시대의 흐름에서 봐야한다고 생각하고 모두 그 시대에 최고의 화가입니다.
여러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들을 보러 유럽과 미국에 있는 100여개의 미술관에 가보았고, 이 그림들을 보는 공부를 하느라고 그리이스‧로마 신화 이야기, 변신이야기, 신통기, 그리스 비극 전집 등과 친해져 단테의 신곡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게 읽게 되었습니다.
한 귀도가 다른 귀도에게서
언어의 영광을 빼앗았고, 아마 그 둘을
보금자리에서 내쫓을 사람이 태어났을 거요.
‘한 귀도’는 카발칸티를 '다른 귀도’는 귀도 귀니첼리(두 사람 다 청신체라 불린 형식의 시를 쓰던 일파의 대표자들)를 가리킵니다.
카발칸티는 단테와 절친한 사이였고 귀니첼리는 단테에게 '나의 아버지이며 나보다 훌륭한 자들의 아버지'였습니다.
단테는 귀니첼리의 가치를 카발칸티가 능가했다고 평가하고 이어 그 둘을 능가한 누군가가 태어났다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오만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고 오데시시의 입을 빌어 명성의 덧없음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명성을 추구하는 오만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내 마음에 겸손을 심어주고 들썩이는 나의 교만을 잠재웁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경계하기도 합니다.
속세의 명성이란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에 지나지 않으니
이 길 저 길로 옮겨 다니다가
방향이 바뀌는 대로 이름도 바뀌게 되는 법이오.
오래 살아서 큰 명성을 남긴다 해도 부질없는 일이이라며 시에나를 지배했고 피렌체를 공격하여 한때 오만했던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당신의 진실된 말이 내 마음에
겸손을 심어주고 들썩이는 나의 교만을 잠재웁니다.
그런데 방금 누구에 대해서 말한 것인지요?
단테의 자만했던 마음이 오데리시의 말에 그의 교만이 수그러지나 봅니다.
프로벤차노 살바니라고 하는 사람이오.
주제넘게 시에나 전체를
지배하려 했기 때문에 이곳에 있지요.
프로벤차노 살바니는 시에나의 기벨리니 당수로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승리한 뒤 피렌체의 철저한 파괴를 주장했으나 파리나타가 이를 저지했습니다. 1269년 피렌체에 패한 뒤 포로로 잡혀서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죄는 일시적인 권력을 휘두른 교만이었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를 미뤘던 영혼들은 연옥 문 밖에서 기다리는데 살바니는 이승에서 살았던 만큼 시간이 지나기기도 전에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프로벤차노 살바니가 연옥문을 통과 한 것은 친구를 위한 선행 덕분입니다. 그의 친구 하나가 카를로 1세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석방을 해주는 조건으로 금화 1만 피오리노를 달라고 했습니다. 살바니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금화를 마련하려고 시에나 캄포 광장에서 구걸을 했고 친구를 무사히 구출해냈습니다.
그가 친구를 구해내고자 한 것이지만 핏줄이 덜덜 떨릴 수치를 무릅쓴 것인데 단테도 멀지 않아 ‘핏줄이 덜덜 떨리는’ 부끄러움을 체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말하지 않겠소. 내 말은 모호하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 이웃들이
내가 말한 것을 알게 해 줄 것이오.
그가 말하는 것이 지금은 모호하게 들려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단테가 ‘신곡’을 쓰던 당시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망명 시절을 스스로에게 암시하는 것입니다. 망명 시절에 온갖 수치를 당하더라도 이웃을 위해 희생하면 자기와 같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단테는 망명 이후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 죽을 때까지 가지 못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