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래 아저씨는, 해남 아침재에 살던 사교성 Zero 늑대소녀 꼬맹이 시절부터, 518기념재단과 짧게 인연 맺었던 십여년 전 때까지, 나를 깊이 이해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던 아비같은 분이셨다.
미국에서 내가 써서 올린 교환학생 일기를 마치 당신의 승전보와 같이 귀하게 여겨 주셨고, 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미국 유학 따위를 수행하며 평탄히 풀릴 것만 같았던 인생이 돼지국밥집에서 설거지를 하게 되는 등 볼성사납게 흘러가자 골방에 수년간 쳐박혀 있던 나를 끌어내어 절벽 위에서 밀쳐 내시면서 나에게 숨은 날개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셨다.
양래 아저씨는, 나에게 따라붙었던 '천재/영재' 같은 수식어가 사라져 세상이 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을 때에도, 아니, 나 스스로도 나라는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완벽하게 포기한 지경에서도, 내가 진정으로 훌륭한 인간이라고 믿어 주셨고, 그 사실에 대해 늘 자랑스러워하셨다. 주변에 내 자랑을 너무 하고 다니신 나머지, 양래 아저씨를 아는 분들에게 나는 일종의 신화 속 캐릭터처럼 거품이 잔뜩 끼고야 말았지만, 아저씨는 그런 거품까지도 내심 자랑스러워 하셨다.
518재단에서 근무하면서 한달에 한번꼴로 나라를 옮겨가면서 인권 conference 준비를 하는 중에, 양래 아저씨는 태국,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인도로 conference 개최를 위해 직접 찾아오셔고,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길에는 늘 당신의 전도금을 탈탈 털어 내 손에 쥐어 주셨다. 특히, 말레이시아에서 뵈었을 때는, 내가 카톨릭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하시면서 "홍콩 AHRC에서 근무하는 동안, 꼭 마카오 성지순례를 가봐야 하네." 힘주어 말씀 하시던 모습, 눈에 선하다.
내가 518재단을 떠나 서울로 일터를 옮기겠다고 했을 때,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시면서 "자네는 나하고 최소 3년은 더 같이 있어야 하네." 힘주어 말씀하신던 모습, 눈에 선하다.
아저씨께 나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518재단에서 기어이 나와 서울로 직장을 옮긴 것이 너무도 죄송해서, 서울에서 근무하는 내내 아저씨께 연락을 드리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와 동명이인인 거래처 사람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이 그만 아저씨에게 실수(!)로 전화를 드리게 되었고, 너무도 민망한 마음에 "이사님, 그간 건강히 잘 지내셨지요?"라고 빤한 인사를 드렸는데, 아저씨는 너털웃음과 함께 "아, 이 사람아, 나 건강 못하네. 췌장암 말기 진단 받고 몇달 못산다고 했는데, 그 몇달 넘도록 살아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받고 있네."하시는 것이 아닌가. 눈앞에 캄캄해졌다.
그 이후로, 아저씨는 초인적인 힘을 내어 투병을 하셨고, 그 누구보다 용감하고 단단하게 병에게 지지 않은 채 당신의 나날들을 활발발히 살아내셨다. 2022년 11월 말, 큰 따님인 바이올리니스트 아람씨의 콘서트에서 약 8년만에 아저씨를 처음 뵈었는데, 말기 암환자의 모습이 아닌 양래 아저씨의 모습, 조금 마르셨지만 예전처럼 호랑이 기운이 여전하신, 그 양래 아저씨를 뵙고, 참으로 큰 은총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양래 아저씨가 2023년 9월 8일,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다.
아, 아저씨, 이번 생에 못 다갚은 은혜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하늘에서도 호랑이 기운으로 기도해 주시고, 제가 아저씨의 기대와 바램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저씨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도로 사람 노릇을 해 갈 수 있도록 부디 지켜봐 주세요.
양래 아저씨, 편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