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
고영민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됐든 한 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대소사가 있을 때
차려 입는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흑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 마을의 한 밤,
아버지는 이 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 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 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아버지의 뒷 모습,
잰 걸음을 따라
나도 가만히 걷는다.
기세가 천리를 갈 듯 하다.
드디어 산등성,
고요하게 잠든 숲의 정적과
뒤척이는 새들의 혼곤한 잠 속,
순간 아버지가
걷던 걸음을 멈추더니
집 쪽을 향해 소리를 치신다.
에이, 이 못된 할망구야
서방이 나간다면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이 못된 할망구야,
평생을 뜯어 먹어도
시원찮을 이 할망구,
뒤돌아 씩씩거리며 아버지는
집으로 천릿길을 내닫는다.
지그시 웃음을 물고
나는 아버지를 몰고 온다.
어머니가 켜 놓은
대문 앞 전등불이 환하다.
아버지는 왜, 팔십 평생
저 낮은 산등성이
하나를 채 넘지 못할까
아들이 묻는다.
아버지는 왜 저
산등성이 하나를 못 넘느냐고.
아버지가 답한다.
가장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안 되는 거라고.
딸이 묻는다.
왜 엄마는 대문 앞까지
전등불을 켜 놓느냐고.
어머니가 답한다.
남정네가 대문을 나가면
그 순간부터
기다려야 하는 거라고.
아들 딸이 묻는다.
그럴 걸 왜 싸우냐고.
부모가 답한다.
물을 걸 물어 보라고!!
<고영민>- 시집 '악어'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