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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人緣)일까 ? 업(業)일까 ?
게으르지 않게 살기를 기도했고, 그 기도 만큼 보답을 받았다고
늘 생각하며 살았다.
나는 무엇을 따라 산으로 갔을까
그 누구도 부르지도 않았던 그곳으로 걸어갔을까.
들어가면서
다시 5월이 다가온다.
어느 하루 의미없는 날이 있겠냐만은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움직여 계속 걷는다.
때이른 계절의 습격(?)을 받으면서
팔공산 은해사 구석구석 숨어있는 암자들을 다녀왔다.
성취감을 얻기위한 것은 아니었다.
좀더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길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다녀온 그 길을 꼼꼼히 기록해본다.
안내해주신 마가목님과 같이 걸어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은해사 칠암자 종주라는 용어를 사용한지가
얼마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칠암자의 위치, 종주방법, 진행방향 등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연원이 그리 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주길을 시도하는 사람 마저 많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에 종주한 순서와 종주길은
마가목님이 수년전 칠암자 종주길을 처음 개척한 이와 같이 진행할 때의
순서와 방향이 일치한다고 첨언해 주셨으니
처음 시도 당시의 방향과 순서는 이렇다는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칠암자길 진행순서는 다음과 같다.
원효암 - 천성암 - 기기암 - 백흥암 - 운부암 - 중암암 - 묘봉암 - 원효암 원점회귀.
엄청 쉬면서 8시간 정도 소요.
은해사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된 산내암자는 다음과 같다.
중암암, 운부암, 서운암, 백흥암, 기기암, 묘봉암 등 6개의 암자이다.
원효암은 은해사 말사로써 은해사에 소속이 되어있으나
천성암은 은해사와는 무관한 사찰로 보여진다.
따라서 은해사 칠암자길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혹자는 서운암, 백련암을 포함시켜 7암자길로 명명하여 둘러 보는 이들도 있다.
이번에 시도한 칠암자길은 기존의 등산방법과는 사뭇 다른 바가 있는데
그것은 백옥회의 경우 거의 대부분 산행시 능선길을 걸어왔으나
그와 비교하여 이번 산행은 계곡에서 능선을 넘어 다음 계곡으로 진행시에 거의 사면을 이용하였으며
많은 소로들이 혼재하여 길이 밝은 경우가 아니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다녀온 길을 개념삼아 그려 보았다.
참조만 해 주시길.
그림에 그려진 순서대로 진행을 하였다.
원효암 천성암 - 원효와 의상의 자리.
원효암 네비 정보는 다음과 같다.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갓바위로 386-73 지번와촌면 대한리 382
경산 갓바위 주차장으로 향하다가 식당과 숙박시설이 뒤엉킨 지역을 지나
우측으로 신라고찰 팔공산 원효암 이라고 쓰인 집채만한 비석이 서있다.
이곳에서 시멘트 포장갈을 따라 차량으로 이, 삼분, 원효암주차장이 나온다.
약 십여대 정도의 차를 주차할 공간이 나온다.
음력 사월 초닷새.
2017년 4월 30일
번개 공지에 응해주신 분이 여섯분.
오전 9시경이 되어서야 주차장에 도착하여
아주 느리게 산행 준비를 한다.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에 자리한 원효암(元曉庵)은 문무왕 8년(668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수도했다고 전하며,
고종 19년(1882년)에 긍월대사(亘月大師)가 중창했다고 전한다.
1986년 팔공산 화재로 금당과 불상이 소실되었으나 1990년에 중창하였고 2016년 6월에는 아미타삼존불상을 점안했다.
원효암에서는 ‘원효사상실천선양회’를 만들어 ‘원효사상과 가르침을 실천 및 선양하고,
원효성사의 사료를 발굴하고 현창’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원효와 관련한 설화는 탄생지 경산지역과 팔공산 일대를 중심으로
경주, 천성산, 부산 금정산, 경기도 소요산, 전라도 지역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다.
연구결과, 원효의 이름을 붙인 사암(寺庵)이 18개소, 그 밖에 원효의 행적과 관련된 사찰이 50개소 등
전국에 68개소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찰 뒤에 사철 찬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일명 ‘냉천사(冷泉寺)’라고도 한다.
마애여래좌상 앞쪽에 샘터가 있다.
음용이 가능한지 두껑을 열어 보니 이끼가 끼어있고 지저분해보인다.
음용불가로 결정.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곳 옆 사면을 보면
뒤로 돌아오르는 듯한 소로가 있다.
소로를 따라 잠시 진행하면 원효암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15분정도 진행을 하면 위의 안내목이 나타난다.
은해능선 상에 도착을 한다.
천성암은
우측 천성산 방향이다.
사면을 따라 진행하다보니 어느새 임도가 나온다.
임도는 두갈래길로 나뉘어지는데 아래, 위 어느 방향이던 천성암 방향이다.
매일 아침 운무가 끼면
관세음보살님이 사시는 보타낙가산을 닮았다고 하여
의상대사는 이곳과 홍련암에서 법을 여셨다고 한다.
전통사찰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낡고 험하여
기존에 있던 관음전을 보수 자광전 불사를 했다고 한다.
귀천의 분별지심이 없는 것을 도라 할 수 있을까?
齊一 .齊物
모든 것이 하나요, 모든 사물이 똑 같다라는
가치의 분별함이 없는 경지를 보여주려 하였을까?
탱자나무 분재를 만들어 두었다.
새로 불사를 일으킨 듯한 자광전과 산신각 사이 너른 암반이 멋져보인다.
한번 올라가보시라는 스님의 말씀에 냉큼 올라가본다.
상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으로 기도와 명상터로 신발을 벗고 올라가시오 라는 경고문이 쓰져있다.
상석은 卍자 형태로 되어있어 더더욱 불가와 인연이 깊은 자리라고 한다.
명자나무 꽃
자광전 앞 상석이라고 불리우는
암반은 만자 형태로 되어있다.
영천 금호 땅이 내려다 보이는 조망터로 일출이 기가 막히다고 한다.
윤판나물 군락지
작약 꽃 구경을 끝으로 천성암을 물러났다.
기기암 갈림길까지 되돌아 나와야한다.
꽃마리의 마중을 받으면서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기기암 - 신기사바 심기극락 (身寄娑婆 心寄極樂)
천성암에서 기기암으로 넘어오는 조망터에서 본 기기암.
이 조망터는 평상 크기만한 판자를 암반위에 덮어 둔 형태로
앉으면 4~5명 누우면 두세명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기기암 신자들이 조망터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
기기암으로 넘어오는 길은 순하면서도 멋진 색감을 가진 길이었다.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에 와도 참 좋을 것이라고 넌즈시 알려주신다.
더불어 단풍취도 많더군요.
'신기사바 심기극락(身寄娑婆 心寄極樂)'이라하여 '몸은 비록 사바세계에 있으나 마음은 극락에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편안한 수행처인 기기암.
나무를 자르고 두드리고
수행처는 불사중이다.
썩고 약해진 기둥은 덜어내고, 튼튼한 새 기둥으로 교체중이었다.
선승들은 다른 거처로 옮겼는지
밭에는 거두지 않은 봄나물이 천지였다.
바위 사이에 끼인채로 자라는 단풍나무.
바위 위에서 자라고 있는지 그 사이에 틈이있는지를 확인해 본 결과
바위 틈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광대수염
기기암 표지석이 서 있는 곳
그 너머로 백흥암 가는 길이 열려있다.
이삼십미터 정도 오르면 길은 양갈래로 갈라진다.
직진하는 길은 백흥암 가는길
우측은 멧돼지 놀이터 가는 길이다.
길은 희미하나 흔적은 남아 있고
곳곳에 멧돼지들이 파헤친 흔적이 역력하다.
멧돼지들의 노천탕은 모두 세개로 십여평 정도의 웅덩이가 있다.
짓밟아 놓은 흔적과 더불어 주위나무에는 몸을 비벼서인지 마른 진흙이 잔뜩 묻어있다.
멧돼지 목욕탕에서 약간 되돌아 나와 산능선을 치고 오른다는 느낌으로 진행을 한다.
빨간 리본을 달아 놓은 나뭇가지를 찾아 이정표로 삼는다.
약 십여분 정도 오름질이 계속된다.
이후 기기암 표지석 뒤에서 직진하여 올라오는 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소로를 타고 아래로 계속 내려오면 산수유 농장이 나타난다.
중간중간 여러갈래 길이 있어 조금 헷갈리기도 하나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다.
산수유 농장 진입 도로를 만나면 우측으로 시멘트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다시 운부암으로 올라가는 길도 있으나
산수유 농장 안으로 진입하여 하우스로 만든 차고 앞을 지나
막사을 우측으로 돌면 산으로 붙는 길이 잇다.
이곳을 넘으면 바로 백흥암 앞이다.
백흥암 - 나무아미타불
백흥암은 비구니 스님 들의 수행처로
평소 일반이 들의 출입은 통제되어있다.
극
극락전과 극락전 내부의 수미단이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처음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자유로운 암자였으나 지금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입금지 구역이다.
암자에 지키는 사람이 없을 때
수미단의 일부가 훼손되는 일이 있고 난 이후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미단은 부처님이 계시는 수미산을 형상화 한 것으로
앉아 있는 불타의 보다 높은 격을 상징화시켜, 수미단을 불상대좌로서 표현한 것이다.
대좌에는 아미타 삼존불을 모셔 놓았다.
맨앞 편액에 보화루
중간 편액에 백흥대난야
맨뒤 편액에 극락전이라고 적혀있다.
보화루는 운부암에서 설명을 하고
여기서는 백흥대난야에 관해 알아본다.
난야는 산스크리티어인 아랸야를 줄인 말로 조용한 수행처를 의미한다고 한다.
백흥대난야를 다른 말로 고치면 백흥대선원 정도로 바꿀수 있을까?
이야기가 빗나가기는 하지만
천녀유혼이라는 영화 다들 기억하시리라
영채신과 소천과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귀신 판타지 영화로
왕조현을 한방에 뭇 남성들의 애인으로 만든 영화.
그 배경이 되는 절이 난약사이다.
蘭若寺.
若자는 약 혹은 야 두개의 음으로 읽히기도 하니
난약사가 맞는지 난야사가 맞는지 묻지는 말자.
좀 더 정확하게 보자면 난야사가 맞다.
문을 열어 젖힌 보화루 위로 한두분의 비구니 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배낭을 벗어 놓고 물통에 물을 받고 있으려니
신도 인듯한 몇분이 안에서 나온다.
꽃그늘에서 쉬고 있으려니 슬슬 배가 고파온다.
점심 장소인 운부암은 고개를 하나 더 넘어야 되는데...
백흥암 담벼락을 따라 암자를 우측으로 돌아가면 다시 태실봉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최단거리로 올라서는 길이기는 하나
보이는 철문 주위에 등산객 출입금지라는 표지판도 붙어있고
담벼락 끝부분에 시시티브이도 설치되어있다.
암자에 있는 스님들이 암자 뒷편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운부암 - 운부대난야
태실봉 능선을 넘어서니 다시 시멘트 도로가 나타난다.
좌측 전면으로 못둑이 보이면서 운부암이 모습을 들어낸다.
보통의 경우 칠암자길에서 운부암을 제외시키는데
운무암에서 중암암으로 오르는 길이 뚜렷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제법 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부암은 칠암자 종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아곳만을 때어내어 둘러보아도 좋을만큼 운치가 있는 암자였다.
오고가는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은해사에서 이곳까지 들어오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연못 한구석에 마련해 놓은 널찍한 돌위가 점심 식당이었다.
방생해놓은 청거북 몇마리가 물위에 떠 다닌다.
꽃 바람 소리와 경치를 반찬삼아 만찬을 즐겼다.
우측으로부터
원장 금모 불산
회주 중화 법타
천하명당
북마하 남운부
운부선원
조사도량
원장, 회주 옆의 이름은 스님들의 법명이고
북쪽의 금강산 마하연과 남쪽의 운부암이 천하의 명당으로
운부선원은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던 경허 스님을 비롯한
동산스님, 운봉스님, 성철스님등이 공부한 곳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문은 번뇌의 속된 마음을 돌려서 해탈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하며,
궁극적으로 번뇌와 해탈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불이문'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불이문을 지나야 비로소 부처의 세상이다. 바로 불국토인 것이다.
불이문을 지나자 만나는 첫 건물이 보화루이다.
부처님이 앉아계신 연화대좌가 보화이다.
보화루에 기거하는 분이 해탈의 경지를 넘은 부처이니
중생과 부처가 어찌 따로 나뉠수 있겠는가?
자세히 보면 가운데 문의 크기보다 좌우로 갈수록 문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겹벚꽃잎이 바람에 날려 안개비처럼 쏟아지는
운부암 마당에 앉았다.
이런건 산행이 아니라
힐링 여행이며, 마음공부하러 떠나는 순례의 길이라고 이름붙어야한다.
보화루 옆 흐르는 물 한잔을 받아 들이키니
시원하니 감로수가 따로 없다.
보화루 누각에는 사람들이 올라가서 앉을 수 있도록 나무의자를 몇개 배치해 놓았다.
열린 창 너머로 보이는 경관 또한 볼거리이다.
차 한잔씩 대법을 할때도 있다고 하는데
부처님 오신날이 다되어 안밖으로 준비할 것인지 많은지 모두들 바쁘시다.
찻잔위엔 꽃잎 대신 먼지가 앉아있다.
보화루 아래를 지나 원통전 건물이 정면에 배치되어있다.
원통전은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암자의 주인공이 관세음보살님인 셈이다.
차창밖 경치가 예술이다.
혹여 마애불을 이나 석불을 만나시거든
불상의 눈 높이에서 보이는 경치를 꼭 감사해보시라.
뭔가 조금 다른 느낌의 세상이다.
금낭화와 매의 발톱이 피어 있는 곳은 원통전 앞 마당 꽃밭.
살아있는 야생화로 헌화를 드리는 셈이다.
운부암의 상세내혁이 적혀져있다.
굳이 옮겨쓰지 않는다.
요사채쪽으로 돌아서면
세월을 이고있는 느티나무가 있다.
속을 비워낸 것이
운부암에서는 나무들도 마음공부를 하는 것일까?
느티나무 속은 서너사람은 들어갈 만한 크기이다.
느티나무 구경을 뒤로
이제 중암암으로 오를 시간이다.
정해진 길이 없다.
개척 산행을 하듯이 탐색을 하면서 진행을한다.
느티나무 있는 곳에서 다시 요사채 갈림길로 돌아나와서
대밭 앞에 철제로 만든 쉼터와 철제 의자를 지나 좌측으로 작은 도랑을 건넌다.
이후 운부곡을 지나
잠시 운보곡을 따라 진행하다가
적당한 곳에서 좌측 태실봉 능선으로 붙는다.
계속해서 운부곡을 따르면 * 고생이다.
이후 계속되는 오름질이다.
마가목님이 백옥회 시그널을 몇장 걸어두었다.
이후 중암암 오르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니
만년송 옆 소로에 도착을 한다.
중암암 - 돌구멍절 속의 우주
만년송은 바위틈에서 자란다.
제몸을 깎아 동글동글하게 된 바위는
모진 세월 살아온 여인처럼 둥글둥글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풀 한포기 자라지않는 바위 틈에서 생명을 지켜낸 만년송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영양분이 없는 곳에서 자라보아야
일년에 얼마나 자라겠는가 ?
그리 생각하면 만년을 살았다해도
일견 수긍이 되는 면도 있기는 하다.
만년송을 나와 중암암 방향으로 백여미터도 채 안돼 삼인암 안내표지가 있다.
삼인암은 중암암 법당 위에 위치하고있다.
고성을 지른다던지 하는 행위는 자제해야한다.
전설은 이렇다.
자손이 귀한 집에 시집을 간 부인이 몇년이 지나도록 자손이 없었다.
어느날 만난 스님 한분이 정을 드릴 장소로 현재의 삼인암 자리를 알려주자
이곳에서 정성을 드린 부인은 삼형제를 얻었다. 고 한다.
세개의 넙적 바위로 이루어졌으니
세개의 바위 도장이라는 의미가 더 낫다고 한말씀 해주신다.
불교에서 印은 주로 불, 보살의 서원과 관련이 되는 용어이다.
아미타 구품인이 대표적이다.
근데 솔직히 삼인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혹여 가르켜주시면 경청하겠다.
극락굴이다.
극락가기가 힘이 든다는건지
마른 사람만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건지
덩치 큰 감포는 시도도 못해 보앗다.
보이는 틈새로 들어가 좌측으로 꺾이는데 가슴. 엉덩이, 아랫도리가 실한 사람은 삼가하는 것이 좋다.
극락굴 바로아래 삼층 석탑이 있다.
극락굴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높이는 3m이고, 하층기단 갑석의 폭은 1.46m이다.
다듬질한 긴돌 4개를 결합하여 지대석으로 깔고, 그 위에 이층기단과 3층의 탑신부를 올렸다.
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가 강화되었고,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가 심해지는 등의 특징을 보아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암벽 아래 터를 조성하고 남북선상으로 나직한 축대를 쌓아 마당을 2단으로 구성하고
서쪽에는 법당, 동쪽에는 석탑을 배치하였으며,
법당지에서는 법당 창건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이골문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다.
석탑에서 20여미터 떨어진 오른쪽에는 중앙암(돌구멍절) 대웅전이 있고,
석탑 상부에는 극락굴, 삼인암, 건들바위, 만년송, 장군수 등이 있다.
삼층석탑에서 계단을 내려서자 우측 묘봉암과 가는 길과 돌구멍을 통과하는 암자로 가는 길이 나뉘어진다.
돌구멍절은 둘러보고 되돌아 나와야한다.
돌구멍절로 들어가는 길은 사람 한명이 지나갈 수 있다. 서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 지나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구멍을 지나 우측 사무실로 쓰이는 암자 역시 절벽 위에 서있다.
좌측 대웅전은 불이 나서 새로 불사를 하엿고, 산신각앞에서는 석간수가 새어 나온다.
간신히 수행중 포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나마도 암자 앞은 나즈막한 담을 세워 두었다.
최소한의 안전 장비인 셈이다.
화마로 인하여 새로 불사를 일으킨 법당안에는 공양미랑 방석이 키재기를 하고 있었다.
사진 윗쪽의 연등 달린 곳이 법당이고 아랫쪽이 기와 담
좌측 비스듬히 연등이 아랫쪽 사무실쪽으로 연결이 된다.
돌구멍절의 첫번째 돌구멍을 지나서 법당과 사무소가 있으면 사무소 앞쪽
한번 더 돌구멍을 지나면 중암암 해우소가 있다.
옛날에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돌구멍절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던 세 분의 도반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절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통도사 스님이 "우리절은 법당문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1말 3되나 떨어진다"고 하며 은근히 절의규모를 법당 문 크기에 빗대어 자랑을 하셨다.
이어 해인사 스님이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때는 배를 띄워야 저을 수 있다." 고 하며 절의 규모를 큰 솥이 있음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두 스님의 자랑을 듣고 있던 돌구멍절 스님은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기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 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자랑을 하여 한바탕크게 웃었다는 아야기가 전한다.
문화재 보호를 위하여
해우소 사용을 금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해우소 앞 바위에서는 매화말발도리 꽃이 하얗게 피어있었다.
중암암 주차장을 지나 시멘트 길을 5분정도 내려오다가 우측 조그만 개울 건너로 다시 산길이 열려있다.
묘봉암 가는 길이다.
묘봉암가는 길에서 지나치기 쉬운 곳이라고 알려주신 조망터.
길에서 십여미터 떨어져있으며 되돌아 나와야 한다.
중암암과 삼인암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뒤돌아보면 묘봉암이 보이는 곳이다.
잠시후 묘봉암 도착이다.
묘봉암 - 암자속의 석굴, 석굴속의 암자
묘봉암에 도착을 하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산신각인데
산신각을 마주보고 좌측 벽 아래
스테인리스 두껑으로 덮어 놓은 약수터가 있다.
시원하고 달다.
사용후에는 이물질 혼입을 막기위해 반드시 덮어둔다.
묘봉암 원통전 뒷편 한쪽은 바위면이다.
기도처로 사용하던 석굴을 그대로 이용하여 원통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원통전을 내려와서
화장실 달린 건물 앞을 지나자 다시 산으로 길이 열린다.
잠시후 은해능선 복귀.
능선에서 중간중간 샛길이 많으니 주의를 요하며 원효암으로 복귀한다.
원효암 복귀전 마지막 조망터.
갓바위에서 명마봉으로 흐르는 능선과
그 너머 환성산 산그림자가 뒤를 막아선다.
천천히 수행을 하는 듯 노는 듯
팔공산의 동쪽 자락을 거닐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