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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ubf 1월 셋째주 주일메시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마가복음 11장 1-마가복음 11장 11
요절 마가복음 11장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2018년 1월 셋째주입니다. 2018년의 떠오르는 해를 본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셋째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다음 주가 일월의 마지막 주입니다. 우리는 신년 말씀 2강을 통해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외쳐 노래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외쳐 노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현실이 어려울수록 외쳐노래하는 것은 순수한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런 찬양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자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로마 정부를 몰아내고 다윗과 같은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600년 식민지살이를 하며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이스라엘이 독립된다고 생각하고 기뻐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찬양보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찬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고난 중에서도 찬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축복보다 찬양이 먼저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찬양 후에 하나님이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 통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베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시며 예루살렘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말씀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백마를 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들어가서 십자가에 죽으시고자 합니다. 나귀 중에도 나귀새끼를 타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새끼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나귀새끼를 끌고 오는 것은 도둑질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나귀도둑질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나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시고 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끌고오는 것이 도둑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귀 주인이 왜 남의 나귀새끼를 끌고 가는거요? 라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대답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리로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아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도둑질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인이 자신의 나귀를 다시 찾아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만드신 분으로 나귀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면 나귀을 지금까지 키운 주인은 무엇입니까? 그는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예수님은 관리하는 사람에게 잠시 관리하도록 맡겼다가 필요한 때에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귀의 주인일뿐 아니라 나귀주인의 주인이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나귀주인도 만드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이 창조하셨고 주님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잠시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나의 생명도 주님의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나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나 부모도 주님의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인이 아니고 관리자임을 알 때 우리는 마음에 평안이 생깁니다. 집이 고장나면 세를 사는 사람은 고치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말하면 주인이 고쳐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관리하는 것들이 문제가 생겨서 주님께 말씀드리면 주님이 고쳐주십니다. 우리는 학과공부도 직장도 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책임져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잘 관리해야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내 놓으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가볍게 가야합니다. 또한 이 땅에서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주님께 드려서 쓰임 받게 내어드려야합니다. 주님께 쓰임받는 것도 영광입니다. 세상일이나 나의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 쓸 것이 주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에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은혜고 시간을 내서 양들을 돌볼 수 있다는 것도 은혜고 물질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최마태 에스더 선교사가 선교사로 쓰임 받는다는 것도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런 은헤를 알고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내어드려야합니다. 아멘!
(순종한 제자들)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이 남의 나귀를 끌고 오라는 명령은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예수님께 우리로 도둑이 되라고하십니까? 만약 주인이 주가 쓰시겠다고 해도 내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위대한 점이 이런 주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하실 때도 베드로는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나를 따르라 말씀하실 때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전도여행을 가라고 할 때도 순종하여 나갔습니다. 물동이 이고가는 어떤 남자를 따라가 성만찬을 준비하라고 하실 때도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배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할 때도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순종을 통하여 주님을 좀더 깊이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이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변화되려면 이런 신뢰와 순종의 분위기를 만들어야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십계명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세계선교 명령에 순종해야합니다. 세계선교명령에 순종하는 최마태 에스더 선교사님에게 은혜를 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일년 요절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더 깊이 만나고 변화되고 주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멘
(찬송하는 사람들)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새끼 위에 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어떤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하였습니다. 호산나는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을 로마압제에서 구원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거의 육백년 동안 다른 나라의 압제를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시고 다윗과 같은 독립정부를 세우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우리나라가 독립될 때 사람들이 큰 소리로 만세를 부른 것처럼 이스라엘의 만세 그리스도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예수님께 실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대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지 않고 성전에 가서 장사치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실망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치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순수한 찬양)
누가복음에 보면 무리 중에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돌들까지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무리들 중에는 순수하게 찬양하는 어린 아이들의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6을 보시시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어린아이와 젖먹이까지 예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이나 현실적으로 좋은 성적이 나오고 취업하고 결혼하는 것으로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순수한 마음으로 찬양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되신 예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찬양해야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을 마음껏 찬양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찬양을 기뻐받으십니다. 지난 주에 본 것처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발가벗겨져 매를 맞고도 손을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찬양하였습니다. 욥은 하루 아침에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신자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신 이도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찬양은 순수한 찬양입니다. 이렇게 고난 중에 찬송하는 것이 진짜 찬양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고난 중에 찬송할 수 있을까요? 폴 투르니에라고 하는 스위스의 심리학자이고, 의사인 그분이 쓴 창조적 고통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정신과 환자들을 상담을 하고 한평생을 지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을 말합니다. "현대 환자들의 가장 큰 병은 바로 자기 상실감입니다." 어느 사이에 자기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명예를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건강을 잃은 것도 아니라 자기의 순수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 상실감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가정과 국가를 위해서 일하며 살다 보니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하고 게임하고 연애하다가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특히 한국의 40-50대는 급속하게 경제성장에 매진하다가 더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 잃어버린 자기를 찾게 합니다. 자기의 순수성을 찾게 됩니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정금같이 순수해졌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모르고 자신을 잃고 살다 죽는 사람은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가난과 고통을 통해서 나의 순수성을 찾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나의 당한 고통, 이것이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고, 바로 자기의 순수성을 찾는 길이요, 하나님을 찾는 길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단순하게 합니다. Simplify, 단순하게 할 때 거기서 순수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혹시 마음이 복잡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소원도 많고, 체면도 생각해보고, 집안도 생각하고, 결혼도 생각하고 나름대로 복잡합니까? 이런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의 고난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정말로 깊은 고난에 들어가게 됩니다. 찬미의 주제는 언제나 주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어릴 때는 내 소원을 이루어 주셔서 감사하고 내 병을 고쳐주셔서 감사하고 내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것이 찬송가 가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하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오늘도 내 마음에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전에 변나영 목자님이 공무원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여름수양회에서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또한 하박국도 이런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이 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만민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사랑은 사흘분의 설탕이에요"라는 제목의 산문집이 있습니다. 시인 오인숙 씨가 지은 책인데 그분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날 장애인선교회에서 "행복 나누기 찬양제"라고 하는 찬양제를 열고 오인숙씨에게 와서 좋은 시를 하나 발표해 주시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오인숙 시인은 그날 따라 가고 싶은 기분이 나질 않아 못 가겠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거절을 해 놓고 퇴근하는 길에 마음에 좀 께름칙해서 찬양제가 열리는 서초구민회관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복음성가 가수인 조성철씨가 휠체어에 앉은 채로 기타를 치면서 복음성가를 부르는 찬양을 듣게 됩니다. 그 얼굴은 환하고 그 음성은 맑고, 그 가사 하나가 큰 감동을 주는데 이렇게 놀라운 행복한 시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행복을 나누어주는 축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 그는 한없이 울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나야말로 가장 무거운 중증 장애인이다. 저분들은 몸의 장애인이지만, 나는 마음의 장애인이다. 나는 정신적인 병자다 이렇게 스스로 깨닫고 펑펑 울었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난 눈은 아름다워지나 봅니다. 옆에 앉은 낯선 사람의 얼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작은 일 사소한 일, 사물까지도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찬송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잘되고, 성공하고, 축제를 하고, 축하해주고, 축하파티를 하고 하는 그런데 찬양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깊이 내려가고, 겸손하고, 아주 순수해질 때, 어린 아이 같아질 때 거기서 진정한 찬양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활짝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해 보았습니까? 아니면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해 보았습니까? 눈물로 감사하는 그 세계에 진정한 행복과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감사보다 불평하기 쉽습니다. 찬송보다 원망하기 쉽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불평할 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불평할 때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내가 왕이 되어 있을 때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가운데 왕이 되어서 세상 일을 친히 그 뜻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으시고 인자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볼 때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을 회개할 때 우리는 마음 깊은 데서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시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이들의 찬양은 순수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중에 젖먹이와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사람들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순수하게 찬양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들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해야합니다. 나의 주위에 어떤 문제가 있을지라도 주님을 찬양해야합니다. 고난 중에도 온전한 찬양을 해야합니다. 눈물로 찬양해야합니다. 기쁨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 찬양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찬양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 찬양을 하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는 한 주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천안 ubf 1월 셋째주 주일메시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마가복음 11장 1-마가복음 11장 11
요절 마가복음 11장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가 141장
천안 ubf 1월 셋째주 주일메시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마가복음 11장 1-마가복음 11장 11
요절 마가복음 11장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